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91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종묘와 사직 - 조선을 떠받친 두 기둥 규장각 인문강좌 1
강문식.이현진 지음 / 책과함께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조선의 국가 제사 체계에서 가장 격이 높고 중요한 대상은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었다. 종묘와 사직은 좌묘우사(左廟右社) 원칙에 따라 배치되었다. 여기서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은 군주남면(君主南面)이다. 사직은 토지 신인 와 곡식 신인 으로 구성된 말이다.

 

사람은 토지가 없으면 살 곳이 없고 곡식이 없으면 먹을 수 없다. 종묘와 사직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위상이 높을까? 사직이다. 이는 조선에만 있었던 특징이다. 중국에서는 종묘, 사직 외에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사용하는 제단인 환구(圜丘), 땅에 제사지낼 때 사용하는 제단인 방택(方澤)이 더 있었다.

 

중국의 경우 환구, 방택, 사직, 종묘의 순서로 위상이 매겨져 있었다. 사직은 조선이 제후국이었던 관계로 하지 못했던 환구와 방택을 실질적으로 담당했던 제사이다. 토지와 곡식은 전통 시대 국가 경제의 기본이었다. 반면 종묘 제사는 국왕과 혈연적으로 연결된 왕실 선조들을 대상으로 한 사적(私的)인 것이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종묘 제사가 사직 제사보다 더 중시되었다. 좌묘우사는 주례(周禮)’의 원칙이다. 반면 천자(天子) 7(), 제후(諸侯) 5()예기(禮記)’의 원칙이다. 조선은 불천지주(不遷之主)를 적절히 활용하여 오묘 제도를 유지했다. 불천지주(不遷之主)란 친진(親盡: 제사 지내는 대의 수가 다 되는 것)에 이른 국왕의 공덕을 평가한 뒤 공덕이 높아 영원히 옮기지 않기로 결정한 신주(神主)이다.

 

조선 시대 사대부 집안에는 조상의 신주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가묘(家廟)가 있었다. 이를 문소전(文昭殿)이라 한다. 가묘적 성격의 사당인 문소전에서도 왕위에 즉위했던 국왕을 봉안한다는 점에서 종묘와 동일했지만 왕위 계승상의 관계보다 혈연 관계를 중시했다는 점에서 종묘와 달랐다.

 

문소전은 임진왜란때 불에 탄 뒤 중건되지 않았다. 조선 왕실의 신주(神主)는 두 가지였다.(신주는 혼이 기대고 의지하는 곳이다.) 우주(虞主)와 연주(練主)이다. 우주는 뽕나무, 연주는 밤나무로 만든다. 우주와 연주의 모양은 차이가 없다. 글을 쓰는 방식이 달랐다.

 

종묘는 공덕이 뛰어난 불천지주들을 모신 정전(正殿)과 그렇지 않은 신주들을 모신 영녕전(永寧殿)으로 나뉜다. 불천(不遷)의 반대는 조천(祧遷)이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됨에 따라 국가의 모든 체제나 의례가 황제국 제도로 격상되었다. 종묘 제도는 오묘가 아닌 칠묘가 되었다.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 이를 신혼체백(神魂體魄)이라 한다. 신혼(神魂)은 사당에 모셔지고 체백은 능()과 묘()에 모셔진다. 조선시대 국가 의례는 제사 대상에 따라 명칭을 달리 했다. 천신(天神)에게 지내는 것을 사(), 지기(地氣)에게 지내는 것을 제(), 인귀(人鬼)에게 지내는 것을 향(), 문선왕(공자)에게 지내는 것을 석전(釋奠)이라 했다.

 

종묘는 국왕의 선조를 모시는 것이므로 그곳에서의 제사를 향이라 일컫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지만 석전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개 제사 또는 제향 등으로 불렀다. 궁궐의 건물명에는 전(殿), (), (), () 등이 있다. 정전과 영녕전은 전을 쓰고 공신당과 칠사당은 당을 쓴다.

 

배향당이라 불리기도 한 공신당은 해당 국왕과 함께 모신 공신을 위한 집이다. 13949월 한양이 조선의 새 수도로 확정된 후 태조는 같은 해 1025일 한양 천도를 단행했다. 이어 태조는 112일에 직접 종묘와 사직이 들어설 터를 점검한 뒤 다음 날 종묘와 사직단 등의 건립을 담당할 공작국을 설치하라는 왕명을 내렸다.

 

세종대에 집현전(集賢殿)이 설치되고 중국과 우리나라의 고제(古制)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었다. 이에 따라 사직 제도 역시 한층 더 유교적인 예의 원칙에 부합되도록 정비되었다. 1426(세종 8) 6월에 사직의 관리를 전담하는 사직서(社稷署)가 설치되었다.

 

1897년 대한 제국 선포로 사직단도 황제국의 제도에 맞도록 격상되었다. 대한 제국의 출범과 그에 따른 국가 의식의 정비는 외형적인 면에서는 사직의 격을 높여주었지만 실질적인 측면에서는 그 위상의 하락을 초래했다.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원구단(환구단의 다른 이름)이 설치되었고 이로써 사직이 담당했던 하늘 제사의 기능이 원구단으로 환원되었기 때문이다.(187 페이지)

 

일제는 1909년 사직을 사직공원으로 개조하면서 부속 건물들을 철거하고 영역을 크게 축소했다. 사직단 역시 왜란과 호란 등으로 수난을 당했다. 사직단 구역이 조선 전기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사직단과 신실(神室) 등에 대한 지속적 수리, 보수 작업 덕이다.

 

종묘 제사에서 익힌 고기를 바치는 의식을 궤식(饋食)이라 하는 반면 사직 제사에서는 익힌 음식을 바치는 것을 진숙(進熟)이라 한다. 희생(犧牲)은 종묘나 사직에서 함께 쓰인 말이다. 희생은 산 짐승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사직 제사에서도 종묘에서처럼 일무(佾舞)가 거행되었다. 일무에는 문무(文舞), 무무(武舞)가 있다. 조선의 사직 제사에서는 6일무가 거행되었다. 조선 시대 형법 기준서인 대명률(大明律)’에 의하면 사직이나 종묘 등 대사로 규정된 국가 제사에 관련된 물건을 훔치는 자는 반역자로 처벌하는 법률을 적용하여 사형에 처하도록 하였다.(255 페이지)

 

사직단에서 희생 소가 난동을 부리는 일도 있었다. 인조대의 홍서봉은 이 사건을 국왕이 정치를 반성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과 북방 오랑캐를 대비해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 우연이겠지만 이 사건이 일어난 지 약 110 개월만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사직에 도둑도 들었다.

