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세계 문학 속 지구 환경 이야기 1~2 세트 - 전2권 - 문학으로 지구를 읽고, 환경으로 문학을 읽는다
이시 히로유키 지음, 안은별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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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언론계 출신으로 오랫동안 환경문제를 천착해온 이시 히로유키님은 우연한 기회에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의 극시<브란트> 속에 백 수십 년 전 영국에서 국경을 넘어 북유럽까지 날아온 대기오염을 생생하게 묘사한 대목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문학 속에서 다루고 있는 지구환경에 관한 이야기를 뒤쫓게 되었다고 합니다. <닛케이 에콜로지>를 통하여 연재해오던 성과물을 단행본으로 묶어낸 것이 <세계문학 속 지구환경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왜 문학일까요?

 

안상헌님은 <통찰력을 길러주는 인문학 공부법; http://blog.joins.com/yang412/13062938>에서 ‘새로운 삶을 얻기 위한 문장을 얻기 위하여’ 인문학을 공부한다고 했습니다. 원리를 알면 세상이 분명해지기 때문에 수월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구체적 접근방법으로는 본질적으로, 역사적으로, 전면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방식은 철학, 역사, 문학, 즉 인문학의 핵심입니다. 문학을 떼놓고 보면,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개성을 가진 주인공들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상호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일어나는 사건을 두고 연결가능한 모든 부분을 동시에 조망하면서 파악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터키출신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묵은 “나에게 소설 쓰기란 사물과 이미지로 둘러싸인 풍경 속에서 소설 주인공들의 생각과 감각을 감지해 내는 기량이다.”(소설과 소설가, 89쪽; http://blog.joins.com/yang412/12935937)라고 말했습니다. 유럽에서 소유물, 그림, 사물, 잡동사니의 풍부함이 불러일으킨 사회적·개인적 욕구를 소설 속 풍격으로 끌어들인 최초의 작가는 발자크라고 합니다. 그의 작품 <고리오 영감; http://blog.joins.com/yang412/13203157>의 서두를 보면, ‘<모든 것이 사실이다.>’라는 셰익스피어 <헨리8세>에 나오는 문장을 인용하면서, “이 드라마는 너무도 사실과 일치하기 때문에 누구든지 자기 집에서나, 어쩌면 자기 마음속에서 이 드라마의 요소들을 인정할 게다.(9쪽)”라고 적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세계문학 속 지구환경 이야기>의 저자는 집필의도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명작에 등장하는 환경 문제를 날실로 하여 문제가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이나 그 후의 전개를 꿰고, 동시대 인물·사건과의 연관성을 씨실로 하여 사람과 환경이 촘촘히 엮인 역사를 펴 보이려 한 것이 이 책이다.(6쪽)” 그렇습니다. 출발은 문학작품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관련된 많은 분야를 섭렵하여 인문, 사회, 과학 등을 아우르고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장융의 <대륙의 딸>을 통하여 마오쩌뚱의 제철입국을 위한 정책이 가져올 파국을 다루면서 저자는 “1958년 가을, 6세였던 나는 소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 매일 학교를 오가며 나는 자갈 사이의 흙 속에 박혀 있는 구부러진 못, 녹슨 쇳조각, 기타 금속 물체를 줍기 위해 길바닥을 샅샅이 살펴보면서 걸어야 했다.”는 구절을 인용하지만, 작품의 기획의도를 파악하기 위하여 작가에 배경도 살피고, 사건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전하기 위하여 신문기사, 보고서 등등 다양한 자료를 인용하기도 합니다.

 

전체 이야기는 스물 세 꼭지나 되는데 주제는 제한적인 것 같습니다. 주로 자연을 남용해서 일어나는 기후변화, 고래와 코끼리의 멸종위기, 스페인독감을 비롯하여 산업화과정의 결과로 환경이 오염되어 생기는 질병 등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제별로 정리되어 있지 않아 조금 산만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출애굽기>, 메소포타미아지방의 <길가메시 서사시>, 플라톤의 <크리티아스: 아틀란티스 이야기>등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등, 동서고금을 망라한 작품들에서 환경과 관련된 부분을 인용하고 있어, 그의 관심이 얼마나 방대한지 알 수 있습니다.

