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비즈니스의 맥 - 14억 소비자를 사로잡을
김상철 지음 / 알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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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경제나 경영을 전공한 것은 아니지만 새해가 되면 코트라가 시공사 알키팀을 통하여 내놓은 한해의 경제 트랜드에 관한 전망을 읽곤 합니다. 최근에 읽은 책으로는 <2012 한국을 뒤집을 14가지 트랜드; http://blog.joins.com/yang412/12475620>, <2013 세계, 기회와 도전; http://blog.joins.com/yang412/13012239>등이 있습니다. 읽다 보면 코트라가 참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코트라의 전체 조직이 움직여 내놓은 전망서 이외에도 주재국의 경제사정을 우리기업들에게 정확하게 전하는 역할도 한다는 사실을 코트라 상하이 무역관의 김상철관장님께서 쓰신 <중국비즈니스의 맥>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최근 미국발 금융위기가 유럽을 거쳐서 아시아에도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고, 그나마 버티고 있던 중국경제도 경착륙이 우려된다는 시각이 나오고 있는 시점에서 중국에 관심을 두고 있는 분들이 많은 가운데 적절한 타이밍에 나온 중국경제의 현주소를 파악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저 역시 2005년엔가 중국의료계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북경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만(http://blog.joins.com/yang412/4639134), 그때 무렵 중국에서 병원을 여는 한국의사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선구적인 분들이지요. 최근에 중국의 지방정부와 함께 의료관련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는 동창이 있어 더욱 관심을 기울여 읽었습니다.

 

지금까지 싼 인건비를 이용하는 단순 임가공 생산기지로 세계의 공장역할을 하던 중국이 변하고 있다고 합니다. 임금이 상승하면서 공장으로서의 매력이 떨어지면서 우리 기업들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정부 역시 변화하고 있는 사회적 여건을 고려하여 경제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수요 측면에서는 투자에서 소비로, 수출에서 내수로 전환하고 있고, 공급측면에서는 저부가가치에서 고부가가치로, 제조업 위주에서 서비스산업으로 중심축을 옮겨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중국사회의 변화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혼란스러워하는 국내기업에 복음이 될 것 같습니다.

 

저자가 서문에서 요약하고 있는 <중국 비즈니스의 맥>의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책은 전체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기존의 시각과는 다른 관점에서 중국경제를 뒤집어 보았다. 2부에서는 구석구석 누벼본 발품으로 정리한 내용을 토대로 중국시장을 파헤쳤다. 3부와 4부는 1부와 2부에서 살펴본 근거에 기초하여 중국시장 진출을 위한 새 판 짜기 실전 전략을 담았다. 이 책이 중국시장에 진출하려고 하거나 이미 진출한 업체들이 내수시장 진출전략을 새롭게 세울 때 참고할 수 있는 지침서가 되었으면 한다.(14~15쪽)”

 