 

사직서에 도둑이 든 사건은 순조대 이후의 위상 변화를 반영한다. 숙종 정조대를 거치면서 의례와 제도의 정비 및 국왕 친제(親祭)의 증가 등으로 크게 강화되었던 사직의 위상은 정조 사후 세도정치가 시작되고 왕권이 크게 약해지면서 숙종 이전으로 돌아갔다. 일반인들에게도 사직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곳이라는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 사회와 그 적들 - 콤플렉스 덩어리 한국 사회에서 상처받지 않고 사는 법
이나미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기시미 이치로의 미움 받을 용기는 진정한 행복은 미움 받을 용기를 갖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진정 행복해지기 위한 필요 조건은 되지 싶은데 어떻든 이 가르침의 핵심은 타인으로부터 미움 받을 것을 두려워 하지 말아야 행복해질 여건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이다.

 

융 심리학자 이나미 박사의 한국 사회와 그 적들에서도 이런 가르침이 있다. 저자는 급작스런 성장의 그림자들 중 가장 심각한 것으로 남과 비교하면서 만들어가는 병적 질투심을 들었다.

 

한국 사회와 그 적들은 한국인들을 힘들게 하는 콤플렉스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극복할 대안을 제시한 책이다. 저자는 분석심리학(융 심리학)에서 말하는 콤플렉스는 열등감과 다른 개념이라 말한다. 그것은 무엇이 모자라거나 넘치는 외적 조건보다 더 깊숙하게,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휘두르는 것이다.

 

콤플렉스는 양면적이다. 병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융 심리학에서 지향하는 궁극의 목적은 내면의 참 자기를 찾는 개성화이다. 개성화란 주변 상황이나 집단적인 흐름 또는 대세에 동조하기보다 참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관심을 갖고 자기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가치대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의 책은 전부 다섯 파트로 구성되었다. Part 1 ’()에 빠진 사람들‘, 2 ’()하지 못하는 사람들‘, 3 ’()난 사람들‘, 4 ’()해진 사람들‘, 5 ’() 받을 사람들등이다.

 

()에 빠진 사람들의 부제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덫에 빠진 한국인들이다.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부제는 그 누구와도 관계 맺기에 서툰 한국인들이다. ’()난 사람들의 부제는 분노의 시대, 화낼 줄밖에 모르는 한국인들이다. ’()해진 사람들의 부제는 어디에서도 위안을 찾지 못하는 외로운 한국인들이다. ’() 받을 사람들의 부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이 행복할 수 있는가?‘이다.

 

저자는 이제는 한()을 마음 속에 품어 두지도 말고 그런 한을 그럴 듯하게 포장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남들이 나 대신 한을 품게 하지도 말며 좀 더 성숙하게 남을 배려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의 콤플렉스 뿐 아니라 내 안의 콤플렉스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21 페이지)

 

그런데 약간 이상한 것은 저자가 우리 사회가 한의 사회에서 욕망의 사회로 변했다고 진단한다는 점이다. ()을 마음 속에 품어 두지도 말고 그런 한을 그럴 듯하게 포장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남들이 나 대신 한을 품게 하지도 말며 좀 더 성숙하게 남을 배려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말은 대세는 그렇지만 그와 다르게 한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보고 하는 말일까?

 

그런 것 같다. 불과 한 세대 만에 한국인의 정서는 180도 달라졌(19 페이지)지만 여전히 드라마에나 현실에나 눈물짓고 울부짖는 불쌍하고 가련한 주인공들은 있다(19, 20 페이지)는 말을 보면 말이다. 저자는 자신이 의식하는 남들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62 페이지)

 

흥미로운 점은 사람은 창조성이 고갈되면 그것을 보상하기 위해 무언가 구매해 텅 빈 마음을 메우려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다.(63 페이지) 저자가 제시하는 한국인의 콤플렉스들은 물질, 허식, 교육, 집단, 불신, 세대, 분노, 폭력, 고독, 가족, 중독, 약한 자아 등이다.

 

이 가운데 교육에 가장 많이 주목하게 된다. 교육은 한국 사회의 모순과 갈등, 불합리를 확대 재생산하는 근거지이다. 우리 사회의 성적 지상주의는 공부를 마음껏 받지 못한 부모 세대들의 좌절감이 관계한다.

 

부모가 재산을 많이 가진 경우 자식들은 영원한 새끼 캥거루로 남으려는 경향을 갖게 된다. 반면 그렇지 못한 부모를 둔 경우 냉소와 무력감, 우울감에 쉽게 빠진다.(71 페이지) 교육에 대한 투자가 모두 병적인 것은 아니지만 과연 어떤 교육을 하는지, 그런 교육을 하는 데 근간이 되는 철학은 건강한지 등을 꼼꼼하게 짚어 보아야 하겠다.(73 페이지)

 

저자는 융 심리학자답게 심리적인 면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준다. 매스 미디어가 아이의 성적을 어머니의 능력과 연결시키고 정보 제공이라며 은근히 사교육을 부추기는 것은 자기 실현이 차단된 어머니들의 좌절감과 소외감을 더 아프게 자극(73 페이지)하며 청소년들이나 성인 존속살해범들의 경우 부모에게서 독립하지 못함으로써 갈등 관계를 맺고 병적인 공생 관계를 유지한다고 보는 것이 그것이다.(75 페이지)

 