 

저자가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주제는 삼림의 남벌로 인한 자연재해입니다. 황사와 가뭄으로 인한 기근은 인구감소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철기시대로부터 석탄과 석유가 에너지원으로 사용되기 이전 단계까지 나무가 주요 에너지원으로 사용되었던 것이고, 해양운송과 전함건조를 비롯하여 건축자재로 엄청난 분량의 나무들이 필요하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이스터섬의 모아이로 대표되는 것처럼 종교적 목적의 건축물을 조성하는데도 삼림을 필요로 하였던 것인데, 이런 목적으로 사용되는 나무들은 대부분 생장에 적지 않은 기간에 필요하기 때문에 대체할 수 있는 수목을 얻으려면 오래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남태평양의 주요 항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세계인들의 관심 밖에 있던 이스터섬에 관심을 쏟았던 노르웨이 인류학자 토르 헤위에르달의 <아쿠아쿠: 고도 이스터 섬의 비밀>을 인용하면서 삼림파괴의 비극을 정리한 경우를 보겠습니다. 최근 연구에서 폴리네시아로부터 건너온 것으로 밝혀졌습니다만, 헤위에르달은 이스터섬의 주민들이 남아메리카에서부터 왔을 것으로 추정하였습니다. 짙은 녹음으로 우거진 폴리네시아의 다른 섬들과는 달리 초원은 있으나 숲은 거의 보이지 않는 이스터섬이 미스터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헤위에르달은 “달세계 여행을 꿈꾸는 사람이 있다면 이스터 섬의 원추형 사화산에 올라가 보라. 그러면 어느 정도 비슷한 느낌을 맛 볼 수 있을 것이다. …… 이스터 섬은 바다와 하늘 사이에 걸려 있는 작은 섬이다.(112쪽)”라고 적었다고 합니다. 4,000년 전 약 200명이 이주해온 이스터섬 주민들은 18세기에 7,000명에서 1만 명까지 늘었는데, 인구가 늘면서 씨족 간에 긴장이 높아지고 종교의식에 집착하면서 종교의식으로 제작되던 모아이의 크기와 숫자도 늘게 되었다고 합니다. 모아이의 제작에는 막대한 노동력과 그들을 부양할 식량 그리고 목재가 필요했기 때문에 규모가 작은 이스터섬의 제한적인 자원은 결국 바닥이 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자원남획이 부메랑이 되어 인간사회를 파멸로 이끌게 된다는 교훈을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서나 라오서의 <낙타 상즈>에서 다루고 있는 황사현상은 결국 집약식 농업으로 지력을 상실한 초원이 사막화되면서 거대한 흙먼지폭풍을 불어오고, 황사는 광대한 영역에 걸쳐 사람들의 일상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고 만다는 점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매년 봄 반복되던 황사경보가 최근에 뜸해진 것은 결국 우리나라 기업과 자원봉사자들까지 나서 중국의 고비사막을 비롯한 황사발원지에 나무를 심고 가꾸는 녹화사업에 참여한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최근 일본의 후지산이 대규모 분화를 일으킬 조짐이 보인다거나, 백두산 역시 조짐이 심상치 않다는 지구과학자들의 경고를 듣곤 합니다만, 대규모 화산폭발은 해당지역에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고 지구적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사례들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오만과 편견>으로 잘 알려진 영국 작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 <엠마>에 나오는 한 장면, “그 농장과 비옥한 목장,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양떼, 꽃이 만발한 과수원, 가느다랗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차분하게 조망할 수 있었다.”에서 영국에서는 통상 5월에 피는 사과꽃이 6월 하순에 피었다고 서술한 이유를 찾고 있습니다. 제인 오스틴이 <엠마>를 집필하던 1814년 1월부터 1815년 3월 사이 영국은 이상저온에 보였는데, 이는 카리브해 세인트빈센트 섬의 수프리에르 산과 인도네시아의 아우산(1812년), 가고시마 현의 스와노세 섬(1813년), 필리핀의 마욘산(1814년) 등 대규모 화산 분화가 이어져 이상 기후가 한층 심해졌다는 것입니다. 특히 1815년 말 집필을 마치고 퇴고 중이던 4월에 인도네시아의 탐보라산이 대분화를 일으켜 한랭화가 더욱 심화되었다는 것입니다(2권, 60쪽).

