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 초기에 계연수(桂延壽)란 인물이 편찬했다는 한국상고 역사책인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진위 논쟁이 극단적이다.

이 책의 ‘단군세기(檀君世紀)에 오성취루(五星聚婁) 현상이 기록되어 있다.(’환단고기’는 ‘삼성기(三聖紀)’, ‘단군세기(檀君世紀)’, ‘북부여기(北夫餘紀)’, ‘태백일사(太白逸史)’ 등 네 책으로 구성된 책이다.)

기원 전 1733년 관측된 오성취루는 금성 목성, 토성, 수성, 화성이 일직선으로 늘어선 현상을 말한다.

길게 서술할 수 없지만 이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사실임이 확인되었다.(미국 프린스턴 대학 천체물리학 이학박사를 지낸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의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참고)

천문학자 박석재 박사는 오성취루 같은 천문현상을 임의로 맞추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개천기’ 참고)

오성취루 같은 천문 현상을 기록했다는 것은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게 하는 요소이다.

전용훈 교수는 전통시대 천문학은 국가천문학이었다고 말한다. 전용훈 교수는 그렇기에 역법과 천문의 두 분야 모두 제왕(혹은 국가)의 허가를 얻은 사람들만 수행할 수 있었고 관련된 모든 시작과 활동은 국가 운영에 기여해야 했다고 덧붙인다.(‘정조와 정조 이후’ 수록 ‘천문학사의 관점에서 정조 시대 다시 보기’ 중에서: 91 페이지)

여담이지만 환단고기의 환(桓)이란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굳셀 환, 빛날 환 등의 의미가 있고 머뭇거릴 환이라는 의미도 있는 글자이다.

내 어릴 적 이름이 태환(泰桓)이었다. 나는 이름대로 살고 있는가? 굳세지도 빛나지도 못하고 다만 머뭇거리기는 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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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고전) 읽기로 우울증도 극복하고 일자리도 얻은 한 분이 고전 공부를 어렵게 여기는 것은 혼자 하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라는 취지의 말을 하는 것을 어제 들었다.

아침에는 오늘 자신이 누리는 편안한 삶은 선조님의 고단한 노력과 희생 덕분이고 자신이 공부해 얻어내는 삶의 결실 또한 온전히 자신 것이 아니라는 한 페친의 글을 읽었다.

선조들의 공부 덕에 우리가 노력하지 않고 많은 것을 알고 깨닫을 수 있는 것이고 지금 나의 공부는 힘들더라도 후학들에게 자산으로 남을 것임을 인식하고 어렵더라도 보람을 가지고 힘든 시간들을 이겨내야 한다는 다짐이 담긴 글이라 생각한다.

두 글은 페북은 활발한 이슈 토론의 장이라는 생각을 하는 나에게 성찰의 기회를 주는 글들이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나도 정치,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지만 주된 관심은 실존적 문제에 닿아 있기에 정치, 사회적 이슈를 올리는 분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표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정치사회적 이슈에 표면적 관심이 있을 뿐 깊이 관여하기에는 성향과 실력이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을 한다.

언급한 한문 연구자의 말을 참고한다면 사실 내가 잘 알지 못하고 쓰지 못하는 분야의 글을 자주, 그리고 멋지게 올리는 분들을 보며 부러움을 느끼기보다 공부거리를 얻고 생각할 기회를 얻는다고 생각해 다행으로 여기는 것이 맞다.

마흔 살이 넘으면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을 마흔이 되기 전에 자신의 삶은 스스로 해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로 듣는다.

주역도 단 한번이지만 ‘혁(革)‘괘에서 ‘대인은 점칠 필요가 없다‘는 말을 했다.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나도 젊어서 몇 차례 도인이라는 사람, 수행자라는 사람, 무당 등을 각 한 차례씩 찾았었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 그러고 싶은 때가 몇 번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스스로 ‘책임지지 못하는/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삶을 드러내는 격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 패를 상대에게 모두 드러내 보이는 것과 다름 없다. 이렇게 말하면 그렇게 점집에 가지 못하는 대신 주역을 공부하는 것이냐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내 주역 공부는 점을 치기 위한 용도가 아니다.