저자의 글을 읽으면 자녀 교육은 노후 보장을 위한 보험의 성격을 지님을 알 수 있다. 물론 학력 사회, 학벌 사회에서 대학을 나와야 불이익을 받지 않는 구조도 문제이다. 교육 제도가 합리적인 선진 외국의 한 학생이 어른이 되어 벽돌공을 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는 그 일이 고위 공무원과 급여 면에서 별 차이가 없기에 그럴 수 있는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자식 사랑은 엄밀히 따지면 이기심에 불과하다(78 페이지)고 말하는 저자는 부모의 책임, 바람직한 양식을 주문한다. 발달 심리학적 입장에서 보면 아이들의 도덕 관념은 학교에 들어갈 나이 이전의 양육자의 태도에 따라 결정된다고 한다.(81 페이지) 배려와 도덕심은 부모가 길러줘야 한다.(83 페이지)

 

저자는 투사(投射)를 거론한다. 투사란 상대방에게 자신의 심리적 갈등을 덮어씌우고 자신의 문제는 덮어 버린 채 모든 잘못과 책임을 상대방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서로 남의 잘못만 찾으니 잔인한 적의 공격에 개죽음당하지 않으려면 일단 자기 죄와 잘못을 감추는 것이 상책인 원시 부족의 상황이 되는 것이다.(104 페이지)

 

냉철한 이성과 합리적인 분석으로 자신이 속한 집단에 비판의 화살을 대면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혀 매장당할 것이라는 두려움도 있다.(105 페이지) 저자는 청와대의 비극(대통령들의 비운)을 풍수 때문이 아니라 권력 콤플렉스 탓으로 본다.(110 페이지)

 

권력 콤플렉스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방해하는 콤플렉스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해서 내 소유물로 만들기 위해 어떤 폭력적인 방법도 불사하는 것을 말한다.(107 페이지) 물론 청와대가 들어선 주변은 위압적이고 고립감을 갖게 한다. 개인주의적인 서구에 비해 한국인의 거짓말은 주로 불특정 다수에 의해 더 확대 재생산된다는 특징이 있다. 그 만큼 남의 인생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128 페이지)

 

한국인들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 벌어 남한테 과시하고 자식 인생에 일일이 간섭하며 문제가 생기면 소리 지르고 폭력을 휘두르며 절대 양보하지 않는 이미지로 요약된다.(143 페이지) 한국인의 그런 점은 전쟁과 군사 독재, 무한 경쟁 등으로 정서가 피폐해진 것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한 탓이다.

 

나는 우리 사회가 화를 낼 때도 이성적으로 자기를 표현하고 불필요한 분노는 잘 걷어낼 줄 아는 사회(144 페이지)가 되기를 바란다. 저자는 부모 또는 아버지가 자식들을 죽이고 죽는 사건을 동반 자살이 아닌 동반 살인이라 부른다.

 

저자는 가족이라는 조직에도 역지사지의 덕목은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165 페이지) 이를 보며 하게 되는 생각은 가정이 사회의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점점 거칠어져 속수무책을 실감하게 하는 아이들의 문제를 가정 교육의 부재에서 찾는다.(169 페이지)

 

최근 더욱 그악해지는 청소년 폭력의 뒤에는 어차피 노력해 보았자 인생에 역전은 없다는 자포자기, 하기 싫은 공부를 노예 부리듯 억지로 시키는 부모나 교사에 대한 분노, 돌봐 주고 이끌어 주는 믿을 만한 어른이 없는 세상에 대한 실망감 등이 복합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문제는 교육 제도가 아니라 한국 학부모들의 심성이다.(171 페이지) 한국 사회가 한()의 사회에서 욕망의 사회로 변한 것이 맞듯 한()의 사회에서 분노의 사회로 바뀌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171 페이지)

 

()해 빠진 한국 사회라는 말을 들으니 최근 들은 독친(毒親)이란 말이 떠오른다. 독친이란 자식의 학교 성적을 끌어올리기 위해 자식을 들들 볶는 부모를 말한다. 저자는 중요한 것은 공간이 아니라 마음이라 말한다.(199 페이지) 교육 제도가 아니라 한국 학부모들의 심성이라는 말과 상통하는 말이다.

 

저자는 알콜에 대한 집착은 어머니의 젖을 빨 듯 술잔에 탐닉하는 퇴행적 모습일 수 있다고 말한다.(207 페이지) 저자는 한국은 경제적으로는 선진국에 다가섰지만 무의식 속에는 여전히 저개발 국가의 추억과 습관이 남아 있어 누군가 교주가 되어 광기 어린 질주를 하면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와 같은 혼란과 폭력적 상황에 빠질 수도 있으니 항상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224 페이지)

 

무속과 점술에 의지하는 사람들편에서 저자는 점복(占卜)을 구체적으로 믿고 우왕좌왕하는 것은 문제지만 미래를 상상해 보고 지금 상황을 어떤 방식으로 풀어나갈지 고민하는 미래 지향적 사고 방식 자체가 모두 나쁜 것은 아니라 말한다.(231 페이지)

 

꼭 특정 종교를 믿지 않더라도 불안한 미래를 한정된 자기의 이성과 개인적 능력에만 기댈 것이 아니라 유일신이나 도(), 우주의 원리와 조응하면서 보다 의식을 확장시키려는 의도로 여긴다면 그것 또한 종교성일 수 있다.”(231, 232 페이지)

 

마음이 불안하고 허랑(虛浪)해질수록 자신의 무의식이 보내는 메시지를 잘 들아 보라는 분석심리학의 메시지와 주역의 기본 철학(지금 승승장구하면 잘 나간다 해도 그만큼 떨어질 가능성이 많다는 점을 잊지 말고, 지금 바닥에서 헤매고 있다면 앞으로 올라갈 일만 남은 것이니 희망을 잃지 말라는 것)은 일맥상통한다.(233 페이지)

 

확실한 것은 귀신과 사후 세계에 대한 관심은 인류가 죽음을 의식한 이후 시공간에 관계 없이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마음의 원형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235 페이지) 저자는 귀신을 자기 마음이 외부로 투사된 존재로 본다.

 

저자는 유연하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 중에 귀신과 대화하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일반인들이 혼령을 만났다고 해서 꼭 비정상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238 페이지)는 말을 보라.

