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통행로 / 사유이미지 발터 벤야민 선집 1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외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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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독일의 유대계 철학자로 20세기 형이상학, 유대신학적 요소를 사적유물론과 결합시킨 독특한 사상가로 알려진 발트 벤야민의 저술을 처음 읽게 된 것은 생뚱맞게도 누군가 쓴 여행기에서 그가 쓴 글을 인용한 것을 읽고서였습니다. 좌파 아웃사이더로 인식되고 있지만, 문학이론, 미학, 철학, 인류학 사회학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한 결과물이 정신, 사회과학 분야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폭넓게 인용되고 있다는데 오히려 저의 시야가 좁았던 것 같습니다.

 

최성만교수님이 ‘발터 벤야민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글에서 “부유한 유대인 시민 가정의 가부장적인 분위기가 그에게 강요한 것은 몰락해가는 계급 속에 갇힌 정체성, 사회로부터 차단된 정체성으로서 이는 어린 벤야민을 소외시켰고, 이 소외감을 극복하는 길을 그는 주로 책읽기에서 찾았다.(30쪽)”고 하면서도 “유복한 시민 가정의 보호막 속에서 자라왔기에 어린 벤야민에게 빌헬름 제국의 말기 계급적 갈등들은 대부분 은폐되어 있었고 파편적으로만 경험할 수 있었다.(31쪽)”고 적고 있어 헷갈리는 것 같습니다.

 

교수자격 취득에 실패하고 특별한 직업이 없을 때, 신문과 잡지 등에 산문, 여행기, 서평을 기고하던 그가 1920년대 몰락해가는 독일 시민사회에서 받은 파노라마적 인상이나 자신이 그동안 해왔던 철학적, 정치적, 문학비평적 관찰과 성찰들, 꿈, 여행기, 기억 등을 몽타주형식으로 엮은 철학적 아포리즘 모음집이 <일방통행로>라고합니다. <사유이미지>는 에세이와 산문단편들을 묶고 있는데 기지에 찬 사상적 통찰들만이 아니라 문체와 아방가르드적 형식이 독특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모두 60편으로 이루어진 <일방통행로>는 ‘주유소’라는 제목의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마치 길거리를 따라 가로에 늘어선 다양한 가게의 간판, 벽보, 플래카드, 광고판, 쇼윈도, 번지수가 적힌 집들, 기타 공간들처럼 다양한 공간들의 열림과 닫힘, 멀어짐과 가까워짐의 모습들을 벤야민의 관상학적 내지는 현상학적 시선으로 ‘사유적인 이미지’로 읽어냈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인지 경우에 따라서는 작가의 시선이 멈추는 곳이 어디인지 분명하게 파악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일방통행로>는 세 분의 옮긴이들이 완역을 했는데, <사유이미지>는 선집에 수록된 이야기 가운데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부분만 발췌하여 번역했다고 합니다. 일방통행로의 길을 거슬러 들어서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타국에서... 진입금지 표지를 보지 못했던 탓에 신호를 받아서 들어선 도로에서 마주선 차량이 놀란 표정을 짓는 모습에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도로상황이 복잡하지 않아 곁길로 빠지면서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일방통행로는 복잡한 도로상황을 고려하여 차량의 흐름을 유연하게 하는 효과를 기대하여 설치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작가는 자신의 사유의 흐름이 일정한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일방통행로>라는 제목을 붙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이야기 ‘주유소’의 첫 번째 구절 “삶을 구성하는 힘은 현재에는 확신보다는 ‘사실’에 훨씬 더 가까이 있다.(69쪽)”의 의미를 깨닫는 일부터가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머리를 쥐어짜면서 읽어가다 보면 제목과 글이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조차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좋은 산문을 쓰는 작업에는 세 단계가 있다. 산문을 작곡하는 음악의 단계, 그것을 짓는 건축의 단계, 마지막으로 그것을 엮는 직조의 단계가 그것이다(93쪽)”라는 이야기는 글을 쓰는 단계를 말하는 것 같은데 제목은 왜 ‘계단 주의!’일까요? 하나 더, ‘작가의 기법에 관한 13가지 명제’, ‘속물들에 맞서는 13가지 명제’, ‘비평가 기법에 대한 13가지 명제’로 구성된 이야기의 제목은 왜 ‘벽보 부착금지!’일까요? 혹시 아시는 분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이해가 될 듯 말 듯한 ‘소화물 운송 및 포장’이라는 제목의 글, “나는 아침 일찍 마르세유를 지나 역으로 간다. 가는 도중에 내가 잘 알고 있는 장소들,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장소들 혹은 흐릿하게만 기억나는 장소들을 마주치면서 그 도시는 손에 들려 있는 한권의 책이 된다. 나는 재빨리 몇 번인가 더 그 책을 들여다본다. 보관소에서 박스에 포장되어 언제 다시 이 책을 보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140쪽)”은 주변을 잘 관찰하면 글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읽었습니다.

