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집
박완서 지음, 이철원 그림 / 열림원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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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선생님의 유고소설을 포함한 산문집을 읽게 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따님이신 호원숙 작가님은 서문에서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어머니가 2000년 초반부터 아치울 노란집에서 쓰신 글이다.”라고 적었습니다. 박완서 선생님의 수필집 <못 가본 길이 아름답다; http://blog.joins.com/yang412/12798700>에서 아치울집을 소개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남쪽으로 난 커다란 유리창문에 비친 경치에 홀린 새가 날아와 부딪혔다는 말씀이 참 신기하단 생각을 했습니다.

 

집도 사람이 들고나는 것을 느끼는 모양입니다. 사람의 체온에 따라 활기가 넘치기도 하고, 퇴락하기도 하니 말입니다. 선생님께서 평소에 노란집이라 부르셨다는 그 집의 뜰을 호원숙 작가께서는 이렇게 그려냈습니다. “돌아가신 지 이 년이 훌쩍 지나갔지만 어머니의 뜰에는 살아 계실 때와 거의 똑같은 속도와 빛깔로 꽃이 피고 지고 있다. 염천인데도 직선으로 올라온 상사화 꽃대와 나무수국 흰빛과 목백일홍 붉은 꽃송이가 여름의 빛을 내고 있다.(7쪽)” 사실 상사화는 요즈음 피는 꽃입니다. 물러날 것 같지 않던 더위가 한풀 꺽일 무렵이기 때문에 염천이랄 것 까지는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제가 처음 상사화를 보게 된 것은 남원에서 일할 때 찾았던 쌍계사 일주문 근처에서입니다. 요즘 동네에서 보는 하양과 핑크 빛이 애매하게 섞인 꽃무릇이 아니라 진홍색 붉게 타오르는 상사화를 보면서 뜰에 한 포기 가져다 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인데, 동행했던 분께서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해 애닲아 하는 상사화를 뜰에 심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짧은 소설들로 채운 첫 번째 장 ‘그들만의 사랑법’을 읽으면서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긴 겨울에서 깨어나는 봄기운이 느껴지는 툇마루에서 젊은 시절 끼니 걱정하던 생각, 처음 눈이 맞았을 때 가슴이 울렁거리던 생각이 되살아나면서 동문서답이면서도 서로를 이어주는 봄기운이 있어 의미를 이해하는 모습에서 예쁘게 늙어가는 마나님과 영감님의 모습을 닮을 수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마나님도 먹고 싶었을 굴비를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혼자서 먹어치운 영감님의 대책없는 무신경에 대한 마나님의 부아를 마음에 새겨둡니다. ‘앞으로 조심해야지’하고 말입니다. 그래도 영감님이 혹시라도 아무도 대작할 이 없이 쓸쓸하게 막걸리를 들이켜는 일이 생긴다면 그 꼴은 정말 못 봐줄 것 같아 영감님보다 하루라도 더 살아야지 싶고, 영감님은 마나님의 쭈그렁바가지처럼 편안한 얼굴을 바라보며 이 세상을 뜰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 요즘 들어 부쩍 마나님의 건강을 염려하는 ‘그들만의 지극한 사랑법’(33쪽)이 마음에 절로 녹아드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다보면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치매와 왕따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은 놀랍고도 얼마나 깜찍한지 모르겠습니다. 먼저 치매에 관한 생각입니다. “나는 건망증이라는 말보다는, 우리 엄마가 붙여준 무심하다는 말이 더 좋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무심함 때문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유념이나 지속적인 관심이 가능했지 않나 싶다.(156쪽)” 맞습니다. 질 프라이스처럼 보고 들은 것을 모두 기억한다면 우리의 머릿속은 온통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질프라이스와 바트 데이비스 지음,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 http://blog.joins.com/yang412/13189206). 그래서 무심함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착 감깁니다. 생리적 건망증을 무심함으로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왕따에 관해서도, “따돌리는 친구들을 두려워만 할 게 아니라 그들의 집단적 소심증을 여유있게 경멸할 수 있는 늠름한 태도도 왕따를 면할 수 있는 한 방법”이라고 하신 선생님의 발상이 놀라울 뿐입니다. 세상사가 마음에 있듯이, 내가 세상으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것에 상처받지 말고, 내가 세상을 왕따시킨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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