어떻든 페북을 하면 내 알량한 정신의 현주소를 모두 드러내보이는 것 같아 불편하기도 하다.

점집에 가서 내 현 상황을 고백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글 잘 쓰는 분들이 많아 위축되지만 그 분들이 평소 기울이는 관심의 양과 질을 생각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든 글쓰기는 쉬운 일이 아님을 생각하자. 그리고 부러워하기보다 내가 능하지 못한 부분을 채워준다고 생각하고 고맙게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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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계 미국인 과학자 존슨 얀(Johnson Faa Yan; 1934 - 2015)의 부고(訃告)에는 주의를 요하는 면이 있다.

성 요셉 메디칼 센터에서 평화로운 죽음을 맞았다(died peacefully)는 내용 때문이다.

물론 평화로운 죽음을 맞는 것이 희귀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가 제기한 주장에 비추어 그의 죽음을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이라 말하고 싶다.

그는 주역이 말하는 변화는 시계추처럼 규칙적인 흔들림이 아니라 다양한 진폭과 주기를 가진 브라운 운동 이론에서의 무작위적 잡음과 비슷하다는 주장을 했다.(‘DNA와 주역‘ 38 페이지)

주역이 변화에 대해 기술하는 책이지만 나는 무심코 그 변화를 얌전하고 고요한 것으로 생각해왔다.

노자의 천지불인(天地不仁)을 감안하면 변화는 결고 얌전하지도 고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존슨 얀의 특이성은 또 있다. 그는 주역의 도가 양자론과 분자생물학 등에 적용되는 현실을 환기시키는 글에서 예(禮)를 잃었을 때는 다른 나라에서 찾으라는 공자의 말을 인용한 뒤 철학이나 점술 등 전통적 영역에서 주역의 도가 상실되었을 때에는 그 도가 다른 분야에서 응용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DNA와 주역‘ 37 페이지)

‘DNA와 주역‘은 제목을 통해 알 수 있듯 DNA와 주역 괘의 유사성과 의미를 밝힌 흥미로운 책이다.
나는 그의 책에서 주역만도 아니고 생물학만도 아닌 제3의 길을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 길을 발판으로 삼아 내 생각의 집을 짓는다면 최선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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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영중 교수(러시아 문학), 김경주 시인, 허희 문학평론가 등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시청했다.(어제 국회방송)

오래 전에 읽었지만 줄거리는 물론 드미트리, 이반, 알렉세이, 스메르자코프 등 네 형제 이름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작품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이 가운데 막내인 배다른 아들 스메르자코프는 간질을 앓는 사람이고 이름의 의미는 ‘냄새난다‘이다.(아버지는 물론 형들로부터 천대, 멸시 받던 그는 결국 아버지를 살해한다.)

“그것은 냄새였다.”. 조성기 작가의 장편 소설 ‘라하트 하헤렙(Lahat Hahereb)’의 첫 문장이다.
라하트 하헤렙은 먹어서는 안 되는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영생할 것을 우려한 히브리의 신 야훼가 그들을 에덴 동산에서 내쫓고 그곳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동산 주변에 둘러친 칼 모양의 불 또는 불 모양의 칼이다. 우리 말로는 화염검(火焰劍)이다.

이 책은 몇 년 전 읽었지만(再讀) 줄거리는 희미하다. 워낙 그 의미의 관념성에 경도된 탓이 아닌가 싶다.

나는 줄거리를 찾아 책을 이리 저리 뒤지기보다 에덴동산의 불칼을 소재로 한 작품이니 그 냄새마저 불로 정화시키듯 태울 것이라는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냄새라는 단어를 첫 줄에 배치한 것일까, 생각을 하고 만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다비(茶毘)’라는 책이다. 저자는 왜 남방불교의 통찰(洞察) 수행인 위빠사나를 말하는 책의 제목을 불교 전통의 화장(火葬)인 ‘다비’라고 지었을까?

자신의 다비 장면을 꾼 저자의 꿈에서 비롯된 제목이지만 왜 그 꿈일까?

단서는 있다. 열반(涅槃)은 조건으로 연결된 작용의 중지라는 저자의 말이 그것이다.

