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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를 쓰라고요?
충청북도교육청.홍준기.황익상 외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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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보험과 관련된 업무를 하다 보니, 하는 사업을 마치면 그 결과를 정리하여 일반에 알려야 하는 일이 또 하나의 일이 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실무자가 보도자료를 준비하게 됩니다만, 언론과 접촉한 경험이 있다고 소문을 낸 탓인지 보도자료의 작성과정에서부터 조언을 부탁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급기야는 인사이동으로 새로 일을 시작하는 직원들을 위한 보도자료 작성에 관한 교육을 맡게 되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강의준비를 위하여 검색을 해보니, 중앙일보의 김경희기자님의, <기사되는 보도자료 만들기; http://blog.joinsmsn.com/yang412/9068165>와 충청북도 교육청에 근무하시는 분들이 힘을 합쳐서 만드셨다는 <보도자료를 쓰라고요?>가 있었습니다. 두 책이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습니다. 김경의기자님의 책은 그야말로 기자가 보도자료를 받았을 때, 눈길을 끌어 기사화될 수 있도록 보도자료를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반면 <보도자료를 쓰라고요?>는 그러한 보도자료를 준비해야 하는 쪽의 애로사항, 혹은 쓰는 입장에서는 무슨 고민을 해야 하는지를, 다시 말해서 기자와는 반대쪽에서 일하는 실무가 알아야 할 내용을 정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보도자료를 쓰려면 막막하기만 하다. 업무 성격상 보도자료를 몇 번씩 써본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나마 덜 부담스럽겠지만 처음 써보는 경우라든가, 자신이 글솜씨가 없다고 스스로 낮추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다.”라고 머리말에서 털어놓고 있는 것처럼, 아무래도 실무를 하는 분이 일내용을 제대로 알고 있어서 누가 대신 써줄수 없는 것이 바로 보도자료이기도 합니다. 죽으나 사나 실무가 일단 써내야 하는 숙제와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쓰기도 어려운 보도자료 작성법을 강의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묵직해지고 있습니다. 일단은 두 종류의 책을 가지고 초안을 만들고 그동안 우리회사에서 만들어 배포했던 보도자료와 이 보도자료가 어떻게 기사화되었는지도 돌아보는 방식으로 만들어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도자료를 쓰라고요?>는 제목에서 보시는 것처럼 흥미롭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보도자료에 대한 기본상식에서 출발해서 내놓은 보도자료가 전혀 기사화되지 않아 실망하게 되는 이유를 먼저 짚고나서 실효성있는 보도자료를 작성해서 배포하는 요령에 이르기까지 실용적인 면을 두루 짚어내고 있습니다.

 

기사작성은 수준에 따라서 기본단계를 정리한 다음에 심화교육으로 단계를 높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사쓰는 요령까지도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보도자료를 만들어야 하는 입장에 있는 분들에게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짧은 예를 인용해보겠습니다. <수정전 원고> “OO고(교장 홍길동) 입학식(2010.03.020에 OO울 사랑하고 지역 교육발전을 위하여 남달리 관심을 가진 OO교육발전협의회(회장 이순신)에서 신입생 ‘행복해’ 외 2명에게 장학금(30만원)을 전달하여 훌륭한 인재 양성의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 <수정후 원고> “3월 3일 열린 OO고(교장, 홍길동) 입학식에서 OO교육발전협의회(회장 이순신)가 신입생 3명에게 장학금 30만원을 전달했다.(65쪽)” 수정전 원고는 보도자료 작성에 초보자가 흔히 작성하는 보도자료의 전형적인 예입니다만, 수정한 원고를 보면 얼마나 깔끔하게 정리되었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일하고 있는 곳에서 나오는 보도자료의 내용은 다양하지 않기 때문에 일정부분 기본적인 틀만 갖추게 되면 일하는데 있어 어려운 점은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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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의 생명윤리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총서 17
이상목 지음 / 아카넷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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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북소리를 통하여 마크 커쥬스키와 로사 린 핀커스의 <병원윤리 딜레마 31;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96461>를 소개한 바 있습니다. 이 책을 추천하신 고윤석교수님은 “의료인들은 흔히 건전한 상식을 가지고 있고, 환자의 이익을 최선으로 하는 의료행위를 한다면 의료윤리의 원칙과 부딪히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때로는 의사가 최선이라고 판단한 환자의 이익이 환자가 원하는 최선의 선택이 아닐 수도 있다.”고 전합니다.

