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연인
김현경 지음 / 책읽는오두막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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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의 연인'에서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사실 하나. 김현경 여사(1927 - )가 이화여대 영문과 시절 정지용 교수로부터 시경(詩經)을 배웠다는 사실이다. "나는 아직 당신과 동거중입니다"란 말을 하는 김수영 시인의 첫 독자, 아내, 한 여인이었던 김현경 여사의 에세이 '김수영의 연인'은 이렇게 책 날개서부터 관심을 놓지 못하게 한다.

 

정지용 시인은 영어, 라틴어, 한문, 고전 등에 능통한 르네상스 지식인이었다. 김순남, 김현경의 5촌 오빠이자 성우 김세원의 아버지인 이 분은 쇼스타코비치로부터 천재라는 칭호를 받은 작곡가이다. 스승인 하차투리안이 오히려 김순남에게서 새로운 음악을 배웠을 정도이다.

 

김순남의 집에는 임화, 오장환, 김남천, 안회남, 함세덕 등의 카프(KAPF) 시인들이 자주 모였다. 진명여고 2년 여름 김수영 시인을 처음 만난 김현경 여사는 그를 아저씨라 불렀다. 이종구란 이름도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다. 김수영 시인의 선린상고 2년 선배이자 일본 유학 내내 함께 기거한 막역지우이다.

 

이종구가 김수영 시인과 김현경 여사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당시 김현경 여사는 배인철을 만나고 있었다. 임화의 집에서 알게 된 배인철은 흑인시라는 장르를 개척한 영문학자였다. 남로당 주요 멤버였던 배인철은 김현경 여사와 데이트 중 괴한의 총에 맞고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김현경 여사는 연애 금지 학칙을 어긴 죄로 이화여대에서 제적을 당했다.

 

모두 꺼렸지만 김수영 시인은 가택 연금 중인 김현경 여사를 찾아왔다. 김수영 시인은 알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게 모른다고 말을 한 사람이었다. 김수영 시인은 My soul is dark란 말로 프로포즈를 했다. 김현경 여사는 문학은 모든 각질화된 제도에 저항하는 양식이 아니던가란 말을 한다.

 

"우리는 스스로 결정한 운명이 형식이 되고 제도가 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32 페이지) 1950825일 서울에 남아 있던 김수영 시인은 인민군에 징집되었다. 시인은 그 체험을 일체 말하지 않았다. 김현경 여사에게 두어 번 말했을 뿐이다. 시인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소련군을 만났다가 미군을 만나 서울로 돌아왔지만 지서로 끌려가 악몽 같은 고문을 당했다. 이후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가게 되었다.

 

시인은 결국 살아 돌아왔다.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의 허락을 얻어 고교 영어 교사를 하던 이종구에게 취직 자리를 부탁하러 갔다. 그곳에서 일년이 훌쩍 지났다. 이종구는 광적으로 집착했다. 세 사람, 아니 김현경 여사가 김수영 시인과 이종구 사이에서 한 처신은 애매했다. 더 이상은 내가 논할 바가 아니다.

 

김수영 시인은 '방안에서 익어가는 설움'이란 시에서 "설움을 역류하는 야릇한 것만을 구태여 찾아서 헤매는 것은/ 우둔한 일인줄 알면서/ 그것이 나의 생활이며 생명이며 정신이며 시대이며 밑바닥이라/ 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마지막 설움마저 보낸 뒤/ 빈 방안에 나는 홀로이 머물러앉아/ 어떠한 내용의 책을 열어보려 하는가"란 말을 했다.

 

김수영 시인은 생계를 위해 김현경 여사에게 외설 소설을 쓰게도 했다. 그렇게 받게 된 원고료를 김수영 시인은 괴롭고 부끄러운 마음에 모두 술을 마시는 데 쓰고 말았다. 김수영 시인은 매문(賣文)이란 말도 했다. 속물이란 말도 했다. 진짜 속물이 되는 것은 속물이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것 만큼이나 어렵다고도 했다. 진짜 속물이란 어엿한 글쟁이를 것을 말하는 듯 하다.

 

김현경 여사는 '도취의 피안'을 김수영 시인의 시 중 제일로 꼽는다. 서정의 가락이 유창하게 늘어서 있는 문장들이 특히 좋은데 명확한 의미가 선뜻 다가오지 않아 직접 물으니 김수영 시인은 사회주의에 대한 노스탤지어라고 말했다.(73 페이지) 김현경 여사는 황무지 같았던 서강 언덕에 삶의 자리를 잡았을 무렵 "농사라고 할 것은 없지만 500평의 채소밭을 가꾸"었다고 한다.

