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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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박완서선생님의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읽었습니다. 글쓰는 분들의 산문을 읽으면 아무래도 내가 쓰고 있는 글이 더 초라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열심히 읽다보면 내 글도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전하고 싶은 내용만 간추려 요약하는 글쓰기 버릇을 바꾸지 못하는 제 입장에서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듯하고 혀끝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글을 읽으면 저도 모르게 ‘나는 언제쯤이나 이런 글을 써보려나’하는 생각을 합니다. 당연히 흉내를 내보려 노력은 합니다만, 웬지 맞지않는 옷을 입은 듯 거북스럽고 중언부언이 되는 것 같아 남에게 읽히기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는 선생님이 가시기 전 일상의 삶에서 느끼는 바를 ‘내 생애의 밑줄’에, 그리고 책을 읽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을 ‘책들의 오솔길’에 그리고 먼저 가신 분들을 생각하며 애닮은 마음을 담은 ‘그리움을 위하여’에 나누어 담고 있습니다.

 

‘책들의 오솔길’에서는 “아! 책을 읽은 느낌을 이렇게도 나눌 수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읽은 책에서 얻은 느낌들을 두루 나열하지 않고도 꼭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부분만을 요약하여 내 생각과 함께 전하는 것도 좋은 글쓰기가 되겠다 싶습니다. 선생님께서 느낌을 나누고자 했던 책들 가운데 몇권을 리스트에 갈무리해두었습니다. 일간 구해서 읽고 선생님의 느낌을 공유해보려 합니다.

 

‘내 생애의 밑줄’에 모은 글 가운데 적지 않은 내용이 남양주에서 마련하신 단독가옥에서 지내시며 얻은 생각으로 보입니다. 첫 번째 글이기도 하고,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아무래도 프로스트의 시 <가보지 않은 길>을 생각하신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남들이 덜 다닌 길을 갔었고 그래서 내 인생이 온통 달라진 것인데, 남들이 간 길을 갔더라면 더 아름다웠을까?

 

텃밭이 있는 시골집을 그리는 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골 종가집처럼 뒤란밖으로는 야트막한 산자락이 내려오고, 사랑채 툇마루에서 내다보면 멀리 저수지가 시원한 바람을 날라주는 그런 곳입니다. 이런 꿈은 돌아가신 선친께서도 가지셨지만, 어머님께서 반대하셔서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이유는 시골집에 사는 것이 꿈꾸는 것만큼 쉽지가 않다는 것이고, 선친께서 도움이 되지 못하시리 란 것을 아셨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저도 별로 다를 바 없어 선뜻 일을 벌이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선생님께서는 손톱 밑에 끼어든 흙에서 돋은 싹을 자랑하실 수 있다 하신 것을 보면 시골에 집을 장만하신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다.

 

요즈음 문화예술계도 진보와 보수로 갈려 각자의 본연의 일보다도 정치활동에 더 열심인 분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개성이 고향인 선생님은 먼눈으로 보이는 고향에 가볼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음에도 어느 한편으로 쏠리지 않은 무심함을 보이는 듯 합니다. 동족상잔의 전쟁을 온몸으로 겪으신 탓이라고 합니다. “어쩜 그렇게 혹독한 추위 그렇게 무자비한 전쟁이 다 있었을까. 이념이라면 넌더리가 난다. 좌도 싫고 우도 싫다. 진보도 보수도 안 믿는다. 김훈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다만 바퀴없는 자들의 편이다.(68쪽)”

 

그러면서도 은근히 미국에 대하여 불편한 심사를 은근히 내비친 대목도 있습니다. 2002년 월드컵경기에서 미국과 붙었을 때 꼭 이기기를 바라셨다거나, 미국에서 일어난 잔혹한 살인사건 소식에 한국에서 사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고 강조하신 대목이 눈길을 끕니다. 그리고 남대문 방화사건이 철거보상금에 불만을 가진 노인네가 저지른 일이라고 하자 유신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경제우선주의의 폐해로 결론지은 것은 예단에 의한 것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 반면에 연평해전에서 산화한 젊은이나 북한의 소행으로 지목되고 있는 천안함사건에서 생떼같은 목숨을 바친 젊은이들 모두의 죽음에 애달파하시는 마음을 감추지 않으신 것을 보면 중도(中道)를 지켜오셨다고 보입니다.

 

이 세상에 섬길 어른이 없어진 나이를 안타까워하신 대목에서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에 섬길 어른이 없어졌다는 건 이승에서의 가장 처량한 나이다. 만추처럼. 돌아갈 고향이 없는 쓸쓸함, 내 정수리를 지그시 눌러줄 웃어른이 없다는 허전함때문이었을까. 예년에는 한 번 가던 추석 성묘를 올해는 두 번 다녀왔다.(28쪽)” 얼마 전에 공부했던 교실행사에 갔더니 이젠 위로 한분밖에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는 앞으로 교실행사에 참석하지 않으리라 작심한 때문입니다.