이다, 아니다, 있다, 없다 등으로 사고 체계를 동원하여 분별할 수 있는 작용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리학을 전공한 김병호 시인이 우주란 상호작용하는 것들의 총체라는 스승의 말을 언급한 것(‘과학인문학’ 참고)을 참고하면 다비는 소멸이고 상호작용의 중지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마침내 우리의 말이란 스님의 뼈와 같고/ 한편의 시란/ 이상한 광채어린 스님의 사리와/ 같아서/ 우리, 역시, 육신을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란 구절이 있는 김승희 시인의 ‘다비(茶毘)를 보며’를 읽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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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 위빠사나 수행기
정해심 지음 / 에디터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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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말하는 화장(火葬)을 의미하는 다비를 제목으로 한 책 다비(茶毘)’60세의 수행자가 기독교를 거쳐 알게 된 불교의 수행 중 초기 불교의 위빠사나를 한 기록이다. 저자에 의하면 기독교는 그에게 믿음이 무엇이며 초월적인 경험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었지만 의심을 키워준 종교이다

 

하지만 저자는 성향이 맞지 않아 기독교와 갈라서고 말았다. 저자가 불교를 접한 것은 일엽(1896 1971) 스님을 통해서이다. 본명이 김일엽(金一葉)인 일엽 스님은 일제 강점기의 여성운동가, 언론인, 시인이었고 불교 승려, 시인 겸 수필가였다. 일본 유학시기부터 화가 나혜석 등과 함께 자유 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외치며 개화기 신여성운동을 주도했던 분이기도 하다.

 

저자에게 위빠사나를 권한 분은 아내이다. 1990년대 저자는 생계를 위해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나니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세상 모든 것을 귀찮아 했지만 신기하게도 위빠사나에는 관심이 갔다고 말한다.(38 페이지) 저자는 삶의 실체를 조금이나마 알아보고 죽자는 마음으로 참여하게 된 위빠사나를 통증과 오기 속에서 가열차게 따라 갔다.

 

독학으로 하게 된 위빠사나는 저자로 하여금 나는 누구인가?”, “왜 태어나서 이렇게 살다가는 것인가?”란 의문을 갖게 했다. 그러나 좌선을 시작하면 얼마 되지 않아 통증이 오고 통증이 사라지는가 싶으면 망상이 오고 망상이 조금 사라지면 졸음이 오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위빠사나는 현상(마음, 대상, 느낌 등)을 바로 보는 수행인데 그 바로 봄을 통해 통증을 극복한 저자에게 이번에는 망상이 왔다. 저자는 호흡으로 인해 생기는 배의 일어남과 꺼짐 현상을 주목함으로써 보는 힘을 키웠다. 집중력이 좋아지면서 신비 체험이 왔다. 물론 환상은 권할 것이 아니다. 그저 주시의 대상일 뿐이다. 환상에 빠지면 수행이 이상한 길로 빠진다.

 

저자는 우리나라에 마하시 사야도의 위빠사나를 처음 소개한 거해스님으로부터 위빠사나를 배우게 된다.(마하시는 좌선, 행선을 번갈아 한다.) 저자는 수행이란 긴장과 이완의 균형을 잡는 것이라 말한다. 수행은 힘을 주면 안 되고 빼도 안 되고 죽기 살기로 대들어도 안 되고 자유롭게 풀고 있어도 안 되는 것이다.(57 페이지)

 

저자는 행선 중 신비 체험을 한다. 물론 인터뷰를 통해 지도 스님(거해 스님)으로부터 그래 뭐 대단한 거 본 것 같아?”란 말을 들었다. 저자는 수행을 홀로 하기로 마음 먹은 뒤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간격이 점점 짧아져 톡톡 튀는 경험을 했고 호흡을 하지 않고 아는 마음만 남는 상태에 들어선다.

 

중요한 것은 강력한 선정(禪定)과 관찰이다. 저자는 지혜 없는 수행은 환상에 불과하고 지혜가 없으면 번뇌는 소멸하지 않는다는 말을 한다.(72 페이지) 저자는 불교 수행의 핵심은 계(), (), () 삼학(三學)의 조화라 말한다.(73 페이지) 저자는 두통을 수행(보는 힘)으로 극복한다. 저자는 모든 현상을 하나의 생멸현상이니 면밀히 관찰하게 된다.

