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 오늘의 일본문학 6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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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부여된 참혹한 선과 악의 공존은 항상 상황의 지배를 받는 듯하다. 극단적인 예로 ‘살인’을 들 수가 있는데, 누구의 잘잘못을 가리는 과정보다는 언제나 결과에 치중하여 초점이 맞춰지기 마련이기 때문에, 살인자는 항상 '악'으로 판명되고 만다. 법률과 도덕이 정해놓은 사회의 규칙이 살인을 인정하지 않기에, 살인자에게는 어떠한 변명이나 동정도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살인자가 살의를 느끼게 만든 원인제공자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는 뜻일까? 법률이 인정한 신악의 딜레마란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

  요시다 슈이치의 <악인>을 읽은 독자라면 아마도 대부분 비슷한 생각을 하리라 본다. 처음부터 공개되어버린 살인자를 향해 옳다, 나쁘다, 라는 정의를 내리기보다는 그의 행적을 쫓으며 그저 물 흐르듯이 유유히 흘러가는 상황의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저 그런 도시에서 살아가는 그저 그런 인생들의 3류 이야기. 얽히고 얽힌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저마다의 사연들. 때로는 눈물겹게 안타까우면서도, 한 편으론 이해 할 수 없는 사상을 지닌 자들에게는 그렇게 밖에 살 수 없는 걸까, 라는 냉소가 스멀스멀 피어올라와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누구나 악한 면과 선한 면은 동시에 지니고 있다. 남에게 폐를 끼치면서까지 자신의 이득을 취한다면 달리 말할 필요도 없는 '악인'이란 정의에 부합될 것이다. 본서에서 정의 내리고자 하는 주인공이 실제 악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못내 가슴 아플 뿐이다.

  이야기는 어느 평범한 여자가 교살로 살해 되면서 시작된다. 살해 된 채 인적이 드문 고갯길에 버려진 ‘요시노’를 둘러싸고 그녀의 주변을 찬찬히, 마치 카메라가 훑는 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다.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채……. 허영에 들떠 싸구려 인생을 살기는 했으나 요시노 역시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고 친구였다. 철딱서니 없이 설쳐 대다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고 탄식해봤자 이제는 들어줄 상대조차 없는 외로운 신세가 되어버렸다. 사실은 그녀도, 유이치도, 깊숙이 숨겨져 있던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고,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이고 싶었을 뿐이다. 누구나가 그러하듯이…….

  실타래처럼 얽인 사람들의 공생관계 속에서 참다운 '나 자신'의 모습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라는 물음을 던져주는 책이다. <악인>에서 진짜 악인이 누구였는지는 마지막까지 책을 모두 읽은 독자들만이 알 수 있다. 처음부터 범인이 누군지를 친절히 알려주고는 있지만, 중반까지는 설마,하는 의혹 속에서 긴장해야 했다. 추리 소설답게 흥미진진하게 사건을 풀어가는 형식이지만, 어쩐지 <악인>은 재미보다는 휴머니즘을 더욱 강조한 듯 보인다. 타인에게 정의 내려지는 개인의 본성과 은밀한 내면, 들추어내면 낼수록 더욱 신비하고 아리송한 인간의 마음들. 깊은 철학까지 논하지 않더라도 <악인>을 통해 가슴 깊이 요동치는 깊고 깊은 인간이라는 심연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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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소믈리에 - 쇼킹발랄 에디터 미미리의 러브&와인 도전기
미미리 지음 / 한스앤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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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고나지 않은 이상, 대부분 사람들의 삶이 초호화 럭셔리는 되지 못 한다. 그 흔한 명품 한번 가져보지 못한 채 명품관 앞을 서성이기만 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할 것이다. 하지만 취향만큼은 럭셔리이고 싶기에 서양 꽃 미남 계보에 열광하거나, 최신 트렌드를 줄줄이 꿰고, 적당한 한도 내에서 수준 높은 문화생활을 즐기고 싶어 한다. 비록 싸구려 와인이 취해 해롱댈지라도 소주가 아닌 와인이라는 사실에 만족하면서 말이다. 여자들의 로망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그녀들의 수다는 언제나 동일하고 취향 역시 하나의 목적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우유 빛 피부의 아폴로 신과의 태양빛 로맨스, 배경이 이탈리아나 그리스의 휴양지로 옮겨가 와인 한 잔을 기울이고 있으면 금상첨화. 어디까지나 상상이다. 상상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분배된 자유의 법칙이니까.