우리나라가 오늘에 이른 경험은 개발도상국가들이 참고하고 싶어 하는 귀중한 자산입니다. 자원이 없는 가운데 오로지 인적 자산을 밑천삼아 일궈낸 것이라서 더운 그렇습니다. 이 경험은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몇 차례에 걸친 오일쇼크가 있었고, IMF의 도움을 받아 겨우 고비를 넘긴 경제위기도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큰일 날 것 같았습니다만, 그러한 경험까지도 개발도상국에게는 좋은 참고서가 될 것입니다. 그런 경험을 한 나라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중국 역시 우리나라처럼 급속한 경제성장을 일궈내고 있습니다만, 갑작스럽게 불어난 몸집을 큰 충격없이 유연하게 만들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중국정부도 경제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고 적었습니다만, 저자는 공장에서 시장으로 변모하고 있는 중국에 성공적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써온 ‘메이드 인 차이나’ 전략을 바꾸어 ‘메이드 포 차이나’ 나아가 ‘메이드 위드 차이나’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깨달아야 할 것이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더라도 그렇지만, 현시점에서 글로벌 경제현황을 살펴보더라도 중국의 손을 잡아줄 최적의 파트너는 바로 대한민국이라는 점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중국을, 중국사람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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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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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로 칼비노는 <왜 고전을 읽는가; http://blog.joins.com/yang412/13094688>에서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를 읽고 있어.’라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책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작가의 혼신이 녹아들어간 고전에는 독자에게 들려줄 것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다시 읽을 때마다 처음 읽는 것처럼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를 다시 읽었습니다. 이 소설은 43년 전에 처음 읽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등학교 1학년 학기말 방학 중에 읽었는데, 독후감을 줄거리만 간략하게 요약하고서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해방 후 한국에 밀려든 풍조를 날카롭게 파헤친 <자유부인>의 풍조에 유사하다고 할까?” 보바리부인을 자유부인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자유부인>을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마담 보바리>를 다시 읽게 된 것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제대로 다시 읽기 위한 준비작업입니다. 프루스트의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를 찾아보기 위해서였는데, 당시 프랑스 사람들이 사는 모습, 특히 남녀간의 관계에 눈길이 가는 것은 요즘의 세태와 비교되는 점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 옛날에는 줄거리를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공부에 열심히던 학생 보바리는 의사가 된다. 자기 어머니의 권고로 듀빅부인과 결혼하지만 실패, 우연히 왕진갔던 루올 노인의 딸 엠마와 결혼한다. 그녀는 또스또에 싫증을 내고 용빌르로 이사간다. 그곳에서 처음 만난 레옹과 서로 알게 된다. 그는 그녀에게 연정을 느끼지만 엠마는 별로 반응이 없으므로 루앙으로 떠난다. 그녀는 레옹이 떠난 후에야 비로소 그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 것을 알고 실의에 빠진다. 이때 르돌프가 나타나 유혹해서 그녀를 함락한다. 그때부터 그녀는 뤼르와 채무관계를 맺게 되어서 조금씩 더 많은 돈으로 늘러나게 되었다. 르돌프가 그녀를 버렸을 때 자살하려 했지만 죽지 못하고 심한 병을 앓는다. 샬르는 그녀를 위하여 루앙에 가서 오페라를 구경시켜 준다. 그때 다시 레옹을 만나 멤마와 또 어우러지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채무관계 액수가 너무 많아져서 차압을 당하게까지 되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옛 애인들을 찾아 돈을 융통하려 하지만 실패, 죽고 만다. 후에 샬르도 그녀와 연인들 간의 뜨거운 편지를 보고 자살하기에 이르고 만다.” 촌스러운 글솜씨지만 줄거리를 그럴듯하게 요약한 것 같습니다.

 

다시 읽으면서 용빌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엠마의 불륜행각이 소방대장 비네의 눈에만 띄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특히 애정행각에 눈이 먼 엠마가 남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로돌프를 만나러 다닌 것을 고려한다면 말입니다. 비네 역시 불법 사냥 중이었기 때문에 엠마와 별다른 관계를 맺지 않는 것으로 그려 스토리를 단순하게 한 것도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이 단행본으로 발표되면서 법정소송으로 번지는 소동이 벌어졌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 정도 수준(? 사실 요즘 세상과 비교해보면 주간지에나 날까 싶기도 합니다만)의 연애사건이 충격적이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남편의 무심함에 마음이 시들해진 엠마를 유혹하는 로돌프가 화려한 연애경력을 가진 것으로 그려지는 것으로 보아서는 용빌 같은 시골에서도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애정행각이 보편적이었던 것 아닐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엠마가 감성적 성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오쟁이를 진 엠마의 남편 샤를르의 입장에서 보면 황당사건일 수밖에 없었을 터이나 아내에게 충분한 관심과 애정표현을 아낀 것이 불찰이라면 불찰이겠습니다. 그나저나 샤를르나 엠마가 딸 베르뜨에 대하여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엠마와 샤를르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직접적인 계기는 엠마의 불륜행각보다는 그로인한 낭비과 두 사람 모두 철저하지 못한 재무관리 때문에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는 점입니다. 엠마의 애정행각을 작가가 어떤 시각에서 보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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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집
박완서 지음, 이철원 그림 / 열림원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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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선생님의 유고소설을 포함한 산문집을 읽게 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따님이신 호원숙 작가님은 서문에서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어머니가 2000년 초반부터 아치울 노란집에서 쓰신 글이다.”라고 적었습니다. 박완서 선생님의 수필집 <못 가본 길이 아름답다; http://blog.joins.com/yang412/12798700>에서 아치울집을 소개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남쪽으로 난 커다란 유리창문에 비친 경치에 홀린 새가 날아와 부딪혔다는 말씀이 참 신기하단 생각을 했습니다.