 

마무리를 하면 평생을 글쓰기와 함께하신 선생님께서 남기신 글에서 아쉬운 점을 느꼈다면 정말 웃기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만, 간혹 눈에 띄는 외래어가 생뚱맞다 느꼈다는 고백을 드립니다. 직업적 특성상 외래어를 많이 사용하는 축에 들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글을 쓸 때만은 외래어 사용을 자제하려 노력하는 탓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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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풍경 - 끈 이론이 밝혀낸 우주와 생명 탄생의 비밀 사이언스 클래식 18
레너드 서스킨드 지음, 김낙우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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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진화과정을 뒤쫓다보니 세상만물의 시원이 되는 우주의 기원에까지 호기심이 이르게 되었습니다. 특히 칼 세이건과 앤 드루얀은 인류의 기원을 뒤쫓은 기록서 <잊혀진 조상의 그림자;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97810>에서 우주가, 태양이, 그리고 지구가 태어나는 모습을 아주 간략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아득한 과거에 태양도 지구도 없었던 때가 있었다. (…) 기체와 먼지의 거대한 덩어리가 자체 중력으로 급속히 붕괴하면서 점차 빠른 속도로 회전함에 따라, 혼돈과 같이 불규칙하던 구름이 점차 질서정연한 얇은 원반형 구조로 변해간다. (…) 천체 형성의 모태가 되는 회전하는 원시 원반은 은하계 속에 펼쳐져 있는 광대한 성간진공에 잠재하는 희박한 물질들이 모여 형성된다.”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고 적은 <반야심경(般若心經)>의 구절에서 삼라만상의 시원이 될 우주탄생의 비밀을 엿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합니다. 하지만 관념적으로는 가능한 무에서 유가 탄생하는 일이 실재적으로는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하는 궁금증은 여전히 남습니다.

 

우주탄생의 비밀을 추적하는 다양한 과학분야 가운데 입자물리학에서는 우주가 아주 작은 알갱이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空)이 역설적으로 충만함을 의미한다는 해석과 궤를 같이 한다고 하겠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일반 상대성이론을 통하여 현대중력이론의 기초를 세웠습니다. 이미 생성된 우주에 흩어져 있는 별들의 움직임을 잘 설명하고 있는 이론입니다. 하지만 입자물리학에서 다루는 기본 입자들 사이에 작용하는 힘, 양자중력을 설명하기 위하여 중력과 양자역학을 결합한  수학적 이론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라고 합니다.

 

양자중력의 비밀을 밝히기 위하여 현대 입자물리학자들 끈 이론과 고리양자중력이론 등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하여 신뢰할 수 있는 영역과 신뢰할 수 없는 영역을 나누고 있는 회의주의자인 마이클 셔머는 <과학의 변경지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02415>에서 양자역학이나 대폭발 우주론의 이론이 확실한 근거 위에 세워진 정상과학으로 인정하고 있는 반면, 초끈 이론이나 인플레이션 우주론은 아직 이론의 근거가 부족한 변경지대의 과학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광양자, 전자, 양성자, 중성자, 중간자, 중성미자, 양전자 등과 같은 소립자도 더 잘게 쪼개지는 입자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소립자들 사이에 작용하는 힘은 일반중력이론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합니다. 소립자들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설명할 수 있게 되면 우주의 시원을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끈이론을 요약하면,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최소단위가 점같이 생긴 입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진동하는, 매우 가느다란 끈이라는 이론입니다. 1960년대 소립자들의 상호작용을 설명하는 수학적 함수와 관련된 물리학적 모형이 1차원의 끈이라는 것을 래너드 서스킨스와 난부 요이치로에 의하여 밝혀졌습니다. 이렇게 입자물리학에 들어선 끈이론은 양자역학과 일반상대성이론을 조화시켜 양자중력이론으로 발전하면서 우주의 시원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우주의 풍경>은 끈이론을 연구하는 과학자 그룹을 이끌고 있는 스탠퍼드 대학교의 레너드 서스킨스 교수가 우주의 시원에 대한 설명을 담은 책입니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우주를 이루는 기본물질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이들이 초미세하게 조정되어 우주가 시작되는 과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놀라울 정도의 학문적 성취를 이룩한 과학자들이 창조론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조신학이라는 분야가 가능했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과학적 방법으로 설명할 수 없는 한계를 절감하였기 때문에 택한 신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반면에 “나는 진정한 과학은 초자연적인 존재를 끌어들이지 않고도 현상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10쪽)”고 말하는 저자와 같은 과학자들도 있습니다.