 

<사유이미지>는 <일방통행로>에 비하여 비교적 의미파악이 쉬운 편인 것 같습니다. 특히 벤야민의 작가론이라고 할 수 있는 ‘훌륭한 작가’, ‘한번은 아무것도 아니다’, ‘글을 잘 쓴다는 것’ 등은 글쓰기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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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아 버림 - 내 안의 위대함을 되찾는 항복의 기술 데이비드 호킨스 시리즈
데이비드 호킨스 지음, 박찬준 옮김 / 판미동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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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간절히 원하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속상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또 누군가는 그런 경우에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하여 끝까지 매달리는 집착하기도 합니다. 그런 집착이 때로는 스스로를 파멸에 몰아넣기도 합니다.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놓아버림>은 역설적으로 원하던 일에 대한 집착을 버렸더니 쉽게 이루어지더라는 경험을 바탕으로 ‘놓아버림’이 가지는 힘을 학문적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편집한 프랜 그레이스는 자아발전에 관심이 많았는데 때로는 신체적, 정서적 문제을 해결하지 못하는 한계를 느낀 경험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호킨스박사의 이론을 배우게 되면서 자신의 인생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놓아 버림>은 더욱 자유로운 삶을 찾아 여행을 떠날 용의가 있는 사람들에게 일목요연하게 지도가 되어 줄 이라고 추천하고 있습니다. 즉, “이 책에서 제시하는 틀을 활용하면 각자 타고난 능력으로 행복과 성공, 건강, 안락, 직관, 조건 없는 사랑, 아름다움, 내면의 평화, 창조성에 이를 수 있다.(9쪽)”는 것입니다.

 

호킨스 박사의 전작 <의식혁명: http://blog.joins.com/yang412/2511139>을 읽으면서, 1부터 1000까지의 척도로 인간의 의식수준을 수치화하는데 성공하여 과거의 인물에 이르기까지 의식수준을 수치로 표현할 수 있다는 주장에 회의를 느끼면서 그가 해왔다는 다양한 연구 전반에 대하여 부정적 인상을 가졌었고, 심지어는 그의 주장이 지극히 서구적 시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책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놓아버림’에 대하여 저자는 “무거운 물건을 떨어뜨리듯 마음속 압박을 갑작스레 끝내는 일이다. 놓아버리면 마음이 놓이고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면서 한결 기쁘고 홀가분해진다.(32쪽)”고 하면서 이는 부처의 가르침을 적용한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전작에 비하면 저자는 종교, 철학, 의학 등의 다양한 영역에서 동양적인 것을 배워 활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집니다.