 

물론 사례들이 미국의 병원과 요양시설 등을 포함한 의료 환경에서 이루어진 것들이라서 문화적 배경이나 의료 환경이 다른 우리나라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어려운 경우도 있다는 있을 것입니다. 특히 연명치료에 관련된 경우 전혀 다른 결정을 내릴 수도 있겠는데, 이는 죽음과 관련된 문화적 배경이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란 삶의 마지막 과정이며 누구도 피할 수 없으므로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은 동양이나 서양에서 모두 공감하는 바일 것입니다. 이옥순 등의 <아시아의 죽음 문화;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714358>에서는 흰두교와 불교의 영향을 받고 있는 아시아지역의 사람들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확고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희망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유학의 전통이 오래 이어져 온 동아시아지역 사람들은 ‘삶은 즐거운 것이요, 죽음은 슬픈 것이라서 현세의 삶에 충실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하는 경향’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연명치료에 대한 입장에서도 소생의 희망이 없다면 품위를 지키면서 죽음을 맞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적극적 안락사까지도 수용하고 있는 서양에 비하면, 부모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자식의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보이고 싶기도 하고, 또 스스로의 위안으로 삼고 싶은 면이 여전한 것 같습니다. 물론 최근에는 서양에서 시작된 존엄사 개념의 영향을 받아 연명치료의 중단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기는 합니다.

고윤석교수님의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우리나라의 일선 의료인들은 대체적으로 임상현장에서 만나는 상황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개개인의 의료윤리에 대한 인식을 제고시키기 위한 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현대의 윤리교육의 필요성을 요약하고 있는 배영기교수님 등의 <생명윤리와 윤리교육;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90297>에서도 생명에 관한 역사적, 철학적 그리고 종교적 이해를 논하였을 뿐, 정작 의료현장에서 당면하고 있는 생명윤리문제가 아니라 변화하고 있는 지구환경 안에서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을 논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습니다. 이만큼 의료현장에서 필요한 생명윤리의 핵심을 정리하는 교육기회는 그리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인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상목교수님의 <동서양의 생명윤리>는 의료현장과 관련된 생명윤리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구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 책의 1부에서는 서구의 문화적 배경에서 출발한 생명윤리의 출현 배경과 그 접근법이 가지고 있는 특성 및 문제점들을 살펴보고 있고, 2부에서는 유교 전통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동아시아 지역과 한국에서는 어떠한 접근법으로 생명윤리 문제를 해결할 것이지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3부에서는 서구 생명윤리학의 토대가 되었음에도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 온 그리스도교의 접근방식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서구에서도 생명윤리학이 하나의 학문영역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1960년대라는데, 우리나라에는 불과 20여 년 전에야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생물학 연구와 그 응용, 특히 의학 연구에 있어 윤리적 관계를 다루는 학문”이라고 정의되는 생명윤리학은 히포크라테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서양의료윤리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의료윤리는 환자의 최선의 이익을 증진시켜 주기위하여 노력하는 의사를 좋은 의사로 규정하고 있었는데, 1960년대 들어 이러한 의료윤리 환경에서는 환자의 목소리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점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즉 의사의 독점적 권위가 도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1960년대 들어 미국사회에서 일어난 사회적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당시 월남전 참전반대운동, 유색인종에 대한 권리와 기회보장운동, 그리고 여권운동이 활발해졌는데,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의료영역에도 영향을 미쳐 의사의 절대적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고 환자의 자율성과 권리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는 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의학기술이 빠르게 진보함에 따라서 의료행위는 점차 장비에 의존하게 되면서 의사들의 관심이 환자에서 의료장비로 옮겨지고, 의사의 주관적 판단에 의존하여 결정하던 치료의 방향이 장비에서 나온 데이터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된 것도 또 다른 요인입니다. 뿐만 아니라 1967년 남아프리카의 버나드박사가 최초로 심장이식수술에 성공하면서 생명의 의미, 그리고 죽음(death)과 죽어감(dying)의 차이에 대한 정의를 재정립할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생명윤리학의 출현이 예고된 셈이라 하겠습니다.