 

최근 미국에서 비정형광우병소가 발견되면서 다시 불거진 광우병위험에 대한 전문가들의 경고를 들으면서, 2008년 광우병과 인간광우병에 관한 과학적 사실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전혀 다른 주장을 하는 바람에 일반 국민들이 혼란에 빠졌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만큼 실험실에서 이루어낸 과학의 성과를 일반에 전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저자는 자신이 연구하는 입자물리학을 포함한 과학적 성과를 정리하여 대중에 전달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우주의 풍경>의 제1장을 이끄는 구절을 읽으면 그러한 평판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은 과연 무엇일까? 어떻게 이곳에 존재하게 되었을까? 나는 왜 여기 있는 것일까? 최초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런 질문들을 던졌던 첫 번째 우주론자의 이름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 또는 그녀가 아주 오래전 선사 시대에, 아마도 아프리카에 살았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다. 창조신화와 같은 최초의 우주론은 현재의 과학적 우주론과는 전혀 달랐지만 그것도 인간의 호기심에서 출발한 것은 마찬가지이다.(37쪽)”

 

<우주의 풍경>에서 저자는 현상의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입자들의 법칙인 표본모형을 설명하고, 우주와 그 법칙들이 절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 그러한 법칙들도 유일무이한 것이 아니라 장소와 시간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저자가 ‘풍경’이라는 용어를 제시하게 된 배경, 즉 풍경은 입자물리학의 이론적 환경의 전체 범위를 기술하기 위하여 만들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끈이론이 등장하게 된 배경으로부터 끈이론이 어떤 것인가 그리고 끈 이론이 과학의 패러다임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가를 살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3개의 공간차원에 시간이 더해진 4차원 세계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끈이론가들은 세계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10차원 혹은 11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의 실생활에 깊숙하게 들어와 있는 내비게이션도 발전하여 이제는 3D방식으로 길안내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특정 장소를 나타내기 위하여 위도와 경도, 표고 3개의 좌표값이 필요한 것입니다. 시간이 더해지는 4차원의 세계에서는 시각이라는 좌표가 더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0차원의 세계를 설명해야 하는 수학적 정합성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갖춘 하나의 이론을 만들고 이 이론에 따라 유일하게 결정되는 물리법칙이 실험과 관측을 통하여 정확하게 들어맞아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아직까지 이러한 실험적 뒷받침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고 옮긴이는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회의론자들이 초끈이론을 과학의 변경지대에 세워두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5차원에서 10차원에 이르는 세계에 적용할 좌표의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여 단순화하여 적용할 단순한 법칙을 만들기가 쉽지 않아서라고 합니다.

 

지난 주말에 지금 하고 있는 업무의 발전방향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기 위하여 같이 근무하시는 분들과 워크숍을 다녀왔습니다. 서울-춘천고속도로 강촌출입구를 빠져나와 구절양장 산길을 달려 도착한 곳은 홍천강이 내려다보이는 춘천 변두리의 산골이었습니다. 언덕 위에 있는 펜션에서 계곡너머로 펼쳐지는 산천의 아름다운 모습에 빠져들었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담고 있는 지구와 같은 행성이 우주에 얼마나 있을까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혹자들은 우주에는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살고 있는 행성은 지구 이외에는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주가 생성되고 태양계 그리고 지구가 만들어지게 된 과정이 얼마나 많은 우연이라는 상황이 겹쳐진 끝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란 이유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는 영어의 ‘우주(universe)’라는 단어가 단수형태로 표기되는 것처럼 하나인 것으로 생각해왔습니다. 하지만 끈이론가들은 메가버스(Megaverse)라는 개념을 고안해냈습니다.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우주와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우주이외의 우주가 실재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풍경개념과 메가버스의 개념을 이끌어낸 끈이론에 따르면 우주에는 수학적으로 모순이 없고, 우아하고 유일한 이론으로 설명할 수 우주는 10,500개나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구와 같은 생명체가 존재하는 행성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곳에 사는 생명체와 조우할 가능성은 여전히 불가능에 가깝다고 해야겠습니다.

 

큰 아이가 어렸을 적에 “네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있을 거야. 그 이유는 아마 네가 세상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이고, 그 일을 잘 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곰곰 생각해보렴”이라고 말해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더 나아가 지구가, 태양이, 그리고 우주가 만들어진 이유가 있을까요? <우주의 풍경>에서 그 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궁극적인 질문에 구체적인 답을 제시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초자연적 존재보다는 과학을 믿는다고 한 저자의 신념은 에필로그의 말미에도 담겨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실존적인 질문인 ‘왜 무(無)가 아니라 유(有)인가?’에 대한 답은 끈 이론이 발견되기 전과 지금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만약 창조의 순간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대폭발의 초기 역사에서 발생한 폭발적 급팽창의 장막으로 우리의 눈과 망원경으로부터 감춰졌을 것이다. 만약 신이 있다면, 그는 스스로 무의미해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나는 이제 피에르 시몽 드 라플라스의 말을 인용하며 이 책을 마치려고 한다. ‘저는 그 가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5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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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5-14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신문 <라포르시안>에서 SNS를 통한 댓글 이벤트를 통하여 도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소의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rapportian.com/n_news/news/view.html?no=5661

oren 2012-05-15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주의 풍경'에 대해 많은 생각들을 해볼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책인 것 같군요. 이 책의 저자가 에필로그에서 인용한 '라플라스'는 『천체역학』의 저자로만 대충 기억하는 인물이었는데, 19세기의 어느 철학자도 '천체의 움직임과 물질의 본질'에 대해 고찰하면서 '칸트와 라플라스'를 언급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그 철학자는 당시에 이미 뉴튼의 물리학이 지닌 한계를 포함하여 '과학이 지닌 근본적인 한계'를 분명하게 꿰뚫어 보면서, 먼 미래에 이르러 물리학이 아무리 발전을 거듭하더라도 '물질의 근원'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고 장담했었는데 21세기에 이르러 초끈이론이나 다중우주이론이 발견하는 내용들이 결국 '과학의 한계 너머'를 미리 내다본 그 철학자의 혜안과도 일맥상통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 * *