 

집도 사람이 들고나는 것을 느끼는 모양입니다. 사람의 체온에 따라 활기가 넘치기도 하고, 퇴락하기도 하니 말입니다. 선생님께서 평소에 노란집이라 부르셨다는 그 집의 뜰을 호원숙 작가께서는 이렇게 그려냈습니다. “돌아가신 지 이 년이 훌쩍 지나갔지만 어머니의 뜰에는 살아 계실 때와 거의 똑같은 속도와 빛깔로 꽃이 피고 지고 있다. 염천인데도 직선으로 올라온 상사화 꽃대와 나무수국 흰빛과 목백일홍 붉은 꽃송이가 여름의 빛을 내고 있다.(7쪽)” 사실 상사화는 요즈음 피는 꽃입니다. 물러날 것 같지 않던 더위가 한풀 꺽일 무렵이기 때문에 염천이랄 것 까지는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제가 처음 상사화를 보게 된 것은 남원에서 일할 때 찾았던 쌍계사 일주문 근처에서입니다. 요즘 동네에서 보는 하양과 핑크 빛이 애매하게 섞인 꽃무릇이 아니라 진홍색 붉게 타오르는 상사화를 보면서 뜰에 한 포기 가져다 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인데, 동행했던 분께서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해 애닲아 하는 상사화를 뜰에 심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짧은 소설들로 채운 첫 번째 장 ‘그들만의 사랑법’을 읽으면서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긴 겨울에서 깨어나는 봄기운이 느껴지는 툇마루에서 젊은 시절 끼니 걱정하던 생각, 처음 눈이 맞았을 때 가슴이 울렁거리던 생각이 되살아나면서 동문서답이면서도 서로를 이어주는 봄기운이 있어 의미를 이해하는 모습에서 예쁘게 늙어가는 마나님과 영감님의 모습을 닮을 수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마나님도 먹고 싶었을 굴비를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혼자서 먹어치운 영감님의 대책없는 무신경에 대한 마나님의 부아를 마음에 새겨둡니다. ‘앞으로 조심해야지’하고 말입니다. 그래도 영감님이 혹시라도 아무도 대작할 이 없이 쓸쓸하게 막걸리를 들이켜는 일이 생긴다면 그 꼴은 정말 못 봐줄 것 같아 영감님보다 하루라도 더 살아야지 싶고, 영감님은 마나님의 쭈그렁바가지처럼 편안한 얼굴을 바라보며 이 세상을 뜰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 요즘 들어 부쩍 마나님의 건강을 염려하는 ‘그들만의 지극한 사랑법’(33쪽)이 마음에 절로 녹아드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다보면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치매와 왕따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은 놀랍고도 얼마나 깜찍한지 모르겠습니다. 먼저 치매에 관한 생각입니다. “나는 건망증이라는 말보다는, 우리 엄마가 붙여준 무심하다는 말이 더 좋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무심함 때문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유념이나 지속적인 관심이 가능했지 않나 싶다.(156쪽)” 맞습니다. 질 프라이스처럼 보고 들은 것을 모두 기억한다면 우리의 머릿속은 온통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질프라이스와 바트 데이비스 지음,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 http://blog.joins.com/yang412/13189206). 그래서 무심함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착 감깁니다. 생리적 건망증을 무심함으로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왕따에 관해서도, “따돌리는 친구들을 두려워만 할 게 아니라 그들의 집단적 소심증을 여유있게 경멸할 수 있는 늠름한 태도도 왕따를 면할 수 있는 한 방법”이라고 하신 선생님의 발상이 놀라울 뿐입니다. 세상사가 마음에 있듯이, 내가 세상으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것에 상처받지 말고, 내가 세상을 왕따시킨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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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1
최수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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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33.5명 수준으로 OECD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문제는 자살증가 속도 역시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합니다. 웰다잉이 화두로 거론될 정도로 죽음에 대한 인식이 많이 개선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죽음은 여전히 생각조차하고 싶지 않은 일인 듯합니다. 죽음이 이렇듯 전통적으로 기피대상이 되어온 것에 비추어 본다면 최근에 자살이 급증하고 있는 현상은 설명이 쉽지 않을 듯합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이상영 선임연구위원과 서울여자대학교 경제학과 노용환 교수는 『우리나라의 자살급증원인과 자살예방을 위한 정책과제』에서, 1990년대 중반 이후 본격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우리나라의 자살률 증가추세를 빨라지고 있는 인구고령화현상과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두 차례에 걸친 경제위기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 것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경제적 위기로 사회적 좌절을 겪게 된 중장년층 남자들이 자살을 선택하는 경향이 늘게 되었다고 해석하고 노년층의 경우 나이듦에 따른 사회경제적 여건의 변화나 심리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 역시 자살을 선택하는 경향이 늘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http://blog.joins.com/yang412/13170649).