 

전통 의료윤리학이 의사들 사이에서 배타적으로 논의되어왔던 것과는 달리 생명윤리학은 출발에서부터 도덕신학과 도덕철학 그리고 의료윤리학과 법학이 상호교류하는 가운데 성립하게 되었기 때문에 서로 상이한 접근방법을 통일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따라서 생명윤리학자들은 구체적인 생명윤리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접근법 확립에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그 접근법에는 서구적 문화적 전통이 스며들게 된 것인데, 우리 문화를 녹여 보완하는 노력없이 서구적 생명윤리학의 접근방법을 그대로 도입하면서 우리나라의 의료현장에서 만나는 생명윤리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만족한 해결책이 될 수 없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서양의 생명윤리학이 발전하는 과정에 참여한 분야에는 나름대로의 접근방식이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생명윤리학의 접근방법이 정립되는데 기여한 접근법에는 토대윤리, 원칙주의, 결의론, 공동체주의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접근법 등이 있습니다.

 

도덕이란 단 하나의 보편적 토대에 기초하고, 그것에 의해서 정의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토대윤리의 핵심입니다. 토대윤리에서 원칙의 보편성과 일반성의 강조는 도덕 이론의 윤리적 상대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공정성을 가질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선과 가치가 다양한 다원주의 사회에 적용하기에 한계가 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상식적 도덕에서 생겨난 원칙은 다원적 사회에서의 윤리적 갈등을 해결하는데 동의를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런 원칙에는 자율성존중 원칙, 악행금지 원칙, 선행 원칙, 정의 원칙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원칙주의에는 원칙들 간의 우선성 문제와 원칙의 해석문제가 있어 원칙들을 구체화하고 우선순위를 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의론은 사례를 분석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접근법으로 구체적인 상황과 사례에 관심을 집중함으로써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해결책에 도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선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는 경우 실제적인 도덕적 추론의 정확성과 적합성을 보증하기 어렵고, 새로운 사례들을 해결하기 어렵다는 난점이 있습니다.

 

개인을 의학적 의학결정의 최종 판단자로 생각하는 개인주의적 접근과 달리 공동체적 접근은 좋은 삶에 대한 체계적 전망을 가지는 장점이 있지만, 공동체의 종교, 지역 문화 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생명윤리학이 서양에서 발전해온 까닭에 유교적 영향이 뿌리 깊은 동아시아지역에서는 온정적 간섭주의(parternalism)를 배제하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 근거한 서양의 생명윤리 기준을 적용하는데 있어 한계가 있습니다. 서양과는 달리 동양에서는 가족 중심주의적인 문화전통에 근거한 도덕 판단이 서양의 그것과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유교적 도덕전통을 보완한 새로운 생명윤리 접근방법이 도출되어야 할 필요성이 제기 되고 있는 것입니다.

 

유교의 도덕 관점은 인간을 관계적 존재로 이해하고, 인간애를 그러한 인간관계의 중심적인 도덕원리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의료현장에서는 의학적 의사결정 과정에 환자 자신의 의사도 중요하지만 가족들의 의사 역시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동양 사회에서의 가족은 서양의 자율적 개인에 비교할 수 있는 자율적인 사회단위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서양과는 달리 동양에서 가족은 질병으로 고통받는 환자와 고통을 같이 나누고 있기 때문에 의학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환자와 같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저자는 “의학적 의사결정에 영향을 주는 환자의 가치관, 의사의 의무와 역할, 환자의 자율성 인정 여부, 의학적 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사람의 범위와 참여 정도는 문화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의학적 의사결정 방식은 문화와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야 할 것(122쪽)”이라 하고, 한국인의 의학적 의사결정모델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가족 결정 모델’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족주의적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특성과 더불어 가족은 고통 받고 있는 환자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으며 환자를 위한 최선이 무엇인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합니다.

