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풍경 - 끈 이론이 밝혀낸 우주와 생명 탄생의 비밀 사이언스 클래식 18
레너드 서스킨드 지음, 김낙우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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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진화과정을 뒤쫓다보니 세상만물의 시원이 되는 우주의 기원에까지 호기심이 이르게 되었습니다. 특히 칼 세이건과 앤 드루얀은 인류의 기원을 뒤쫓은 기록서 <잊혀진 조상의 그림자;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97810>에서 우주가, 태양이, 그리고 지구가 태어나는 모습을 아주 간략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아득한 과거에 태양도 지구도 없었던 때가 있었다. (…) 기체와 먼지의 거대한 덩어리가 자체 중력으로 급속히 붕괴하면서 점차 빠른 속도로 회전함에 따라, 혼돈과 같이 불규칙하던 구름이 점차 질서정연한 얇은 원반형 구조로 변해간다. (…) 천체 형성의 모태가 되는 회전하는 원시 원반은 은하계 속에 펼쳐져 있는 광대한 성간진공에 잠재하는 희박한 물질들이 모여 형성된다.”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고 적은 <반야심경(般若心經)>의 구절에서 삼라만상의 시원이 될 우주탄생의 비밀을 엿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합니다. 하지만 관념적으로는 가능한 무에서 유가 탄생하는 일이 실재적으로는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하는 궁금증은 여전히 남습니다.

 

우주탄생의 비밀을 추적하는 다양한 과학분야 가운데 입자물리학에서는 우주가 아주 작은 알갱이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空)이 역설적으로 충만함을 의미한다는 해석과 궤를 같이 한다고 하겠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일반 상대성이론을 통하여 현대중력이론의 기초를 세웠습니다. 이미 생성된 우주에 흩어져 있는 별들의 움직임을 잘 설명하고 있는 이론입니다. 하지만 입자물리학에서 다루는 기본 입자들 사이에 작용하는 힘, 양자중력을 설명하기 위하여 중력과 양자역학을 결합한  수학적 이론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라고 합니다.

 

양자중력의 비밀을 밝히기 위하여 현대 입자물리학자들 끈 이론과 고리양자중력이론 등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하여 신뢰할 수 있는 영역과 신뢰할 수 없는 영역을 나누고 있는 회의주의자인 마이클 셔머는 <과학의 변경지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02415>에서 양자역학이나 대폭발 우주론의 이론이 확실한 근거 위에 세워진 정상과학으로 인정하고 있는 반면, 초끈 이론이나 인플레이션 우주론은 아직 이론의 근거가 부족한 변경지대의 과학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광양자, 전자, 양성자, 중성자, 중간자, 중성미자, 양전자 등과 같은 소립자도 더 잘게 쪼개지는 입자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소립자들 사이에 작용하는 힘은 일반중력이론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합니다. 소립자들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설명할 수 있게 되면 우주의 시원을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끈이론을 요약하면,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최소단위가 점같이 생긴 입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진동하는, 매우 가느다란 끈이라는 이론입니다. 1960년대 소립자들의 상호작용을 설명하는 수학적 함수와 관련된 물리학적 모형이 1차원의 끈이라는 것을 래너드 서스킨스와 난부 요이치로에 의하여 밝혀졌습니다. 이렇게 입자물리학에 들어선 끈이론은 양자역학과 일반상대성이론을 조화시켜 양자중력이론으로 발전하면서 우주의 시원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우주의 풍경>은 끈이론을 연구하는 과학자 그룹을 이끌고 있는 스탠퍼드 대학교의 레너드 서스킨스 교수가 우주의 시원에 대한 설명을 담은 책입니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우주를 이루는 기본물질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이들이 초미세하게 조정되어 우주가 시작되는 과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놀라울 정도의 학문적 성취를 이룩한 과학자들이 창조론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조신학이라는 분야가 가능했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과학적 방법으로 설명할 수 없는 한계를 절감하였기 때문에 택한 신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반면에 “나는 진정한 과학은 초자연적인 존재를 끌어들이지 않고도 현상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10쪽)”고 말하는 저자와 같은 과학자들도 있습니다.

 

최근 미국에서 비정형광우병소가 발견되면서 다시 불거진 광우병위험에 대한 전문가들의 경고를 들으면서, 2008년 광우병과 인간광우병에 관한 과학적 사실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전혀 다른 주장을 하는 바람에 일반 국민들이 혼란에 빠졌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만큼 실험실에서 이루어낸 과학의 성과를 일반에 전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저자는 자신이 연구하는 입자물리학을 포함한 과학적 성과를 정리하여 대중에 전달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우주의 풍경>의 제1장을 이끄는 구절을 읽으면 그러한 평판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은 과연 무엇일까? 어떻게 이곳에 존재하게 되었을까? 나는 왜 여기 있는 것일까? 최초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런 질문들을 던졌던 첫 번째 우주론자의 이름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 또는 그녀가 아주 오래전 선사 시대에, 아마도 아프리카에 살았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다. 창조신화와 같은 최초의 우주론은 현재의 과학적 우주론과는 전혀 달랐지만 그것도 인간의 호기심에서 출발한 것은 마찬가지이다.(37쪽)”

