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물이다 - 어느 뜻깊은 행사에서 전한 깨어 있는 삶을 사는 방법에 대한 생각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지음, 김재희 옮김 / 나무생각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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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있었지, 예들아? 물이 괜찮아?”하는 질문을 받으면 무어라 답하시겠습니까? 장소에 따라서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젊은이라면 멋있는 젊은이들이 많으냐는 질문으로 생각하고 대답을 준비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이든 물고기가 물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어린 물고기들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면요? 당연히 “도대체 물이란 게 뭐야?”라고 중얼거렸을 것입니다. 물고기들끼리 주고받은 이 이야기를 사람에게 통역을 한다면 “잘 있었지, 예들아? 공기가 괜찮아?”라고 옮겨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공기를 마시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공기가 맑다 커니 혹은 탁하다 커니 할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무슨 소리인지 모를까요?

 

이 이야기는 ‘20세기 100대 영문소설’에 뽑힌 <한없는 웃음거리>를 쓰고 20세기 후반 가장 영향력 있고 창조적인 작가 중 하나라는 찬사를 받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2005년 5월 케니언대학의 졸업식에서 한 주제강연문을 시작한 에피소드입니다. 월리스는 물고기 이야기를 “지극히 당연하고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중요한 현실이 사실은 가장 힘들고 논하기 어렵다는 점(14쪽)”을 전하기 위하여 인용한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 대학에서 인문교육을 받은 졸업생들에게 인문교육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새겨보라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즉 인문교육이란 학생의 머리를 지식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라기보다는 ‘학생들에게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는 점을 깨닫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연자 역시 젊어서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는 말이 진정으로 뜻하는 바가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대해 선택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말을 전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조금 더 설명해서 “성인으로서의 삶을 그저 편안하고 순조롭게, 그럴싸한 모습으로 죽은 사람같이 살지 않는 방법, 무의식적인 일상의 계속이 아닌 삶을 사는 방법, 또한 자기 머리의 노예, 허구한 날 독불장국처럼 유일무이하며 완벽하게 홀로 고고히 존재하는 태생적 디폴트세팅의 노예가 되지 않는 삶을 살아나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66쪽)”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보면 저의 전공을 고려하여 보았을 때 저의 삶은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출근하여 책상 위에 올려진 슬라이드를 판독하여 진단을 결정하는 일이 매일 반복되는 것이었을 겁이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일탈이라고 해보았자 새로 나온 사례를 책을 통하거나 다른 의사들의 경험을 공유하여 공부하거나, 임상의사들과 사례검토회의를 통하여 저의 진단을 확인하고 실수를 줄여나가려 노력하는 정도였을 것 입니가. 그런데 그런 생활을 십여년 지나오다가 어느 날 울타리를 넘어 세상 밖으로 나선 것이 결국은 다양한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다른 세상을 만날 때마다 최선을 다해서 배우고 배운 것들을 바탕으로 최선의 선택을 해온 것인데, 시간이 지나 익숙해질 만하면 새로운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을 맞곤 했던 것이니 이날 까지 도전이 반복되는 삶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리게 될 개인적 자유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자유가 있겠지만, “진실로 중요한 자유는 집중하고 자각하고 있는 상태, 자제심과 노력, 그리고 타인에 대하여 진심으로 걱정하고 그들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능력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매일매일 몇 번이고 반복적으로, 사고하고 하찮은 대단치 않은 방법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128쪽)”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유를 선택하는 것 또한 생각하는 법을 배운 사람들의 몫일 것이므로, 진정한 교육의 진가는 우리 주위에 환히 보이는 곳에 있지만 그래서 오히려 잘 보이지 않는 숨어있는 현실, 매일 끊임없이 그 존재를 스스로 깨우쳐주지 않으면 발견하지 못하는 그런 현실, 그런 현실을 알고 살아가는 법을 깨우치기를 희망하는 메시지를 담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물입니다.”라는 함축적인 메시지로 담아낸 것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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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낮은 데서 피는 꽃 - 쓰레기마을 톤도에서 발견한 희망의 교육
이지성.김종원 지음, 유별남 사진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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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톤도의 파롤라 마을은 세계 3대 빈민 도시의 하나로 꼽히는 곳이라고 합니다.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의 거대한 쓰레기산이 마을 전체를 뒤덮고 있어 ‘쓰레기마을’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지금은 올림픽 평화공원으로 변신한 난지도의 옛날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같습니다. 난지도에서 사시는 분들을 위하여 진료봉사를 나갔던 적이 있습니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쓰레기더미를 멀리 보면서 지나다닐 때는 몰랐지만 살기에는 너무 열악한 환경인데도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아직 어렵게 살고 있는 분들이 적지 않은 형편임에도 <가장 낮은 데서 피는 꽃>을 쓰신 이지성, 김종원님과 사진작가 유별남님이 톤도를 찾은 것은 이곳에서 12년이 넘게 톤도 아이들을 보살피며 봉사하고 있는 한국인 김숙향 선교사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김숙향 선교사는 가난한 이들에게 빵만 주어서는 안 되고, 인간적인 삶과 미래에 대한 꿈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사업을 병행하는 것이 진정한 빈민구호 활동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2000년부터 톤도에 건물을 짓고, 가난과 무지 속에 방치된 톤도 아이들을 모아 교육하는 일을 해왔다고 합니다. 이런 김선교사님의 톤도교육센터가 재정적으로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은 세 분이 도와드릴 방법을 찾기 위하여 방문했던 것인데, 정작 이곳에서 자신과 세상을 참되게 바꾸는 교육을 보고 감동을 받게 되었다는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톤도 교육센터는 세 가지 특별한 교육 철학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첫째, 배움의 기회에서 차별을 주지 않는다, 둘째, 우등생이 아니라, 인간을 만든다, 셋째, 동반성장 학습을 교육 철학으로 삼는다, 라고 합니다.