 

3부에서는 생명윤리에 대한 종교적 관점, 특히 기독교와 가톨릭의 입장을 별도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의료기술의 발전에 의하여 야기된 도덕문제들 가운데 특히 생명현상에 관한 부분, 예를 들면, 출산과 죽음 그리고 질병으로 인한 고통에 관한 내용들은 신학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였을 것입니다. 종교에 따라서 교리의 근본적 차이 혹은 교리의 해석의 차이에 따라서 시각차이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공회 신학자 요셉 플레처의 경우, “과학기술의 발달에 의해서 나타난 결과가 인간에게 해악을 끼칠지라도, 그것이 인류에게 미치는 유익함이 크다고 할 때 그것은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주장하는데, 예를 들면 임신중절, 인공수정, 피임, 유전자 감별, 인간 복제는 인간의 고통을 축소시키고 인간의 선을 확대시켜주기 때문에 지지한다.(185쪽)”는 행위공리주의적 입장입니다. 반면 감리교 신학자 폴 램지의 경우 개인의 선이 사회의 선에 결코 지배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플레처의 공리주의적 입장에 반대하고, 인체실험의 윤리, 죽음과 말기 환자의 윤리, 장기이식의 윤리에 있어서 개인의 불가침성과 사람들 사이의 신뢰를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생명윤리학은 그것의 유일한 토대를 산출된 이익에 두어서는 안된다고 보았고, 올바른 행위의 기준은 합리적이며 자유로운 의사결정과 설명동의가 필수조건이 되어야 한다.(187쪽)”고 했습니다. 대표적 가톨릭 도덕신학자인 리차드 맥코믹은 플레처의 자유주의와 램지의 보수주의 사이에서 중간자적인 입장이자만 그의 생명윤리사상은 인간의 자유, 개성 그리고 사회성과 같은 인간생명의 가치를 보호하는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고 합니다. 전통적 자연법 윤리에 근거한 새로운 방법으로 접근하고 있는데, 관련된 가치들이 서로 상충될 경우 항상 최상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도덕적 선택은 획득하게 되는 가치와 상실하게 되는 가치를 적절하게 계산한 다음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인 것입니다.

 

<동서양의 생명윤리>는 의료현장에서 의학적 결정을 하는데 있어 윤리적 판단이 필요한 경우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나름대로의 방향을 정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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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탄생/ 즐거운 지식 동서문화사 월드북 11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곽복록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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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가 저물어갈 무렵, 니체의 삶과 정신을 재구성한 고명섭 기자님의 <니체극장;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70004>을 읽었습니다. 김선희교수님의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 http://blog.joinsmsn.com/yang412/12474996>를 읽으면서 니체에 대하여 조금 더 공부할 생각을 하던 차라서 그의 삶고 생각의 틀을 가늠하는 기회가 되었고, 그의 저작들 가운데 어떤 것을 먼저 읽을 것을 결정하는데도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비극의 탄생>을 제일 먼저 읽게 된 것도 <니체극장>에서 찜해두었던 것에 더하여 최근에 읽은 <그리스 미학기행;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18098>에서 저자께서 그리스에 눈길을 두게 된 이유가 바로 니체의 <비극의 탄생>이었다고 설명하고 있었던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그리스 미학기행>을 라포르시안에서 소개하기 위해서라도 <비극의 탄생>을 읽어야 할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비극의 탄생>은 양이 많지 않은 탓에 니체의 다른 작품들과 함께 소개되는 경향입니다. 여러 판본을 저울질하다가 곽복록교수님이 번역하신 동서문화사의 것으로 골랐습니다. <비극의 탄생>과 같이 묶어진 <즐거운 지식>과 <반그리스도교>는 덤으로 읽게 된 셈입니다.

 

<비극의 탄생>은 니체의 첫 번째 저작이며 그가 전공한 고전문헌학의 틀을 벗어난 작품이기도 합니다. 곽복록교수님은 작품해제를 통하여 “그는 이 작품에서 그리스 비극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전자는 중용, 제약, 조화를, 후자는 거침없는 정열을 표현함)의 결합에서 나왔으며, 소크라테스의 합리주의와 낙관주의가 그리스 비극을 죽였다.(538쪽)”고 주장했습니다. ‘음악정신으로부터 나온 비극의 탄생’이라는 제목의 본문을 ‘리하르트 바그너에게 바치는 서문’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을 쓸 무렵 니체는 바그너에게 심하게 경도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 비극을 극적 요소와 음악적 요소로 구분하여 각각의 의미를 새기고 있는데, 특히 비극을 노래하는 합창 부분에 무게를 더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전승은 우리에게 비극은 비극 합창단에서 발생했으며, 비극은 근원적으로 합창에 지나지 않으며, 합창단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단호히 말한다.(46쪽)” 더하여 민중으로 이루어지는 합창단에는 민주적 아테네 시민의 영원한 도덕률이 나타나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술의 발전은 아폴론 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관련이 있다.(22쪽)”라고 시작하는 ‘음악정신으로부터 나온 비극의 탄생’이라는 제목의 본문에는 “결국 우리는 그리스 비극의 근원과 본질은 서로 얽혀 있는 두 개의 예술 충동, 즉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이중성 자체에 있다는 것을 발견(74쪽)”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폴론적 예술로서의 조형예술과 디오니소시적 예술로서의 음악이 대립하고 있다는 해석에서 음악의 정신에서만 비극이 탄생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르네상스를 통하여 그리스 비극은 오페라의 형식으로 유럽 예술로 계승되었는데, 특히 바흐에서 베토벤을 거쳐 바그너에 이르기까지 독일음악에 그리스 음악이 전승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니체가 그리스 비극을 통하여 바그너를 찬미한 <비극의 탄생>은 학계의 거센 비난을 받는 결과를 낳았다고 합니다.

