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김영민 교수가 말한 ‘예열 없는 공부‘란 말의 의미는 다소 아니 많이 어렵다.

그에 의하면 ‘예열 없는 공부‘란 신체와 정신, 무의식과 지성, 의욕과 욕심의 근대적 분화(分化)와 물화(物化)를 깨고 새로운 몸(삶의 양식과 버릇)을 얻고 길러 인간의 통전적 성숙을 위해 그 몸을 경첩으로 삼아 갖은 이치들을 융통케 하는 것이다.

내가 이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김 교수가 설명한 공부는 분열 없는 공부, 소외 없는 공부라 불러야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는 것이다.

어떻든 나는 ‘예열 없는 공부‘보다 ‘지체 없는 공부‘ 즉 뜸 들이지 않는 공부를 말하고 싶다.

‘지체 없는 공부‘란 불필요한 예비 동작 없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을 의미한다.

남양주 실학 박물관 가는 길에 들고 나온 제임스 글릭의 ‘인포메이션‘도 바로 본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의 사이트를 찾고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의 감수(監修)의 글을 읽고 글릭의 전작인 ‘카오스‘에 관한 내용을 검색하고 심호흡을 하고..등등의 동작을 하고 책을 본격적으로 읽고 있으니 영락 없이 지체하고 우회하고 허송하는 공부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스마트폰을 이용하는 것도 공부를 방해하는 것이다. ‘무슨 무슨 책을 읽기 전에‘나 ‘무슨 무슨 책을 읽으며‘보다 ‘무슨 무슨 책을 읽고‘ 형태의 글을 써야겠다.

어떻든 정말 문제인 것은 지금 필요한 것과 당장 필요한 것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이다.

많은 지체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하다. 시간은 부족하고 읽을 책은 많음을 늘 유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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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와 정조의 소설관은 너무 달랐다. 사도세자는 소설은 마음의 병을 고쳐주고 외로움을 없애주고 웃음을 주고 교훈을 주고 심지어는 사랑스럽기까지 하다는 말을 했다.

반면 그의 아들 정조는 소설은 독이며 이단이고 음란하고 야비한 음악, 남의 비위를 잘 맞추는 간사한 음악이라고까지 말했다.

박소연의 장편 소설 ‘꽃 그림자 놀이’를 읽고 있다. 사도세자와 정조의 소설 이야기는 이 책의 서두에 인용된 글이다.

소설과 관련해 드러난 사도세자와 정조 사이의 커다란 생각의 차이를 보니 두 부자 사이에 드라마틱한 비밀이라도 숨어 있을 것만 같다. 재미가 있어 다행이고 의미도 있어 만족스럽다는 생각으로 소설을 읽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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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다 도라히코의 ‘어느 물리학자의 일상’, 캐슬린 제이미의 ‘시선들’을 내 글쓰기의 이상(理想)으로 삼으려 한다.

일본 최초의 과학 문필가라 불리는 데라다 도라히코는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문하생이었던 물리학자였다.

과학적 정밀함과 문학적 유려함이 한데 어우러진 글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캐슬린 제이미는 ‘벤투의 스케치북’ 등의 저자인 평론가 존 버거가 에세이 형식을 마술처럼 주무르는 여자 마법사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스코틀랜드의 작가이다. ‘시선들’은 그가 쓴 자연 에세이이다.

내가 자연을 대상으로 한 에세이를 주목하게 된 것은 샤먼 앱트 러셀의 인상적인 에세이집인 ‘꽃의 유혹’을 읽고서부터이다.

러셀은 자연자원 보존학을 전공한 사람이다. ‘꽃의 유혹’에서 그는 자연은 결코 자신 앞에서 침묵하는 법이 없다고 말한다.

러셀은 자연이 자신에게 속삭이며 때로는 “아름다움, 아름다움, 아름다움”이라 소리친다고 말한다.

다이앤 애커먼의 ‘휴먼 에이지’도 자연을 대상으로 쓴 시적인 문체의 글이다. 애커먼은 박물학자이자 에세이스트이자 시인으로 자연과 과학의 언어를 시의 언어로 옮기는 작가라는 평을 받는다.

일본의 물리학자 유카와 히데키도 언급할 만하다. 그는 “과학자로서는 드물게 많은 에세이를 남”(고토 히데키 지음 ‘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 202 페이지)긴 사람이다.