 

흔히 좋은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입사해 높은 연봉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을 꿈꾸는 한국의 학생들과느느 달리 이곳의 학생들의 꿈은 소박하고 열정적인 것 같습니다. 특히 하버드대학으로 유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하고 좋은 직장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던 톤도교육센터 출신 살로나 우바스는 자신이 공부한 톤도교육센터로 돌아와 적은 급여를 받으면서도 후배들 교육에 헌신하고 있다고 합니다. 김선교사는 살로나와 같은 28명의 리더를 길러냈다고 하는데, 그와 같은 일이 가능하게 된 데는 “리더십은 바이러스처럼 쉽게 퍼져나가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너희들이 리더가 되어 톤도를 바꿔나가기 시작하면, 너희들의 리더십을 지켜본 아이들 역시 엄청난 리더가 되어 세상을 바꿀 인재가 될 거야. 결국 너희들은 자기 자신을 바꾸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는 거야(123쪽)”라고 리더를 양성하는 교육의 필요성을 설파한 김선교사의 평소 지론이 이들에게 심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자들은 톤도에서 학생들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진행되고 있는 가치관교육이 큰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것을 직접 경험하고 그것은 바로 조선시대의 자녀교육법과 일맥상통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교육기관인 서당에서는 천자문을 떼어 책을 읽을 수 있게 되면 교훈적 내용이 담긴 계몽편을 가르쳤는데, 계몽편을 통하여 올바른 생활습관을 몸에 익히게 된 어린이들이 성장하여 세상을 바꾸는 리더가 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물론 “필리핀 톤도의 많은 소녀들은 열세 살이 되기 전 가출을 한 후, 마음에 드는 이성과 동거를 하곤, 원치 않는 출산을 경험한다. (…) 톤도의 아이들이 꿈과 희망을 잃고,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일까?(133쪽)”라고 이곳의 실태를 적고 있는 것으로 보아 톤도마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톤도교육센터의 영향이 미치고 있는 것은 아닐 듯합니다. 그리고 톤도교육센터에서 좋은 결실을 맺고 있는 교육방법들을 우리나라에 적용하기에는 사회적 여건 등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어려울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하지만 가능성은 분명 있다는 점을 적고 있는데, 저자들의 종교적 배경에서 나온 제안도 한계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예를 들면, “한국의 발전에 엄청난 역할을 했던 주일학교가 1990년대0 들어서부터 쇠락하고 있다. 모두가 부모들의 욕심에서 비롯되었다.(272쪽)”는 주장은 기독교가 우리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 점은 분명하지만 지나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는 느낌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저자가 지적하는 식탁에서 신문에 빠진 아버지, 핸드폰문자에 빠진 아이들, 드라마에 빠진 어머니라고 일반화시켜 우리네 가정의 문제를 진단하고 있는 것도 동의하기 어려운 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현행 교육제도나 입시제도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에 공감하고, 우리의 전통교육에서 길을 찾을 수 있겠다는 저자의 생각도 고려할 가치가 있겠다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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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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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위있게 죽기’는 제가 오랫동안 쥐고 있는 화두이지만 아직까지도 손에 잡히는 무엇이 없는 것 같아 허전하기만 합니다. 오래된 화두인 만큼 지칠 법도 한데, 아직도 죽음을 논한 읽을거리라고 하면 그냥 지나치지를 못합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는 기대가 컸던 책입니다. 