  <러브 소믈리에>는 나처럼 공상을 즐기는 엉뚱한 노처녀의 이야기다. 아직 내 나이가 20대 중반을 달리고 있기에 노처녀의 범주에 포함된 것은 아니지만, 지금껏 지독스러울 만치 연애 복이 없는 것을 보면 절대 남 일 같지가 않기에 나도 서서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눈물을 머금어 보지만, 현실은 가혹하다.) 글쓴이가 잡지사 에디터이기에 여성들의 취향을 너무도 잘 아는 듯하다. 일에 치여 분주한 일상에 쫓기다 보면 어느덧 결혼 적령기를 놓쳐 버리게 되는데, 문제는 나이가 들수록 연애의 기회는 현저히 줄어들고, 결혼 역시 더욱 더 멀어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여자의 나이는 남자의 나이와 점점 더 획기적인 반비례를 이룬다. 끔찍한 참상을 이겨내기 위해 적당한 취미 생활로 와인을 즐기면서 미미양의 통통 튀는 연애와 와인 스토리가 펼쳐진다.

  간단히 요약해 이 책의 장점은 잠들기 전 편안하게 읽기에 좋고, 내용이 매우 쉬우며, 유머러스하게 사랑과 와인을 음미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만남에 얽힌 짧은 에피소드와 와인에 대한 짧은 설명이 이어진다. 와인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초보 여성 독자들에게 쉽게 어필 할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큰 미덕이다. 단점이라면 책이라는 특성에 부여되어야 할 깊이감이 상당부분 결여되어 있다는 점. 여성지의 짧은 기사를 읽는 듯 금방 훑어 내릴 수 있기에 특유의 가벼움과 다소의 유치찬란함이 반짝반짝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연예인 가십에 열광하고, 주변인의 뒷담화를 사랑하며, 화장실과 카페의 수다가 인생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자들이라면 가볍게 읽을 만 하다. 누군가의 시시콜콜한 연애 이야기로 범벅이 된 20~30대 여성들이라면 친구의 수다에 동참하는 기분으로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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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집
전경린 지음 / 열림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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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로부터 자식에게 전가되는 책임의 무게는 막중하다. 아직 부모가 되어보지 못해 부모의 심정을 100% 이해할 수는 없다. 다만 나는 내 부모님의 딸이기에 전적으로 자식의 입장에서 이 글을 서술할 수는 있다. <엄마의 집>에 등장하는 미스 엔의 의젓한 딸 호은과 나는 놀랄 만큼 비슷한 입장으로, 부모가 이혼 한 가정의 딸이라면 대부분 겪는 극심한 정신적 타격과 사회적 불이익까지 감당해야 했다. 부모가 이혼한 경우 대부분의 딸은 다소간의 애정 결핍을 보이고, 누군가에게 내색하지 못하는 혼자만의 성에 갇혀버리게 된다. 엄마에게도 속하지 않고, 아빠에게도 속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중립의 입장. 또래에 비해 상당히 조숙한 정신세계를 지니게 되고, 힘겨운 아르바이트로 어린 나이에 물질이 주는 풍요와 아늑함을 동경하게 됨은 물론이다. 아버지가 무능한 경우 상황은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엄마의 집>은 마치 우리집 앨범을 들춰보는 듯 적나라해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이런 특이한 케이스의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일 경우, 대다수 일탈 혹은 타락의 나락으로 빠질 수도 있으나, 또 어떤 식으로 보면 그 반대라고 볼 수도 있다. 상황이 본인을 지배 해 버리는, 옴짝달싹 할 수도 없는 가혹한 운명 속에서 아무리 빠져 나오려고 발버둥쳐도 결국은 제자리 걸음 뿐인 막다른 골목길 같은 삶들. 상황에 지배되지 않기 위해 상황을 지배할 수밖에 없는 노력은 <엄마의 집>에서 호은이 보여준 용기이고 삶의 원동력이 된다. '생은 시어 빠진 레몬 따위를 줄 뿐이지만, 나는 그것으로 레모네이드를 만들 것이다.' 운명에 수긍한 채 날개 빠진 채로 살기 보다는 조금 더 타당하고 조화롭게, 그리고 아름답게 생을 조리해야 하는 법을 배운다.

