내가 사는 연천의 한 작은산에 조각가 유영호 님의 ‘그리팅맨’이라는 작품이 설치되어 있다. 북한 사람들도 보라는 의미로 크게 만든 조각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들이 보기에는 너무 작다. 이 작품 이후 ‘고궁박물관에서 서촌’ 가는 길에 연천 것의 1/3 정도인 작은 그리팅맨을 보았다. 같은 작가가 만든 작품이다.

 

15도 각도로 인사하는 공손한 모습을 하고 있는 작품이다. 마포구 상암동 DMC 광장에 설치된 동(同) 작가의 미러맨이란 작품도 거대 조각이다. 이 작품은 지난 해 출판 편집 강의를 들으러 가는 길에 만났다.

 

지난 2월 모임 장소였던 시네큐브 가는 길의 흥국생명 빌딩 앞에서 완전히 다른 느낌의 거대 조각을 보았다. 조너선 보로프스키의 ‘해머링맨’이란 이름의 작품이다. 노동의 신성함과 보편적 인간상에 대한 사유를 담은 작품이라고 한다.

 

지난 해 문화 해설 수업 시간에 인간의 손을 조각한 작품을 설명하라는 과제를 받고 ‘손은 정신의 칼날’(야콥 브로노프스키), ‘손은 밖으로 드러난 뇌’(칸트) 등의 말을 인용하며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한 위대한 손을 찬양하는 의미로 만든 조각이라는 설명을 했던 기억이 난다.

 

이 밖에 우리나라에 여러 공공 미술이 있어(1만 5천 점) 내가 못 본 작품들에 비하면 내가 본 것은 너무 하찮은 수이지만 일상에서 참 많은 미술 작품을 본 듯한 느낌마저 든다. 지난 금요일 정동(貞洞) 공원에서 본 몇몇 작은 청동 조각상도 내가 거리에서 본 미술품으로 계산해야 하리라.

 

명당(明堂)을 찾은 조선의 풍수(風水)와 달리 인체의 혈(穴)에 침을 놓듯 주요 지점에 절을 창건하고 나무를 심어 지기(地氣)를 북돋고 그 자리를 명당으로 만들려 한 고려 풍수가 생각난다. 조각상들로 인해 도시가 조금이나마 아름다워지는 것에서 현대판 풍수라는 말을 떠올려도 될지? 차이가 있다면 현대의 조각상들은 사유를 유도한다는 부가의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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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정동(貞洞)길을 걸었다. 정동 극장에서 경운궁 중명전(重明殿)을 거쳐 예원학교, 이화여고, 옛 신아일보사 별관,

정동 공원, 구 러시아 공사관, 캐나다 대사관 등을 보고 서울역사박물관을 거쳐 체코 대사관, 일조각, 책세상 등의 출판사와 성곡 미술관 등을 지나는 짧은 걷기 일정이었다.

볕이 좋은 가을을 실감나게 만끽한 시간이었다. 오는 길에 조선시대 과거제(科擧制) 재현 행사(2017년 9월 23일 9시 – 17시. 경희궁 숭정전) 소식도 확인했다.

축 평창동계오륜대회(祝 平昌冬季五輪大會)를 시제(試題)로 해 칠언율시를 쓰는 행사이다.(장원에게는 250만원의 상금이 수여된다. 내공이 전혀 없는 나는 어느 세월에?)

미학자 이나라 교수와 프랑스 상원의회 입법사무관인 그의 남편 티에리 베제쿠르는 ‘풍경의 감각’이란 책에서 자신들을 도시를 어슬렁거리며 걷는 산책자인 플라뇌르(flâneur)로 설명하며 플라뇌르에 대한 일반적 이해와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즉 플라뇌르의 산책은 안내책자를 절대로 보지 않거나 자신만의 환상을 쫓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그들이 택한 것은 충분한 사전 독서였다.