 

"그는 농부요 나는 알뜰한 농부의 아내를 자처했다. 그는 또한 매일 같이 읽고 쓰고 또 읽고 쓰고 했다. 농부와 시인이 하나였던 시절이었다."(77 페이지)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이 삶의 여유를 반기면서도 끊임 없이 경계하는 의식을 드러냈다고 말한다.(132 페이지) '풀은 김수영 시인이 작고하던 해 529일 쓴, 김수영 시인의 마지막 작품이다. 김현경 여사는 '' 역시 수식 없이 수영의 온몸에서 울려 나온 듯한 소리로 꽉 차 있다고 말한다.

 

김수영 시인은 새로운 시를 쓰느라 꼭 몸부림 같은 진통을 겪었다.(135 페이지) 김수영 시인은 개인으로서 시인의 행복이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기고 안일(安逸)과 무위(無爲)를 극도로 거부했다. 오직 존재의 참되고 아름다운 정신의 지표를 바랐다. 김수영 시인은 작고(作故) 무렵 단호한 자신감을 가지고 시와 에세이에 자기만의 시론을 멋지게 정리하려고 마음 먹고 있었다.(143 페이지)

 

김수영 시인은 예술가는 끝까지 고독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과 자신의 자랑이라면 가끔 대화로 밤을 지새울 수 있는 열정을 잃지 않고 살아온 것이라 말한다.(145 페이지)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의 죽음을 "48년 생애를 마치고 조각처럼 희고 단정한 얼굴로 무()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라 표현한다.(149 페이지)

 

김수영 시인이 운명(殞命)의 날 마지막으로 집을 나선 것은 번역 원고료를 받기 위해서였다. 김수영 시인은 술이라도 한잔 한 날이면 "부끄러움도 없이"(김현경 여사의 표현) "시를 쓰는 일은 바로 인류를 위한 일이야. 나는 인류를 위해 시를 쓴다"는 말을 했다.(152 페이지)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과 함께 박인환 시인의 서점 '마리서사'에 드나들었던 시절을 이야기한다. 한 일본인 시인의 시를 박인환 시인이 일본어로 낭송했는데 음독이 너무 틀려 그 후로 그를 철저하게 무시했다고 말한다. 김수영 시인은 초현실주의 예술이나 전위예술에 무서운 비평을 가했고 거기에 취해 있는 시인들을 뒤떨어진 시인이라며 경멸했다.

 

김수영 시인은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뒤 무척 당황했다고 한다. 갑자기 자유의 몸이 되어 길 한복판에 서서 어디로 갈 것인가 하고 한참이나 망설였다고 한다.(166 페이지) 그것은 어머니한테 먼저 가야 하나, 아내와 아들한테 먼저 가야 하나의 문제였다. 김수영 시인이 택한 곳은 아내와 아들이 있는 곳이었다.

 

김수영 시인은 포로수용소에서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매순간 다짐했다. 김수영 시인은 포로수용소의 답답한 시간을 이를 흔들어 빼는 것으로 달랬다. 김수영 시인에게 그 고통은 살아 있음의 징표였다. 김수영 시인은 소리에 극히 민감했다. 특히 글을 쓸 때 그랬다. 그래서 소음이 없는 곳을 찾다 보니 황무지 같은 서강(西江) 언덕에 자리하게 되었고 호구지책으로 양계를 했다.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이 늘 그늘과 비애를 삼킨 위대한 서정을 깔고 시를 썼다고 표현한다. 김수영 시인은 일 년에 평균 10편에서 13편 정도 시를 썼다. 김현경 여사가 한 일은 초고(草稿) 정서(淨書)였다. 김수영 시인은 비위에 거슬린 술을 마신 날 김현경 여사에게 심한 주사를 부려 여사로 하여금 이혼을 생각하고 별거를 하게 만들기도 했다.

