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나 돌, 살갗 등에서 조직의 굳고 무른 부분이 모여 일정하게 켜를 지으면서 짜인 상태 또는 무늬를 의미하는 결이란 말은 어렵지 않지만 설명하라면 쉽지 않다. 나는 어제 이 결이란 단어를 세 번이나 들었다. 내가 처음 이 단어의 철학적 의미에 대해 들은 것은 이정우 교수님의 책에서였다.

 

이 교수님에 의하면 다산(茶山)이 말의 본래 쓰임새를 상세하게 추적한 리(: 진리)는 본래 옥석(玉石)의 결을 의미했다.(1999년 출간 인간의 얼굴’ 154 페이지)

 

결에 대해 들은 첫 번째 공간은 강남순 교수님의 책이다. 교수님은 학술서와 달리 개별인들이 주고 받은 편지는 그 한 사람이 지닌 다양한 존재의 결(layers of being)을 느끼게 한다는 말을 했다.(‘배움에 관하여’ 23 페이지)

 

() 또는 켜를 뜻하는 layer란 말로 결이 설명된 것은 어원을 보았을 때 매우 적확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결에 대해 들은 두 번째 공간은 페북이다. 어제 내게 답지한 생일 축하 메시지들 가운데 박태웅님이 세상에 와서 누리 결이 한결 **졌습니다.”란 글이 있었다.

 

결에 대해 들은 세 번째 공간은 강병국 저자의 주역 독해출간 기념 강연회장(마포 평생학습관)이다.

 

저자는 책을 통해 이런 말을 했다. "옥을 다루는 사람은 옥의 결을 찾아 옥그릇을 만든다. 마찬가지로 천지만물에는 모두 결이 있다. 그러므로 동양에서는 이치를 밝힌다는 말이, 결이 어느 방향으로 나 있는지를 밝히는 것과 동의어라고 생각했다. 그에 따라 사물의 결을 알고자 노력했던 것이다."(‘주역 독해 상경’ 34, 35 페이지)

 

나도 강의 후 진행된 사인회에 동참했다. 책을 구입해 서명을 받은 것인데 강의 중 나온 태괘(泰卦)와 비괘(否卦)를 보고 나는 경복궁 왕비 침전인 교태전(交泰殿)이 태괘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한 뒤 내 이름은 한자어로 朴泰雄이라 쓴다고 말했다.

 

태괘(泰卦), 교태전(交泰殿), 웅의 공통점을 부각시킨 것이다. 주역(周易)의 괘들은 모두 두 갈래로 이루어졌다. 소통이 잘 되어 태평한 경우인 태() vs 소통이 막히는 경우인 비(), 혁신, 개혁, 혁명의 길인 혁() vs 전통을 회복하는 길인 정(), 대세를 따라 자기 뜻을 굽히는 것인 손() vs 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인 태()...

 

전형적인 이원적 대립 체계(binary opposition)이다. 물론 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역은 변화를 말한다. 변화에 대비할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란 한용운 선사/ 시인의 님의 침묵의 한 구절은 (당신은 의식했는지 모르지만) 주역의 논리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제 유종지미(有終之美)라 할 수 있는 것은 나선(螺旋)의 비유가 두 저자에게서 나왔다는 점이다. 강병국 저자는 변화는 나선형으로 이루어지기에 드라마틱하게 눈에 띄지 않지만 그 과정이 결국 상승의 과정이라는 말을 했다.

 

강남순 교수님은 가르침과 배움은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나선형처럼 서로 얽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는 말을 했다. 교수님은 그 의미에 맞는 가르침/ 배움이란 말을 했다.

 

교수님은 슬픔과 기쁨, 비극과 희극, 어두움과 밝음, 우울함과 즐거움 등 상반된 덕목들도 결국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나선형처럼 겹치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면서 얽혀 있다는 말을 하셨다.('배움에 관하여' 123 페이지)

 

나의 어제는 두 분의 귀인(貴人)을 만난(한 분은 강연과 책으로, 한 분은 책으로) 하루였다. 물론 화룡점정의 붓질은 내가 치러야 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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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汝諧)와 빈빈(彬彬)..

최근 상촌(上村; 흔히 서촌이라 부르는..)과 혜화동 순례에서 여해와 빈빈이라는 간판을 보았다.

상촌에서 여해, 혜화동에서 빈빈을 보았다고 해야 정확하다.

여해는 고전연구소란 이름을 달았고 빈빈은 책방이라는 이름을 달았지만 두 곳은 모두 출판사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두 이름이 모두 중국 고전을 출처로 한다는 점이다. 여해는 서경, 빈빈은 논어.

사실 이런 예는 너무 흔하다. 우리 나라의 궁궐, 경전, 서책 등의 이름은 중국 고전에서 거의 대부분 유래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여해(汝諧)는 너로 인해 세상을 화평케 한다는 의미이다.

빈빈(彬彬)은 문질빈빈의 줄임말로 내용과 외양이 고루 조화를 이룬다는 의미이다.

두 이름 모두 조화를 담은 말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물론 이 부분이 요점은 아니다.

요점은 달리 있다. 여해가 ‘너로 인해 세상을 화평케 한다‘는 의미인가 묻자 출판사 직원은 이순신의 자(字)라는 말을 했다.

맞는 말이지만 순서가 잘못 되었다. 너로 인해 세상을 화평케 한다는 서경의 구절을 이순신 장군이 자로 삼았다고 해야 옳다.

은유를 배울 때 원 의미와 그로부터 확장된 의미를 함께 거론해야 하는 것처럼.