 

저자는 교단 차원의 여러 트러블을 자등명(自燈明)의 지혜, 자신을 귀의처(歸依處)로 삼겠다는 다짐으로 넘어서기로 한다. 저자는 이런저런 힘든 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보면 위빠사나 수행을 권하고 싶어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수행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사람들은 매우 드물다.(87 페이지)

 

저자는 수행 중 현상들의 소멸을 보게 되었다. 이는 위빠사나 수행에 수반하는 일반적 현상이다.(94 페이지) 위빠사나 수행에서 소멸의 경험은 불교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인 열반의 체험과도 연결된다.(95 페이지) 수행자는 나타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바쁘다.(98 페이지)

 

생멸 현상에 적응이 되는 것은 집착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스승은 수행자가 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길잡이 역할을 할 뿐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해결사가 아니라고 말한다. 나 이외에 어느 누구도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지론이다.(109 페이지)

 

저자는 마하시 위빠사나 명상 센터에서 겪은 일을 소개한다. 한 스님께서 어떤 사람이 비오는 날 지붕 위에서 빗방울이 떨어져 바닥에 놓여 있는 댓돌을 오랜 세월 파내는 것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몸과 마음이라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도 아닌 외부에서 일어난 현상을 보고 깨달았다면 소설책 보고 깨달았다는 말과 뭐가 다르냐는 질문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스님이 외부에서 내부로 옮겨 수행하여 깨달았다고 답하는 것을 듣고 저자는 미얀마의 모든 스님들이 진지한 수행자는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111 페이지) 저자는 인과응보를 관장하는 자도 없고 업의 실체도 없으며 죄를 지은 고정된 자아도 없고 죄를 받는 고정된 자아도 없지만 수행을 통해 나타나는 현상들은 내가 쌓은 의도적 행위의 결과 외에 다른 답을 찾기 어렵다고 말한다. (128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바라본다는 것은 관념을 내려놓고 존재의 실상을 아는 것이다. 나의 몸과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현상이 실제이다. 수행자는 관념을 이어가는 이야기를 만들지 말고 그저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132 페이지) 자동적이며 동시에 편견으로 변형되기 쉬운 관념을 만드는 작업이 우리에게 지금까지 커다란 괴로움을 준 것이 사실이다.(132 페이지)

 

생멸 현상이 아닌 것은 없다. 수행의 시작에서 몸의 느낌(감각)을 대상으로 삼는다면 실제에 머무는 것이 쉬워진다. 생멸현상은 마치 파장의 연속처럼 이루어졌다. 생멸현상에서 영원이나 영속을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정불변의 영속적인 실체가 있다면 경험되어야 하는데 그런 것은 경험되지 않는다. 심지어 붓다도 이 고정된 실체(아트만)를 찾는 데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영원한 실체를 찾아 끊임없이 허우적 거린다.(132, 133 페이지)

 

먼저 일어난 현상과 다음에 일어난 현상은 같은 정보를 담고 있기에 같은 현상의 반복처럼 느껴지지만 자세히 보면 그것들도 계속 변해 간다.(135 페이지) 내 몸과 마음에 영원불변의 것이 없다는 것을 경험하면 이 세상의 모든 현상들이 그런 속성을 지녔다고 파악할 수 있다.(135 페이지)

 

저자는 나라고 하는 주체가 있어 아픔이나 가려움 등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며 나 자신이 통제하는 것 같지만 그 사이에는 내가 놓치는 무수히 많은 조건과 작용들이 함께 하며 혹시 내가 있어 조정한다 해도 그것은 생멸현상의 일부일 뿐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 말한다.(162 페이지)

 

그 과정들을 예리한 주시를 통해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바라보다 보면 어느 순간 저절로 알아지는 것이고 수행자는 오직 바라볼 뿐이다. 저자는 열반은 조건으로 연결된 작용의 중지라 말한다. 이다, 아니다, 있다, 없다 등으로 사고 체계를 동원하여 분별할 수 있는 작용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70 페이지) 짧지만 인상적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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