 

일본이 2020년 올림픽을 유치하는 과정에서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오염의 위험을 감추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최근 일본이 우경화되는 경향에 대하여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만, <세계 문학 속 지구 환경 이야기>에서 일본이 지구환경에 개입한 구체적 사례를 별로 볼 수 없다는 점이 미심쩍었습니다.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으로 풀어내고 있는 고래남획의 사례에서도 유럽과 미국의 무차별적인 남획으로 고래가 빠르게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고 지적하면서도 마지막까지 고래남획의 현장에 남아있던 일본에 대하여는 “특히 일본을 통치했던 미국 주도의 연합군 최고 사령부는 일본에 원조하는 식량 부담을 줄이기 위해 고래고기의 소비를 장려하기도 했다.(2권, 22쪽)”거나 “일본은 연안에서 끝까지 상업포경을 이어갔고 1988년을 마지막으로 그만둘 때까지 국제적인 비판을 한 몸에 받았다.(2부, 23쪽)”고 간략하게 적고 있어 지나치게 필봉을 사리는 자세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독일의 헤켈이 에콜로지의 개념을 정립하기 약 200년 전에 이미 자연보호를 내세웠다는 구마자와 반잔(1619~1691)의 <대학혹문(大學惑問)>을 인용하여 일본에서의 삼림남벌과 보호의 역사를 정리하는 대목에도 마찬가지 대목입니다. 반잔은 이렇게 적었다고 합니다. “자연은 나라의 근간이다. 요즈음 산이 망가지고 강물이 얕아졌다. 나라가 심각하게 황폐해졌다. 예로부터 이런 사태에 이르면 세상이 혼란에 빠져 100년이고 200년이고 전국(戰國)의 세상이 되어 많은 사람이 죽었다.(2권 80쪽)” 일본의 삼림역사를 보면 3번의 삼림 소실기가 있었다는 것인데, 6세기말 아스카 시대부터 9세기 중반 개간과 함께 장원이 발달하던 시기와 16세기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국 통일부터 에도 바쿠후 체제가 확립되던 17세기 중반까지, 그리고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부터 전후 부흥기라고 합니다. 조선이 일제 치하에 있을 때 백두산을 비롯한 국내의 깊은 산에서 아름드리나무들을 벌채하여 강물을 따라 뗏목을 띄워 내려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평야지역에서 수확한 쌀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던 일제가 조선의 깊은 산에 우거져 있던 나무들을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삼척동자도 알만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시바 료타로의 글을 빌어 한반도의 숲을 황폐시킨 것과 일본은 관련이 없다고 피하는 듯합니다. 석탄이 상용화되기 전까지 제철산업의 에너지원은 목탄이었기 때문에 제철산업이 숲을 망친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시바는 “제철로 삼림을 잃어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한반도의 제철공이 대거 일본으로 건너왔다”는 설을 전개했다는 것입니다. 우수한 제철기술은 곧 전쟁의 판세를 가름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국가에서 제철기술자는 물론 제철에 필요한 자원을 허투루 관리할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경우 지질학적으로 산이 노쇠한데다가 기후도 일본 열도보다 건조한 탓인지 산림을 지속적으로 베어내면 암석이 드러나고 이윽고 민둥산이 되는 일이 많았다. 산이 벌거숭이가 되자 그들이 이즈모로 건너왔다는 것이 나의 추정이다.(2부, 215쪽)”라고 적었다거나, “최근 민둥산이 특징적인 풍경이라 여겨지는 한반도도, 원래는 그렇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반도의 민둥산은 겨울철 온돌에 쓸 땔감을 너무 많이 베어버린 까닭에 그렇게 된 것이라 전해지나, 고대 한국의 수준 높은 금속 문화를 생각하면 반드시 난방에 쓰기 위한 벌채만이 그 원인은 아니라고 본다.(2부, 210쪽)“고 적었습니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일제가 주도했던 벌채와 6.25사변의 전란의 영향은 고려하지 않고 국민의 무책임한 행동 탓이라 치부한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생각입니다.