이것을 크게 보면, 중심 천체와 유성의 관계에도 나타나고 있다. 유성은 유기체에서 화학적인 힘과 마찬가지로 중심 천체에 결정적으로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이에 반항하고 있다. 거기에서 구심력과 원심력의 부단한 긴장이 생기고, 이 긴장이 우주의 운행을 유지시키고 있으며, 그 자신이 이미 우리가 지금 고찰하고 있는 의지의 현상에 고유한 보편적인 투쟁을 나타내는 하나의 표현이다. 왜냐하면 어떤 물체도 의지의 현상이라고 보지 않으면 안 되지만, 의지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노력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구형을 이루게 된 천체의 원상태는 정지가 아니고 휴식도 목표도 없이 앞을 향해 무한한 공간으로 나아가는 운동, 노력이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관성의 법칙도 인과의 법칙도 대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성의 법칙에 의하면, 물질은 정지나 운동에 대해 무관심하며, 물질의 근원적인 상태는 정지이기도 하고 운동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물질이 지금 운동하고 있을 경우, 우리는 그 운동에 선행하여 정지 상태가 있었다고 전제할 권리도 없고, 운동이 시작된 원인을 질문할 권리도 없다. 그와 반대로 그 물질이 정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정지 상태에 선행하는 운동을 전제하거나 운동이 그치고 정지가 시작된 원인을 질문할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원심력을 일으키는 최초의 충격은 찾아도 얻을 수 없다. 이 원심력은 칸트와 라플라스의 가설에 따르면, 유성의 경우 중심 천체 원래의 회전 잔재며, 여러 유성은 이 중심 천체가 수축할 때 거기에서 분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중심 천체는 그 자체는 본질적으로 운동하고 있다. 즉 중심 천체는 언제나 계속 회전하며 동시에 무한한 공간 속을 날고 있으며,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더 큰 중심 천체의 주위를 돌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천문학자들의 중심 태양에 대한 억측과 완전히 일치하며, 또 우리의 전 태양계나 우리의 태양이 속해 있는 모든 별들의 이동이 지각되는 것과도 일치한다.

결국 여기에서 중심 태양을 포함한 모든 항성이 이동한다는 추론도 나오지만, 이러한 이동은 무한한 공간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절대 공간에서 운동은 정지와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바로 그것 때문에 이미 직접적으로 목적 없는 노력이나 비상에 의한 것과 마찬가지로 허무와 궁극적인 목적 없는 표현이 되는 것이지만, 우리는 이 허무와 궁극적인 목적의 결여를 이 제2권의 마지막에서 의지와 노력에 의한 결과로 모든 현상 속에서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또다시 무한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이 의지의 모든 현상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형식이 아니면 안되며, 모든 현상은 의지의 본질을 표현하기 위해 현존하고 이다.

마지막으로 인과성을 물질로 본다면, 이 단순한 물질 속에서도 이미 이때까지 고찰한 것과 같은 모든 의지 현상 상호간의 투쟁이 행해지고 있는 것을 재인식할 수 있다. 즉 물질 현상의 본질을 칸트는 반발력과 견인력으로 표현하고 있고, 물질이 실재하는 것은 상반된 두 개의 힘이 투쟁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상과 같은 재인식이 가능하다. 만약 우리가 물질의 모든 화학적인 차이를 도외시하거나 인과의 연쇄를 거슬러 올라가 아직 아무런 화학적인 차별이 없는 것까지 생각하게 되면, 거기에 남는 것은 단순한 물질이다. 또 구상(球狀)으로 된 세계로서 생활, 즉 의지의 객관화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견인력과 반발력의 투쟁이다. 견인력은 중력으로 사방으로부터 중심을 향해 모든 사물을 밀어붙이고, 반발력은 강성에 의해서든 타성에 의해서든 불가입성으로서 견인력에 대항하는 것이지만, 끊임없는 박진과 대항은 최저 단계에서 의지의 객관성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또 이미 이 단계에서도 의지의 특질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최저 단계에서는 의지가 어떤 맹목적인 충동, 어떤 어둡고 막연한 활동으로 나타나 있어서 직접 인식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의지의 객관화 가운데 가장 단순하고 미약한 방식이다. 그런데 의지는 이러한 맹목적인 충동이나 인식이 없는 노력으로서는 무기적 자연 전체에도, 모든 근원적인 힘에도 나타나 있다. 이들의 힘들은 백만 가지의 동질적이고 규칙적인 현상에 자신을 드러내어 우리들에게 나타나는데, 개별적인 물질은 전혀 나타내지 않고 오직 시간과 공간에 의해, 즉 개별화의 원리에 의해 다양화되어 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상이 유리의 다각면을 통해 다양하게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2권 의지로서의 세계에 대한 제1고찰 中에서