 

‘농담, 음모 그리고 복수’라는 제목으로 된 독일식 압운의 서곡과 모두 5부로 구성된 <즐거운 지식>은 아주 독특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어떤 것은 짧은 경구의 형식을, 어떤 것들은 엽편소설(葉篇小說)처럼 짧은 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짧은 분량으로 된 칼럼이라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옮긴이는 “이 책은 20세기의 정신을 날카롭게 예측하는, 니힐리즘의 끝을 보여준다기보다는 지적 용기를 북돋워 주는 교훈으로 가득 차 있다.(543쪽)”라고 요약하고 있습니다.

 

<반그리스도교>는 ‘모든 가치의 재평가’라는 제목으로 구상했던 글이라고 합니다.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는 초인의 도래를 예언하고 있는데, 그리스도교는 니체의 그와 같은 관점에 부합하지 않는 면이 너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약자와 실패자는 몰락해야 한다. 이렇게 말한다면 모두들 놀랄 것이다. 하지만 정말 인간을 사랑한다면 그들의 몰락을 도와야 한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정말 훌륭하게 발전하려면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인류애다. 그러므로 약자와 실패자를 동정하는 것은 매우 안 좋다. 그리스도교는 그런 걸 모르고 그들을 한없이 동정한다.(459쪽)” 니체는 유대인의 역사를 기록한 구약성서를 사제들이 왜곡하여 서술하여 신도들을 구속하려 들었다고 통박하기도 합니다. 성서에 대한 앎이 많지 않은 탓에 니체의 견해에 대하여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습니다만, 아는 범위에서는 공감이 가는 점이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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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 4 (보급판) - 두 개의 탑 2
존 로날드 로웰 톨킨 지음, 이미애 외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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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의 마지막 장면에서 보로미르의 순간적인 탐욕으로 반지원정대가 흩어지게 되고 프로도와 샘만이 모르도르로 향하게 됩니다. 3편에서는 두 그룹으로 쪼개진 반지원정대에서 오르크에게 납치된 피핀과 메리를 구출하기 위한 아라고른, 레골라스, 그리고 김리의 활약을 뒤쫓아 드디어 오르크에게 호빗을 납치에 오라는 명령을 내렸던 사루만의 본거지를 제압하는 성과를 올리게 됩니다.

 

반지의 제왕 4편은 쪼개진 반지원정대, 절대반지를 지니고 있는 프로도와 샘을 뒤쫓고 있는 것이니 단촐해진 반지원정대의 행로를 뒤쫓게 되는 셈입니다. 2편의 마지막 무렵 숨어서 일행을 뒤쫓던 골룸이 4편에서 드디어 프로도와 샘과 조우하게 됩니다. 제가 둔한 탓인지 영화에서는 분명하게 갈라내지 못했던 골룸의 이중인격이 책에서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교활한 캐릭터인 골룸과 착하고 충직한 스메아골이 상황에 따라 등장하는 묘한 캐릭터입니다. 아직 초반인 탓인지 골룸의 캐릭터는 숨겨지고 주로 스메아골의 캐릭터가 두드러지고 있어 프로도와 샘에 의하여 제압된 스메아골은 풀어주는 대신 프로도를 주인으로 섬기게 됩니다.