 

닛케이 에콜로지에 연재할 무렵 환경문제로부터 문학으로 들어가게 된 학생이 있었다는 뒷이야기가 있었을 정도로 문학은 다양한 해석과 접근이 가능한 영역 같습니다. 저 역시 문학으로부터 무언가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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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7
소포클레스 지음, 강대진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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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연극반에서 활동할 적에 장아누이가 각색한 소포클레스 원작의 <안티고네> 공연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서슬이 퍼렇던 제3공화국 시절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있어서였던지 권력의 표상인 크레온왕에 대한 안티고네의 저항을 응원하는 분위기였던 것 같습니다. 안티고네의 비극은 오이디푸스의 비극과 연결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야 했는데 그때는 공연을 준비하는 일도 벅차서 따로 읽어보지 못한 것을 지금까지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왔던 오이디푸스 일가의 비극을 새겨보기 위해서 소포클레스의 비극 모음을 읽게 되었습니다. 강대진교수의 번역으로 민음사에서 나온 <오이디푸스 왕>에는 소포클레스 원작의 비극, 오이디푸스, 안티고네, 아이아스 그리고 트라키스 여인들 등 4편의 비극을 담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를 중심으로 생각해보려합니다. 테바이의 왕 라이오스는 아내 이오카스테가 낳은 아들 오이디푸스가 자신을 죽이고 아내와 결혼할 운명이라는 신탁을 받게 되자 죽이라는 밀명을 내리게 됩니다. 대체로 이와 같은 신탁이 내려지는 경우에는 지난날의 알게 모르게 저지른 과오에 대한 신의 업보로 내려지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신탁은 특별한 이유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신탁이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피를 받은 자식을 버린 것 자체가 신에 대한 죄과를 짓는 일이고 그에 대한 벌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면 과연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찌르고 방황하다가 죽음을 맞고, 이어서 두 아들과 딸 역시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된다는 신의 뜻이 과연 옳은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이디푸스를 살해하라는 라이오스의 명을 받은 신하가 왕명을 어기고 오이디푸스를 살려준 것이라고 한다면 끝까지 입을 다물었어야 하지 않을까요? 또한 자신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할 신탁을 받은 운명임을 알고 있던 오이디푸스라면 누군가 죽여야 할 상황이라면 제고에 제고를 거듭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정말 끊임없이 의문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외디푸스>를 읽어가다 보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테바이를 구한 외디푸스가 신탁을 받기 위하여 길을 떠났다가 살해된 라이오스를 대신하여 테바이의 왕위에 오르고 이오카스테와 결혼하여 4명의 자녀를 두어 장성한 다음에 역병이 돌아 위기에 처한 테바이를 구할 방안을 묻기 위하여 델포이의 아폴론신전에 신탁을 받기 위하여 처남인 크레온을 보내는 것도 이해되지 않는 점은 크레온이 자신의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의심하는 정황이 읽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크레온이 받아왔다는 신탁을 어떻게 믿을 것이며, 크레온이 데려왔다는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들일 생각을 했는지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물론 라이오스의 명을 받았던 신하가 등장해서 오이디푸스가 라이오스의 아들이었음을 증명하는 등 꼬인 실타레를 풀어내는 증언이 결국 신탁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하게 됩니다만,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 점입니다.

 

마찬가지로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아들이 아버지를 적대시하고, 어머니를 좋아하는 본능의 표현”으로 해석하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이름을 붙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견해에도 동의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신화에서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입양된 코린토스의 왕 폴리보스를 아버지로 알고 자라다가 신탁을 두려워하여 외국으로 떠도는 것을 보면 프로이트가 무엇을 근거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이디푸스로부터 자녀들을 돌보아주기를 부탁받은 클레온은 결국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뤼네이케스가 테바이의 왕권을 둘러싸고 대결하다가 모두 죽음을 맞은 다음에 테바이의 왕위에 오르게 되고, 결국은 오이디푸스의 두딸 안티고네와 이스메네까지도 죽음을 맞게 되는 비극을 꾸며내게 된다는 점도 이해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다음과 같은 오이디푸스의 부탁을 저버린 셈입니다. “오, 메노이케우스의 아들이여, 이들을 낳은 두 사람이 모두 파멸하여, 그대만이 이들의 아버지로 남았으니, 그대의 친족인 이들이 남편도 없이 거지로 유랑하도록 내버려두지 말고, 이들이 나와 같이 불행해지도록 만들지도 말아 주시오.(오이디푸스 왕 114쪽)