 

안일과 무위를 싫어한 김수영 시인은 무위도식하는 사람의 술은 마시지 않은 염결(廉潔)성을 보였다. 김수영 시인은 집에서는 절대 술을 마시지 않았다. 집과 서재를 엄숙한 일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수영 시인은 앞서 가는 시 정신을 갖기 위해 철학서는 물론 새로운 문학 책을 숙독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이 문명과 서울과 인간정신과 인류의 온갖 오염을 시와 행동으로 구체적으로 밀어붙이고 살다 간, 끈질긴 의지의 시인이었다고 말한다. 김수영 시인은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삶을 자발적 또는 적극적 감금생활로 정의했다. 김수영 시인은 사람은 죽을 곳을 알아야 한다는 말을 시에 적용해 시인은 자기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죽어야 한다는 말로 정리했다.

 

김수영 시인은 고독이나 절망이 용납되지 않는 생활도 그것이 자신의 현실이라면 조용히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순수하고 남자다운 일이라 생각했다. 김수영 시인은 시는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나가는 것이라 말했다. 김수영 시인은 시는 문화와 민족과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지만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한다는 말을 했다.

 

김수영 시인은 그것을 형식이 내용이 되고 내용이 형식이 되는 것이라 표현했다. 김수영 시인은 새로움은 자유고 자유는 새로움이란 말도 했다. 김수영 시인은 시인의 스승은 현실이고 시인에게는 현실에 정직할 수 있는 과단과 결의가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

 

김수영 시인은 진정한 시의 테두리 속에서 살아 있는 낱말들이 진정 아름다운 우리 말이라는 말을 했다. 김현경 여사는 시를 쓰고 책을 읽으면서 번역도 쉴 사이 없이 부지런히 한 수영의 정진하는 자세를 정말 좋아했다고 말한다.

 

김수영 시인은 잔병치레를 많이 했다. 그 중 하나가 기관지염이다. 김현경 여사는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을 읽으면 수영의 기침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는 말을 한다. 김수영 시인은 술에 취하면 애교가 대단해질 때도 있었지만 울분과 불만의 분화구로 변할 때도 있었다. 울분과 불만 이후에 새로운 시들이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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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최근 들은 시 강의 중 가장 알차고 흥미롭고 자유로운 강의가 어제 용산도서관에서 열린 이혜미 시인의 강의였다고 자신한다.

우리는 연말연시를 운(韻)으로 하는 4행시 짓기 과제를 수행했고, 스티커에 질문을 써서 내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강의는 자연스럽게 토크쇼처럼 진행되었다.

시인은 4행시를 가장 잘 지은 한 사람과 좋은 질문을 한 두 사람에게 사인을 하고 직인까지 찍은 자신의 시집(‘뜻 밖의 바닐라‘와 ‘보라의 바깥‘)을 선물로 주었다.

나는 좋은 질문을 한 사람 가운데 하나로 뽑혀 ‘보라의 바깥‘을 선물로 받았다. 나는 시집을 받으며 두 시집 모두 있지만 사인을 하고 직인을 찍은 시집을 받게 되어 더 좋다고 말했다.

시인은 4행시 수상자에게 ‘뜻 밖의 바닐라‘를 읽게 한 뒤 창작 배경을 설명했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에게는 ‘넝쿨 꿈을 꾸던 여름‘과 ‘바난(Banan)‘을 읽게 한 뒤 역시 배경 설명을 했다.

‘넝쿨 꿈을 꾸던 여름‘은 ˝꽃은 물이 색을 빌려 꾸는 꿈˝이란 표현이 마음에 드는 시이다.

내가 한 질문은 운동이든 산책이든 춤이든 명상이든 그런 것들이 생각이나 문체에 영향을 미치는지였다.

시인은 애인을 따라 스킨스쿠버를 한 경험을 이야기하며 그런 것들이 시의 좋은 소재가 된다는 말을 했다.

명상은 아직 해보지 않았다는 말을 했다. 나는 운동이나 산책을 하면 리드미컬한 시가 쓰일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시인은 내 질문이 뜻 밖의 질문이라 말했다. ‘뜻 밖의 바닐라‘를 응용해 한 말이 아닐까 싶다. 시인은 좋은 시를 쓰기 위한 10가지 방법에 대해 말했다.

이 가운데 ‘감정에게 언제나 예의를 차린다‘, ‘다 썼다고 느낀 순간 바로 그 순간부터 다시 시작할 것‘이 인상적으로 느껴진다.