처음처럼 2012-05-16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학의 한계를 철학적 사유로 인식하던 시절이 있었고, 과학에서는 한계를 뛰어넘으로는 노력을 부단하게 하고 있으니 그 결과를 지켜봐야 하겠습니다만, 자연과학 방식의 사고를 하는 저로서는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편입니다. 좋으 자료를 더하여 말씀을 정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개의 힘 2 밀리언셀러 클럽 125
돈 윈슬로 지음, 김경숙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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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출신 칼란이 우연히 조직원을 살해하고 쫓기지만 결국은 조직을 장악하게 되고 전문킬러가 되는 과정을 거쳐 바레라 카르텔의 조직을 지키는 역할을 떠맡게 됩니다. 이 과정에 아트와는 다른 정부조직에 속하고 있는 스카키의 조종을 받게 되는데, 스카키는 베트남전쟁에서 아트와 같이 일한 동료였습니다. 또 하나의 주인공 노라는 고급 매춘사업을 하는 헤일리의 눈에 띄어 철저한 교육을 받고 헤일리의 퀸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박경리선생님의 <토지>를 읽으면서 놀랐던 점은 등장인물의 방대함과 그토록 많은 등장인물이 촘촘히 엮여서 관계를 맺고 대단원의 결말에 이르면서 한치의 빈틈이 없어 정교하게 물려가는 점이었는데, 돈 위슬로의 <개의 힘>을 <토지>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적지 않은 등장인물이 잘 배치되어 관계를 맺고, 심지어는 그들의 죽음까지도 정교하게 계산되어 클라이맥스로 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트와 아단, 아단과 노라, 아단과 칼란 그리고 칼란과 노라 이들은 적절한 타이밍에 수인사(?)를 하고 모두들 클라이맥스를 이끌어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더욱 극적인 것은 멕시코의 풀뿌리민중을 사랑하는 후안신부가 주인공 4명 모두와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고, 그의 죽음, 사실 누가 그를 죽였는지 왜 죽였는지는 이야기가 끝나도록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만 후안신부가 중남미 마약카르텔과 반공산주의투쟁을 조정해온 미국 정부의 특수팀의 조정에 의하여 살해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라는 정신적으로 사랑하는 관계였던 후안신부를 죽인 사람이 아탄이라고 믿게 되고 그를 몰락시키기 위하여 아트와 협력하게 됩니다. 아트가 자신을 이용해서 기왕의 마약조직을 소탕하고 새로운 구축한 바레라 카르텔에 대한 분노는 어쩌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범죄조직을 도와준 꼴이 되고만 스스로에게 절망하게 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사가 스스로의 의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을 보면서 깜짝 놀라는 상황이 그리 드물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런 경우 상황을 제자리에 돌려놓아야겠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돌아가는 상황에 그대로 따르십니까? 어쩌면 아트는 결벽주의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젊었을 적 전도유망한 복서를 키워 세계챔피언을 만드는 꿈을 꾸었던 아단이 고향에서 마약농장 단속반에 걸려들어 사선을 헤맨 끝에 아트 덕분에 목숨을 구하면서 티오의 바레라 카르텔에 가담하고 결국은 파트론이 되고 자신의 사업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은 모두 제거하는 악의 화신이 되고 마는데, 이런 과정을 작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단은 숫자를 믿고, 과학을 믿고, 물리학을 믿었다. 바로 이 순간, 아단은 악의 본성을 깨달았다. 악은 추진력이 있어서 일단 시작되면 멈출 수 없가 없었다. 물리학의 법칙이다.(124쪽)”

 

아단과 게로 멘데스가 조직의 생존을 건 대결을 펼치는 과정에서 중재에 나선 후안신부가 살해되는데, 아단의 측근인 파비안이 그 일을 떠맡았고, 파비안은 누구로부터 명령을 받았는지 분명치 않습니다. 후안신부가 저격을 당해 쓰러진 현장에 있던 칼란은 신부가 남긴 “당신들을 용서하겠고. 하느님은 당신들을 용서할 것이오(228쪽)”라는 마지막 말의 의미를 깨닫고자 조직을 떠나 술에 빠져 숨어살게 됩니다. 아무리 적을 사랑하라 했지만,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까지도 용서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후안신부가 남긴 한 마디는 결국 칼란의 마음을 움직였고, 노라의 마음을 굳게 만들어 이 스토리의 결말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용서가 무엇이었을까 꼼꼼히 따져봐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궁금한 것은 책의 제목이기도 한 ‘개의 힘’은 무엇일까 입니다. “확실히 아트의 내면에도 잠재되어 있었다. 개의 힘.(55쪽)” 아단의 내면에도 잠재되어 있는... 개에 대한 이야기는 다르게도 표현됩니다. “케르베로스는 파수꾼이 아니라 안내자였다. 헐떡이고, 이를 드러내고, 혀를 늘어뜨린 채 당신을 악의 세계로 초대하려고 안달을 내고 있는 안내자. 그리고 당신은 결코 저항할 수 없다.(343쪽)”