저자가 예일대학 철학과 교수이고, 예일대학교에서도 명강의로 손꼽히는 내용이라는 카피는 그렇다고 쳐도 ‘죽음’의 본질과 ‘삶’의 의미 그리고 ‘생명’으ㅟ 존엄성을 고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서 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책을 읽고 난 느낌을 먼저 정리하자면 제가 아직도 철학을 공부할 수 있는 준비가 덜 되어 있는 탓인지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강의내용을 바탕으로 구성한 탓에 책읽기에 익숙한 문어체가 아니라 구어체에 가까운 문장이 집중을 어렵게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프롤로그에서 저자가 요약하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의 전반부에서는 영혼, 죽음의 본질, 영생의 가능성을 논하고, 이어서 가치문제로 넘어가서 죽음이 정말로 나쁜 것인지를 철학적 차원에서 들여다보고 끝으로 자살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철학개론서의 저자들이 취하는 일반적인 접근방식, 즉 다양한 주장과 찬반론을 소개하면서 저자 자신은 중립적 위치를 고수하거나, 저자의 입장을 밝히고 옹호하는 두 가지 방식 가운데 후자의 방식을 선택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읽어가다 보면 저자가 단호하게 자신의 입장을 내세우거나 옹호하는 것으로 보이는 장면이 별로 기억에 남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정작 읽고 있는 저는 영혼의 존재나 영생의 가능성은 과학적으로 이미 입증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인지, 저자의 논리전개 자체에 대하여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즉, 영혼의 존재나 영생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중립적으로 논하기 위하여 무리한 가정을 세우고 논지를 전개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삶이 끝난 후에도 삶은 계속되는가’라는 1장의 제목이 시사하는 바는 이미 죽음이 선언된 마당에 어떤 삶이 존재할 수 있다고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단순무식한 제가 보기에는 무리한 주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자는 “영혼의 존재를 받아들일 만큼 충분히 설득력 있는 주장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잘라 말하면서도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존재를 믿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도 영혼의 불멸성에 대해 살펴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105쪽)”고 적고 있습니다. 자신은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지만 남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그는 “내가 ‘이원론’과 ‘물리주의’라는 두 가지 관점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145쪽)”고 강변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강조하지만 나는 영혼이 절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사실 영혼의 존재를 완벽하게 부정할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어쨌든 영혼이라고 하는 존재 자체가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148쪽)”라고 적고 있으니 읽는 사람이 헷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서 저자가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기 위하여 무리한 가정을 세운다고 했는데, 그 예를 들어보면, 미친 과학자가 내 인격을 린다의 몸에 이식한 상황에서 영혼과 육체의 동질성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고 있습니다만,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상황을 가정하고 전개하는 논의가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밖에 없겠습니다. 비슷하게 이미 죽은 나폴레옹의 인격을 현재 미국의 미시건에 살고 있는 남성이 물려받았다고 주장하는 상황을 두고 이 남성이 진짜 나폴레옹인지 아닌지를 논하는 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한 걸은 더 나아가 뇌를 이식하는 상황, 특히 좌우 뇌를 각각 다른 사람에게 이식하고 두 사람이 동등한 존재인지를 논하려는 시도는 참신하다고 해야하나 이런 억지가 어디 있느냐고 해야 하나 헷갈립니다.