시인은 시를 쓸 때 고칠 부분이 있으면 전체를 다시 쓴다고 한다.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를 필사하느라 손가락에 이상이 생길 정도였다는 시인이 우리에게 일깨우는 것은 성취는 저절로 또는 쉽게 얻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랜만에 참 밝고 유쾌한 강의를 듣게 되어 기분이 좋다. 당분간 그의 시를 읽고 해석하느라 애쓰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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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김이듬 시인의 책방이듬(일산 동구 평화로)에서 진행된 문보영 시인(2017년 김수영 문학상 수상) 초청 강연에서 나는 춤이 생각이나 문체에 영향을 미치는지, 미친다면 그런 점은 어떻게 드러나는지 등을 물었다.

하루 종일 시를 생각한다는 26세의 그녀는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답을 했다. 다만 춤을 출 때는 시 생각에서 놓여날 수 있고 슬픔 같은 감정도 아무렇지 않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춤은 효과면에서 명상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시인은 시와 무관한 취미를 갖기를 주문했다.)

시란 논리적 설명을 거부하려는 경향이 있고 그런 점에서 설명을 하는데 앨러지를 느끼는 사람에게 시는 쉽게 느껴질 수 있다는 말이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논리로, 인과관계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사람에게 시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내가 그런 경우가 아닌가 싶다.)

얼마 전 자살한 샤이니의 종현이 담당 정신과 의사로부터 ˝왜 힘든지를 찾아보라˝는 말을 들은 사실을 인용하며 시인은 그가 그 말 앞에서 설명의 부담을 느꼈을 것이라 말했다.

공감한다. 다만 나는 그 의사에게 그러면 의사는 무엇 때문에 있는가, 란 말을 하고 싶다. 출구를 찾으러 간 사람에게 힘든 이유를 찾아보라는 말을 하다니..

시인은 지난 2년간 일기에 죽고 싶다는 말을 200번도 더 썼다고 한다. 그녀가 시로써 치유를 이루기를, 그래서 그 비결을 오래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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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반생기
양주동 지음 / 최측의농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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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측의 농간판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敎檀(..교단) 四十年(사십년)回憶(회억)'이란 부제를 병기하지 않고 제목만을 명기한 책이다. 사실과 허구를 적절히 결합한 저자만의 글쓰기를 수필이란 장르로 한정짓지 않기 위해서이고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사실 혼동의 소지를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저자 무애(无涯) 양주동(1903 - 1977) 선생님(이하 저자)은 우리나라 최초로 신라 향가 25수를 해독한 국어학자이고 우리 고어를 의식적으로 글쓰기에 활용한 분이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몇 어찌'란 글을 통해 그 분의 성향이나 스타일을 알 수 있었거니와 깔끔한 노란 색 표지가 인상적인 전집 형태로 새 단장되어 나온 책을 보니 읽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든다.

 

저자의 책은 술의 힘에 편승해 써내려간 문학 책이 아니라 깊고 거침없고 정교한 사유가 압권인 책이다. 저자는 문학을 자신의 평생의 기호(嗜好)라 말한다. 자칭 한문학 중독자, 신학문 중독자인 저자의 글은 종횡무진 지식의 보고(寶庫)들을 섭렵한 내공에 기인한 유서 깊은 것이다.

 

()()() 세 방면을 겸수(兼修)한 저자의 끝내의 귀의처는 국학 곧 국문학의 사학(斯學)이었다. 저자는 열한 살 때 동네 야학숙(夜學塾)의 숙장겸 선생 역할을 수행했다.(: 글방 숙) 저자는 이때 학비 일체는 숙장(塾長)인 자신이 부담하고 월사금은 없고 속수(束脩: 입학할 때 내는 돈) 대신 한 달에 술 한 병을 지참할 것을 요구했다.

 