 

나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말도 읽을 수 있어 좋았다. 시작(始作)에 약한 사람들(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 좀처럼 시동이 걸리지 않아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자세히 보면 우선 강박적이고 완벽주의적인 경향을 자주 보인다(253 페이지)는 말이다.

 

남의 평가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실현 가능한 목표부터 실천하고 낯선 상황일수록 만나는 모든 이가 내 스승이라고 생각하라는 가르침에 유의하자. 아주 작은 변화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실천하면 한 땀 한 땀이 모여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개인이 변하면 사회도 변한다.(254 페이지)

 

저자는 남들처럼의 덫에서 벗어나라며 창조적 재능이 반드시 성공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고 성공한 사람들이 반드시 굉장히 창조적인 것도 아니라 말한다.(262 페이지) 저자는 수십 년 된 옷과 머플러를 복고 패션이라며 자랑스럽게 입고 다닌다고 말한다.(264 페이지) 자신이 좋으면 그 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분노와 억울함, 용서는 감정 반응이지만 그 반응을 해결하는 몫은 많은 부분 이성이다. 감정만 과잉되고 이성이 작동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저지른 잘못에 더해 자기 자신을 더 못 살게 구는 경우도 생긴다. 용서하는 것은 상대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 속의 독소를 빼고 더 행복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한 나만의 작업이다.(270 페이지)

 

저자는 한국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국인에게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면 이런 책도 쓰지 않았을 것이라 말한다.(303 페이지) ‘한국 사회와 그 적들은 갑질에 대한 관심으로 읽은 책이지만 그보다는 한국인들을 괴롭히는 12 가지 콤플렉스를 다룬 책이어서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 - 갑질 공화국의 비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약육강식, 적자생존, 우승열패로 대변되는 힘의 관계는 갑과 을로 나뉜다. 갑질은 바로 그 갑이 저지르는 못된 횡포를 말한다. 우리 사회의 갑들은 정치인, 고위 공직자, 재벌 등이다. 하지만 갑질은 상대적이어서 힘센 사람 앞에서 을인 사람이 자신보다 약한 사람 앞에서는 갑으로 군림할 수 있다.

 

저자 강준만은 갑질을 우리가 옳거나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것들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본다. 저자는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스템은 신분 상승을 이룰 수 있는 코리안 드림의 토대이지만 동시에 사회적 신분 서열제와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왜곡된 능력주의' 즉 갑질이라는 실천방식을 내장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문제는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은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스템은 각개전투 사회의 시스템이다. 요즘에는 각자도생이란 말이 더 자연스럽다. 저자는 진보가 힘주어 주장하는 개천에서 용이 나는 사회가 그들이 온힘을 다해 비판하는 낙수효과의 사회적 버전임을 깨닫지 못하거나 애써 외면하고 있다고 말한다.

 

개천에서 용이 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용과 미꾸라지를 구분해 차별하는 신분 서열제를 깨거나 완화하는 동시에 개천 죽이기를 중단하고 개천을 우리의 꿈과 희망을 펼칠 무대로 삼자는 뜻이다. 우리에게는 6.25 심성(心性)이란 것이 있다. 한국전쟁이라는 비인간적인 참사를 겪는 동안 우리 국민들이 몸에 익힌 극단의 생존경쟁, 물질만능주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개인주의 등을 말한다.

 

갑질은 6.25 심성이 구현된 것이다. 물론 갑질은 한국인의 전투성을 키워준 동력이었다. 한국을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압축성장을 하게 한 힘이 한국인들을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모욕사회이다. 남에게 모욕을 주는 걸 자신의 인정욕구 충족이나 존재감의 확인수단으로 이용하는 사회인 것이다.(42 페이지)

 

한국은 우리가 개인주의 사회로 알고 있는 서구 사회보다 공동체성이 훨씬 취약한 나라이다. 한국 사회는 조선시대보다 더한 계급사회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철저한 서열의식과 귀천 관념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라는 의미이다. 저자는 나는 모욕을 견디는데 너는 왜 못하냐며 내부 고발자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약한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사회를 보며 이는 인간의 문제라기보다 구조와 시스템의 문제라 말한다.(59 페이지)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우리 사회의 온갖 불합리와 모순을 해결하는 것은 참으로 난제 중의 난제이다. 이런 불합리와 모순은 상당히 폭력적이고 원초적인 양상으로 드러난다. 이성은 없고 떼 쓰고 과시하고 일그러진 의식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양상을 보면 어린아이들의 막무가내를 보는 듯 하다.

 

'내가 누군지 알아?'란 말이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이는 '너 따위가 감히'를 핵심으로 하는 권력 담론이자 강자가 약자를 짓밟는 갑질 언어이다. 저자는 나름으로는 제법 성공을 거둔 이들이 자신을 개천에서 난 용으로 간주하는 가운데 우리들이 그들이 기고만장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열심히 조성해오지 않았는지 묻는다.

 

그리고 우리는 자기 정체성을 오직 남과의 서열관계 속에서만 파악하는 삶을 살아왔다고 말한다.(84 페이지) 사실 속물적 과시와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한 이상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의 신분이나 지위를 표현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 사회는 조선시대보다 더한 계급사회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철저한 서열의식과 귀천 관념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라는 의미이다.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꾼 1897년경 매관매직(賣官賣職)은 국가 시책이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를 폐지해버린 탓도 있었지만 황실은 세원(稅源)이 없어 벼슬을 팔아서라도 국고를 충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결과 탐관오리들만이 득실거렸는데 벼슬을 돈 주고 샀으니 본전 뽑고 이익까지 남겨야 했음은 너무도 뻔한 사실이다. 갑질은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라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오늘날 양반 족보는 학력, 학벌 증명서로 대체되었다.

 

저자는 능력주의는 허구이거나 사기(詐欺)라 말한다. 능력은 주로 학력과 학벌에 의해 결정되는데 고학력과 좋은 학벌은 주로 부모의 경제력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서울대 합격률은 아파트 가격과 상관관계를 보인다.

 

저자가 문제 삼는 것은 모든 능력을 세습되지 않은 재능과 노력의 산물로 보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격차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즉 능력주의이다.(145 페이지) 우리 사회의 교육은 온갖 차별과 서열주의의 시발점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회로부터 배운 그런 악덕들을 학생들이 되풀이하는 것이다.

