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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8월
평점 :
주말에 박완서선생님의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읽었습니다. 글쓰는 분들의 산문을 읽으면 아무래도 내가 쓰고 있는 글이 더 초라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열심히 읽다보면 내 글도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전하고 싶은 내용만 간추려 요약하는 글쓰기 버릇을 바꾸지 못하는 제 입장에서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듯하고 혀끝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글을 읽으면 저도 모르게 ‘나는 언제쯤이나 이런 글을 써보려나’하는 생각을 합니다. 당연히 흉내를 내보려 노력은 합니다만, 웬지 맞지않는 옷을 입은 듯 거북스럽고 중언부언이 되는 것 같아 남에게 읽히기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는 선생님이 가시기 전 일상의 삶에서 느끼는 바를 ‘내 생애의 밑줄’에, 그리고 책을 읽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을 ‘책들의 오솔길’에 그리고 먼저 가신 분들을 생각하며 애닮은 마음을 담은 ‘그리움을 위하여’에 나누어 담고 있습니다.
‘책들의 오솔길’에서는 “아! 책을 읽은 느낌을 이렇게도 나눌 수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읽은 책에서 얻은 느낌들을 두루 나열하지 않고도 꼭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부분만을 요약하여 내 생각과 함께 전하는 것도 좋은 글쓰기가 되겠다 싶습니다. 선생님께서 느낌을 나누고자 했던 책들 가운데 몇권을 리스트에 갈무리해두었습니다. 일간 구해서 읽고 선생님의 느낌을 공유해보려 합니다.
‘내 생애의 밑줄’에 모은 글 가운데 적지 않은 내용이 남양주에서 마련하신 단독가옥에서 지내시며 얻은 생각으로 보입니다. 첫 번째 글이기도 하고,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아무래도 프로스트의 시 <가보지 않은 길>을 생각하신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남들이 덜 다닌 길을 갔었고 그래서 내 인생이 온통 달라진 것인데, 남들이 간 길을 갔더라면 더 아름다웠을까?
텃밭이 있는 시골집을 그리는 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골 종가집처럼 뒤란밖으로는 야트막한 산자락이 내려오고, 사랑채 툇마루에서 내다보면 멀리 저수지가 시원한 바람을 날라주는 그런 곳입니다. 이런 꿈은 돌아가신 선친께서도 가지셨지만, 어머님께서 반대하셔서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이유는 시골집에 사는 것이 꿈꾸는 것만큼 쉽지가 않다는 것이고, 선친께서 도움이 되지 못하시리 란 것을 아셨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저도 별로 다를 바 없어 선뜻 일을 벌이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선생님께서는 손톱 밑에 끼어든 흙에서 돋은 싹을 자랑하실 수 있다 하신 것을 보면 시골에 집을 장만하신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다.
요즈음 문화예술계도 진보와 보수로 갈려 각자의 본연의 일보다도 정치활동에 더 열심인 분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개성이 고향인 선생님은 먼눈으로 보이는 고향에 가볼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음에도 어느 한편으로 쏠리지 않은 무심함을 보이는 듯 합니다. 동족상잔의 전쟁을 온몸으로 겪으신 탓이라고 합니다. “어쩜 그렇게 혹독한 추위 그렇게 무자비한 전쟁이 다 있었을까. 이념이라면 넌더리가 난다. 좌도 싫고 우도 싫다. 진보도 보수도 안 믿는다. 김훈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다만 바퀴없는 자들의 편이다.(68쪽)”
그러면서도 은근히 미국에 대하여 불편한 심사를 은근히 내비친 대목도 있습니다. 2002년 월드컵경기에서 미국과 붙었을 때 꼭 이기기를 바라셨다거나, 미국에서 일어난 잔혹한 살인사건 소식에 한국에서 사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고 강조하신 대목이 눈길을 끕니다. 그리고 남대문 방화사건이 철거보상금에 불만을 가진 노인네가 저지른 일이라고 하자 유신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경제우선주의의 폐해로 결론지은 것은 예단에 의한 것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 반면에 연평해전에서 산화한 젊은이나 북한의 소행으로 지목되고 있는 천안함사건에서 생떼같은 목숨을 바친 젊은이들 모두의 죽음에 애달파하시는 마음을 감추지 않으신 것을 보면 중도(中道)를 지켜오셨다고 보입니다.
이 세상에 섬길 어른이 없어진 나이를 안타까워하신 대목에서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에 섬길 어른이 없어졌다는 건 이승에서의 가장 처량한 나이다. 만추처럼. 돌아갈 고향이 없는 쓸쓸함, 내 정수리를 지그시 눌러줄 웃어른이 없다는 허전함때문이었을까. 예년에는 한 번 가던 추석 성묘를 올해는 두 번 다녀왔다.(28쪽)” 얼마 전에 공부했던 교실행사에 갔더니 이젠 위로 한분밖에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는 앞으로 교실행사에 참석하지 않으리라 작심한 때문입니다.
마무리를 하면 평생을 글쓰기와 함께하신 선생님께서 남기신 글에서 아쉬운 점을 느꼈다면 정말 웃기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만, 간혹 눈에 띄는 외래어가 생뚱맞다 느꼈다는 고백을 드립니다. 직업적 특성상 외래어를 많이 사용하는 축에 들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글을 쓸 때만은 외래어 사용을 자제하려 노력하는 탓인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