구학(舊學)의 대가가 신학(新學)을 접할 때 어려움을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삼인칭(三人稱)이란 말을 처음 듣고 논어에 나오는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 必有我師)의 그 삼인행인가, 아니면 좌전에 나오는 삼인점 종이(三人占 從二)‘의 그 삼인점인가 궁구했다고.(삼인행 필유아사는 세 사람이 가면 반드시 스승이 될 사람이 있다는 의미이고, 삼인점 종이는 세 번 점을 쳐서 두 번 나온 괘를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신학문 중 수학을 가장 좋아했다. 앞에서 몇() 어찌()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은 공간 속 도형이나 대상들의 치수, 모양, 상대적 위치 등을 연구하는 수학의 한 분야(측량과 관계된)geometry를 중국에서 소리나는 대로 적은 것이다. 기하 시간에 저자는 안기하(安幾何)로 통하는 안일영 선생이 대정각(맞꼭지각)은 상등(相等: 같다)하다는 문제를 증명해내는 것을 보고 놀라 근대문명에 지각(遲刻)하여 ”, “도장만 찍다가 드디어 봐라, 어떻게 되었느냐?”의 망국을 당한 내 나라도 대개 시골뜨기나 자신 같은 무지의 과정의 소치였구나! 오냐 기하를 공부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는 가위로 실제 각을 만들어 대정각이 같다는 것을 증명한 저자와 달리 수식만으로 깔끔하게 증명해낸 안일영 선생이 자신의 도출 과정을 가리키며 봐라,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은 데서 나온 말이다. 저자가 이름을 날린 것은 약관 20세의 와세다대 초년급 학생으로 춘원 이광수의 중용과 철저‘(동아일보 수록)를 반박하는 철저와 중용‘(조선일보 수록)이란 글을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어서였다.

 

춘원(1892 1950)은 저자(1903 1977)보다 11살 연상이다. 열 살 때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는 저자는 자신의 기주벽(嗜酒癖)과 한때의 경음(鯨飮: 고래가 물을 마시듯 술을 많이 마심)은 모두 전가(傳家)의 내력이라 말한다. 저자는 기주(嗜酒: 술을 즐김)했는데 술과 관련된 중국 고전들로 자신의 처지를 대변하거나 표현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듯 단지 술만 좋아한 것이 아니었다.

 

시회(詩會)가 발전하면 주회(酒會)가 되고, 시회는 번번이 시루(詩樓)로부터 주막으로 옮겨짐이 항례였다.(135 페이지) 저자는 청춘은 한창 서럽고 인생은 그저 외롭고 사랑도 차츰 권태로워졌기에 술이 자꾸 늘어만 갔다고 한다.(138 페이지) 저자가 술과 글로 어울린 사람들은 나도향(1902 1926), 이은상(李殷相: 1903 1982), 염상섭(廉想涉: 1897 1963) 등이다.

 

술은 염상섭과, 글은 이은상과였다(나도향의 본명은 나경손, 호는 도향, 필명은 빈이었다.) 저자에 의하면 염상섭은 시에 자못 흥미가 없었음에 대하여 자신은 소설의 경계를 아주 몰랐다. 염상섭이 끙끙거리며 열심히 퇴고(推敲)해 쓴 치밀하고 끈기 있는 문장을 저자는 트리비얼리즘이라 평했는데 정작 그런 저자는 구상한 소설을 한 줄도 쓰지 못했다.

 

저자는 이를 일러 버선 한 켤레도 꼼꼼히 말아보지 못한 시골 색시가 서울 마누라의 저고리 깃, 섶 솜씨를 비평하는 격이라 말한다.(150 페이지) 저자는 그리도 자긍(自矜)이 심하던 시를 중단하고 평론과 잡문에 종사하다가 신라가요 연구에 전()하였다고 한다.(179 페이지) 저자는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우연히 읽고 선생도 일찍이 자신처럼 객기를 이국에서 잠깐 부린 일이 있었거니와 만일 선생이 자신의 글을 읽는다면 후생이 가외라 했을 것이라 말한다.(208 페이지)

 

저자는 1921년에 일본에 갔다가 중간에 지진으로 인한 재해 때문에 1년을 휴학하고 1928년에 와세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6년 공부 기간을 개인의 영화나 일신의 이해를 꿈에도 계교(計巧: 여러 모로 빈틈없이 생각하여 낸 꾀)해본 적이 없고 오직 겨레를 계몽하고 지도하고 향상하여 독립과 해방의 터전을 마련하고자 한 시간들이었다고 말한다.(228 페이지) 충분히 공감한다.

 

저자가 회월 박영희, 필봉 김기진, 빙허 현진건, 노산 이은상, 금동 김동인, 서해 최학송 등 유명 문인들과 어울린 모임 가운데 시조의 현대적 의의에 대한 토론이 가장 인상적이다. 저자는 시조의 정신을 살리자는 쪽이었는데 일부에서 봉건 시대의 이데아라고 주장했다. 두 진기한 발언이 있었다.