 

이러한 현상은 개인의 죽음에 선행하는 ‘사회적 죽음’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曾煥棠(증환당)박사는 사회 속에서 개인이 사회와 맺었던 실질적 관계로부터 격리되거나 단절되는 현상을 일러 사회적 죽음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林綺雲 외, 죽음학 209쪽; http://blog.joins.com/yang412/12919367) 개인이 겪는 사회적 죽음의 압력은 은퇴나 상실 같은 개인 적 상황도 있고 경제적 공황, 전쟁 및 과학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문제 등 집단적 경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부녀자의 사회적 죽음은 주로 배우자의 사망 후 장기간의 고독에 빠지는 것을 의미하고,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있는 환자의 경우 사람들로부터 접촉을 거절당하거나, 스스로를 격리시킴으로서 사회적 죽음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죽음상태로부터 실제적인 죽음으로 이어지는 현상은 다양하게 설명되고 있다고 합니다.

 

인식의 기피대상인 되어온 죽음에 대한 담론이 조금씩 열리고 있는데 반하여 자살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금기의 영역에 남아 있습니다. 제가 죽음에 관한 글을 쓸 때 즐겨 인용하는 멜라니 킹의 <거의 모든 죽음의 역사; http://blog.joins.com/yang412/12436588>에서도 자살을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이 1897년에 쓴 <자살론>은 자살에 대한 현대적 해석으로는 선구적인 연구라고 합니다. 뒤르켐은 자살을 “피해자 자신에 의해서 완수되는 적극적이거나 소극적인 행위로 인하여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죽음”이라고 정의하였는데, 그런가 하면 심리학자 슈나이드만은 나아가 “자아피괴의 의식적 행동의 하나이며, 자신에게 있어서 자살이 문제해결의 최선의 방법이었음을 이해받기를 기도하는 행위”라고 정의하여 자살에 대하여 긍정적 시각을 내비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임기운 등, 죽음학, 307쪽).

 