 

저자는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만,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미국의 SF작가 올슨 스캇 카드의 단편소설에서 인간은 우주의 모든 생명체 중 유일하게 죽는 종이라는 이유로 다른 생명체들이 부러워하는데, 그 이유는 ‘제한된 시간 동안만 가질 수 있는 소중한 가치를 오로지 인간만이 누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라는 대목에 완전히 꽂혔습니다.

 

시작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책읽는 호흡은 결국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붙들지 못하고 끝에 이르렀습니다. 그래도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우리는 죽는다. 때문에 잘 살아야 한다. 죽음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다.(507쪽)”는 마무리만큼은 건진 것 같습니다. 물론 저자가 어떻게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는지 기억에 남아있지 않아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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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전세주택 - 전세대란의 마지막 희망
임성은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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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의 보유에 관한 세금부담을 높이는 쪽으로 정책방향이 선회한 이후로 상승세를 보이던 주택가격이  하향세를 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매매가격이 분양가격보다 낮아 주택을 분양받은 분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는 것 같습니다. 주택가격이 하향세를 타게 된 배경에는 세금정책에 맞물려 젊은이들이 결혼을 미루는 추세에다가 주택보유보다는 현실적 소비에 비중을 두는 성향도 기여했다는 분석을 본 기억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택가격은 떨어지는 상황인데 전세가격은 급등하는 이상현상이 일고 있다고 하는데, 어쩌면 보유를 기피하는데서 오는 전세수요의 증가 때문이라고 한다면 동전의 양면과 같은 두 가지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 마련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주택은 중요한 제태크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신혼 초에 집을 장만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여력이 없어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을 때 자고나면 집값이 오르는 바람에 망연자실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때는 오르는 집값을 따라서 전세값도 덩달아 오르던 때라서 전세계약 만료일이 다가오면 이번에는 또 얼마나 올려주어야 할지 걱정이 앞서곤 했습니다. 전세대란이라는 단어가 그때 나왔던 것 같습니다. 아파트 분양을 받아보려 이리저리 돌아다녔지만, 당첨이라는 행운과는 거리가 멀게 태어났기 때문이었던지 꽤 오랜 기간을 전세로 전전하던 아픈 기억입니다.

 

요즘처럼 전세가격이 뛰고 계약에 따라서 이리저리 이사를 다녀야하는 신세가 지겨울 때는 집을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하지만 주택가격의 동향이 어떻게 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노릇이기도 합니다. 이럴 때 외국처럼 장기에 걸쳐 상환할 수 있는 방법이 있거나 장기간에 걸쳐 거주할 수 있는 장기전세주택제도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장기전세주택 박사1호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임성은 박사님의 <장기전세주택>은 ‘전세대란의 마지막 희망’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는 것처럼 지금까지 소유의 개념으로 보유하던 주택을 거주의 개념으로 전환시키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올 수 있는 주택제도가 될 것이라는 점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장기전세주택’이란 개념에 대하여 설명하고 이 제도의 도입과정, 그리고 다른 유형의 주택정책을 비교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2부에서는 민간에 의하여 주도되는 주택시장에 주택정책을 가지고 정부가 개입하고 있는 상황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장경제하 주택은 상품이다. 국가가 최소한의 주택시장 개입으로 사회발전을 도모하고자 하지만, 이 경우 시장메커니즘은 인간의 기초수요인 주택서비스를 모든 사람들에게 충분하고 공평하게 제공하지 못한다는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87쪽)”라고 적고 있는 것처럼 시장에 맡겨진 주택이 필연적으로 야기한 사회적 불평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하여 정부가 정책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는데, 국가의 형태에 따라서 그 개입의 정도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3장과 4장에서는 장기전세주택 정책에 대한 정책당국자들과 실제 입주자를 중심으로 인식의 변화를 조사한 결과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정리해보면 주택에 대한 개념은 아직도 투자에 가깝다고 볼 수 있으나 거주수단으로 인식하는 비중이 적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인식의 변화가 일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장기전세주택의 공급물량이 늘어가게 된다면 이러한 인식의 변화가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고 있습니다.