 

안티고네에서도 외세를 빌어 테바이의 왕위를 노렸던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을 매장하지 못하도록 한 크레온의 포고에 대하여 인륜을 내세워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을 매장한 안티고네의 고집스러운 대결양상 또한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인간의 운명을 틀어쥐고 있었다는 그리스 신들의 이해되지 않는 결정을 합리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읽고 의문이 더 커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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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비즈니스의 맥 - 14억 소비자를 사로잡을
김상철 지음 / 알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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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나 경영을 전공한 것은 아니지만 새해가 되면 코트라가 시공사 알키팀을 통하여 내놓은 한해의 경제 트랜드에 관한 전망을 읽곤 합니다. 최근에 읽은 책으로는 <2012 한국을 뒤집을 14가지 트랜드; http://blog.joins.com/yang412/12475620>, <2013 세계, 기회와 도전; http://blog.joins.com/yang412/13012239>등이 있습니다. 읽다 보면 코트라가 참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코트라의 전체 조직이 움직여 내놓은 전망서 이외에도 주재국의 경제사정을 우리기업들에게 정확하게 전하는 역할도 한다는 사실을 코트라 상하이 무역관의 김상철관장님께서 쓰신 <중국비즈니스의 맥>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최근 미국발 금융위기가 유럽을 거쳐서 아시아에도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고, 그나마 버티고 있던 중국경제도 경착륙이 우려된다는 시각이 나오고 있는 시점에서 중국에 관심을 두고 있는 분들이 많은 가운데 적절한 타이밍에 나온 중국경제의 현주소를 파악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저 역시 2005년엔가 중국의료계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북경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만(http://blog.joins.com/yang412/4639134), 그때 무렵 중국에서 병원을 여는 한국의사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선구적인 분들이지요. 최근에 중국의 지방정부와 함께 의료관련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는 동창이 있어 더욱 관심을 기울여 읽었습니다.

 

지금까지 싼 인건비를 이용하는 단순 임가공 생산기지로 세계의 공장역할을 하던 중국이 변하고 있다고 합니다. 임금이 상승하면서 공장으로서의 매력이 떨어지면서 우리 기업들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정부 역시 변화하고 있는 사회적 여건을 고려하여 경제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수요 측면에서는 투자에서 소비로, 수출에서 내수로 전환하고 있고, 공급측면에서는 저부가가치에서 고부가가치로, 제조업 위주에서 서비스산업으로 중심축을 옮겨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중국사회의 변화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혼란스러워하는 국내기업에 복음이 될 것 같습니다.

 

저자가 서문에서 요약하고 있는 <중국 비즈니스의 맥>의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책은 전체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기존의 시각과는 다른 관점에서 중국경제를 뒤집어 보았다. 2부에서는 구석구석 누벼본 발품으로 정리한 내용을 토대로 중국시장을 파헤쳤다. 3부와 4부는 1부와 2부에서 살펴본 근거에 기초하여 중국시장 진출을 위한 새 판 짜기 실전 전략을 담았다. 이 책이 중국시장에 진출하려고 하거나 이미 진출한 업체들이 내수시장 진출전략을 새롭게 세울 때 참고할 수 있는 지침서가 되었으면 한다.(14~15쪽)”

 