자살을 설명한 많은 이론 가운데 뒤르켐의 이론구조가 가장 명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뒤르켐은 그때까지 심리적 문제로 간주되어 왔던 자살이라는 현상을 사회적 요인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자살이 비록 개인적인 행위이기는 하지만 한 개인의 자살 동기는 그가 속한 공동체와의 통합 정도에 의해 생겨난다는 점에 주목하였습니다. 다양한 인구집단, 즉 공동체에서의 자살율을 통계적으로 분석하고 그러한 경향을 설명한 것입니다. 뒤르켐은 자살의 유형을 이타적 자살, 이기적 자살 그리고 아노미적 자살 등으로 분류하기도 하였습니다. 고도로 통합된 공동체에서는 공동체의 목표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도 희생할 각오를 다지게 되는데, 삶과 죽음에 동등한 의미와 가치를 둔 결과 공동체의 이익을 위하여 선택하는 자살을 이타적 자살이라고 보았습니다. 반면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유대감이 상대적으로 느슨하여 개인주의 성향이 팽배해있는 사회에서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타인의 평가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게 된다는 것인데, 개인의 위기를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극복할 수 없는 경우에 시도하는 자살을 이기적 자살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 유형의 자살이 사회적 규범이 지켜지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한다면 아노미성 자살은 지금까지의 가치관이나 사회규범이 혼란상태에 빠졌을 때 일어나는 것으로 경제적 위기에 처한 시기에 많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자살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것이 우리사회의 규범이 혼란상태에 빠져들고 있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으로 본다면, 사회적 차원에서의 해결방안을 시급하게 찾아야 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서론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는 자살을 사회적 현상으로 읽어낸 최수철교수님의 2005년작 <페스트>를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살이 우리사회의 문제적 이슈로 꿈틀거리기 시작할 무렵으로 폭발적인 사회현상으로 부각될 것을 예견한 선구적 작품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작가의 근작 <침대; http://blog.joins.com/yang412/12313444>를 읽으면서도 느꼈던 점입니다만, 그의 작품은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의식의 해체, 엄정한 문체, 도저한 지적 사유라는 작가적 과제에 천착하고 있는 그의 스타일 때문일 것입니다. 페스트에서는 개인의 의식으로부터 사회구조로까지 분석대상을 확대하고 있기 때문에 작가의 그런 의식의 꼬투리를 놓치지 않으려면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예 작품에 대한 작가의 변을 붙여두지 않은 소설도 적지 않게 만나게 됩니다만, 그래도 반쪽도 되지 않은 작가의 말에서 “앞으로 한동안 이 소설에 대해 아무 할 말이 없을 것 같다.(페스트 2권 391쪽)”고 적은 것으로 보아 참으로 불친절한 작가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독자들에게 자신의 의도를 강요하지 않아 자유롭게 해석하도록 열어두었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아무런 수고도 필요 없도다. 지옥의 심연으로 내려가는 일에는. 음침한 무덤의 문은 밤낮으로 열려 있기 때문. 그러나 위쪽으로, 천상의 밝은 대기로 되돌아가는 것은 고통의 길로 이어지리.(1권 9쪽)” 엽기적인 방법으로 죽음을 준비하는 남자의 모습을 스케치하면서 이야기를 여는 첫 번째 장면에 등장하는 비르길리우스의 시귀는 이 소설이 다루게 될 자살이라는 화두에 대한 해답을 과연 구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회의감이 우선하도록 만드는 절망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는 무망시에서 자살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면서 이런 사회적 현상을 해석하고 대응책을 마련해가는 과정을 다루면서도 어떻게 보면 자살예방센터 OSP에 근무하는 센터 부책임자 강시우를 중심으로 하여 무수히 등장하는 인물들과의 연결고리를 뒤쫓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기도 합니다.

 

무망시는 대한민국 어딘가에 있는 가상의 도시일 것이나 그 위치를 추정해보면 행정구역상 동해안을 끼고 있고 도심이 해안으로부터 한 시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등장인물 가운데 하나인 임서상의 칼럼에서는 북위 37° 03′ 45″ 동경 37° 03′ 45″ 에 자리 잡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이 위치는 터키의 내륙지방 어디에 해당되는 좌표일 것 같습니다. 국토지리정보원의 공식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북위 33° 06′ 32″에서 북위 43° 00′ 35″, 동경 124° 11′ 11″에서 동경 131° 52′ 31″ 사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임서상의 말대로 가상의 도시 무망시가 어디에 있는지 새삼 지구본을 들여다보며 지리적인 위치를 따져보는 헛수고를 할 필요가 없는지도 모릅니다. “지구상의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그저 평범한 도시들 중 하나일 뿐(68쪽)”이기 때문입니다.

 