 

임성은 박사의 <장기전세주택>은 저자가 연구과정에서 얻은 다양한 통계자료들을 인용하고 있고, 주제의 전개방식이 논문방식을 따르고 있어 딱딱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만,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삼대요소 가운데 하나인 주거문제를 다루고 있는 만큼 앞으로의 주택의 개념의 방향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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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 - 개정판
파울로 코엘료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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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보스턴에서 열린 학회에 갔을 적에 시간을 쪼개서 보스턴 시내의 명소를 걸어서 돌아보았습니다. 코플리 플레이스의 학회장에서 시작해서 올드 사우스교회, 보스턴 커먼, 그래너리 묘지, 킹스 채플, 옛날 주의사당, 올드코너 북스토어를 거쳐서 보스턴 항에 정박해있는 보스턴 티파티에 이르기까지 보스턴 역사에서 한 몫을 한 장소들입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2880647). 얼마나 되는 거리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만, 그리고 전철을 타고 보스턴 미술관으로 이동해서는 전시된 작품의 감상을 마치기까지 거의 여섯 시간을 강행군한 것입니다. 그동안 편하게 앉아 다리를 쉰 시간이라고는 간단한 점심을 먹는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2879810).

 

미리 예정한 일정이 아니라서 운동화를 미리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구두를 신고서 오래 걸었던 탓인지 귀국한 다음날 시작한 무릎통증이 고질병이 되어 지금도 걷기를 삼가고 있습니다. 아내와 함께 대중교통이 닿는 곳으로 나서곤 하던 주말걷기도 어쩔 수 없이 쉬고 있습니다. 지난해 가을은 유독 주말 날씨가 참 좋아서 주말마다 창밖을 내다보면서 억울함을 삭이곤 했습니다. 아내와 함께하는 걷기는 벌써 7년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주말에 다녀온 곳을 블로그에서 소개하다보니 소문이 났던지 월간지에서 걷기를 예찬하는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했습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3036544). 걷기가 좋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노릇이지만 막상 글로 옮기려니 쉽지가 않았습니다. 결국 걷기 좋아하시면서 좋은 글을 남긴 분들의 도움을 받게 되었는데, 다비드 르 브르통교수님의 <걷기예찬;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35107>에서 많은 도움을 얻었습니다.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라고 시작하는 브르통교수님의 <걷기예찬>은 여기에 더할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처음에는 체중을 줄이기 위해서 집근처에 있는 양재천 산책에 나섰던 것이 모 일간지에서 서울근교에 있는 걷기에 좋은 코스를 매주 소개하는 것을 보고 따라 걷는 것으로 발전하고, 아예 그런 코스를 엮은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걷기 여행;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25144>이라는 책을 사서 완주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은 한강변을 따라서 100km의 거리를 다섯 번에 나누어 걷는 코스들 입니다. 평균적으로 20km를 다섯 시간 정도에 걷도록 되어 있습니다. 100km를 완주한 다음에는 더 긴 코스를 따라 걸으면서 자신을 시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생겼는데, 생각의 나래는 제주의 올레길을 넘어, 제주 올레길을 만든 서명숙 이사장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가는 길에까지 날아가게 되었습니다.

 

위키백과에서는 ‘산티아고 가는 길’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산티아고 가는 길(Camino de San Tiago, Way of St. James), 산티아고 순례길은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가 복음을 전하려고 걸었던 길이다. 9세기 스페인 산티아고에서 야고보의 유해가 발견되고 야고보를 스페인의 수호성인으로 모시게 되면서 오늘날 순례길이 생겼다. 절대 만만한 코스가 아니며 프랑스 남부국경에서 시작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북부지방을 가로지르는 800km 여정. 한 달을 꼬박 걸어야 한다. 연금술사의 파올로 코엘료가 걸어 더욱 유명해졌다.”