 

첨단과학을 활용하는 시대에서 치루는 전쟁은 역설적이게도 디지털로 무장한 상대에게는 오히려 아날로그 방식이 더 효과를 보는 경우를 봅니다. 베트남전쟁에서도 디지털로 무장한 미국이 아나로그방식으로 파고든 월맹군에 결국은 손을 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소설을 리뷰하면서 시시콜콜 스토리를 요약하면 스포일링이 될 것 같아 제게는 특히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흐름을 소개하지 않고는 심심한 리뷰가 될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중요한 포인트는 요약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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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힘 1 밀리언셀러 클럽 124
돈 윈슬로 지음, 김경숙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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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은 <마약의 역사; http://blog.joinsmsn.com/yang412/12789709>에서는 인류가 마약을 이용해온 발자취를 따라가 볼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동물 역시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는 마약성분을 함유한 생물체를 활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마약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같이 한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심지어 메케너는 실로빈과 같은 환각성 알칼로이드를 함유한 향정신성 식물들이 지닌 특수한 능력을 발견하고 섭취한 원숭이에서 뇌기능이 발전하여 진행된 진화의 결과로 인류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마약원숭이가설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마약의 역사>에서는 유럽의 제국주의국가들이 아시아와 신대륙에서 경제적 이권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마약을 주요 교역수단으로 활용한 적이 있고, 미국 역시 남미를 포함한 제3세계에 개입하는 과정에서 불법적인 마약생산과 유통에 깊숙한 관련을 맺었다는 사실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쿠바커넥션, 프렌치커넥션, 피자커넥션 등 냉전의 부산물로 물밑에서 긴밀하게 밀고 당기던 국제정세 속에서 마약은 중요한 거래의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아일랜드계 작가 돈 윈슬로의 <개의 힘>은 바로 멕시코를 중심으로 하여 미국의 남부지역, 그리고 컬럼비아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지역을 무대로 펼쳐지는 마약거래의 커넥션을 파헤치고 있습니다. 멕시코를 중심으로 한 핵심 마약거래조직 바레라 카르텔이 부상해서 몰락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바레라 카르텔의 상대는 미국 법무국 마약단속국의 CIA출신 요원 아트 켈러입니다. 미국인 아버지가 멕시코에서 만난 어머니와 결혼해서 태어났지만, 일찍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게 된 켈러는 세상을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는 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됩니다. 가족, 특히 아버지의 역할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주관을 세우고 살지만, 한때 자신이 전체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결정한 선택이 가져온 커다란 잘못을 바로잡기 위하여 스스로를 위험한 상황에 몰아넣는 결정을 하기도 합니다.

 

<개의 힘>은 1975년 멕시코에서 시작된 대대적인 아편농장 소탕에 이어 아편을 생산하여 유통시키는 카르텔의 대부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바레라 카르텔이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부상하여 2003년에 몰락하기에 이르기까지 무려 3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벌어진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월을 씨줄로 그리고 뉴욕, 샌디에고, 멕시코, 그리고 컬럼비아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지역을 날줄로 촘촘히 엮어 한편의 장대한 서사를 그려낸 작가의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생각해봅니다. 아일랜드 사람들의 끈질긴 기질이 힘이 되었을까요?

 

1부에서는 마약 단속반 아트, 마약 조직 보스 아단, 고급 매춘부 노라, 킬러 칼란 등 네 주인공들이 서로 얽히는 과정을 펼쳐놓고 있습니다. 살다보면 우연의 연속이라는 느낌이 드는 세상사가 사실은 필연적으로 얽히도록 조정되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작가는 멕시코에서 마약이 생산되고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흘러들어가는 과정을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쿠바사태로 놀랐던 미국정부가 중남미국가들에 영향력을 미치려는 공산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마약조직을 끌어들였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고, 중남미 국가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들, 예를 들면, 1988년 제도혁명당 선거 조작 의혹, 1989년 유력 후보 루이스 카를로스 갈란 암살, 또 다른 유력 후보 베르나르도 하라미요 오사 암살, M-19 대통령 후보 카를로스 피사로 암살, 루이스 도날도 콜로시오 암살 사건, 과테말라 오스카 로메로 신부 암살 등과 같은 실제 사건들을 이야기 속에서 재현하여 긴박감을 더하고 있습니다.