 

사람이 감정을 다스리는 방식은 크게 억제, 표출, 도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즉 부정적 감정에 대하여 무의식적으로 억압하거나 의식적으로 억제하고, 이로서도 감당이 되지 않을 때는 표출 기제를 사용하여 감정을 분출해서 억제할 수 있는 분량으로 줄이는 것입니다. 표출이 여의치 않을 때는 주의를 다른 데로 돌려 감정에서 벗어나는 회피기제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놓아버림’은 전혀 새로운 접근방식인가? 사실 놓아 버림은 타고난 능력이라고 합니다. 다만 무언가에 대한 욕망을 놓아버리면 아예 그것을 얻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한 켠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놓아버림의 정의하고 감정의 신경해부학적 원리를 설명한 다음, 저자는 무의욕과 암울함, 비탄, 공포, 욕망, 분노, 자부심, 용기, 받아들임, 사랑, 평화 등 놓아버림과 관련이 있는 요소들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설명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사례들, 심지어는 자신의 경험까지도 진솔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특히 제가 기억해야 할 점이라면 “타인에게 사랑을 행동으로 표현했다 인정받지 못하는 것도 분노의 원인이 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즉 타인이 내게 보내는 감정표현을 알아주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여기에서 사랑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개는 주인의 가슴에 사랑을 가져와 사랑의 크기를 키우는데, 사랑은 수명을 연장한다고 합니다(220쪽).” 다만 제가 서양의학을 전공한 탓인지, 스트레스에 대한 에너지 체계의 반응과 침술 체계에 대한 저자의 주장에는 쉽게 공감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현대의학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침술체계에서는 보이지 않는 신체 에너지 청사진에 따라 육체 구석구석 필수 에너지가 흐른다고 본다.(247쪽)”는 주장에 대하여 동의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합니다.

 

놓아버림과 정신의학 영역의 심리치료와의 차이점에 대하여 저자는, “심리치료에서는 치료자에게 의존하므로, 그들이 어떤 교육을 받았고 어떤 기법을 사용하는지가 중요하다. 또한 치료자와 환자가 동의하는 심리이론에 의존한다. (중략) 놓아버림의 기제에서는 환자 역할이 없으며 다른 사람이나 이론에 의지하지 않는다.(282쪽)”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놓아버림의 목표는 모든 괴로움과 아픔의 근원 자체를 없애는 것(284쪽)’에 두고 있다는 저자의 주장이 충분히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저자의 이론을 뒷받침할 수 있는 충분한 객관적 근거가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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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서로돌봄 - 사랑과 섬김의 실천
성규탁 지음 / 이담북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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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경제적으로 곤경에 처한 자녀를 지원하던 노부모까지 함께 어려움이 처하거나 부모와 자녀가 불화를 겪고 심한 경우에는 패륜범죄로 이어지기도 한다고 합니다. 늙은 부모를 자녀가 모시던 옛 풍습이 대가족제도의 붕괴에 따른 사회구조의 변화에 따라 사라지고 있는 것이며, 특히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자녀 세대가 누릴 수 있는 사회적 자원이 줄어든 것도 원인이라고 합니다(http://blog.joins.com/yang412/13242660). 결국 노인 부양에 대한 사회적 부담이 급증하고 있는 현실에서 세대간의 갈등이나 노인복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시급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복지를 전공하신 성규탁박사의 제안을 담은 <서로 돌봄>을 통하여 나름대로의 길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우리 겨레는 일상생활에서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공경하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에게 인자함을 베풀어 서로 돌보는 도리를 문화적 가치로 오랜 세대에 걸쳐 실행해왔다.”고 하고, 최근 변화된 우리 사회에서는 가족의 개념을 확대하여 “가족을 비롯한 이웃과 사회가 서로 돌보는 공동사회를 이루는 시대적 흐름이 현저해지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우리가 추구하는 서로 돌봄과 국가가 개발하는 사회보장을 효율적으로 융합하여 한국적 사회복지가 구현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서로 돌봄>은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 ‘방향: 서로 돌봄-넓은 사랑의 실현’에서는 돌봄은 물질적인 면 뿐 아니라 정서적인 면까지도 실현되어야 할 요소라는 점을 설명하고, 2부 ‘실천: 변하는 돌봄 방식’에서는 가족 구성이 변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하여 가족 바깥의 사회적 지원망과 사회복지 서비스를 활용하는 방안을 사례를 인용하여 논의하였습니다. 마지막 3부 ‘이념: 이어지는 전통’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여전히 가족 중심적 성향을 간직하고 있고, 서로 돌봄이 한국적 가치로 실행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서구사회의 복지모델을 인용하여 사회복지가 국가적 책임으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보장제도가 발전된 서구 사회에서도 최근에는 복지제도만으로는 국민의 복지요구 수준을 만족시킬 수 없단즌 결론에 도달하고, 가족이 자체의 성원들을 돌보는 본래의 기능을 보다 더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반영하여, 예를 들어 자녀가 부모를 모시는 경우, 부모와 가까이 사는 경우, 멀리 떨어져 사는 경우 등과 같이 다양한 상황에 따른 돌봄의 모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떨어져 있는 거리만큼 관계가 소원해질 것이라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저자는 부모와 자녀가 서로 노력하면 지리적 거리에 상관없이 바람직한 가족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서로 돌봄의 이론적 배경 뿐 아니라 현실적 실행방안도 제시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가족 중심의 돌봄의 유형에서도, 개인적 돌봄, 가족을 위한 돌봄 그리고 지역사회를 위한 돌봄에서 자주 제공하는 돌봄의 형식을 제시하고, 많은 자녀들이 고민하고 있는 위급할 때의 돌봄 형식도 제시하고 있어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사회복지 서비스를 이용해야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데, 시설을 이용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개선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고, 이용할 시설을 선정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들, 몇 가지 예를 들면, 시설의 분위기가 안락하고 가정적인가, 면허를 소지한 간호사가 배치되어 있는가, 시설의 안전은 확보되어 있는가, 오락 등을 포함한 사회활동 프로그램은 얼마나 제공되는가 등, 쉽게 놓칠 수 있는 요소들을 정리하고 있어 참고가 될 것입니다.

