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장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우리는 그 중요성을 별로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인간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지만 정작 그 존재의 기반이 되는 장소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 장소는 인간과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지만, 주목받지 못한다. 그런데 만약 내가 관련을 맺고 있는 장소에서 한 발짝 떨어져 의식적으로 그곳을 관찰하고 낯설게 느껴 본다면 어떨까? 어쩌면 그 장소가 흥미로운 여행지로 바뀌면서 나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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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한다는 건 삶의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이다. 저자는철학을 아는 삶이 우리를 얼마나 이롭게 하는지를 이야기하며 프랑스에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이처럼 철학과 함께하는 삶의 가치를 알려온 저자는 오래전부터 바다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파도와 때에 맞춰 밀려오고 물러나는 밀물과 썰물 등 바다의 생태에서 우리의 삶과 유사한 모습을 발견하면서 바다가 인생을 가장 잘 표현하는 자연이라고 생각했다.
삶이란 이미 그 자체로 가치 있다. 바다가 존재만으로 완벽한 것처럼 말이다. 때때로 고난과 역경이 삶의 전체를 휘감아도, 들뜨고 환희로 가득한 순간들도, 그 모든 순간이 인생이다. 잠시 눈 감고 싶을 만큼 힘들다고 해도 그것이 삶이 아닐 리 없다. 저자는 잠시도 쉬지 않고 물결치는 바다처럼 삶도 그렇게 물결치며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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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시 일기 헨리 나우웬 영성 모던 클래식 3
헨리 나우웬 지음, 최종훈 옮김 / 포이에마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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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수도원의 은수자 엘리아 수사를 만났다. 이전에 방문왔을 때우의를 갖게 되었던 요리사 크리스찬 수사가 나를 숲속길로 안내하여이 놀랄 만한 인물에게 소개시켜주었다. 우리가 20분 동안 이야기할때 엘리아 수사는 내가 들어야 할 말들을 실제로 전부 다 해주었다. 그는 곧잘 험악해지는 기후 속에서 날씨 변화가 얼마나 "선익한지" ― 그의 말에 따르면 "서-어-어-언익한지" ―모른다고 했다. 날씨 변화가 하느님에 대한 열망을 심화시켜주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폭풍이 그로하여금 부드러운 미풍을 염원하게 하고 구름이 태양을 염원하게 하며메마른 대기가 비를 염원하게 할 때 그의 마음은 하느님을 갈구하는 법을 배우게 되며 어느 것 하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게 된다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라 안에서 이 지역이 그렇게 좋은 것은 선익한모든 것들이 다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라오. 항상햇빛이 내리쬐면 사람은 그것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망각해버리고 더이상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말아요." 이 말을 할 때 행복한 눈을 가진 수염 덥수룩한 그의 작고 둥근 얼굴이 투명해지는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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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어느 하나 같은 장소가 없다. 모든 장소에는 독특한 자연경관과 문화경관이 다채롭게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곳 사람들은 자기 삶의 터전에 고유한 의미와 상징을 아로새기며 분주하게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여행에 지리학적 안목이 필요한 이유다. 여행지에 대한 앎을 바탕으로 세상과 나의 관계를 알게 되고, 그로부터 나에 대한 성찰이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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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가족 폐지론자들은 자기 가족을사랑한다. 흔히 어떤 사회 시스템에서 불쾌한 경험을했던 사람, 그리고 그 시스템에 대한 사랑만이 아니라다른 감정 역시 느끼는 사람들이 그걸 전복하는 운동을 시작한다는 건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이 불우했음에도 자기 가족을 사랑하는 건 (예비)가족 폐지론자들에게서 상당히 전형적으로 찾아볼 수있는 모습이다. 이를테면 가족 폐지론자는 자기 가족을 사랑하고, 그들의 행복을 빌고, 그들에게 절실한 돌봄을 제공하는 문제에 관해서라면 이 세상에 가능한대안이 거의 또는 전혀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자신과 자기 가족이 서로에게 유익하지 않음을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자기 가족을 사랑하는 건 누구에게든 문제일 수 있다. 가족을 벗어나고싶어하는 가정폭력 생존자들에게는 추가적인 족쇄가될 수 있고(특히 상업화된 주거에서 도망친 사람들에게 자본주의가 가하는 경제적 처벌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내가 보기에 가족이라는 종교는 가족이 앞으로 그런 역할을 하리라는 빛나는 희망을 중심으로 굴러가는 게 아닌가싶다. 우리는 확실한 소속, 신뢰, 인정, 충만의 가능성을 붙잡으려고 한다. 가족이라는 꿈은 안식처에 대한꿈과도 같다. 굶주림이나 구속과는 정반대되는 무언가. 관용적으로, 어떤 사람이 "가족 같다"는 말을 하는건 가능한 한 가장 강렬한 의미를 전달하려는 것이다.
"너는 내 거야, 나는 너를 사랑해. 우리는 운명이야."
이보다 더 강한 은유는 없다! 그런데 어째서 이 은유를 사용하는 걸까?
톨스토이는 "모든 행복한 가족은 고만고만하게 행복하고, 불행한 가족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그럴듯한 문장으로 자신의 역작을 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어슐러 르 귄이 "훌륭한 첫 문장이라고 인정하듯이, 좋은 말이다. 너무나 많은 가족이 극도로 불행하다! 그리고 이 심각한 불행은 고유하게 체감된다. 자본주의의 구조가 그렇듯이, 그 구조적인 특징이 멀리서 보면 교묘하게 뭉개져버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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