  어린 시절, 가출한 엄마를 시작으로 '호은'의 삶은 격변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엄마는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니라 둘이서 더 잘 살기 위해, 자신들의 집을 갖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힘들기만 한 시간들을 채워간다. 오직 딸과의 재회라는 결과만을 노리면서 말이다. <엄마의 집>은 소위 말하는 안정적인 가정의 범주에서 벗어난 두 모녀의 이야기다. 아직도 시대를 탓하며 자신의 무능을 정당화하는 고집불통 아버지로 인해 어머니는 가난이라는 벽과 평생을 마주봐야 했다. 그런 아버지를 증오하는 동시에 동정하는 딸 호은, 그녀는 오히려 아버지에게서 냉정히 떠나가 가정을 파괴해 버린 엄마라는 존재를 더 증오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호은이 느끼는 증오의 원천은 그리움이었고, 사랑이라 불렸던 표현의 다른 이름이었다. 결국은 서로의 존재를 찾게 되고 인정하며, 또 이해하게 되는, 핏줄이라는 어쩔 수 없는 연결의 고리가 끝내는 눈물겹다. 그리고 몹시 잔인하다.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가족들. 기존의 '집'을 파괴해 새롭게 잉태된 또 다른 '집'은 과연 누구에게 휴식을 준 것일까? 관계라는 것이 참으로 복잡하고 어렵다. 한때는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힘들고, 또 초라하고 가엽게 느껴지다가도 돌이켜보면 나보다 더 힘들고 고통을 겪었던 또 다른 사람을 볼 수 있게 된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기 위해 더 많은 것을 버리고 포기해야 했던 엄마라는 큰 이름이 있었다. 한 걸음씩 가까워져 보면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세상을 조금 더 밝은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엄마의 집>을 통해, '나'란 아이의 의미, 엄마의 의미, 그리고 가정이라는 의미를 곱씹어 보았다.

