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에게 물을 (양장)
새러 그루언 지음, 김정아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내 나이 아흔, 혹은 아흔 세 살이 되었을 때를 상상해보고 싶지만, 도무지 상상이 가질 않는다.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하고 있을까? 그 때 쯤이면 이미 난 세상을 등졌을 수도 있고, 멀쩡히 살아 남아 젊은 날을 회상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미래라곤 하지만, 아흔 살의 노인이 처한 환경을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앙상하게 마른 팔, 다리, 거울을 볼 때 마다 나 자신도 믿기 힘들 만큼 초라하게 늙어버린 모습을 한 채 어딘가의 영로원에서 간혹 방문하는 자식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치 제이콥처럼...

  제이콥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많지 않다. 하루 종일 양로원에 누워 주변 사람들과 뒤섞여 살아가는 게 전부다. 몸이 말을 듣지 않게 되자, 간호사들에게 히스테릭한 성질을 부리지만 본심 만큼은 따뜻한 노인이다. 그리고 식사조차 혼자 해낼 수 없을 만큼 노쇄한 상태에서 온 몸의 근육이 퇴화되는 노화조차 막을 수 없는 일이 단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이 살아왔던 지난 과거, 젊은 날의 파란만장했던 기억들을 불러내는 일이다.

  노인들의 눈은 세상의 진리를 거의 다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다. 주름 투성이의 약한 몸이지만,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연륜은 세상 그 어떤 깊이 보다도 무한하다. 제이콥 역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었고, 대공황과 냉정, 스페인 독감까지 경험했다. 한창 서커스가 전성기를 맞이했던 20, 30년대의 청년 시절을 보내면서, 그는 서커스와 인연을 맺게 된다. 대공황으로 미국 경제가 몰락하고 넥타이 부대가 줄줄이 자살을 하던 그 시절, 삶의 위안거리가 없던 서민들에게 세상 모든 시름을 잊게 해 주었던, 화려한 눈속임의 세계 서커스! 결국 모든 것이 거짓이지만, 어차피 진실 역시 거짓의 일부분이기에 사람들은 더욱 더 자신을 감쪽 같이 속여주기를 갈망하는지도 모르겠다.

  <코끼리에게 물을>은 두 가지 관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책이다. 첫 번째는 1920년대라는 시대의 광풍에 휩쓸리던 미국 역사의 한 단락을 '서커스'라는 매계체로 즐겁고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풍부한 사전 조사를 통하여 서커스단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사건들을 대부분 본문에 삽입했다. 실제 서커스단의 사진들과 함께. 그로 인해 소설이라는 완전한 허구의 세계에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했다는 기본 모티브가 완벽하게 성립된다. 두 번째는 한 사람의 일생을 통해서 들여다 볼 수 있는 삶의 풍요로운 의미, 혹은 나이듦의 허무함이다. 주인공 제이콥 노인의 과거 이야기가 이 작품의 핵심 줄거리지만, 젊은 시절 그의 빛나는 모험이 현실에 와서는 한낱 추억거리일 뿐이고, 하루 하루 죽을 날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노년의 풍경과 서글픈 심정을 너무도 생생하고 가슴 아프게 보여준다. 그러나 기억되는 젊은 날의 한낱 추억 거리가 지금까지 그를 버티게 하는 삶의 이유였다.

  소설을 읽는 내내 현장의 모습을 이미지화하여 그려 볼 수 있었는데, 이 소설이 2009년에 영화로 탄생된다니 대단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젊은 시절의 제이콥이 겪는 일도 대부분 과거시제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문장이고, 이 점은 이 작품을 영상화하게 되면 더욱 돋보일 플러스 요인이다. 기차 서커스단의 전성기, 호황을 누렸던 그 시절 화려한 행진을 어서 빨리 영화로 만나보고 싶다.

  또한 이 책이 작가 '새러 그루언'의 남다른 동물 사랑을 실감했다. 책날개 부분에 적힌 짧은 필모그래피를 통해 그녀는 모든 책에 동물을 주인공을 내세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는데, 이번 책의 코끼리 '로지'는 제이콥이 로지를 처음 보고 반했던 것처럼 나 역시 반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너무 똑똑하고, 장엄하고, 아름다운 코끼리 '로지'. 로지가 주는 감동과 놀라움은 마지막을 읽고 난 후에야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동물에겐 거짓이 없다. 사람과 닮은 눈동자, 기분 좋을 때 짓는 미소들... 착하고 순수한 동물들이 재주를 펼치며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건 서커스에서 뿐만이 아니다. '언제나'이다.

  과거로 과거로 가다가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여러번의 여행을 거친 기분이다. 아마도 한 평생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내 나이의 끝이 왔을 때, 인생을 돌아보며 가장 아름다웠노라고, 정말 벅찬 순간이었노라고 말 할 수 있는 순간이 언제였는지를 알게 되었을 때. 그 때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지난 날들을 회상하며 달콤한 추억 속에 잠겨보고 싶다. <코끼리에게 물을>! 내 기억 속에서 아주 아주 특별한 책으로 자리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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