 

김동인(金東仁: 1900 - 1951)은 시조라는 것은 도무지 무슨 수작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다. 김동인은 시조를 개수작, 당치도 않은 객설이라 칭했다. 저자는 이에 자신이 한 시조혁신론의 평범, 진지한 일석의 변을 듣고 도리어 일종의 반발감을 느껴 잠깐 역설적인 독설을 농()한 모양이라 말한다.

 

신경향파의 작가 서해 최학송은 시조 집어치우라는 말을 했다. 저자는 술에 취해 한 그 말을 시조() 집어 치우고 술이나 마시자는 소리인지 시조 같은 유한 문학을 아예 현대문학에서 집어치우자는 뜻인지 알지 못하겠다는 말로 마무리한다.(314 페이지)

 

저자는 서해의 그날 밤 진의는 아마 영원한 비밀이겠으나 자신은 그것이 이념적, 위치적으로는 사회파에 기울어지고 인간적, 체질적으로는 민족파에 친근한 그의 딜레마적 입장에서 고민된 나머지 취중에도 궁여의 일책으로 고심 안출(案出)된 한 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314 페이지)

 

저자는 뜻 밖에도 H. G 웰스의 타임머신을 이야기한다. 사연인즉 소동파가 술을, ()를 낚는 갈구리라 칭한 것을 살짝 고쳐 술은 현실을 잊게 하는 에테르, 시간을 줄이는 비행기라 말하며 (시간 단축술을 논한) 웰스가 술이라는 간단한 틀의 축시(縮時: 시간 단축)적인 기능을 작품에 언급하지 않은 것은 그가 자신과 같은 주도(酒徒: 술꾼)가 아니었기 때문으로 실천적인 경험과 착상이 부족한 탓이니 섭섭한 일이라 말한 것이다.(351, 352 페이지)

 

저자는 문재(文才)도 뛰어나고 그 만큼 아량(雅量)도 크다. 저자의 아량을 문재에 기반한 아량이라 할 수 있다. 초나라 왕이 명궁(名弓)을 잃자 신하들이 찾아보기를 청하자 왕이 초나라 사람이 잃은 것을 초나라 사람이 얻었으리니 찾아서 무엇하겠는가, 라 말했다. 이를 들은 공자가 왕의 생각이 크지 못함을 아까워 하였다. 왜 사람이 잃은 것을 사람이 얻었으리라고 말하지 못하는가, 라 말했다.

 

이에 저자는 공자의 생각이 크지 못하다. 왜 자연은 얻고 잃음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왜 하필 사람이리오?라 말했다.(368 페이지) 저자는 자신의 두 가지 지적 결함을 이야기한다. 하나는 독일어를 통 모르는 것, 다른 하나는 아주 음치(音癡)인 것이다.

 

괴테의 파우스트와 릴케, 카프카의 여러 작품을 원어로 읽어보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라는 것이다. 또한 모차르트, 베토벤의 음악을 듣고도 아무 영감이 없었음이 괴로운 일이었다고 말한다.(431 페이지)

 

저자는 1923년 일어난 관동대지진을 말한다. 당시 저자는 휴학중이었다. 저자는 이를 천운(天運)으로 돌린다.(442 페이지) 저자는 위방불입 난방불거(危邦不入 亂邦不居: 멸망할 듯한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으며 정치와 풍속이 어지러운 나라에는 머무르지 않는다: ’논어태백편), 화염곤강 옥석구분(火炎崑崗 玉石俱焚: 곤강에 불이 나면 옥과 돌이 모두 같이 불탄다. 재난이 있으면 선한 자 악한 자 구분 없이 모두 다 죽을 수 있다는 의미.)이란 경전 내용으로 자신의 처지를 설명한다.

 

저자는 자신의 스무 살 직후 청춘기의 글벗이요 애인이었던 K와의 인연을 꺼내기도 한다. 재래의 봉건적 가족 제도에 의한 친권 중심의 도덕관에 대향하여 연애와 결혼, 이혼의 개인적인 자유를 믿고 주장하고 그대로 실천에 옮겨 조혼(早婚)에 의한 결혼을 솔선 파기하는 등 진보적 행태를 보임으로써 일본 유학생회에서 제명 논의가 있자 저자는 스스로 모임에서 탈퇴한 뒤 고별 연설을 겸하여 한 바탕 문학 강연을 시험했다.