평범한 듯 보이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는 누군가의 집을 엿본 소감은? 당연히 진부한 듯 보이지만, 소소한 희망과 감동을 느낀다. 가족이라는 완전체가 지리멸렬하게도 내 삶을 잡아끄는 이상, 촌스러운 자존심과 멍에 따위는 깨끗이 잊어야 할 것이다. 다만 이해와 타협으로 혹은 존중으로 나와 익숙한 타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해하는 한 아픔은 폭력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받아들여 성숙해야 하는 순리인 것이다.' 나는 지금 독자의 입장에서가 아닌, 어느 불안정한 가정의 딸로서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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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에 뉴욕을 담다 - 요리사 김은희의 뉴욕레스토랑 여행기
김은희 지음 / 그루비주얼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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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접시에 뉴욕을 담다」의 저자 ‘김은희’는 전공과는 무관한 요리에 매료되어, 무작정 요리를 배우기로 마음먹고 뉴욕으로 날아간 당찬 여성이다. 영어도 서툴고, 요리에 대한 특별한 지식도 없었지만, 오직 열정 하나 믿고 그 먼 나라로 무대포로 떠나간 것이다. 사람이 오랫동안 꿈을 바라보면 그 꿈을 닮아간다고 했다. 너무 너무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그 일을 위해 땀을 흘리는 모습은 언제 봐도 눈이 시릴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다. 낯선 문화에 섞여 살아가야 한다는 막막함도 그녀에겐 배움의 터전이라는 인식 속에서 모든 두려움이 요리라는 달콤한 희망 속에 사라진 듯 보인다.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여 혼합된 세계 최대의 도시 뉴욕. 살인적인 물가와 위험한 상황이 간혹 연출되는 도시지만, 매혹적이고도 자유분방한 뉴요커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게 만드는 도시이기도 하다. 그래서 누구나 뉴욕을 동경하게 된다. 그곳에서 저자는 C.I.A로 요리유학을 떠났고, 2년에 걸친 체류기간 동안 뉴욕에서 이름 난 멋진 레스토랑을 마음껏 탐방하게 되었다. 뉴욕은 외식 문화가 매우 발달한 도시답게, 식사에 최소한의 격식을 차리며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다. 음식 하나에 정성과 심혈을 기울에 자신의 작품이라는 자긍심으로 중무장을 하여, 세계 각국의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요리사들. 뜨거운 키친 속에서 저자 역시 흥분과 짜릿함, 그리고 힘든 수련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단지 배를 채우기 위해 식사를 한다는 단순 목적을 넘어 공부하는 자세로 모든 음식들을 시식하면서 뉴욕 레스토랑의 정보들을 담았는데, 그 땀방울이 섞인 결과물이「접시에 뉴욕을 담다」로 탄생되었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관심 있는 프랑스 요리와 세계 각국의 요리를 뉴욕식으로 해석한 퓨전 요리들을 경험했고, 배움의 가치를 부여했다. 그녀가 방문한 수많은 레스토랑의 유명 음식들을 구경하는 사이 나도 모르게 입안에 군침이 도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가뜩이나 다이어트 중인 여성이라면 아마도 고통스러움에 몸부림쳐야 할 수고까지 겸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서양 음식들을 좋아하지만 감히 직접 요리해 볼 엄두를 내지 못했던 나에게 각색의 요리들을 직접 만들어 맛보는 그들이 색다른 충격으로 다가왔다.

  풍부한 사진 자료들을 보며 눈도장을 찍는 사이 뉴욕에 가보고 싶은 충동이 드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레스토랑 유명 메뉴에 대한 간단한 레시피를 통해 집에서 직접 요리해 볼 수 있는 실속 있는 페이지도 여럿 포함되어 있다. 요리에 관심이 많고, 맛 기행을 즐기는 분들에게 아주 좋은 정보들이 가득하다. 특히 뉴욕 요리 유학에 꿈을 가지고 있는 분이라면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레스토랑의 위치, 유명한 메뉴들, 그리고 각종 요리 용어들을 정리한 설명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뉴욕 여행을 떠나기 위해 준비하는 분들께도 유용한 정보가 될 것 같다. 책에 실려 있는 메뉴 중 한 가지를 찜한 후, 예약을 하고 그 식당을 방문하게 된다면? 상상만 해도 즐겁다. 큰 용기를 내어 하고 싶었던 일을 직접 해 낸 그녀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다채로운 음식들의 향연 속에서 잠시나마 행복했지만, 내겐 너무 먼 얘기들 같아서 슬며시 주눅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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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에게 물을 (양장)
새러 그루언 지음, 김정아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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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나이 아흔, 혹은 아흔 세 살이 되었을 때를 상상해보고 싶지만, 도무지 상상이 가질 않는다.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하고 있을까? 그 때 쯤이면 이미 난 세상을 등졌을 수도 있고, 멀쩡히 살아 남아 젊은 날을 회상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미래라곤 하지만, 아흔 살의 노인이 처한 환경을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앙상하게 마른 팔, 다리, 거울을 볼 때 마다 나 자신도 믿기 힘들 만큼 초라하게 늙어버린 모습을 한 채 어딘가의 영로원에서 간혹 방문하는 자식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치 제이콥처럼...

  제이콥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많지 않다. 하루 종일 양로원에 누워 주변 사람들과 뒤섞여 살아가는 게 전부다. 몸이 말을 듣지 않게 되자, 간호사들에게 히스테릭한 성질을 부리지만 본심 만큼은 따뜻한 노인이다. 그리고 식사조차 혼자 해낼 수 없을 만큼 노쇄한 상태에서 온 몸의 근육이 퇴화되는 노화조차 막을 수 없는 일이 단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이 살아왔던 지난 과거, 젊은 날의 파란만장했던 기억들을 불러내는 일이다.