목적 도시에 대한 독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그 도시와의 충분한 교감이다. 나는 이를 보며 맥락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정중동(靜中動)이란 말을 생각한다.

사실 어슬렁 거리며 걷는 것은 좀 더 느끼고 생각하기 위한 선택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느리게 걷는 의미는 없다.

어제 나는 산책자이되 목적의식을 가지고 걸은, 우연한 산책자가 아닌 필연의 산책자인 플라뇌르였다. 사전 준비로 독서를 한 뒤 도심 거리의 낭만을 만나고 사후 조치로 후기를 남기며 나는 벌써 다시 정동길을 걸을 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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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의 감각 - 파리 서울 두 도시 이야기
이나라.티에리 베제쿠르 지음, 류은소라 옮김 / 제3의공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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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의 감각'은 프랑스인 남편이 본 서울과 한국인 아내가 본 파리 이야기를 1, 2부로 배치한 플라뇌르(flaneur) 에세이이다. 플라뇌르는 어슬렁거리는 눈으로 도시를 걷는 만보객(漫步客)을 의미한다. 책의 1부는 프랑스인 남편의 이야기인 파리의 눈으로 본 서울이고 2부는 한국인 아내의 이야기인 도시라는 공동체이다.

두 저자는 서문격의 글인 '들어가며'에서 플라뇌르를 언급한다. 자신들은 천천히 걸어다니는 산보객인 플라뇌르일 것이지만 플라뇌르의 산책이 꼭 우연한 산책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말은 호시우행(虎視牛行)이란 말을 생각하게 한다. 호시우행이란 호랑이처럼 관찰하고 소처럼 끈기있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두 단어는 맥락이나 의미면에서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다만 느슨하게 걷고 즐기듯 다소 흐트러지게 움직이는 걸음 속에 예리한 시각을 갖춘 것은 두 저자를 생각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어떻게 보면 정중동(靜中動)이라고도 할 여지도 있다.

'풍경의 감각'은 두 저자가 취한 그런 남다름의 산물이다. 사실 프랑스인 남편이 서울에 대해 논하고, 한국인 아내가 파리에 대해 논하는 것 자체가 예사롭지 않은 포석이다. 표지 이야기도 하지 않을 수 없다. 구스타브 카유보트의 그림인 파리의 거리, 비오는 날을 생각하게 하는 그림인 표지는 우산 쓴 두 저자 중 한 사람은 지구의 북반구 같은 곳에서 아래로 머리를 두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남반구 같은 곳에서 바로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현대는 글로벌한 시대이다. 여행 자체가 일상화되었고 그런 흐름에 따라 해외 여행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그럼에도 프랑스인 남편은 서울에 대해 이방인이고 한국인 아내 역시 파리에 대해 이방인이다. 그렇기에 두 저자는 낯선 곳을 알기 위해 독서로 철저 준비를 했다. 그 가운데는 풍수 책도 있다.

파리의 눈으로 본 서울이라는 제목에 어울리게 프랑스인 남편(티에리 베제쿠르)은 우리의 풍경들과 다른 파리의 풍경들을 이야기한다. 서울의 일상이 파리의 일상보다 우월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하다. 우월한 것은 우리의 카페에서는 노트북을 펼쳐 검색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파리의 카페는 테이블이 너무 작아서 노트북을 올려놓을 수 없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을 낳은 것은 자유로운 생각들이 만나고 부딪히고 강화되고 확산된 파리의 카페들이었다.(34 페이지) 병렬적 나열이겠지만 파리의 카페들에서 생각을 나눈 지식인들이 멋지게 보인다. 베제쿠르는 우리의 공동묘지, 장례의식과 파리의 공동묘지, 장례의식이 가진 뚜렷한 차이를 언급한다.