 

<우주의 풍경>에서 저자는 현상의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입자들의 법칙인 표본모형을 설명하고, 우주와 그 법칙들이 절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 그러한 법칙들도 유일무이한 것이 아니라 장소와 시간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저자가 ‘풍경’이라는 용어를 제시하게 된 배경, 즉 풍경은 입자물리학의 이론적 환경의 전체 범위를 기술하기 위하여 만들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끈이론이 등장하게 된 배경으로부터 끈이론이 어떤 것인가 그리고 끈 이론이 과학의 패러다임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가를 살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3개의 공간차원에 시간이 더해진 4차원 세계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끈이론가들은 세계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10차원 혹은 11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의 실생활에 깊숙하게 들어와 있는 내비게이션도 발전하여 이제는 3D방식으로 길안내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특정 장소를 나타내기 위하여 위도와 경도, 표고 3개의 좌표값이 필요한 것입니다. 시간이 더해지는 4차원의 세계에서는 시각이라는 좌표가 더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0차원의 세계를 설명해야 하는 수학적 정합성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갖춘 하나의 이론을 만들고 이 이론에 따라 유일하게 결정되는 물리법칙이 실험과 관측을 통하여 정확하게 들어맞아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아직까지 이러한 실험적 뒷받침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고 옮긴이는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회의론자들이 초끈이론을 과학의 변경지대에 세워두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5차원에서 10차원에 이르는 세계에 적용할 좌표의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여 단순화하여 적용할 단순한 법칙을 만들기가 쉽지 않아서라고 합니다.

 

지난 주말에 지금 하고 있는 업무의 발전방향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기 위하여 같이 근무하시는 분들과 워크숍을 다녀왔습니다. 서울-춘천고속도로 강촌출입구를 빠져나와 구절양장 산길을 달려 도착한 곳은 홍천강이 내려다보이는 춘천 변두리의 산골이었습니다. 언덕 위에 있는 펜션에서 계곡너머로 펼쳐지는 산천의 아름다운 모습에 빠져들었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담고 있는 지구와 같은 행성이 우주에 얼마나 있을까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혹자들은 우주에는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살고 있는 행성은 지구 이외에는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주가 생성되고 태양계 그리고 지구가 만들어지게 된 과정이 얼마나 많은 우연이라는 상황이 겹쳐진 끝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란 이유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는 영어의 ‘우주(universe)’라는 단어가 단수형태로 표기되는 것처럼 하나인 것으로 생각해왔습니다. 하지만 끈이론가들은 메가버스(Megaverse)라는 개념을 고안해냈습니다.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우주와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우주이외의 우주가 실재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풍경개념과 메가버스의 개념을 이끌어낸 끈이론에 따르면 우주에는 수학적으로 모순이 없고, 우아하고 유일한 이론으로 설명할 수 우주는 10,500개나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구와 같은 생명체가 존재하는 행성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곳에 사는 생명체와 조우할 가능성은 여전히 불가능에 가깝다고 해야겠습니다.

 

큰 아이가 어렸을 적에 “네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있을 거야. 그 이유는 아마 네가 세상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이고, 그 일을 잘 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곰곰 생각해보렴”이라고 말해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더 나아가 지구가, 태양이, 그리고 우주가 만들어진 이유가 있을까요? <우주의 풍경>에서 그 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궁극적인 질문에 구체적인 답을 제시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초자연적 존재보다는 과학을 믿는다고 한 저자의 신념은 에필로그의 말미에도 담겨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실존적인 질문인 ‘왜 무(無)가 아니라 유(有)인가?’에 대한 답은 끈 이론이 발견되기 전과 지금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만약 창조의 순간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대폭발의 초기 역사에서 발생한 폭발적 급팽창의 장막으로 우리의 눈과 망원경으로부터 감춰졌을 것이다. 만약 신이 있다면, 그는 스스로 무의미해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나는 이제 피에르 시몽 드 라플라스의 말을 인용하며 이 책을 마치려고 한다. ‘저는 그 가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5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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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5-14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신문 <라포르시안>에서 SNS를 통한 댓글 이벤트를 통하여 도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소의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rapportian.com/n_news/news/view.html?no=5661

oren 2012-05-15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주의 풍경'에 대해 많은 생각들을 해볼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책인 것 같군요. 이 책의 저자가 에필로그에서 인용한 '라플라스'는 『천체역학』의 저자로만 대충 기억하는 인물이었는데, 19세기의 어느 철학자도 '천체의 움직임과 물질의 본질'에 대해 고찰하면서 '칸트와 라플라스'를 언급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그 철학자는 당시에 이미 뉴튼의 물리학이 지닌 한계를 포함하여 '과학이 지닌 근본적인 한계'를 분명하게 꿰뚫어 보면서, 먼 미래에 이르러 물리학이 아무리 발전을 거듭하더라도 '물질의 근원'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고 장담했었는데 21세기에 이르러 초끈이론이나 다중우주이론이 발견하는 내용들이 결국 '과학의 한계 너머'를 미리 내다본 그 철학자의 혜안과도 일맥상통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 * *