 

흔히 숙명의 라이벌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만, 한창 피끓는 나이에 멕시코 시날로아에 부임한 미국정부의 마약단속반원 아트가 조직에서 왕따를 당하다가 우연히 체육관에서 만난 아단과 인연을 맺고 당시 멕시코에서 생산되는 아편의 유통을 한손에 쥐고 있던 돈 페드로 아빌레스를 제거하는 엄청난 전과를 올리면서 부서의 핵심요원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바레라 카르텔의 티오가 이 과정을 처리하는 과정을 보면 작가가 손자병법을 따로 공부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즉, 이이제이(以夷制夷) 수법입니다. 미국 정부와 멕시코정부의 합동 마약단속반의 힘을 빌어 멕시코를 장악하고 있는 마약카르텔을 무너뜨린 다음 흩어진 조직을 새롭게 짜낸다는 전략입니다. 특히 양귀비 재배의 특성상 지력을 소생시키기 위해서 양귀비밭을 엎어야 할 상황이었고, 오랜 가뭄이 찾아들 조짐이 보이는 시점이었으니 바레라 카르텔의 파트론은 천시와 지리를 읽을 줄 아는 대단한 지도자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개의 힘’은 무엇일까요? 바레라 카르텔을 세운 티오가 아트를 개처럼 이용해서 자신의 적을 덮치게 했고, 덕분에 아트는 조직에서 영웅이 되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개자식이라 저주를 하고 있습니다. 그 대가로 판 영혼을 다시 되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만, 아내와 아들이 눈에 밟히는 것이지요. 아트는 어떤 선택을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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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합이란 무엇인가 - 융합의 과거에서 미래를 성찰한다 미래 융합 아카데미 1
홍성욱 엮음 / 사이언스북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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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에서 조용하게 등장했던 융합이란 용어가 사회적 관심사가 되고 있는 것은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의 안철수 원장의 정치적 행보 때문만은 아닌 듯합니다. 서울대학교를 비롯하여 포항공대, 호서대학에서 융합대학원을 설치한데 이어 성균관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가 의학부문에서도 융합대학원을 설치하였다고 합니다.

 

다음 국어사전은 “① 서로 섞이거나 조화되어 하나로 합쳐지다 ② 둘 이상의 사물을 서로 섞거나 조화시켜 하나로 합함.”이라고 융합(融合)을 풀이하고 있습니다. 학계의 화두가 되고 있는 융합의 의미를 지식의 융합, 그 중에서도 학문의 융합을 통해서 시너지효과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학문의 융합이란 “다른 종류의 학제에 기반한 학문이 하나로 합하여지거나 그렇게 만듦”이라고 박상욱교수님은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니 몇 년 전 에드워드 윌슨교수의 화제작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를 최재천교수님이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하면서 제시한 ‘통섭(consilience)’이란 조어가 한동안 회자되었던 기억이 납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4895225). 인간의 사회적 행동양식도 생물학적, 유전적 진화과정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는 “사회생물학”을 처음 제창한 에드워드 윌슨이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만남으로 서로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란 주장을 <통섭>에 담은 것이었습니다. 윌슨교수님이 제창한 통섭이란 학문적 개념을 우려의 시각으로 바라본 분들도 있었습니다. 윌슨교수의 하버드대학교 동료인 존 벡위드교수는 사회생물학이 한때 인류공존에 위협이 되었던 우생학의 망령을 되살릴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를 <과학과 사회운동 사이에서; http://blog.joinsmsn.com/yang412/11205257>를 통하여 설파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박상욱교수님은 통섭이 학문간의 통합을 통하여 방법론을 공유하는 정도의 개념이라 한다면 융합은 서로 다른 두 학문을 녹여 전혀 새로운 학문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인의 관심을 끄는 정도에 머물렀던 통섭과는 달리 학문의 영역을 변화시키고 있는 융합에 대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홍성욱교수님을 비롯한 여섯 분이 필진으로 참여하고 있는 <융합이란 무엇인가>에서 화제가 되고있는 ‘융합’이란 개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개 이상의 서로 다른 학문을 하나로 녹여내기 위해서는 각각의 분야에서 상당한 학문적 성과를 이루어야 가능한 일이겠습니다. 따라서 두 분야를 전공한 사람들을 모아서 하나의 학제에 묶어두는 물리적 융합으로는 기대했던 성과를 낼 수 없을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당연히 화학적 융합이 일어나야 하겠는데, 우리 옛말에도 있는 ‘팔방미인’이라는 말처럼 깊이는 없으면서 두루 걸쳐놓은 학문적 관심만으로는 해당 학문의 융합을 이룰 임계점을 넘어설 수 없다는 점이 또 다른 한계라 하겠습니다.

 

<융합이란 무엇인가>에서는 융합학문의 이론적 설명을 서두로 하여 학제가 융합이 성공한 분야를 예시하고 있으며, 미래에 융합학문이 어떤 모습으로 형상화될 것인가를 예측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생명과학분야의 독자들이 많으실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박형욱교수님이 맡으신 노화와 장수를 주제로 한 글을 읽은 느낌을 정리해보려 합니다.