 

직장에 메여 있어 아무래도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언제가 될지 몰라도 꼭 가보겠다는 생각만 해도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사실 긴 여행을 하는 경우 여행지를 직접 돌아보면서 감동을 얻는 것도 특별합니다만, 사실 저는 그 여행을 준비하면서 현지의 모습을 수도 없어 머릿속에 그려보는 과정에서 얻는 즐거움 또한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최근에 우연히 정인홍교수님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적은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50186>걸음 다가섰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소문에 듣기로는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한국 사람들을 제일 많이 만나게 된다고 할 정도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산티아고 가는 길’은 다양하다고 들었습니다만, 스페인 국경에서 가까운 프랑스의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이르는 길이 많이 알려져 있는 것 같습니다. 정인홍교수님은 ‘산티아고 가는 길’의 안내서가 아니라 그 길을 걸으면서 느낀 점을 기록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당연히 오감을 통하여 느낀 것을 단순하게 기록하기보다는 그가 가진 풍부한 인문학적 재료와 섞어서 더욱 풍성해진 느낌을 얻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전하는 이야깃거리를 더욱 쫄깃쫄깃하게 만들기 위하여 인용하는 많은 책들 가운데서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를 제일 먼저 맛보기로 했습니다.

 

<순례자>는 <연금술사로>로 잘 알려진 파울로 코엘료의 첫 번째 작품인데 1986년 산티아고 순례길을 따라 걸은 느낌을 바탕으로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순례자>의 마지막에 있는 작가의 말에 붙인 원주에 “내가 순례하던 그해에는(1886년) 산티아고 순례자들이 연간 4백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2005년의 비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매일 4백명이 넘는 순례자가 이 글에 나오는 바 앞을 지나갔다고 한다.(341쪽)”고 적고 있습니다. 아마도 “<순례자>를 읽고 나는 언젠가 ‘산티아고의 길’에 가리라 예감했고, 또 그러리라 결심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 길을 걷게 되었다. ‘산티아고의 길’은 내게 ‘모비 딕’과도 같은 것이었다. 언젠가 꼭 해내리라 다짐하는 그 무엇. <순례자>는 내게 생의 시간을 여행하도록 영감을 불어넣어주었다. 그리고 그 길에서 나는 상상도 못 했던 많은 것들을 발견하게 되었다.”라고 적은 아마존 서평처럼 코엘료의 <순례자>가 산티아고 가는 길을 홍보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순례자>는 람(RAM)이라고 하는 상징적인 언어의 구전에 기반을 둔 비밀스런 종파에서 활동하는 저자가 마스터가 되기 위하여 나선 산티아고 순례를 통하여 삶의 신비를 깨우치는 훈련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걷는 사람들은 혼자서 걷거나 혹은 가까운 사람끼리 동행하기도 합니다만, <순례자>에서는 순례길에서 저자의 깨우침을 도와주는 인물로 페트루스가 동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종교단체가 실존하는가 하는 문제나 저자가 깨우치려는 것이 무엇인가는 그리 중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페트루스가 저자에게 소개하는 단계별 훈련방식은 충분히 의미를 새겨볼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정진홍교수님께서 눈보라 속에서 피레네 산맥을 오르면서 자신도 모르게 북받치듯 눈물이 났다고 적은 것을 읽었던 기억때문인지, 코엘료 역시 “생장피에드포르와 가까운 한 마을의 폐허를 걷다가 갑자기 강렬한 마음의 동요에 사로잡히면서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33쪽)”고 적은 부분에 눈길이 멎었습니다. 정진홍교수님이 코엘료의 <순례자>가 남긴 암시의 영향을 받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산티아고 가는 길’이 남자의 눈물을 끌어내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남자의 눈물이 금기였을 조선시대에도 연암 박지원선생이 삼류하를 건너 요양의 백탑이 멀리보이는 탁 트인 요동벌판에 서서 “훌륭한 울음터로다! 크게 한번 통곡할 만한 곳이로구나!”라고 하셨다니 ‘산티아고 가는 길’과 요동벌판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을 것 같습니다.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페트루스는 코엘료에게 람의 의례를 순서대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거듭남을 익히는 ‘씨앗훈련’, 평소 무관심했던 것들을 발견하기 위하여 느리게 걷는 ‘속도훈련’, 자신에게 관대해지도록 하는 ‘잔인성 훈련’, 자신을 돌보는 사자(使者)를 만나게 해주는 ‘사자의 의식’, 직관을 깨어나게 하는 ‘물의 훈련’, 아가페의 의식인 ‘푸른 천체 의식’, 죽음의 두려움을 일깨우는 ‘산 채로 매장당하는 훈련’, 주위로부터 기를 끌어오는 ‘람 호흡법’, 나쁜 결정을 인식하는 ‘그림자 훈련’, 삶이 매순간 우리에게 주는 조언을 들을 수 있는 ‘듣기 훈련’, 의식을 거행할 때 쓰게 될 ‘춤의 훈련’ 등입니다. 이와 같은 훈련은 종교적인 깨달음을 얻는 방법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기억하면 좋은 습관 같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순례자에게 산티아고 길은 어떠한 의미일까요? 순례를 시작해서 하루면 넘을 수 있는 피레네 산속을 일주일에 걸쳐 걸을 때 페트루스가 순례자에게 건넨 말을 곱씹어 보게 됩니다. “여행을 하다보면 거듭남의 행위와 관련된 매우 실제적인 경험을 하게 되지요. 당신은 완전히 새로운 상황에 처한 겁니다. (…) 모든 것이 새롭기 때문에, 사물의 아름다운 면만 보게 되고 살아있음을 더 행복하게 느끼게 됩니다. 그런 이유로 언제나 사람들은 성지 순례가 계시에 이르는 가장 객관적인 방법 중 하나라고 여겼던 것이지요.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조금씩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새로운 상황에 적응해가고, 구하는 자에게 삶이 관대하게 베풀어주는 수많은 축복을 답례로 받아들이면서 말이죠.(51쪽)”