이것을 크게 보면, 중심 천체와 유성의 관계에도 나타나고 있다. 유성은 유기체에서 화학적인 힘과 마찬가지로 중심 천체에 결정적으로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이에 반항하고 있다. 거기에서 구심력과 원심력의 부단한 긴장이 생기고, 이 긴장이 우주의 운행을 유지시키고 있으며, 그 자신이 이미 우리가 지금 고찰하고 있는 의지의 현상에 고유한 보편적인 투쟁을 나타내는 하나의 표현이다. 왜냐하면 어떤 물체도 의지의 현상이라고 보지 않으면 안 되지만, 의지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노력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구형을 이루게 된 천체의 원상태는 정지가 아니고 휴식도 목표도 없이 앞을 향해 무한한 공간으로 나아가는 운동, 노력이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관성의 법칙도 인과의 법칙도 대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성의 법칙에 의하면, 물질은 정지나 운동에 대해 무관심하며, 물질의 근원적인 상태는 정지이기도 하고 운동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물질이 지금 운동하고 있을 경우, 우리는 그 운동에 선행하여 정지 상태가 있었다고 전제할 권리도 없고, 운동이 시작된 원인을 질문할 권리도 없다. 그와 반대로 그 물질이 정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정지 상태에 선행하는 운동을 전제하거나 운동이 그치고 정지가 시작된 원인을 질문할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원심력을 일으키는 최초의 충격은 찾아도 얻을 수 없다. 이 원심력은 칸트와 라플라스의 가설에 따르면, 유성의 경우 중심 천체 원래의 회전 잔재며, 여러 유성은 이 중심 천체가 수축할 때 거기에서 분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중심 천체는 그 자체는 본질적으로 운동하고 있다. 즉 중심 천체는 언제나 계속 회전하며 동시에 무한한 공간 속을 날고 있으며,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더 큰 중심 천체의 주위를 돌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천문학자들의 중심 태양에 대한 억측과 완전히 일치하며, 또 우리의 전 태양계나 우리의 태양이 속해 있는 모든 별들의 이동이 지각되는 것과도 일치한다.

결국 여기에서 중심 태양을 포함한 모든 항성이 이동한다는 추론도 나오지만, 이러한 이동은 무한한 공간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절대 공간에서 운동은 정지와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바로 그것 때문에 이미 직접적으로 목적 없는 노력이나 비상에 의한 것과 마찬가지로 허무와 궁극적인 목적 없는 표현이 되는 것이지만, 우리는 이 허무와 궁극적인 목적의 결여를 이 제2권의 마지막에서 의지와 노력에 의한 결과로 모든 현상 속에서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또다시 무한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이 의지의 모든 현상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형식이 아니면 안되며, 모든 현상은 의지의 본질을 표현하기 위해 현존하고 이다.

마지막으로 인과성을 물질로 본다면, 이 단순한 물질 속에서도 이미 이때까지 고찰한 것과 같은 모든 의지 현상 상호간의 투쟁이 행해지고 있는 것을 재인식할 수 있다. 즉 물질 현상의 본질을 칸트는 반발력과 견인력으로 표현하고 있고, 물질이 실재하는 것은 상반된 두 개의 힘이 투쟁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상과 같은 재인식이 가능하다. 만약 우리가 물질의 모든 화학적인 차이를 도외시하거나 인과의 연쇄를 거슬러 올라가 아직 아무런 화학적인 차별이 없는 것까지 생각하게 되면, 거기에 남는 것은 단순한 물질이다. 또 구상(球狀)으로 된 세계로서 생활, 즉 의지의 객관화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견인력과 반발력의 투쟁이다. 견인력은 중력으로 사방으로부터 중심을 향해 모든 사물을 밀어붙이고, 반발력은 강성에 의해서든 타성에 의해서든 불가입성으로서 견인력에 대항하는 것이지만, 끊임없는 박진과 대항은 최저 단계에서 의지의 객관성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또 이미 이 단계에서도 의지의 특질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최저 단계에서는 의지가 어떤 맹목적인 충동, 어떤 어둡고 막연한 활동으로 나타나 있어서 직접 인식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의지의 객관화 가운데 가장 단순하고 미약한 방식이다. 그런데 의지는 이러한 맹목적인 충동이나 인식이 없는 노력으로서는 무기적 자연 전체에도, 모든 근원적인 힘에도 나타나 있다. 이들의 힘들은 백만 가지의 동질적이고 규칙적인 현상에 자신을 드러내어 우리들에게 나타나는데, 개별적인 물질은 전혀 나타내지 않고 오직 시간과 공간에 의해, 즉 개별화의 원리에 의해 다양화되어 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상이 유리의 다각면을 통해 다양하게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2권 의지로서의 세계에 대한 제1고찰 中에서


처음처럼 2012-05-16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학의 한계를 철학적 사유로 인식하던 시절이 있었고, 과학에서는 한계를 뛰어넘으로는 노력을 부단하게 하고 있으니 그 결과를 지켜봐야 하겠습니다만, 자연과학 방식의 사고를 하는 저로서는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편입니다. 좋으 자료를 더하여 말씀을 정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