우리나라가 오늘에 이른 경험은 개발도상국가들이 참고하고 싶어 하는 귀중한 자산입니다. 자원이 없는 가운데 오로지 인적 자산을 밑천삼아 일궈낸 것이라서 더운 그렇습니다. 이 경험은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몇 차례에 걸친 오일쇼크가 있었고, IMF의 도움을 받아 겨우 고비를 넘긴 경제위기도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큰일 날 것 같았습니다만, 그러한 경험까지도 개발도상국에게는 좋은 참고서가 될 것입니다. 그런 경험을 한 나라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중국 역시 우리나라처럼 급속한 경제성장을 일궈내고 있습니다만, 갑작스럽게 불어난 몸집을 큰 충격없이 유연하게 만들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중국정부도 경제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고 적었습니다만, 저자는 공장에서 시장으로 변모하고 있는 중국에 성공적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써온 ‘메이드 인 차이나’ 전략을 바꾸어 ‘메이드 포 차이나’ 나아가 ‘메이드 위드 차이나’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깨달아야 할 것이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더라도 그렇지만, 현시점에서 글로벌 경제현황을 살펴보더라도 중국의 손을 잡아줄 최적의 파트너는 바로 대한민국이라는 점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중국을, 중국사람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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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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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로 칼비노는 <왜 고전을 읽는가; http://blog.joins.com/yang412/13094688>에서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를 읽고 있어.’라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책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작가의 혼신이 녹아들어간 고전에는 독자에게 들려줄 것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다시 읽을 때마다 처음 읽는 것처럼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를 다시 읽었습니다. 이 소설은 43년 전에 처음 읽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등학교 1학년 학기말 방학 중에 읽었는데, 독후감을 줄거리만 간략하게 요약하고서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해방 후 한국에 밀려든 풍조를 날카롭게 파헤친 <자유부인>의 풍조에 유사하다고 할까?” 보바리부인을 자유부인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자유부인>을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마담 보바리>를 다시 읽게 된 것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제대로 다시 읽기 위한 준비작업입니다. 프루스트의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를 찾아보기 위해서였는데, 당시 프랑스 사람들이 사는 모습, 특히 남녀간의 관계에 눈길이 가는 것은 요즘의 세태와 비교되는 점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 옛날에는 줄거리를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공부에 열심히던 학생 보바리는 의사가 된다. 자기 어머니의 권고로 듀빅부인과 결혼하지만 실패, 우연히 왕진갔던 루올 노인의 딸 엠마와 결혼한다. 그녀는 또스또에 싫증을 내고 용빌르로 이사간다. 그곳에서 처음 만난 레옹과 서로 알게 된다. 그는 그녀에게 연정을 느끼지만 엠마는 별로 반응이 없으므로 루앙으로 떠난다. 그녀는 레옹이 떠난 후에야 비로소 그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 것을 알고 실의에 빠진다. 이때 르돌프가 나타나 유혹해서 그녀를 함락한다. 그때부터 그녀는 뤼르와 채무관계를 맺게 되어서 조금씩 더 많은 돈으로 늘러나게 되었다. 르돌프가 그녀를 버렸을 때 자살하려 했지만 죽지 못하고 심한 병을 앓는다. 샬르는 그녀를 위하여 루앙에 가서 오페라를 구경시켜 준다. 그때 다시 레옹을 만나 멤마와 또 어우러지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채무관계 액수가 너무 많아져서 차압을 당하게까지 되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옛 애인들을 찾아 돈을 융통하려 하지만 실패, 죽고 만다. 후에 샬르도 그녀와 연인들 간의 뜨거운 편지를 보고 자살하기에 이르고 만다.” 촌스러운 글솜씨지만 줄거리를 그럴듯하게 요약한 것 같습니다.

 

다시 읽으면서 용빌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엠마의 불륜행각이 소방대장 비네의 눈에만 띄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특히 애정행각에 눈이 먼 엠마가 남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로돌프를 만나러 다닌 것을 고려한다면 말입니다. 비네 역시 불법 사냥 중이었기 때문에 엠마와 별다른 관계를 맺지 않는 것으로 그려 스토리를 단순하게 한 것도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이 단행본으로 발표되면서 법정소송으로 번지는 소동이 벌어졌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 정도 수준(? 사실 요즘 세상과 비교해보면 주간지에나 날까 싶기도 합니다만)의 연애사건이 충격적이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남편의 무심함에 마음이 시들해진 엠마를 유혹하는 로돌프가 화려한 연애경력을 가진 것으로 그려지는 것으로 보아서는 용빌 같은 시골에서도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애정행각이 보편적이었던 것 아닐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엠마가 감성적 성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오쟁이를 진 엠마의 남편 샤를르의 입장에서 보면 황당사건일 수밖에 없었을 터이나 아내에게 충분한 관심과 애정표현을 아낀 것이 불찰이라면 불찰이겠습니다. 그나저나 샤를르나 엠마가 딸 베르뜨에 대하여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엠마와 샤를르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직접적인 계기는 엠마의 불륜행각보다는 그로인한 낭비과 두 사람 모두 철저하지 못한 재무관리 때문에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는 점입니다. 엠마의 애정행각을 작가가 어떤 시각에서 보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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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집
박완서 지음, 이철원 그림 / 열림원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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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선생님의 유고소설을 포함한 산문집을 읽게 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따님이신 호원숙 작가님은 서문에서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어머니가 2000년 초반부터 아치울 노란집에서 쓰신 글이다.”라고 적었습니다. 박완서 선생님의 수필집 <못 가본 길이 아름답다; http://blog.joins.com/yang412/12798700>에서 아치울집을 소개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남쪽으로 난 커다란 유리창문에 비친 경치에 홀린 새가 날아와 부딪혔다는 말씀이 참 신기하단 생각을 했습니다.