 

골룸이라는 등장인물은 어쩌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캐릭터 일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황량한 습지에 빠진 두 사람은 이 지형을 잘 알고 있는 골룸에게 모르도르의 입구까지 안내할 것을 요청하게 됩니다. 암흑의 군주 사우론이 지배하는 땅으로 들어가는 관문 키리스 고르고르(악령고개)에는 모르도르의 이빨이라고 부르는 두 개의 높은 탑이 있습니다. 이곳은 사우론의 군사가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어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인데, 골룸이 숨겨진 통로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궁즉통이라 했던가요? 프로도가 골룸과 동행해야 하는 운명이라는 것을 알 것 같습니다.

 

프로도와 샘이 헤맸던 습지는 곤도르왕이 지배하는 땅이고, 3편에서 죽었던 보로미르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 프로도 일행은 보로미르의 동생 파라미르의 군대와 만나게 되는데, 파라미르는 보로미르와는 달리 치밀하면서도 심지가 굳은 것 같습니다. 프로도와 샘을 추궁하여 반지원정대에서 맡은 미션이 무엇인지를 캐려들지만 약속한대로 그들을 보호하게 되니 말입니다. 세상사람들이 반지원정대에 참여한 종족들 같았으면 정말 살기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인간에게는 보고 도망쳐야 할 위험한 것들이 있다는 걸 알 만큼은 현명한 사람이오.(181쪽)”라는 파라미르의 말을 새길 필요가 있겠습니다.

 

4편에서는 절대반지를 모르도르까지 가지고 가서 파괴하는 임무를 프로도가 맡게 된 이유가 조금씩 드러나게 됩니다. 강인하면서도 좌절하지 않는 성격에 더하여 치밀함까지 겸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절대반지를) 스메아골에게 돌려달라는 요구에 대하여, “다시는 그런 소리를 하지마! 그런 생각이 네 마음에 자라게 해서는 낭돼! 넌 그걸 결코 다시 가질 수 없다. 그것에 대한 욕망 때문에 넌 비참한 종말을 맞을 수도 있어.(93쪽)”라고 단호하게 경고하여 골룸의 야심을 꺾어놓는 장면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골룸의 속셈이 곧 들어나게 됩니다. “난 그가 얼빠진 머릿속에 또 하나의 명료한 계략을 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253쪽)”라고 프로도는 착각한 것인데, 다른 사람을 쉽게 믿는 호빗족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이런 얼토당치 않은 믿음 때문에 공연한 고생을 하게 됩니다만... 모르도르로 향하는 숨겨진 통로에는 거대한 거미 괴물 쉴로브가 숨어있었던 것입니다. 쉴로부는 오로지 생명체를 붙잡아 피를 마시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어 절대반지를 다시 손에 넣으려는 골룸으로는 프로도와 샘을 쉴로브의 굴로 밀어넣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프로도를 주인으로 모시기로 한 스메아골의 약속이 번거로웠던 골룸은 프로도를 쉴로브에게 넘기고 자신은 샘을 붙들려 들지만 샘의 거친 반격에 실패하게 됩니다. 골룸의 함정을 벗어난 샘은 거미줄에 묶인 프로도에게 덤벼드는 쉴로브를 격퇴하지만 프로도가 절명한 것으로 오해하고서는 프로도가 맡은 미션을 대신해서 수행하려 나서게 됩니다. 호빗족이 반지를 운반하는 역할을 맡게 된 이유가 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순수하고 충직한 종족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프로도가 죽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샘은 오르크에게 붙잡힌 프로도를 되찾기 위하여 뒤따르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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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배우는 게 아니다 - 작품으로 읽는 연암 박지원 산문.시편 작품으로 읽는 연암 박지원
주영숙 엮음 / 북치는마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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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1737-1805)하면 <허생전(許生傳)>, <양반전(兩班傳)>, <호질(虎叱)> 등의 단편소설을 통하여 몰락해가는 조선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한 것 뿐 아니라 1780년 북경을 거쳐 건륭제가 피서차 가있던 열하까지 다녀오면서 보고들은 내용을 담은 <열하일기>로 유명합니다. 열하일기는 청나라의 정치·경제·병사·천문·지리·문학 등 다방면에 걸친 새로운 사조, 즉 실학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연암의 산문과 시편으로 뽑아 만들었다는 <눈물은 배우는 게 아니다>는 눈물에 관한 연암의 색다른 시각을 볼 수 있을까 하여 읽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매양 모르겠네, 소리란 똑같이 입에서 나오는데, 즐거우면 어째서 웃음이 되고, 슬프면 어째서 울음이 되는지.(220쪽)”라고 의문을 표하면서도 어‘쩌면 웃고 우는 이 두 가지는 억지로 되는 게 아니라 감정이 극에 달해야만 우러나는게 아닐지’ 추정하고 있습니다. 전송열교수님의 <옛 사람들의 눈물; http://blog.joinsmsn.com/yang412/12254105>에서 조선시대 남성들도 마냥 눈물을 감추고 살았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연암이 심노숭(1762-1837)과 교류가 있었더라면 “눈물은 마음으로부터 나오고 또 눈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눈물이란 무엇인가, 52쪽; http://blog.joinsmsn.com/yang412/12280442)”는 점을 알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죽은 누이를 그리는 마음을 그린 시 ‘누님을 배웅하며’에 “보내는 이의 옷깃을 눈물로 적시네(224쪽)”라고 적거나 ‘맏누님 증 정부인박씨묘지명’에 “누님이 빗을 떨어뜨렸던 때를 떠올리니 눈물이 솟구친다.(117쪽)”고 적은 것을 보면 연암은 감정이 풍부한 남정네였던 것 같습니다.