 

봉양이라는 고답적인 의미를 돌봄이라는 현대적 표현으로 다시 해석하여 전통적 돌봄 방식이 현대에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라거나 동아시아 각국에서의 돌봄의 현황 등에 관한 논의도 더하고 있어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격변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기에 안정될 수 있도록 구성원 모두가 적절한 대응방안을 모색해야 하는 현시점에서 실질적 도움이 될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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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밤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21
알프레드 드 뮈세 지음, 김미성 옮김 / 책세상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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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드 뮈세의 시집 <오월의 밤>을 붙들고 씨름했다는 한 독자는 “아주 오래 전이긴 하지만...나에게도 시를 사랑하는 순간이 있었는데, 왜 이렇게..요즘은 詩 읽기가 힘들까,”라고 리뷰에 적고 있습니다만, 저도 한 때는 시구절을 읊조리던 시절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詩 읽기를 그만둔 것이 언젠가 조차 잊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뮈세가 라마르틴, 비니, 위고와 더불어 프랑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이라는 사실도 몰랐다는 고백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월의 밤>을 읽은 것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제대로 읽어보자는 의욕 때문입니다.

 

뮈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스완네 집 쪽으로 1>에 처음 등장합니다. 마르셀의 할머니가 설날에 마르셀에게 줄 선물로 루소의 작품과 상드의 <앵디아나>와 함께 골랐던 것인데 아버지의 반발로 상드의 전원소설들로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상드와 소문난 연애와 뒤따른 실연의 아픔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연작시가 어린 마르셀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하는 우려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셀이 친구 블로크와 나눈 이야기를 적고 있는 부분에서 뮈세의 「10월의 밤」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 시점에선가 뮈세의 시를 읽은 것으로 보입니다.