 

집도 사람이 들고나는 것을 느끼는 모양입니다. 사람의 체온에 따라 활기가 넘치기도 하고, 퇴락하기도 하니 말입니다. 선생님께서 평소에 노란집이라 부르셨다는 그 집의 뜰을 호원숙 작가께서는 이렇게 그려냈습니다. “돌아가신 지 이 년이 훌쩍 지나갔지만 어머니의 뜰에는 살아 계실 때와 거의 똑같은 속도와 빛깔로 꽃이 피고 지고 있다. 염천인데도 직선으로 올라온 상사화 꽃대와 나무수국 흰빛과 목백일홍 붉은 꽃송이가 여름의 빛을 내고 있다.(7쪽)” 사실 상사화는 요즈음 피는 꽃입니다. 물러날 것 같지 않던 더위가 한풀 꺽일 무렵이기 때문에 염천이랄 것 까지는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제가 처음 상사화를 보게 된 것은 남원에서 일할 때 찾았던 쌍계사 일주문 근처에서입니다. 요즘 동네에서 보는 하양과 핑크 빛이 애매하게 섞인 꽃무릇이 아니라 진홍색 붉게 타오르는 상사화를 보면서 뜰에 한 포기 가져다 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인데, 동행했던 분께서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해 애닲아 하는 상사화를 뜰에 심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짧은 소설들로 채운 첫 번째 장 ‘그들만의 사랑법’을 읽으면서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긴 겨울에서 깨어나는 봄기운이 느껴지는 툇마루에서 젊은 시절 끼니 걱정하던 생각, 처음 눈이 맞았을 때 가슴이 울렁거리던 생각이 되살아나면서 동문서답이면서도 서로를 이어주는 봄기운이 있어 의미를 이해하는 모습에서 예쁘게 늙어가는 마나님과 영감님의 모습을 닮을 수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마나님도 먹고 싶었을 굴비를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혼자서 먹어치운 영감님의 대책없는 무신경에 대한 마나님의 부아를 마음에 새겨둡니다. ‘앞으로 조심해야지’하고 말입니다. 그래도 영감님이 혹시라도 아무도 대작할 이 없이 쓸쓸하게 막걸리를 들이켜는 일이 생긴다면 그 꼴은 정말 못 봐줄 것 같아 영감님보다 하루라도 더 살아야지 싶고, 영감님은 마나님의 쭈그렁바가지처럼 편안한 얼굴을 바라보며 이 세상을 뜰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 요즘 들어 부쩍 마나님의 건강을 염려하는 ‘그들만의 지극한 사랑법’(33쪽)이 마음에 절로 녹아드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다보면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치매와 왕따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은 놀랍고도 얼마나 깜찍한지 모르겠습니다. 먼저 치매에 관한 생각입니다. “나는 건망증이라는 말보다는, 우리 엄마가 붙여준 무심하다는 말이 더 좋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무심함 때문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유념이나 지속적인 관심이 가능했지 않나 싶다.(156쪽)” 맞습니다. 질 프라이스처럼 보고 들은 것을 모두 기억한다면 우리의 머릿속은 온통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질프라이스와 바트 데이비스 지음,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 http://blog.joins.com/yang412/13189206). 그래서 무심함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착 감깁니다. 생리적 건망증을 무심함으로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왕따에 관해서도, “따돌리는 친구들을 두려워만 할 게 아니라 그들의 집단적 소심증을 여유있게 경멸할 수 있는 늠름한 태도도 왕따를 면할 수 있는 한 방법”이라고 하신 선생님의 발상이 놀라울 뿐입니다. 세상사가 마음에 있듯이, 내가 세상으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것에 상처받지 말고, 내가 세상을 왕따시킨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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