도시가 변하는 속도도 주요 비교 사안이다. 파리를 비롯한 유럽의 도시들은 완전히 바뀌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인간의 세대들이 그 뒤를 잇는 데 반해 한국에서는 한 세대 안에서조차 도시가 여러 번 다시 태어난다. 한국에서 고궁들이, 서울이 오래된 도시임을 환기하는 장치가 된다. 한국은 아파트 공화국이다. 한국에서 주택은 우리가 거주하는 삶의 공간 이상으로 사고 다시 파는 재화나 주택 임대업의 아이템이다.(105 페이지)

베제쿠르는 한국의 것도 분류를 한다. 절과 교회가 그것이다. 베제쿠르는 절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고 말한다.(풍수 책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한국인 아내 이나라는 대학생 시절 홀로 떠났던 유럽 여행에서 순전히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밤기차를 탔다는 이야기로 서두를 장식한 뒤 기차의 의미를 짚는다. 기차는 대륙을 가로지르는 최초의 근대적 운송수단이라는 것이다.(187 페이지) 기차에 얽힌 인간과 사회의 이야기가 풍성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한국인 아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속도의 차이가 낳은 정서의 차이, 세상의 변화이다.

이나라도 파리와 서울을 나란히 놓는다. 한국에서는 꽃이 너무 공식적인 반면 프랑스에서는 꽃도 자유분방하다.(206 페이지) 이나라가 파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곳이 유학(留學)지이기 때문이다. 이나라는 랜드마크 건축물은 무용하지 않지만 어떤 랜드마크가 도시의 정체성을 대단하게 창조하거나 상징할 것이라는 기대는 호들갑이라 지적한다.(243 페이지)

베제쿠르가 문이 그렇듯 다리도 인간을 연결하고 분리시키는 능력의 기호(29 페이지)라고 말했다면 이나라는 다리는 한편으로는 나누는 장소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연결하는 장소라 말한다.(247 페이지) 다리는 두 사람, 두 세계를 연결짓기도 하지만 적대적인 사람, 적대적인 세계를 분리한다.

이나라가 한국에서는 꽃이 너무 공식적이라는 말을 했다면 베제쿠르는 서울의 풍경은 과히 준법의 풍경에 가깝다는 말을 했다.(262 페이지) 이나라는 시민의 최우선 윤리는 무조건적인 준법정신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 말한다.(265 페이지) 준법정신은 경직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나라는 서울 이야기도 많이 한다. 프랑스 이야기를 하려면 당연하다.

비교 없는 이야기는 무의미하다. 비교는 우리 것들 사이에서도 프랑스의 것들 사이에서도 행해진다. 우리가 은밀한 별실을 좋아한다면 서유럽의 유명 식당들은 대체로 전망을 제안한다.(291 페이지) 베제쿠르가 절이 개신교 교회보다 더 한국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라고 말했다면(73 페이지) 이나라는 은밀함의 공간이 무조건적인 배제나 궁극적인 차별의 공간은 아니고 보여주기의 공간이 무조건 자유의 생산지가 되는 것은 아니라 말한다.(295 페이지)

플라뇌르를 목적을 갖는 것으로 보는 두 사람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는 글이다. 자신만의 독특하고 예리한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음을 말해주는 시각이다. 깊게 보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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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임 테스트가 페부커들의 게시 글을 보고 가장 좋아하는 단어를 알려주는 프로그램에서 내가 무척 좋아하는 단어로 ‘게리는‘이라는 단어가 선정되었다. ‘게리는‘이 무슨 뜻일까?

게리는 지난 2012년 일반 관람객이 없는 이른 시각에 자신과 일행들 몇몇만 종묘를 특별 관람하게 해달라고 해 어렵게 꿈을 이룬 분으로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을 설계한 세계적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 1929 - )이다.

그는 종묘 정전 만큼 장엄한 곳은 다시 보기 힘들다는 말을 했다.

1985년 국립 로마박물관을 설계한 건축가 라파엘 모네오(Rafael Moneo; 1937 - )가 지난 6월 한국을 찾았다. 이 분은 세계 건축계에서 드물게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대스승으로 알려진 분이다.