 

마르셀의 고백에 대하여 블로크는 “뮈세 선생에 대한 네 저속한 취미 따위는 이제 버려. 아주 위험한 녀석에다 기분 나쁜 작자야. 고백하는데, 그 녀석이나 라신이란 작자는 평생 동안 운율을 잘 맞춘 시구절 하나씩은 쓰긴 했지만, 그 시구절은 내가 보기엔 절대로 아무 의미도 없다는 데에 그 최상의 가치가 있어. 예를 들면, ‘하얀 올로손과 하얀 카미르(La blanche Oloosone et la blanche Camyre)' 그리고 라신의 ’미노스와 파지파에의 딸(La fille de Minos et de Pasiphaè)이라는 구절이지.(프루스트 지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스완네 쪽으로 1, 162쪽, 민음사 펴냄; http://blog.joins.com/yang412/12948920)”라고 혹평했다고 합니다. 사실 뮈세는 1833년 데뷔 초기 관심을 쏟던 낭만주의적 시작에 관심이 시들해지면서 위고와 불화를 빚고, 이어진 상드와의 세상이 떠들썩한 열애도 1835년 파국을 맞은 상황에서 쓰여진 시들이 문단의 외면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1847년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올린 희곡 <변덕>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그의 시도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프루스트 자신은 뮈세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을 은근히 자랑(?)하고 있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출판사의 리뷰에 따르면, “실연의 고통에 빠져 있던 뮈세는 ‘내 영혼 속에서 빠져나오고자 하는 무언가’를 느낀 오월의 어느 밤, 촛불로 온 방 안을 밝혀놓은 채 아침까지 쉬지 않고 시를 썼다. 그리고 그날 밤 그의 영혼에서 빠져나온 것이 바로〈오월의 밤〉이었다. 뮈세가 무려 112행에 이르는 시를 하루저녁에 써 내려갔다.”고 합니다. 영감이 손을 움직여 시를 쏟아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실연의 아픔은 그에게 새로운 시의 세계를 눈뜨게 했음이 분명합니다. ‘고통 없는 시는 없으며 시인은 고통을 넘어서야 한다’는 그에게 시란 ‘한 방울의 눈물로 진주를 만드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프루스트가 인용한 시 ‘오월의 밤’의 한 구절를 살펴보면, 절망의 나락에서 실연의 아픔으로 몸부림치고 있는 시인을 뮤즈가 위로하는 대목입니다. “오세요. 신 앞에서 노래합시다. 당신의 마음속에서, / 잃어버린 환희 속에서, 지나간 고통 속에서 노래합시다. / 입맞춤을 한 채로 미지의 세계로 떠납시다. / 닥치는대로 당신의 생명의 메아리를 일깨웁시다. (중략) 색색의 나무가 우거진 펠리온 산꼭대기와, / 푸른 티타레스와, 백조가 떠다니는 물 위로 / 하얀 올로손과 하얀 카미르가 비치는 / 은빛의 만(灣)이 여기 있습니다.(78쪽)”

 

김미성교수가 옮긴 뮈세의 <오월의 밤>은 뮈세의 <신시집>의 분량이 너무 방대해서 전체를 완역하지 못하고 발췌해서 번역했다고 합니다. 시집의 말미에 뮈세에 관한 다양한 연구서들을 종합하여 시인과의 상인터뷰를 싣고 있어 뮈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등장인물이 마치 대화하듯 시구절들을 배치하고 있는 형식이 매우 독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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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의 연인 조르주 상드 소설집
조르주 상드 지음, 박현석 옮김 / 동해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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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스완네 집 쪽으로>에서 할머니가 선물로 고른 조르주 상드의 소설 네 가지 가운데 <사랑의 요정(꼬마 파데트로 번역되기도 합니다)>과 <마의 늪>을 싣고 있습니다. 옮긴이에 따르며 상드의 작품들은 시기에 따라서 색깔을 달리하는데, 1기에는 주로 연애소설을, 2기에는 사회소설, 3기는 전원소설을 그리고 4기에는 회상록과 프랑스 상류사회의 연애담을 다루었다고 합니다. 이 책에 담긴 <사랑의 요정>과 <마의 늪>은 상드가 머물던 프랑스 노앙지방의 민화를 바탕으로 쓰인 것들로 ‘소박하고 한가로우면서도 풍성함이 넘쳐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고 합니다. 상드가 삼 두드리는 사람의 구전을 통하여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어 마치 할머니께서 들려주시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느낌이 들거나, 잠자리에서 어머니가 들려주는 동화를 듣는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마르셀의 어머니가 고른 책은 <프랑수와 르 샹피>였는데, 마르셀은 “엄마는 자신의 목소리에서 언어의 강력한 분출을 방해할지도 모르는 모든 잔재주나 꾸밈을 추방하고, 마치 자신의 목소리를 위해 쓰인 것처럼 보이는 문장들, 말하자면 엄마의 감수성이라는 음역 안에 들어있는 문장들에 적합한 온갖 자연스러운 다정함이나 넘쳐흐르는 부드러움을 표현하려 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마르셀 푸르스트 지음, 김화영 옮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I, 민음사 펴냄)