 

‘산티아고 가는 길’처럼 출발점에서 목적지가 정해진 코스를 걷다보면 미리 정한 일정에 맞추려 노력하거나 아무래도 목적지를 염두에 걷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되면 걷기가 고행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페트루스가 전한 람의 의례 가운데 ‘속도훈련’이 순례길에서 무심하게 지나칠 수도 있는 것들을 발견하기 위하여 느리게 걷는 법을 익히기 위한 것이었음을 기억하십니까? 느리게 걸으면 고행으로만 느껴지던 걷기가 기쁨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순례길에 숨어있는 메시지를 발견해냈다는 즐거움이 만들어내는 기쁨인 것입니다. 정진홍교수님이 바람부는 벤토사의 한적한 길에서 바람과 풀이 사랑하는 듯한 모습을 읽은 것처럼 말입니다. 김수영시인의 <풀>에서 모티프를 얻은 듯합니다. “(…)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

 

정진홍교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풀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길가의 풀들이 바람 속에 누웠다 섰다를 반복하며 내게 말을 걸어온다. 풀들의 목소리는 한결같았다. ‘우리는 바람과 다툰 적 없어요. 우리는 바람과 싸운 적 없어요. 바람은 우리의 적이 아니에요. 우리는 바람을 사랑해요. 바람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늘거리며 춤출 수 있겠어요. 사람들은 꼼짝도 않는 우리를 죽었는 줄 알거예요. 그래서 뿌리째 뽑아버릴지도 모르죠. 하지만 바람 덕분에 사람들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걸 알잖아요.’(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 141쪽)”

 

코엘료가 순례길에서 만난 어떤 상인은 “순례는 성자들이나 하는 거요.(135쪽)”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코엘료 역시 람이라고 하는 비밀종파의 마스터가 되기 위하여 산티아고 가는 길을 따라 훈련을 받고 있는 것이므로 상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꼭 성자나 교인이라야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걷는다>의 작가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걷기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치유활동”이라고 한 것처럼 그저 걷기에 좋다면 걸어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에베레스트 산에 최초로 도전했던 미국의 산악인 조지 맬러리가 “산이 그곳에 있어 오른다(Because it is there)”라고 말한 것처럼 “그곳에 길이 있어 걷는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요?

 

코엘료는 산티아고 가는 길의 순례에서 얻은 ‘자신의 검의 비밀’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습니다. “내 검의 비밀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얻는 모든 성취의 비밀과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것이었다. 검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가 바로 그것이었다.(313쪽)” 그런데 검을 가지고 할 그 ‘무엇’이 어떤 것인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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