 

연애지상주의, 자유 연애 등을 주제로 게거품을 물었는데 그 열변을 들은 K가 찾아왔고 저자는 그녀를 제자 겸 애인으로 두었다. 저자에 의하면 그녀는 참으로 지식욕이 엄청나고 감수성이 날카로운 만큼 연애에 대해서도 미상불(未嘗不: 아닌 게 아니라) 뜨겁고 용감하였다.(458 페이지)

 

저자는 뜻하지 않은 한 불행한 일로 그녀와 헤어진 날 비가 와 날이 음침한 탓도 있었겠으나 대낮인데도 시야가 컴컴하여 길이 온통 보이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아마 내가 K를 무던히 사랑했던가 보다. 그 빛나는 눈, 참새 같은 몸매, 훤칠한 이마, 그 재주, 그 소박함, 그 정열, 그 영리, 또 그 까불음 모두 다 좋았다.”(462 페이지)

 

K는 소설가 강경애(1907 1943)이다. 강경애는 병으로 일찍 타계했다. ‘인간 문제등으로 유명한 작가이다. 불문과에서 춘원이 자신과의 논쟁에서 물과 밥 같은 평범, 건실함의 문학으로 칭한 영문학과로 적()을 옮긴(474 페이지) 저자는 문학행동과 술 마시기에만 몰두하며 날뛰다가 졸업 3개월 전에 논문을 쓰게 되었다.(490 페이지)

 

토마스 하디의 소설 기교론을 주제로 한 논문인데 하디의 전작과 평론의 참고서들을 부랴부랴 구해 단시일내에 모조리 섭렵, 독파하고 결국 논문을 완성한 뒤 고국에서 온 아내와 함께 논문을 나누어 정서(淨書)해 마감 10분 전에 제출까지 했다.(493 페이지) 저자는 논문에서 (하디를 염두에 둔 바에 따라) 운명론, 염세주의 따위는 당초부터 엄밀한 의미로서의 문예상의 이즘이 아니며 형식에서 출발하여 내용에 미치고 드디어 그 총체에 도달함이 문예 비평의 모든 행정(行程)이라는 말을 했다.(500 페이지)

 

저자는 가을 날 황혼에/ 줄나무 길을 혼자 걷다가/ 신을 만나면, 나는 그에게 말씀하리라 - / 당신을 찾지 않을 만한/ 굳센 힘을 제게 주소서같은 존 골즈워디의 시를 읊곤 했다.(509 페이지) 저자는 대학 3개년 전 과목 성적의 4/5가 갑()이어야 취득할 수 있는 고등면허를 위해 나머지 학기에서 모두 갑을 얻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공부에만 매진 목표를 이루는 등 몰입하는 대단한 힘을 보이곤 했다.

 

저자는 어려서부터 오로지 불후의 문장에 야망을 두었던 바 시인, 비평가, 사상인이 될지언정 학자가 되리란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그런 자신으로 하여금 국문학 고전 연구에 발심(發心)케 한 것은 일본인 조선어학자 오구라 신페이씨의 저서 향가 및 이두의 연구라 말한다.(557 페이지) 우리의 문화가 언어와 학문에 있어서까지 완전히 저들에게 빼앗겨 있다는 사실이 저자에게 통절(痛切)함을 안겨주었다.(558 페이지)

 

저자의 글은 현란한 한자어들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독학무사(獨學無師: 스승 없이 홀로 배운 것), 독서불구심해(讀書不求甚解: 책을 읽을 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그대로 접어두고 그 뜻을 깊이 연구하지 않는 것), 염운(拈韻: 운자를 뽑는 것), 촉각시(燭刻詩: 초에 금을 그어놓고 촛불이 거기까지 타들어가기 전에 짓는 시. 짧은 시간 안에 짓는 시), 학숙(學塾: 글방),

 

후생가외(後生可畏: 후학이 두려워 할 만하다는 뜻으로 논어 자한(子罕)편이 출처이다.), 일일지장(一日之長: 하루 먼저 세상에 태어났다는 뜻, 나이가 조금 높음을 이르는 말.), 시참(詩讖: 우연히 쓴 시가 자신의 앞날을 예언한 격이 되는 경우), 기주벽(嗜酒癖: 술을 즐기고 좋아함), 경음(鯨飮: 고래가 물을 들이키듯 술을 몹시 많이 마심), 일람첩기(一覽輒記: 한 번 보면 다 기억한다는 뜻),

 