  노인들의 눈은 세상의 진리를 거의 다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다. 주름 투성이의 약한 몸이지만,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연륜은 세상 그 어떤 깊이 보다도 무한하다. 제이콥 역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었고, 대공황과 냉정, 스페인 독감까지 경험했다. 한창 서커스가 전성기를 맞이했던 20, 30년대의 청년 시절을 보내면서, 그는 서커스와 인연을 맺게 된다. 대공황으로 미국 경제가 몰락하고 넥타이 부대가 줄줄이 자살을 하던 그 시절, 삶의 위안거리가 없던 서민들에게 세상 모든 시름을 잊게 해 주었던, 화려한 눈속임의 세계 서커스! 결국 모든 것이 거짓이지만, 어차피 진실 역시 거짓의 일부분이기에 사람들은 더욱 더 자신을 감쪽 같이 속여주기를 갈망하는지도 모르겠다.

  <코끼리에게 물을>은 두 가지 관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책이다. 첫 번째는 1920년대라는 시대의 광풍에 휩쓸리던 미국 역사의 한 단락을 '서커스'라는 매계체로 즐겁고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풍부한 사전 조사를 통하여 서커스단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사건들을 대부분 본문에 삽입했다. 실제 서커스단의 사진들과 함께. 그로 인해 소설이라는 완전한 허구의 세계에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했다는 기본 모티브가 완벽하게 성립된다. 두 번째는 한 사람의 일생을 통해서 들여다 볼 수 있는 삶의 풍요로운 의미, 혹은 나이듦의 허무함이다. 주인공 제이콥 노인의 과거 이야기가 이 작품의 핵심 줄거리지만, 젊은 시절 그의 빛나는 모험이 현실에 와서는 한낱 추억거리일 뿐이고, 하루 하루 죽을 날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노년의 풍경과 서글픈 심정을 너무도 생생하고 가슴 아프게 보여준다. 그러나 기억되는 젊은 날의 한낱 추억 거리가 지금까지 그를 버티게 하는 삶의 이유였다.

  소설을 읽는 내내 현장의 모습을 이미지화하여 그려 볼 수 있었는데, 이 소설이 2009년에 영화로 탄생된다니 대단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젊은 시절의 제이콥이 겪는 일도 대부분 과거시제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문장이고, 이 점은 이 작품을 영상화하게 되면 더욱 돋보일 플러스 요인이다. 기차 서커스단의 전성기, 호황을 누렸던 그 시절 화려한 행진을 어서 빨리 영화로 만나보고 싶다.

  또한 이 책이 작가 '새러 그루언'의 남다른 동물 사랑을 실감했다. 책날개 부분에 적힌 짧은 필모그래피를 통해 그녀는 모든 책에 동물을 주인공을 내세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는데, 이번 책의 코끼리 '로지'는 제이콥이 로지를 처음 보고 반했던 것처럼 나 역시 반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너무 똑똑하고, 장엄하고, 아름다운 코끼리 '로지'. 로지가 주는 감동과 놀라움은 마지막을 읽고 난 후에야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동물에겐 거짓이 없다. 사람과 닮은 눈동자, 기분 좋을 때 짓는 미소들... 착하고 순수한 동물들이 재주를 펼치며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건 서커스에서 뿐만이 아니다. '언제나'이다.

  과거로 과거로 가다가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여러번의 여행을 거친 기분이다. 아마도 한 평생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내 나이의 끝이 왔을 때, 인생을 돌아보며 가장 아름다웠노라고, 정말 벅찬 순간이었노라고 말 할 수 있는 순간이 언제였는지를 알게 되었을 때. 그 때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지난 날들을 회상하며 달콤한 추억 속에 잠겨보고 싶다. <코끼리에게 물을>! 내 기억 속에서 아주 아주 특별한 책으로 자리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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