중국 이야기를 했기에 하는 말이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문사철(文史哲) 즉 동양의 인문학에서 문은 시경(詩經), 사는 서경(書經), 철은 역경(易經) 곧 주역(周易)이다.

이래서 주역을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주역 공부의 요점은 점을 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는 것, 3천년 간 집적된 추상적 데이터들을 보며 자신의 상황을 객관화시켜 보는 것이다.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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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세계는 무림(武林)의 세계이다.˝ 지난 해 말 내가 한 시인께 직접 들은 이야기이다.

무림이란 무사 또는 무협의 세계를 말한다. 시인의 세계는 생존하기가 그 만큼 어려운 고난의 터라는 의미일 것이다.

최근 장석주 시인의 책(‘은유의 힘‘)에서 비슷한 글을 접했다. 시쓰는 것을 투쟁이라 말한 글이다.

우물에서 정갈한 물을 길어올리듯 새로운 은유를 생각해 내야 하니 그럴 것이다.

국문학 연구자 시나다 히로코는 정지용 시인의 작품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한국인은 자기 감정의 구석구석까지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을 얻었다는 말을 했다.

히로코에 의하면 민족이라는 것도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정지용 시인은 근대인의 심리를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창출했다.(‘최초의 모더니스트 정지용‘ 참고)

히로코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지용은 아방가르드 즉 정예 선발 전투원이었던 셈이다.

나는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 들은 또 하나의 싸움 이야기이다. 윤동주 시인에 관한 것이다.

자신의 내면과 치열하게 싸운 시인이 윤동주 시인이라는 것이다. 수긍할 만하다.

물론 전쟁터 같은 삶임을 인정하며 할 말은 자신의 싸움이 가장 치열하고 자신의 싸움만이 의미 있다고 보면 안 되리라는 점이다. 양보의 미덕은 싸움을 보는 데에서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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냅뜰성은 명랑하고 활발해 나서기를 주저하거나 수줍어하지 않는 성질을 이르는 말,

보굿은 굵은 나무줄기의 비늘같이 생긴 껍데기를 이르는 말, 듬쑥하다는 말은 되바라지지 않고 속이 깊은 것을 이르는 말.

모두 유종인(劉鍾仁) 시인의 ‘조선의 그림과 마음의 앙상블’에서 읽은 낯선 말들이다. 모두 우리 말이다.

이 무작위로 고른 몇 안 되는 단어들의 조합에서도 균형의 미덕이 요구되는 듯 하다.

주저하거나 수줍어하지도 않고 되바라지지도 않아야 하는 미덕.

책은 한편 여물위춘(與物爲春: 당신과 더불어 화창한 봄)과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 같지 않은 봄)처럼 상반된 말이 함께 등장하기도 해 생각거리를 준다.

어제가 입춘이었다. 하지만 크게 달라진 것 없이 여전히 춥다. 마음도 춥다. 당신과 더불어 화창한 봄이란 뜻의 여물위춘이란 말을 조용히 읊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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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離散: 디아스포라) 자료를 찾다가 정은경 교수의 ‘밖으로부터의 고백 디아스포라로 읽는 세계문학’을 읽게 되었다.

이 책에 스테판 츠바이크(1881 – 1942) 이야기가 나온다. 구스타프 말러가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독일 사이에서 복잡한 정체성을 가졌던 유대인 작곡가였던 것처럼 츠바이크는 독일어로 작품 활동을 한 오스트리아 태생의 유대인 작가였다.

그는 참여 작가도 적극적인 반전 작가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전장에서 도피한 작가로 부와 명에를 통해 망명지에서도 비참한 생활을 면했음에도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젊은 아내와 머나먼 브라질에서 동반 자살을 했다. 저자는 이를 의문이라 표현한다.

스테판 츠바이크의 ‘프로이트를 위하여’ 편역자 양진호는 츠바이크가 1942년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접하고 절망감에 휩싸인 채 아내와 함께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자살했다고 썼다.

프랑스 작가 로랑 세크직은 장편 소설 ‘스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나날’에서 츠바이크의 ‘어제의 세계’를 나치의 만행으로 망가져 가고 있는 유럽의 폐허에 세운 비석(碑石) 같은 글로 표현했다.

정은경 교수는 스테판 츠바이크를 코스모폴리턴으로 정의했다.(29 페이지)

츠바이크는 나치 때문에 자살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유대인인 발터 벤야민(1892 – 1940)을 생각하게 한다.

벤야민은 나치에 의해 미국 망명의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다량의 모르핀을 복용해 자살한 작가이다.

마르크시즘 연구자였던 까닭에 출국 비자가 발급되지 않자 피레네 산을 넘어 스페인 국경에 도착했으나 스페인 경찰로부터 프랑스 강제송환을 통보받은 상황이었다.

벤야민은 한나 아렌트에게도 베일에 싸인 인물이었다. 아렌트는 “벤야민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그가 시인이 아니면서도 시적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그에게 은유(隱喩)는 언어의 가장 크고 비밀스러운 선물이었다. 언어를 비의적으로 사용하면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구체화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는 말을 했다.(우베 카르스텐 헤예 지음 ‘벤야민, 세기의 가문’ 110 페이지)

요즘 내가 관심을 갖는 주제는 윤동주 시인을 디아스포라로 보는 것을 정교화하는 것과 그의 시를 은유에 초점을 맞춰 이해하는 것이다.

윤동주 시인을 비롯 벤야민, 츠바이크에 이르기까지 1940년대에 몇 가지 유형의 죽음을 맞은 국내외의 문인, 작가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너무 자유로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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