 

한국의 학벌 카스트는 상징자본은 물론 돈과 힘까지 독식할 수 있는 근거가 되니 어떤 면에서 인도보다 뒤떨어진 카스트제도를 갖고 있는 셈이다.(161 페이지) 저자는 지위(地位)의 본질은 비교라 말한다.(191 페이지) 한국인들이 자부심이 낮은 이유는 이 때문이다. 저자는 한국인들은 남의 시선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라 말한다. 좁은 땅에서 동질적인 사람들이 몰려 살다보니 갖게 된 인정 욕구 때문이라는 것이다.(211 페이지)

 

저자는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 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삶을 추구하는 상상력과 용기, 이것이 바로 지위 불안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라 말한다.(222 페이지) 학력, 학벌 차별처럼 외모 차별도 갑질의 하나이다. 대기업의 중소 기업 착취도 그렇다.

 

미생(未生)’을 통해 널리 알려진 비정규직에 대한 푸대접, 차별 등도 그렇다. 우리나라도 서구 선진국들처럼 고용 안정성이 없는 비정규직이 돈을 더 받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272 페이지) 저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여전히 재벌을 사랑하는 것을 스톡홀름 신드롬에 비유한다.

 

우리나라 재벌 기업들은 막대한 이익을 남기면서도 고용확대를 주저하고 오히려 사내 하청을 통해 비정규직 남용을 주도한다. 하도급 기업에 대해 납품 단가 후려치기, 기술 빼앗기 등 불공정 거래를 일삼으며 이익의 공유를 거부한다. 중소기업 영역과 심지어는 골목상권까지 침투하고 있다.

 

저자에 의하면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사는 나라는 경쟁 과잉이지만 강자들()이 사는 나라는 경쟁 과소이다.(245 페이지) 관피아, 전관예우, 담합 등을 보라. 저자가 말했듯 한국은 시장경제를 제대로 시행하지 않는다. 기본적인 공정 경쟁조차 구현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245 페이지)

 

우리 사회는 패자부활전이 없는 사회가 되었다. 그리고 승자 독식 사회가 되었다.(276 페이지) 승자 독식 사회란 개천에서 용 나는 시스템이다. 저자는 대학 등록금 폭등의 원인이 대학 서열화에 있는데 그것을 오히려 강화하면서 억울하면 너도 대학 가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라 말한다.

 

저자는 진보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 성찰의 필요성을 왜 우리만 자기성찰을 해야 하느냐?”, “왜 적을 이롭게 하느냐?“는 항변으로 대체하는 멘털리티라 말한다.(280, 281 페이지) 한 사교육 관계자는 가진 사람들이 부를 세습하는 장치들이 너무 단단하다, 공부 잘 한다고, 명문대 나온다고 중산층으로, 그 이상으로 올라가긴 쉽지 않다, 대학 잘 가는 것은 경쟁력 요소의 하나일 뿐 그리 큰 경쟁력은 아니라는 말을 했다.(318 페이지)

 

온갖 독설을 하며 공부를 독려하던 이의 말이다. 목숨 걸고 공부해도 소용 없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고착화 사회, 변화(계층 상승)의 가능성이 없는 정체 사회가 되었다. 이게 가장 큰 갑질이 아닐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사회를 우리 나라를 설명하는 데 쓸 수 있는데 문제는 그런 가혹한 투쟁이 을에게만 해당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제대로 보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긍정하는 것이라 말한다.(336 페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 - 한국적 페미니즘, 한국적 포스트모던 영성
이은선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1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은선의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는 한국 유교의 종교성을 여성들의 삶, 리더십 등과 연결시킨 책이다. 1부 다른 유교, 2부 다른 기독교로 구성된 책에서 저자는 영정조 시대의 여성 성리학자인 임윤지당(任允摯堂: 1721 1793)과 강정일당(姜靜一堂: 1772 1832)의 삶과 사상을 조명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제시한다.

 

강정일당은 지극한 종교인, 수행자의 삶을 살았다. 남편에게 삶에서 도를 추구하는 삶이 가장 귀중한 일임을 일일이 강조하고 부귀나 생계, 과거 시험 등이 결코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음을 누누이 상기시켰다.

 

저자는 이런 의식이야말로 오늘날 어떤 현대의 페미니스트 주체의식보다 더욱 견실한 주체의식이라 규정한다.(48 페이지) 저자는 유가적 도()의 특성이 성인지도(聖人之道)의 추구라고 보면서 그것이 단순히 어떤 정치경제적 의미나 윤리, 도덕적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배움을 통해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깊은 내재적 초월성과 종교성을 포함하는 것으로 본다.

 

또한 유교 종교성은 우리의 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공적 인간으로서의 자각을 불러일으킨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한국 유교 영성과 종교성이 오늘날 여성들에게 포괄성과 지속성의 영성을 준다고 본다.

 

저자는 가정의 안녕을 기초로 해서 정치와 문화와 경제를 통괄해서 보는 안목, 드러나는 일순간의 효과에 좌우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노력하여 뜻을 실현하고자 하는 결심, 자신의 가정이나 사적 울타리를 넘어서 세상의 만물에 마음과 관심을 두는 포괄적 배려심과 생명적 책임감 등의 덕목과 배려심이야말로 오늘 여성들에게도 긴히 필요하고 그것을 강정일당과 같은 유교 여성들의 삶에서 배울 수 있다고 여긴다고 말한다.(53 페이지)

 

1부의 두 번째 장인 한류와 유교 전통 그리고 한국 여성의 살림 영성은 우리가 어떻게 유교 전통에서 새롭게 배울 수 있고 어떻게 유교 문명과 기독교 문명이 서로 대화할 수 있는지 페미니스트의 시각에서 물은 글이다.

 

저자는 유교의 내성외왕(內聖外王),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 등의 가르침을 공과 사, 이념적 삶과 물질적 생활, 타자와 자아 등 오늘날 여성들도 포함해서 현대인들이 첨예하게 느끼는 삶에서의 근본적 간극들을 매우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방식으로 조화시키려 한 노력으로 본다.