한자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시는 분들에게는 호재가 될 것 같습니다. 저자는 임서상의 칼럼을 빌어 무망(務望)시의 이름이 ‘애써 바람’에 해당되는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 생각이 없다(無妄), 남을 속이다(誣罔), 희망이 없다(無望) 등의 뜻도 있음을 잊지 말아달라(无妄)고 주문하고 있습니다. 잊지 않는다면 희망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야기는 무망시 자살예방센터 OSP에 근무하는 센터 부책임자 강시우와 사업2부 팀장 최동호가 최근 급증하고 있는 자살사건을 조사하여 대응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을 따라가는데, 시립정신병원 정신과의사 한기형, 시립정신병원 부설 자살기도자 감화원의 신명인 연구원 등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어서 OSP가 지원하고 있는 무량주식회사의 자살방지약 신제품 설명회에서 설명회 책임자 김성수를 비롯하여 작가 임서상, 가수 진유열, 의사 한기형, 무용수 서문주, 영화감독 전치운, 목사 장신수 등이 차례로 등장하여 이야기의 흐름에 동참하게 됩니다. 이렇게 등장한 인물들은 소설의 마지막까지 확산되는 자살이라는 사회적 현상을 차단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지만 적지 않은 인물들이 역시 다양한 이유로 죽음을 택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야기의 초반에 시우와 함께 자살사건을 조사하던 동호가 장신수목사의 주례로 유정과 결혼식을 거행하면서 자살예방을 위한 캠페인 영상을 찍기도 하지만, 막상 중세에 페스트가 창궐했던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떠난 신혼여행에서 갑작스럽게 자살을 선택하는 미스터리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장신수 목사를 중심으로 자살예방을 위한 집단치유 모임, ‘우란강 기도회’가 설립되기도 하지만, 명상을 통하여 심리적 안정을 추구하는 장신수목사와는 달리 수석관리자의 주도로 임사체험을 유도하기 위하여 물을 이용한 적극적 시술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참가자가 죽음을 맞는 파국적 결말을 맞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논리적 근거가 분명하지 않은 음악과 춤과 같은 예술적 접근을 시도하던 진유열과 서문주 등의 봉가산캠프의 시도 역시 사태를 우려한 당국의 개입으로 해산되고 이 과정에서 서문주가 죽음을 택하기도 합니다. 당국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적극적 방안을 마련하지 않고 자살자의 통계를 숨기는 등 소극적 대응을 하는 동안 무망시는 무정부상태로 돌입하면서 정부는 자살현상이 마치 페스트와 같은 급성 전염병처럼 확산되고 있는 무망시를 외곽에서 봉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데, 이와 같은 흐름은 작가가 앞서 설명 드렸던 뒤르켐의 이론을 따라가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종국에는 손을 놓고 있는 시당국의 승인을 받아서 그동안 숨겨왔던 자살현상의 본질을 시민들에게 공개하고 공감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집회, 이른바 ‘죽음의 파티’를 열게 됩니다. 광장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집회에서는 건물 옥상에 설치된 대형 전광판을 통하여 그동안 숨겨오던 죽음과 죽음의 현장, 죽음의 도구들 그리고 오열하는 유족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광장에 모인 대중 앞에 나선 혜강스님의 설법이 인상적입니다.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당당하게 죽음을 대면해야 합니다. 삶의 끝에서 고결한 죽음을 맞아야 합니다. 그 또한 우리의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 생명이란 끊임없이 타고 있는 불입니다. 우리는 그 생명이란 불 속에 쉬지 않고 장작을 던져주어야 합니다. (…) 우리의 몸을 불 속으로 던지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우리 마음의 불 속으로 던져 넣어야 합니다. 죽은 자의 영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우리 자신의 영혼이 새로운 몸을 받아 새로운 옷을 갈아입도록 해야 합니다. (…) 우리는 마음의 불이 타오르기를 원합니다. 그 불꽃이 하늘 높이 치솟을 때, 비로소 죽음의 행진도 멈출 것입니다.(276-280쪽)”

 