게리가 표면적으로는 삼성 리움 미술관 특강을 위해 한국에 왔지만 실은 종묘 정전을 보러 온 것이라면 모네오는 서울대 강연을 위해 한국에 오자마자 덕수궁, 광화문, 서촌 등을 찾았고 종묘에서는 해설사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했다.

모네오는 종묘에 대해 담장 밖은 바쁜 서울인데 담장 안 종묘는 전혀 다른 영적인 세계라며 감탄했다. 영적인 세계란 내 식으로 말하면 잠시 세속의 번잡함과 어수선함을 잊을 수 있는 곳이다.
종묘가 이런 찬사를 받는다는 사실이 반갑고 궁(宮)보다 묘(廟)를 더 좋아하는 내 취향이 인정받은 듯 해 기쁘다.

나는 물론 묘(墓)도 묘(廟) 만큼 좋아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능(陵), 원(園), 묘(墓) 가운데 능을 좋아하는 것이다.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고 원은 왕세자와 왕세자비의 무덤이고 묘는 대군, 공주, 옹주, 귀인 등의 무덤이다.

해설사로서 필수인 연구팀으로 왕릉연구팀을 선택하며 나는 종묘 연구팀도 있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섯 곳에 산재해 있는 궁궐, 수십여 곳에 나뉘어 있는 능과 달리 종묘(宗廟)는 한 곳에 있지만 그 주인공들은 궁과 능의 주인공들과 같다.

그러니 이야기거리는 얼마든지 있다. 다만 계속 한 곳에서만 모인다는 점이 걸림돌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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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5월부터 2007년 1월까지 울산 울주군 서생면 신암리의 광어 양식장에서 일할 때 신암리 통신이란 블로그 카테고리를 운영했었다.

동해남부선이 지나던 그곳은 지금도 낭만과 아쉬움의 정서를 교차하게 하는 근원지 같은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간절곶에서 5분 거리인 그곳에는 (자주 가지는 않았지만) 술을 마시며 바다를 보기에 좋은 횟집이 있었다.

그 횟집은 약간은 모호한 그리움의 정서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페북에서 우포늪 통신사 역할을 하시는 손 시인의 글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오늘 글에는 수달이 목격되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를 보고 내가 생각한 것은 달제어(獺祭魚)라는 말이다.

수달이 물고기를 잡은 뒤 먹지는 않고 제사를 지내듯 늘어놓고 있는 것을 뜻하는 이 말이 어떤 계기로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

물론 중요한 것은 수달을 직접 가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나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수달은 다른 곳에도 있으니 가시연꽃을 비롯한 우포의 수생식물들과 짙은 청록을 보려는 것이다.

올해는 궁궐 순례를 많이 했다. 지난 8월 창경궁에서는 청설모(청설모가 아니라 청서靑鼠라 해야 맞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를 보았고 7월 창덕궁에서는 너구리를 보았다.

당시 청설모를 보면서 나는 저 동물은 낭만적이지만은 않다는 말을 해설사에게 했다. 함께 해설을 들었던 누군가가 청설모가 다람쥐를 잡아먹는다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색해보니 청설모가 다람쥐를 잡아먹는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청설모는 나무 위에서 살고 다람쥐는 땅 위에서 살며, 청설모는 잣을 좋아하고 다람쥐는 도토리를 좋아하는 등 습성이 다르고 청설모는 겨울잠을 자지 않고 다람쥐는 겨울잠을 자는 등의 차이도 분명하다.

어떻든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샜는데 말하고 싶은 것은 나에게는 새로운 것에 대한 그리움 또는 아쉬움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궁궐 시나리오를 쓸 때 주안점을 두어야 할 것은 대체로 정해져 있다. 쉽고 간결한 글, 관심을 유도하는 질문과 미션 제시 등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나는 새로움과 독창성 등도 염두에 둔다. 물론 이로 인해 글이 어려워지기도 한다.