 

내성외왕은 안으로는 성인(聖人)이며, 밖으로는 임금의 덕을 함께 갖춘 사람이라는 뜻으로, 학식과 덕행을 모두 지닌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하학이상달은 낮고 쉬운 것을 배워 깊고 어려운 것을 깨달음을 이르는 말이다.

 

저자에 의하면 성적 차별과 무관한 유교의 태극론적 우주관이 리()의 현실적인 활동을 위해 다시 음과 양의 우주론적 기()의 원리를 받아들여 형이상학적으로 존재의 구별과 차별을 말하기 시작했다.(60 페이지)

 

현실의 인간 삶에서 여성과 남성의 구별이 차별이 되었고 종법(宗法) 질서는 지독한 남성 중심의 가부장주의의 위계질서가 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유교 성속 체계의 사각지대이다. 이일분수(理一分殊)의 세계관을 가졌지만 현실에서는 속()의 전 영역을 거룩의 영역으로 화()하게 하기 위해 출발점을 필요로 했을 것이고 그 출발점을 모든 세속 가정의 적장자 가부장으로 본 것이라고 이해(61 페이지)하는 저자는 조선 시대 여성들의 삶도 또 하나의 성화(聖化)의 과정으로 본다.(62 페이지)

 

()는 하나이지만 여럿으로 나뉘어져서 다르다고 직역할 수 있는 이일분수(理一分殊)란 모든 리는 태극이라는 하나로 귀결되며 모든 만물에는 각자의 태극이 존재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주희(朱熹) 철학의 핵심이다.

 

저자는 오늘날 전 세계로 번지고 있는 한류의 바람과 그 밑바닥에 오랜 기간의 유교적 살림의 과정에서 다듬어진 한국 여성들의 살림의 영성과 리더십이 녹아 있다고 생각한다.(63 페이지) 그런데 이 시점에서 의문이 든다. 유교 이전에 있었던 장구한 세월의 비유교적 가치관들은 오늘날의 한국 여성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이다.

 

저자는 유교 전통 여성들보다 오히려 공적 영역에서 일하는 현대 여성들이 오히려 사적 영역에 갇혀 있다고 말한다. 유교 여성들은 당시 하나의 공적 영역이기도 했던 가계의 유지와 계속을 위해 모자 관계를 극진히 일구었다. 반면 공적 영역에서 일하는 현대 여성들은 대부분 사적 이익을 위해 일하기 때문에 사적 영역에 갇힌 것이라는 논리이다.(67 페이지)

 

저자는 사기종인(舍己從人)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사기종인이란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남이란 공적 영역이라 할 수 있다.) 당연한 논리이다. 문제는 그런 대의를 위해 분투하는 여성들에게 보상책이 주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다.

 

저자는 한국 유교의 사기종인의 종교성과 영성을 영적 종교성, 세속적 종교성, 탈세속적 종교성 등으로 부른다. 저자는 생명을 낳고 살리고 보살피면서 공적 영역을 가능하게 하는 여성의 역할을 극진한 의미의 주체성의 표현으로 본다.(69 페이지)

 

저자는 사기종인의 리더십이 어짊을 구해 성인(聖人)됨을 이르는 구인성성(求仁成聖)의 리더십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74 페이지) 저자는 원망은 곧음으로 갚고 덕은 덕으로 갚으라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며 그것이 사기종인과 구인성성의 덕을 실행하는 것이 현실에서 얼마나 왜곡될 수 있으며 자기 부정과 굴종, 억압의 덫이 되는지 잘 알려준 것이라 말한다.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의 세계는 인간 문화 자체가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가족과 같은 인간적 토대가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관건은 누가 사기종인과 구인성성의 도를 행하는 사람이 되는가, 이다. 저자는 이는 단순히 정치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안목만으로는 되지 않으며 훨씬 더 궁극으로 밀고 가서 존재론적으로 또는 영적으로 탐구해야 할 일이라고 본다.(82 페이지)

 

저자가 제안하는 것은 성()과 속()을 분리하는 종교로는 할 수 없는 것을 성과 속이 급진적으로 하나됨을 지향하는 유교적 도의 가르침으로 한 번 진지하게 살펴보자고 말한다. 저자는 맹자가 말한 무군(無君)을 공적 영역의 훼손과 함몰에, 무부(無父)를 가족적 삶의 해체에 견준다.(87 페이지)

 

저자는 오늘날 서구 기독교 여성신학자들이 가부장적 전통을 여성해방적으로 재해석하여 다른 관계를 맺고 있듯 유교 진영에서도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본다.(88 페이지)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유교의 포스트모던적 종교성이다. 저자는 서구적 포스트모던의 탐색과 유교의 궁극 이해가 잘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선에 비해 여성 인권 면에서 앞섰다는 평가를 받는 고려 시대가 당면했던 문제로 혼인이 성립하면 신랑이 신부의 집에서 일정 기간 거주하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을 든 저자는 마르티나 도이힐러의 논의에 의거해 너무 단기적인 과정과 정태적인 개별 대상에 대한 집중에서 벗어나 좀 더 긴 기간에 대한 장기적인 전망과 역사의식을 가지고 판단하면 다른 측면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남귀여가혼의 문제점은 여자 집에서 혼수를 마련하고 사위를 거주시켜야 하는 제도였기에 실제 상황에서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집안의 여성들은 버림받을 위험에 노출된다는 점이고 도이힐러의 논의란 조선 사회에서 16세기 중반과 17세기 후반의 큰 인구 증가로 효율적인 식량 공급을 위해서 토지가 더 이상 작게 나뉘어서는 안 되었기에 출가한 딸에게까지 상속을 해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너무 여자와 남자의 대결 구도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91 페이지) 저자는 모든 역사적 추세를 부동적이고 진화가 없는 것으로 파악하는 역사의 정태주의, 역사에서 오직 끊임 없는 변화만을 보고 그런 변화의 기저에 있는 질서와 역학 구조, 방향 등을 무시하는 역사 상대주의를 모두 배격하고 장기간에 걸친 역사적 경험을 실증적으로 살펴보면 거기에는 분명 뚜렷한 포괄적인 사회발전의 방향과 구조가 드러난다고 역설한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92 페이지)