 

<마의 늪>에 대한 작품해제에서 상드는 ‘전원생활에 대한 꿈은 어느 시대에나 도회 사람들의 이상이자 또한 궁정 사람들의 이상’이라 생각하고, ‘문명인을 소박한 생활의 매력 속으로 돌아가게 하는 경향에 따랐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상드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순박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지만 뜻대로 잘 되지는 않았다.’고 겸양하게 표현했지만, 프루스트는 “조루주 상드의 전원 소설들은 마치 옛 가구처럼 유행이 지난 비유적인 표현들로, 시골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표현들로 가득했다.”고 했습니다.

 

<사랑의 요정>은 콕스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 가운데 동생 랭드리가 어머니로부터 버림받고 할머니 슬하에서 자란 파데트의 거치 외양 아래 숨겨진 아름답고 순수한 모습을 찾아내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다루는 성장소설입니다. 콕스지방에서는 쌍둥이를 따로 키우지 않으면 한쪽에 불행이 닥친다고 믿었던 모양입니다. 건강한 랭드리와는 달리 형 시르비네는 병약했던 탓에 부모와 랭드리의 사랑이 사라질까 두려워하는데, 어느날 사라진 시르비네를 찾아 헤매던 랭드리는 파테트의 도움으로 시르비네를 찾게 되고, 파데트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합니다. 그 부탁은 성 안도슈 축제일에 자기하고만 춤을 춰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최근 예쁜 마드론의 관심을 받고 있는 랭드리로서는 힘든 부탁이었지만, 심지가 굳은 랭드리는 자신이 한 약속을 어길 수 없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의아해하고 동무들이 비아냥거리지만 랭드리는 파데트와의 약속을 지켰을 뿐 아니라 파데트를 놀리는 동네 아이들을 혼쭐을 내주기까지 합니다. 결국은 못생기고 더러운 옷을 입고 다니는 파데트가 심지가 굳고 신앙심도 깊은 것을 발견하게 되고,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파데트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기 위한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파데트를 돌보아주시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엄청난 유산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하던 바르보씨도 파테드의 진면목을 알게 되고 결국은 두 사람의 사랑이 결실을 맺게 된다는 해피엔딩입니다.

 

<마의 늪>은 독특하게도 작가가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홀바인의 판화 밑에 덧붙여진 오래된 프랑스 사행시, “이마에 땀 흘리며 / 너는 가난한 생활 / 오랜 동안의 일과 피로 끝에 /  보라, ‘저승사자’가 너를 부르고 있다”를 인용한 작가는 소박한 표현 속에 감춰진 깊은 슬픔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역설적으로 무덤의 허무도, 강요받은 체념으로 살아야 하는 농부의 삶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아내가 죽은 다음에도 장인 장모를 모시고 사는 젊은 제르망은 새장가를 가라는 장인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은 청혼을 하러 떠나게 되는데, 일자리를 얻어 외지로 나가는 젊은 여인 마리와 동행하게 됩니다. 아버지를 따라가려 숨어있던 작은 아들까지 어울린 일행은 생각지도 않게 안개 속에서 마의 늪에 갇히게 되고, 밤을 지내는 동안 어린이로만 생각했던 마리에게서 여성을 발견하고 마음이 끌리게 됩니다. 늪의 조화로 두 사람은 결국 결혼에 이르게 된다는 해피엔딩 소설입니다. 부록으로는 당시 프랑스 지방의 결혼식 풍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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