요즘 열 가지 서울의 색을 시나리오에 반영할 수 있는 방안을 궁리하고 있다.

그 색들은 서울의 건축문화유산과 나무와 자연의 원소들을 연상하게 하는 색이라고 한다. 궁궐 기둥의 빨간색, 궁궐 기타 영역의 갈색, 가을 거리의 은행나무의 노란색, 한강의 물결이 드러내는 은백색 등이다.

왕조시대의 유산인 궁궐은 죽은 건축 유형이다.(조재모 지음 ‘궁궐, 조선을 말하다‘ 4 페이지) 그럼에도 궁에 갈 때는 마음이 늘 설렌다.

미지의 영역이고 거대 건축물이고 문화 유산이기 때문일 것이다.(궁은 십년을 드나들어도 미지의 영역으로 남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가볼 수 없는 과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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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09-08 0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사는 도시에는 산이 도심에 있는데요. 그곳에 친구와 함께 등산 혹은 산책을 갔어요. 간식으로 해태 에이스 크랙카를 가지고 갔는데요. 그곳 정상에서 에이스 크랙카를 먹는데요. 아 글쎄, 청설모 한 녀석이 쫄랑쫄랑 제 곁으로 다가오더라고요. 그리곤 앞발을 모아 들고 나 좀 하나 달라는 표정으로 서 있지 뭡니깤ㅋㅋㅋ 크랙카 한 조각을 주니까 오몰오몰 바삭바삭거리며 받아 먹더라고요. 넘 귀엽고 기특하더라고요. ㅎㅎㅎ

그래서 산에 갈 때는 한동안 늘 에이스 크랙카를 가지고 가곤 했죠. 에이스 크랙카 은박지를 구겨서 바시락바시락거리는 소리를 내면 그 신호를 듣고 청설모가 어디선가 다가옵니다. 청설모도 에이스 크랙카가 맛있는가 봐요. (아니 아니 인간들이 청설모한테 나쁜 식습관을 들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자연식만 해오던 청설모가 인공식인 과자를 먹고 해롭지는 않을까 걱정이 들기도 하더군요.) 어쨌든 언제부턴가 청설모들이 인간과 친해진 것은 분명해요. 저 같은 경우 산에만 가면 청설모들이 다가오는 경험을 합니다. 걔들한테 아무것도 줄 것이 없을 때는 얼마나 아쉽던지요. 그리고 에이스 크랙카(크래카, 크래커)는 참 질리지도 않는 추억의 과자입니다. 지금도 저는 에이스 크랙카를 먹으면서 댓글을 쓰고 있네요 ㅎㅎㅎ

벤투의스케치북 2017-09-08 01:13   좋아요 1 | URL
“..도토리 청설모 쑥부쟁이 뿐이어서...”란 구절이 있는 나희덕 시인의 ‘시월’이란 시 이야기를 했었지요. 아늑하고 고즈넉한 시이지만 다람쥐를 잡아먹는 청설모가 있어 의아하다는 말을 했던 것인데 검색 해보고 그렇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에이스 크래커는 예전에 많이도 먹던 것이지요. 달지도 않고 약간 짠 맛이 나는 독특한 맛이 자꾸 입맛을 당기게 한 과자였지요.

청설모와 얽힌 사연이 재미 있습니다. 그것도 교감(交感)이겠지요. 들짐승이나 날짐승들의 입맛을 인위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이 문제가 되기도 하지요. 도심에 산이 있는 도시가 어디인지 궁금합니다. 고려의 풍수와 조선의 풍수는 다르다는 점이 생각납니다. 고려는 비보(裨補)의 개념이고 조선은 명당(明堂)에 관심을 기울이는 개념이었지요. 아, 나희덕 시인의 ‘시월’도 첫 구절이 “산에 와 생각합니다 바위가 산문을 여는 여기...”이지요. 재미 있는 댓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