 

1930년대에 주로 활약했던 엘리아스는 1970년대 아날학파에 의해 재발견된 이후 빛을 보았다. 아날 학파는 사건들로 시끄러운 역사의 표면 아래에서 거의 무의식과도 같은 평형들을 밝혀냈다. 즉 시원으로부터의, 그리고 시원으로의 목적론적 과정이 아닌, 오랜 시간 동안의 평형 뒤에 찾아오는 급격한 변환의 모델을 사용함으로써 변증법적 역사 철학의 패러다임을 파기시켰다.(이정우 지음 담론의 공간’ 146 페이지)

 

시원으로부터의, 그리고 시원으로의란 말을 들으니 베르그손이 거부한 기계론과 목적론이 생각난다. 엘리아스는 유럽인들의 삶의 변화를 문명화 과정으로 보았다. 이에 영감을 받은 저자는 조선조(朝鮮朝)가 성립한 이래 유교적 예()를 국가 삶의 전 영역으로 확산시키고자 한 조선의 예치(禮治) 노력이 조선 사회를 유교화해 갔고 그 과정 안에 여성들의 삶과 살림살이도 포괄되었다고 말한다.(92 페이지)

 

저자는 조선조 이전에는 여성들이 문화의 각 분야에서 그렇게 폭넓게 활동한 적이 없었다는 한국 여성사 연구를 소개한다.(수긍할 수 있지만 여성들의 활동이 기록보다 더 크고 많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란 의문을 전하고 싶다.)

 

저자는 문해력을 갖추고 외국어 성서를 번역하거나 여신도들을 계몽한 조선 여성들을 거론한다. 저자가 말하려는 바는 조선사 이전에 미미했던 여성들의 활동을 감안하면 조선은 특히 여성의 주체적 능력면에서 발전했다는 말이다.

 

저자는 유교화 과정을 단순히 간단한 윤리, 도덕적 차원에서의 예화(禮化: 매너화) 과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성화(聖化)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저자가 말하는 성화란 성과 속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두 영역을 서로 깊이 연결시키는 것이다.

 

저자는 유교를 가장 적게 종교적이면서도 그 안에 풍부한 영적 추구와 실천적 수행의 차원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96 페이지) 물론 저자가 말했듯 공자 자신도 유교 가부장주의에 갇혀 있었다.

 

유럽에 가서 서양 지도교수로부터 명나라의 신유교 사상가 왕양명을 소개받고 단번에 빠져들었다는 저자(85 페이지)는 체()와 용(), (), (), 안과 밖의 하나 됨을 훨씬 강조하는 양명은 대학 팔조목의 모든 공부가 결국 하나를 이루는 것이며 결코 안팎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한다.(121 페이지) 팔조목이란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 격물, 치지, 성의, 정심이다.

 

저자는 5내가 믿는 이것, 한국 생물(生物) 여성정치와 교육의 근거에서 한나 아렌트가 19세기 부르주아 제국주의로부터 파생된 20세기 전체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원리로 드러내고자 한 것이 탄생성의 원리라 말한다. 탄생성의 원리란 오직 태어남에 근거해서 귀한 존재이고 존엄한 존재임을 말한다.

 

2부 다른 기독교의 1한국 천지생물지심의 영성과 기독교 영성의 미래에서 저자는 오늘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실리주의와 공리주의, 경제제일주의는 경제라는 하나의 원리에 의해서 삶의 다른 모든 차원이 무시되고 억압되는 것으로 서구적 근대 문명의 물질주의와 깊이 관계되어 있고 그 문명의 토대가 되는 기독교 절대주의와 거기서 실체론적으로 굳어진 기독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말한다.(179, 180 페이지)

 

저자는 여성신학자로서 우리 시대의 물음을 위해 유교와 대화하려는 이유는 유교의 보편성과 인간주의 때문이라 말한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탈세속적이거나 선험적인 방식이 아닌 보편과 다원성, 이곳, 수행의 인간성 속에서 답을 찾는 유교의 비근한 특성이다. 저자는 서구 전통의 배경에 있는 기독교 영성의 초월 신관과 실체론적 세계관을 신유교의 내재 신관과 생명 유기체적, 역동적 사고와 밀접히 만나게 한다면 생명 경시와 공동체 파괴의 인류 문명적 난제를 푸는 데 좋은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185 페이지)

 

책의 중요 부분은 24포스트 휴먼 시대에서의 인간의 조건5장 한국 교회와 여성, 그리고 인류의 미래이고 핵심적인 장은 4장이다. 이 장은 유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다룬 장이다. 저자는 유교 전통을 하나의 특별한 종교적 전통으로 보며 거기서 여성들이야말로 그 유교적 영성을 아주 잘 체현하면서 살아왔다고 본다.(281 페이지)

 

유교 영성의 핵심은 이 세상의 세간적 삶에서 도를 이루려는 것이다. 유교 전통 사회에서 여성들의 삶은 이 세상의 온갖 살림살이를 맡아오면서 그 유교적 삶을 살아온 경우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아가 신이 되고 원리가 되고 법이 되는 서구 근대성이란 유()의 사고를 극단적으로 펼친 결과라고 생각한다.(283 페이지)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은 무()의 사고이다. 저자는 사기종인 극기복례, 구인성성 등을 유교적 무의 세 가지 방식으로 본다. 이 세 덕목은 서구 근대주의가 빠져들기 쉬운 자아 절대 의의 유()의 언어에 대한 대안으로서 유교적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의 무()의 언어이다.(298 페이지)

 

물론 전통 사회에서 이 세 언어는 한편으로 여성들에게는 혹독한 억압의 언어였고 오늘날에도 그렇게 긍정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저자는 여성들도 도덕적 주체성을 세우는 일을 회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흥미로운 점은 여성적 사기종인, 여성적 극기복례, 여성적 구인성성이란 말이다.