 

국문학을 전공하신 편저자께서 책끄트머리에서 연암의 산문이 사설시조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 그리고 연암이 당시로서는 획기적이라 할 서양과학에 눈뜨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오히려 산문편의 마지막에 모아두신 ‘매력적인 글쓰기란?’에 눈길이 갑니다. 아무래도 글쓰기에 관심이 많은 탓이겠습니다. 니체는 “나는 손으로만 쓰는 것이 아니다. 발도 항상 함께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확고하고 자유로우며 용감하게 혹은 들판을, 혹은 종이 위를 달린다.(비극의 탄생)”라고 적었습니다만, 연암의 <열하일기>는 딱 니체의 말대로 발과 손으로 쓴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글쓰기에 대한 연암의 생각은 참으로 재미있고, 깊이가 있습니다. ‘글이란 뜻을 그려내는 것이므로, 거창할 필요가 없으며, ‘도’는 털끝만한 차이로도 나뉘는 법이니, 글로써 도를 표현할 수 있다면 부서진 기와나 조약돌인들 어찌 글 소재가 아니라며 버리겠는가(184쪽)‘라고 하였습니다. 무심코 지나칠 소재라도 생각을 가다듬어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정제해내면 좋은 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생각을 가다듬어 정리가 되었다고 한다면 문장을 어떻게 지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옛글을 본받아 법고(法古)해야 한다는 주장과 창신(創新)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어, 각각 옛것을 따라하고 본뜨면서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거나 괴벽하고 허황되게 문장을 지으면서도 두려워할 줄 모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법고’한다는 사람은 옛 자취에만 얽매여서 병통이고, ‘창신’한다는 사람은 보통의 법칙에서 벗어나게 되어 걱정거리를 만드는 문제가 있으니, “진실로 ‘법고’하면서도 변통할 줄 알고 ‘창신’하면서도 충분히 틀에 맞아 아담하다면, 지금의 글이 바로 옛글과 같이 품위가 있을 터라는 것이 연암의 생각입니다.

 

“단 한 토막의 말일지라도 정곡 찌르기를 눈 오는 밤 채주에 쳐들어가듯이 할 수 있어야 한다.(198쪽)”는 연암의 촌철살인과 같은 글쓰기요령을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좋은 글을 쓰기 위하여 적절하게 인용할 자료가 풍족해야 한다는 의미를 말하는 것입니다. 글을 잘 짓는 자를 병법에 통하고 있음이라는 비유도 놀랄 법합니다. “비유컨대, 글자는 군사요 글 뜻은 장수요 제목은 적국이다. 옛적부터 내려온 정례와 규칙을 주장하여 인용함은 싸움터의 진지를 구축함이요, 글자를 묶어 구절 만들기, 구절 모아 문장 이루기는 부대의 대오행진과 같다.…(195쪽)” 글쓰기를 위하여 병법도 익혀야 할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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