고토 히데키는 이론 물리학자는 논리에 엄격하고 군더더기를 싫어해서 문장을 계속 간결하게 수정하며 심지어는 문장에 적합한 말은 단 하나 밖에 없다고 생각해 단어 선택에 극도로 신중하다고 말한다.(‘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 204 페이지)

일본 최초(1949년)의 노벨상(물리학) 수상자인 유카와 히데키는 명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다. 고토 히데키는 이론 물리학자들의 그런 각고의 노력으로 시퍼렇게 간 칼날과 같은 날카로운 문장이 완성된다고 말한다.

물론 우려스러운 점도 있다. 그렇게 시퍼렇게 간 칼날과 같은 날카로운 문장은 따뜻하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다.

물론 나는 시퍼렇게 간 칼날과 같은 날카로운 문장은 따뜻하지 않을 것 같다는 내 생각이 뉴턴이 무지개를 프리즘의 색으로 환원함으로써 모든 시정(詩情)을 말살했다는 시인 존 키츠식의 생각과 얼마나 거리가 있는지 알지 못하겠다.

다이앤 애커먼의 ‘휴먼 에이지’를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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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트 피코 아이어(Pico Iyer)란 이름을 들으니 싯다르타와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 궁금해진다. 물론 그는 인도 혈통의 영국 에세이스트일 뿐이다.

그의 ‘여행하지 않을 자유’란 책이 생각을 이끈다. 번역본 제목보다 원제(The Art of Stillness : Adventures in Going Nowhere)가 오히려 강한 뉘앙스를 전한다.

그의 책에 영향을 받아서이겠지만 “그래, 너무 밖으로만 마음을 두었다” 싶으면서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여행지를 안내하는 책들을 들추고 인터넷 기사를 검색하고 있는 내가 보인다.

아이어는 이스터 섬에서 에티오피아코, 쿠바에서 카트만두로 세계 곳곳을 여행했으나 어느 날 사방을 여행하며 만족을 찾는 자신의 행위가 공허한 행위, 즐거움을 찾는 강박이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문제는 그가 수많은 여행지를 찾았기에 그런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싯다르타가 쾌락(왕자로서의 삶)과 고행(뼈만 남았을 정도의 단식 등...) 등을 거칠 만큼 거쳤기에 중도(中道)의 진리를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처럼.

고미숙은 “비움과 채움, 머묾과 떠남의 이중주!”를 말하며 오히려 우리 시대의 유목(遊牧)은 도심 한 가운데가 적당하다고 말한다.(‘로드 클래식 길 위에서 길 찾기’ 25 페이지)

아이어에게 자신이 지금껏 한 여행 중 가장 위대한 것은 내면으로의 여행이라고 한 레너드 코헨의 말과 비교하도록 하는 말이다.

아이어는 내면을 말하고 고미숙은 “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몸은 움직여야 한다.”는 말을 한다.(22 페이지) “출가란 바로 이 가족의 그물망을 벗어나는 것”이란 말도 고미숙의 책에는 있다.

고미숙의 책에 더 마음이 가는 것은 여행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은 아니다.

그러기에 고미숙이 권하는 ‘길 위에서 길 찾기‘는 사색(思索)이고 구도(求道)이고 속박의 그물망을 벗어나는 것인 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다. 여행이 어디 쉬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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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이들을 위하여‘란 부제를 가진 양효실 교수의 ‘불구의 삶, 사랑의 말‘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예술가를 전시주의자 또는 노출증자로 정의한 부분이다.

그에 따르면 전시는 상처를 자랑하는 것이고 노래하는 것이며 즐기는 것이다. 반면 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위니콧은 예술가란 소통하려는 욕망과 감추려는 욕망 사이의 긴장에 의해 추동(推動)되는 사람이란 말을 했다.

위니콧처럼 볼 수도 있고 양효실처럼 볼 수도 있겠지만 굳이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위니콧의 말을 고르겠다.(나는 물론 예술가가 깊은 내막을 알지 못한다.)

사실 양효실의 말대로 예술가가 전시주의자 또는 노출증자라 해도 무조건 드러내지는 않을 것이다. 선택과 배제가 없는 드러냄은 무모하고 소모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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