 

저자는 모든 포스트휴먼적 논의에서 나오는 관계성의 의미나 익명성의 의미 같은 것들이 유교 전통, 특히 거기에서의 여성들에 의해서 실행된 유교적 삶 속에서 이미 잘 녹아 있다고 본다.(303 페이지)

 

저자는 맺는 말에서 기독교 성경의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이 동시에 전하는 수로보니게(가나안) 여자의 믿음의 이야기를 언급한다. 귀신 들려 괴로워하는 딸을 고쳐달라는 여자의 이야기로 예수가 그녀가 이방인이라는 이유를 들어 아이들을 먼저 먹여야지 개들에게 빵을 던져줄 수 없다는 말로 거절하자 여자는 개들도 주인의 상 아래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얻어먹는다는 이야기로 예수를 굴복시킨다는 내용을 갖는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뜻을 꺾고 승복한 예는 이것이 유일하다. 여인에게 승복했다는 점이 중요한데 그녀는 다름 아닌 어머니이다.(311 페이지) 저자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속된 것을 거룩으로 선포하는 하나님의 창조 사건, 말씀 사건, 언어 사건이 계속되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그것은 그리스도 영역의 확장이고, 한 청년 예수가 그리스도로 선언되는데 그치지 않고 이방여인과 온 피조물이 그리스도로 선언되는 것을 고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필요한 것은 변화이고 대화이고 질적 도약임을 알게 하는 장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난장
홍성담 지음 / 에세이스트사 / 2017년 4월
평점 :
품절


소설(小說)과 대설(大說)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소설은 디테일하고 사적인 이야기를 주로 하고 대설은 스케일 큰 사회적 차원의 이야기를 한다. 그렇다면 대설에 어울리는 형식은 무엇일까? 풍자(諷刺)가 아닐지?

 

이 즈음에서 생각나는 시인이 김수영이다. 김수영은 신랄하게 사회를 비판했고 때로 자신을 까발렸다. 가령 이렇게.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원 때문에 십원 때문에 일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원 때문에...”

 

이 시의 제목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이다. 그럼 풍자(諷刺)라는 단어가 직접 들어간 시가 김수영에게 있을까? 있다. 바로 누이야 장하고나란 시이다. “누이야/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 너는 이 말의 뜻을 아느냐...누이야/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 네가 그렇고/ 내가 그렇고/ 네가 아니면 내가 그렇다..”

 

김수영을 언급하는 사설(辭說)이 길었다.(사설이란 판소리에서 소리와 소리 사이에 가락을 붙이지 않고 이야기하듯 줄거리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이유는 홍성담 화백의 난장의 장르인 대설(大說)의 첫 걸음을 떼어 놓은 김지하 시인이 누이야 풍자가 아니면 자살이다란 산문으로 김수영 시인의 누이야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란 시를 창조적으로 배반(?)했기 때문이다.

 

홍성담 화백. 박근혜를 풍자한 세월오월을 그린 분이다. 세월(世越)이란 바로 세월호 사건(2014416)을 말한다. 세월호 사건을 소재로 한 대설 난장(亂場)’은 한 바탕 시원하고 짜릿하게 썰을 푼 홍성담 화백의 작품이다.

 

홍성담 화백은 난장을 출간한 같은 출판사의 월간지20145월부터 20161월까지 바리라는 작품을 연재했다. ‘난장은 역시 전기한 월간지에 실었던 그의 죽음 뒤엔 음악이 흘렀다를 수정, 보완한 작품이다.

 

특기할 것은 연재 시작과 함께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는 점이다. 정해진 이정표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엄청난 사건이 터진 이상 어떤 식으로든 작품에 그 사건을 담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가능하다.

 

사건이 터지고 홍성담 화백은 바로 진도 팽목항으로 향했다. 그의 화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단원고 학생도 희생자 가운데 있었다. 작품의 주인공은 28세의 여자 화가 오현주이다. 검은손에 의해서 쫓기면서도 그 검은손의 정체를 쫓는 인물이다.

 

3년의 수감 생활을 거쳐 석방된 그는 어느 날 매복꾼들에게 기습을 당한다. 그 위기에서 그는 매복꾼들에게 사지가 찢겨 죽는 대신 불암산의 큰 바위 절벽에서 투신을 하는 길을 택한다. 1829년에 죽은 처녀귀신인 천무생이라는 어린 귀신이 함께 몸을 날린다.

 

두 사람 아니 귀신은 중랑천 물속으로 떨어지는데 거기에는 투명한 흰 정체의 사람들이 이어가는 긴 행렬을 펼쳐졌다. 흰 정체의 사람들이란 진도 앞바다 맹골수로에서 수장당한 세월호 희생자들로 자신들이 왜 죽었는지를 알지 못해 그 이유를 따지기 위해 청와대로 가는 무리였다. ”그럼, 지금 이 행렬의 목적지가 어딘가?“.. ”청와대.“

 

난장은 마술적 리얼리즘의 색채를 보임에도 직설적이다. 아니 그런 색채를 보이기에 직설적이라 해야 할까? 홍성담 화백은 어릴 때 눈병에 걸린 자신을 위해 정안수 한 그릇을 떠놓고 웅얼웅얼 비나리를 하신 할머니의 심정으로 작품을 썼다고 말한다.

 

작가의 이력에 눈이 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투옥되고 고문당하고 배신당하고 찢긴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런 분이었기에 걸판진 한 바탕 대설을 늘어놓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난장은 자신들을 쫓는 검은손의 정체를 역으로 찾아내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이다. 기이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 검은손의 윗 대가리란 것들이 가진 특성이다. 바로 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미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이 압권이다. ”! 이제 끝났다? 시작도 끝도 없고, 삶도 죽음도 사라진, 중심도 주변도 없는 곳에서, 영원도 찰나도 없는 시간에,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은 지속도 단절도 없이 마냥 존재할 뿐이었다.”

 

여운이 많이 남는다. 현실과 상상이 교차하듯 사회성과 실존성이 교차하는 느낌을 준다. 하기야 죽음을 애도하고 항의하고 난장처럼 풀어내는 것은 사회적인 동시에 실존적인 것이 아닌지? 한바탕 굿을 본 것 같은 마음이 가득하다. 작가에게 경의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91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