 

칼로리섭취와 장수와의 관계는 노화학을 전공하시는 분들이 오랫동안 주목해오고 있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오래 전에 제가 미국 텍사스에 있는 샌안토니오에 갔을 때 마우스를 이용하여 칼로리섭취와 수명을 연구하는 실험실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양껏 먹이는 마우스에 비하여 사료의 양을 줄여서 먹이는 마우스가 더 오래 산다는 실험결과에 고무되어 귀국한 다음 소식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는 우리네 속담을 핑계로 내세웠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박형욱교수님께서 소개하시는 글에서 칼로리와 노화에 관한 선구적 연구에 처음 착안했던 맥케이의 초기 실험에서 칼로리를 제한한 동물들이 비교적 젊고 건강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구조적 기능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는 지적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칼로리를 제한한 동물이 크기와 몸무게가 떨어졌을 뿐 아니라 뼈에 칼슘이 부족해서 작은 충격에도 골절이 일어나기도 했고, 생식기능도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풍부한 영양을 섭취하게 된 우리 아이들이 부모세대보다 키도 크고 체격도 좋아졌다는 점을 금새 깨닫게 됩니다. 칼로리 제한이 장수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분명 장점이 있다고 보지만, 건강 전체를 놓고 본다면 손익을 면밀하게 따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밖에도 멕케이가 실험모델을 구축하는 과정에서는 실험동물분야의 수준도 지금보다 낮아서 순수혈통이라는 개념이 없을 때이기 때문에 실험성적의 일관성 등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멕케이의 모델동물을 이용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노화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었던 것은 영양학과 축산학 등의 결합이 발단이 되어 생명과학 및 의학 영역으로 확대되어 장수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영역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전진권교수님과 장대익교수님께서 함께 쓰신 합성생물학 분야에서 융합의 성공사례는 놀랍기도 하고, 최근에 관심을 두고 읽었던 우주의 생성과 진화에 관한 책에서 얻었던 궁금증을 푸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눈먼시계공; http://blog.joinsmsn.com/yang412/12604835>에서 지구상에 살고 있는 생명체들이 지구상에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DNA라고 하는 화학적 구조에 그 유전정보를 담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었다면, 칼 세이건과 앤 드루얀의 <잊혀진 조상의 그림자;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97810>에서는 원시지구가 안정적 상태에 이르렀을 때 원소들이 서로 결합하여 DNA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DNA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실험실에서 구현하게 된 것도 유전학과 공학이 겹합한 합성생물학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공적으로 만든 유전체를 가진 최초의 합성 생명체를 만드는 과정을 담은 연구성과가 2010년 5월호 <사이언스>에 실렸다는 놀라운 소식도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공생명체를 만들어내는 일이 인류에게 어떤 의미가 될 것인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학의 발전과정에서 인류의 안녕을 위협하는 위기상황이 발생하고 이런 상황은 인간의 힘으로 해결되지 못하고 우연 혹은 자연의 힘으로 겨우 해결된다는 이야기를 어릴 때부터 읽어온 공상과학소설을 통해서 학습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실험실에서 인공생명체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생명체가 탄생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마음 한 구석에 남게 된다는 말씀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밖에 일부 필진이 제기하고 있는 사회적 의미가 조금 더 강한 융합의 논점은 논외로 하기로 하고, 학문 혹은 학제의 융합은 의학계 혹은 의료계에서도 많은 관심을 두어야할 것이라는 점을 짚어보려 합니다.

 

의학과 윤리학이 만나는 의료윤리분야만 하더라도 존엄사를 비롯하여 장기이식 등 다양한 이슈를 정리하는데 있어 인문학적 깊이를 갖춘 의학자들이 심도있는 연구를 통하여 그 의미를 정립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이를 실행하는데 있어 현행 법질서체계와 충돌하는 부분에 대하여는 법학의 담을 허물어야 할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의학교육에 인문학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하고, 다양한 분야의 기초지식을 갖춘 사람들이 의학을 공부할 수 있도록 하는 의학대학원제도가 도입되기도 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물리적 융합만으로는 기획했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오히려 생각지도 못했던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정책이 의학대학원제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외국에서 이미 운용하고 있는 제도이기도 할 뿐 아니라 도입 당시에 부담이 되고 있었던 대입제도의 해결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 예측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도를 도입하여 운용한 결과는 의학과 관련된 자연과학분야의 토대 자체가 흔들리는 상황을 불렀을 뿐만 아니라 기초의학 활성화 등 기대했던 효과는 전혀없고 오히려 개업의사만을 양산하는 부작용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의학대학원제도의 도입을 앞두고 의료계가 제기했던 우려가 그대로 현실화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사회는 충격적 변화에 저항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의학교육에 관한 제도를 단숨에 바꾸려했던 시도 역시 우리사회가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고 하겠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의학계에서 불고 있는 융합의 바람이 새로운 대안으로 자리잡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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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5-07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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