작가는 서상을 빌어 이 작품의 성격을 이렇게 정리하였습니다. “픽션도 논픽션도 아니었다. 위기에 처한 한 사회의 드라마이자, 자살의 벼랑에 몰린 한 인간의 내면에 대한 정밀한 보고서이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그 글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실상은 그 모두가 한 중심인물이 겪는 심리적 상황의 상징적 형상일 따름이었다.(334쪽)” 작가가 프로이트, 융, 성 아우구스티누스, 비르길리우스, 키케로, 세네카 , 푸코, 니체, 쇼펜하우어 등의 글과 함께 불교, 힌두교 경전 등이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자살에 대한 작가의 종교적, 철학적 성찰을 마주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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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 클래스 승객은 펜을 빌리지 않는다 - 비행기 1등석 담당 스튜어디스가 발견한 3%의 성공 습관
미즈키 아키코 지음, 윤은혜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공항에서 비행기 탑승시간이 되면 이코노미석 승객들이 기다랗게 선 줄을 뒤로 하고 우선적으로 탑승하는 퍼스트석 승객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나도 언젠가는 저런 모습으로 퍼스트석에 탑승할 기회가 있을까? 물론 퍼스트석을 이용해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한번은 가족들과 함께 비행기를 탔는데 대기순번으로 탑승을 하면서 자리가 흩어지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아이들이 어려서 돌봐주어야 하는 상황인데 옆자리 승객 누구도 자리를 바꿔주겠다고 나서지 않자 결국 퍼스트클래스에 좌석을 마련해준 것이 첫 번째 경험이었습니다. 두 번째 역시 이코노미클래스로 탑승하려는 순간 항공사의 배려로 퍼스트석을 이용하게 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마일리지 승급도 아니고 항공사의 배려로 얻은 좌석이다 보니 아무래도 당당하게 이용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저와 같은 승객은 맞돈을 내고 탑승한 퍼스트 클래스 승객과 차별되는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퍼스트 클래스 승무원을 지낸 미즈키 아키코씨가 자신의 경험을 정리한 <퍼스트 클래스 승객은 펜을 빌리지 않는다>를 읽으면서 제가 그런 모습을 보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좌석 업그레이드로 퍼스트클래스에 탑승한 승객에게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주위를 살피는 것처럼 어딘가 어색하게 눈을 이리저리 굴린다. 자신이 퍼스트클래스를 낯설어 한다는 사실을 주위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바짝 긴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197쪽)” 사실 마일리지를 이용하여 비즈니스석으로 승급해서 이용한 경험도 있지만 퍼스트 클래스를 이용할 때의 묘한 느낌을 정확하게 지적한 것 같이 읽으면서 얼굴이 뜨듯해지는 것 같습니다.

 

저자가 퍼스트클래스의 승무원으로 오래 근무한 경험에 따르면 퍼스트클래스 승객들에게는 공통된 습관이 있다고 합니다. 대화법, 메모하는 방법, 발성, 주위 사람을 대하는 태도, 걷는 자세, 독서법, 여성을 대하는 태도, 시간 관리법에 이르기 까지 성공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습관DNA가 있는 것 같더라는 것입니다. <퍼스트 클래스 승객은 펜을 빌리지 않는다>에는 저자가 발견한 그들만의 독특한 습관을 담고 있습니다. 그 독특한 습관들 가운데는 저에게도 해당되는 것들이 있습니다만, 그렇지 못한 것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저자의 기준대로 퍼스트클래스 탑승객들을 성공한 사람들로 본다면, 그녀가 인용하는 브라이언 트레이시의 <한 가지로 승부하라>의 한 구절을 새길 필요가 있겠습니다. “체격, 나이, 인종, 성별, 학력은 상관없다. 성공한 사람과 같은 행동을 하면 누구나 안젠가는 그들처럼 성공할 수 있다. (중략) 만약 당신이 성공한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습득한다면 그들과 같은 성과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8쪽)” 공감이 가는 점이 있지 않습니까?

 

예전에는 비행기를 타면 영화를 주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만, 요즈음에는 공항에 나가는 버스에서부터 책을 읽기 시작해서 탑승대기시간, 비행하는 동안 등등 주로 책을 읽고 있습니다. 저자는 여덟 권의 책을 가져와 비행 중에 전부 읽은 승객이 최고 기록이었다고 합니다만, 저는 보통 다섯 권 정도를 들고 가는데, 편도비행에 두 권 정도를 읽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자가 보는 것처럼 역사책은 아니고 주로 인문교양서적을 주로 읽는다는 점이 다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서비스 자체가 이코노미석과는 다르기 때문에 불만스러운 점이 없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서비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화를 벌컥 내는 분위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승객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저자의 생각은 공감이 가는 점이 많기는 합니다만, 다른 좌석에 앉아 있는 승객이 누구인지 묻기를 망설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상대의 개인정보를 승무원이 누출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싶어서 찜찜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보니 처음 비행기를 타던 시절에는 옆 자리에 앉은 사람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던 것 같습니다만, 요즘에는 별로 그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코노미석이라고 해도 좌석은 그대로 자신만의 공간으로 인정을 해주고 서로 지켜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때문입니다. 옆자리 승객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도 싫어서 창가자리보다는 통로쪽에 자리를 정하는 것도 최근에 생긴 버릇이기도 합니다.

 

정리를 해보면, 평범한 사람들과는 분명 다른 그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퍼스트클래스는 비싼 값을 들여야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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