중인개취아독성(衆人皆醉我獨醒: 모두 술에 취해도 자신만은 깨어 있음을 이르는 말로 굴원의 어부사(漁父詞)‘가 출처), 궁즉통(窮卽通: 궁하면 통한다는 뜻으로 주역(周易)‘이 출처), 겁나(怯懦: 겁이 많이 마음이 약함), 치의(緇衣: 승려), 치문(緇門.. ()는 검은 비단 치자로 치문(緇門)은 물들인 옷을 입은 사람들의 세계(世界)라는 뜻으로 승도(僧徒)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일지반해(一知半解: 하나쯤 알고 반쯤 깨닫는다는 의미. 지식이 충분하게 제 것으로 되어 있지 않거나 많이 알지 못함을 이르는 말), 필흥(筆興: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일어나는 흥취) ..

 

문주반생기는 대단한 책이다. 발간 60년이 다 된 책인데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주는 것이 놀랍다. , , 학문, 우정, 사랑.. 이 모든 것이 책에 담겨 있다. 천재이지만 필요할 때 놀랍게 몰입한 사정은 노력의 힘을 일깨운다. 오래 된 문주반생기를 한글 세대들이 이해하기 편하게 새로운 감각과 주해(註解) 등으로 새롭게 단장한 최측의 농간(출판사)에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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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취사(靈鷲寺), 홍련(紅蓮) 등은 의미가 깊고 살강살강, 찰강찰강 등은 재미가 있다. 이 말들로 시를 지은 사람이 마산 출신의 김수영(1967 - ) 시인이다. ‘영취사 홍련을 보았느냐고‘란 제목의 시.

김수영(1921 - 1968) 시인 뿐 아니라 김수영(1967 - ) 시인도 있다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다.

당연한지 모르겠지만 검색을 하면 거의 김수영(1921 - 1968) 시인에 대한 자료만 뜬다.

199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김수영 시인에 대해 알고 싶어 조선일보에 가서 ‘1992년 신춘문예‘라 치니 반칠환 시인(1964 - ) 이야기가 나온다.(반칠환 시인은 199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자이다.)

동화작가이고 숲해설가이기도 한 반칠환 시인은 ˝감수성 짙은 문학적 해설˝을 하는 분으로 알려졌다.

숲해설사 교육기관인 숲연구소에서 숲해설 강의를 한다고 한다.(2016년 11월 23일 월간 산 수록 글 ‘시인의 감성으로 들려주는 나무 이야기‘ 참고)

반칠환 시인은 ˝나무를 더 깊이 공부하기 위해 숲해설사가 되었다. 숲해설가 공부를 하면서 무척 행복했는데 결핍이 없어졌기 때문에 시가 안 나온다.˝는 말을 했다.

아무튼 김수영(1967 - ) 시인을 오랜만에 생각하게 된 것은 김수영(1921 - 1968) 시인론(전병준 지음 ‘김수영과 김춘수, 적극적 수동성의 시학‘)에서 읽게 된 김수영(1921 - 1968) 시인의 ‘비‘라는 시 때문이다.

..명령하고 결의하고
<평범하게 되려는 일> 가운데에
해초처럼 움직이는
바람에 나부끼는 밤을 모르고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
투명한 움직임의 비애를 알고 있느냐
여보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
(‘비‘ 일부)

이 시를 읽고 생각한 시가 김수영(1967 - ) 시인의 ‘영취사 홍련을 보았느냐고‘이다.

누가 묻는다
..지나간 발자국에서도 향기가 날까?

붉은 꽃도 지고 푸른 잎도 지고
흐린 물 속에는 탁발을 나가는 검은 발목뼈들

영취사 홍련을 보았느냐고
바람이 불 때마다 살강살강 찰강찰강
물 밖으로 걸어나가는 젖은 발을 보았느냐고
(‘영취사 홍련을 보았느냐고‘ 일부)

‘비‘는 시인이 아내에게 묻는 형식의 시이고 ‘영취사 홍련을 보았느냐고‘는 시인이 다른 사람의 물음을 회상하는 시이다.

‘비‘를 통해 드러난 김수영(1921 - 1968) 시인과 연인 김현경 여사의 사연은 쇼팽과 조르주 상드의 사연을 생각하게 한다.

마요르카 섬에서 쇼팽과 상드는 어떤 시간들을 보냈을까? 피아노 독주로 연주되는 곡이지만 그 섬과 인연이 되어 지어진 ‘빗방울 전주곡‘은 쇼팽과 상드가 대화를 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그 섬에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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