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일러 주는 하느님 - 오늘의 삶을 위한 식별
프란치스코 교황 지음, 자코모 코스타 엮음, 정강엽 옮김 / 성서와함께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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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냐시오 성인은 두 가지 생각의 차이점을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인은 3인칭 시점으로 쓴 그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세상사를 공상할 때에는 당장에는 매우 재미가 있었지만, 얼마 지난 뒤에 곧 싫증을 느껴 생각을 떨치고 나면 무엇인가 만족하지 못하고 황폐해진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가는 길, 맨발로걷고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하는, 성인전에서 본 고행을 모조리 겪는다고 상상을 하면, 위안을 느낄 뿐만 아니라, 생각을 끝낸 다음에도 흡족하고 행복한 여운을 맛보는 것이었다"(8항). 성인전은 그에게 기쁨의 여운을 남겼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이 경험에는 주목할 만한 측면이 두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시간입니다. 즉, 세상에 대한 생각은 처음에는 매력적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매력을 잃고 공허함과 불만족을 남깁니다. 반대로 하느님에 대한 생각은 처음에는 ‘나는 이 지루한 성인들의 이야기를 읽지 않겠어‘ 같은 일종의 저항감을 일으키지만, 성인들의 삶이 마음에 들어오면 그간 경험하지 못했던 평화를 느끼고 그 평화는 오래 지속됩니다.

두 번째 측면은 생각의 종착점이 어디인지입니다. 처음에는 상황이 그렇게 명확하지 않아 보입니다. 식별에는발전 단계가 있습니다. 가령 우리는 추상적이거나 통상적인방식이 아니라 우리 삶의 여정을 통해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지를 이해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이 근본적인 경험의결실인 ‘식별의 규칙‘에서 이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중요한 전제를 제시합니다. "대죄에서 대죄로 나아가는사람들에게 원수는 노골적인 쾌락을 제시하고 감각적인 쾌락과 즐거움을 상상하도록 하여 악덕과 죄들을 유지하고더욱 키워 가게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선한 영은 이성의 분별력으로 양심을 자극하고 가책을 일으키는 등 정반대의•방법을 쓴다" 《영신수련》, 314항).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하지않습니다.

식별하는 사람은 식별에 선행되는 역사를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식별이란 두 가지 가능성을 놓고서 제비를 뽑는 일종의 신탁이나 숙명론 혹은 실험실의 결과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어떤 지점을 지나는 여정을 마칠 때면 중요한 질문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여정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삶에서 조금 더 나아가면, ‘그런데 내가 왜 이 방향으로 걷고 있지? 내가 무엇을 찾고 있는 거지?‘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바로 그곳이 식별이 일어나는 지점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다리 부상을 치료하는 동안 하느님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자신의 삶을 개선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네, 그렇지 않았지요. 그러나 그는 자신의마음에 귀를 기울이면서 하느님을 처음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에게 놀라운 반전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첫눈에매력적으로 보인 것들은 그에게 환멸을 가져왔지만, 그다지눈부시지 않은 다른 것에서 그는 지속되는 평화를 느꼈습니다. 우리 역시 이러한 경험을 합니다.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고 거기에 머물다가, 결국에는 실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신에 우리가 자선 활동이나 좋은 일을 하면 행복을 느끼고, 좋은 생각이 떠오르고, 행복과 기쁨이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사건에는 명백한 우연성이 존재합니다. 모든 것은 사소한사고에서 발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기사들의 무용담에 관한 책을 원했지만, 성인전만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좌절은 하나의 전환점이 됩니다. 얼마 후에야 이냐시오 성인은 이것을 깨닫고 모든 관심을 집중했습니다. 명심합시다. 하느님은 계획되지 않은 우연한 일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나에게 우연히 어떤 일이 일어났고, 우연히 이 사람을 만났고, 우연히 이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일들은 계획되지 않았지만, 하느님은 계획되지 않은 사건과 심지어 불상사를 통해서도 일하십니다. "산책을 해야 하는데 발에 문제가 생겨서 산책을 할 수 없잖아." 이런 불상사를 통해서 하느님은 여러분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십니까? 그사건이 여러분의 삶에 무엇을 말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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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간이 약이며 결국에는 다 좋아질 것이라고, 모든 고통에는 메시지가 있다고 말하는 부류의 사람은 못 된다. 어떤 경우에는 그렇지도 않은 것이 삶이니까. 부서진 파편들을 서둘러주워 모으려고 하면 안 된다. 파편에 손을 다친다. 단, 이 한 가지를 나는 안다. 칼 융이 말한 대로, 우리는 아무것도 치유받지못한다는 것. 그저 놓아줄 뿐이라는 것. 우리는 흉터를 보면서자신이 상처를 극복했음을 알 수도 있고, 흉터를 보면서 상처입은 일을 기억할 수도 있다.

다행히도, 파란 바다가 바라보이는 귤밭에서 뙤약볕과 장대비와 풀모기들이 그녀의 아픈 마음을 인정사정 봐 주지 않았다.
더 다행히도, 그녀는 몸은 고되지만 지금 이 순간 마음은 평화

그러던 어느 날,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다음 문장을 발견하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깃털의 가벼움이 아니라 새처럼 가벼울 수 있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내가 무의식적으로 추구한 것이었다. 깃털의 가벼움이 아니라 새의 가벼움! 그래야 비상할 수 있고, 정신의 자유를 누릴 수 있고, 높은 곳에서 멀리 볼 수 있다.
깃털처럼 중심도 방향도 없이 이리저리 부유하는 것이 아니라새처럼 가볍게 날 수 있어야 한다. 새는 뼛속에 공기가 통하는공간이 있어서 비행할 수 있듯이 존재 안에 자유의 공간이 숨쉬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경박한 가벼움이 아니라 자유를 품은가슴의 가벼움이다.

깨달음에 이른 후 싯다르타가 제자들에게 한 첫 번째 강의는
‘인생은 괴로움이고 고통이다.‘라는 것이었다. 불교도뿐 아니라비불교도들도 이 진리에는 동의한다. 그런데 모든 불상은 왜고통스러운 얼굴이 아니라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을까? 심지어 크게 웃는 불상도 있다. 그렇다면 생에 대한 정의는 괴로움에서 출발해 궁극의 웃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자신을생각의 무거움으로 짓누르는 시기를 지나 경쾌한 혼의 길로 나아가는 것.

영국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가 소설 『섬」에서 썼다.
"마음이 어두운가? 그것은 너무 애쓰기 때문이라네. 가볍게가게, 친구여, 가볍게. 모든 걸 가볍게 하는 법을 배우게. 설령 무엇인가 무겁게 느껴지더라도 가볍게 느껴 보게. 그저 일들이 일어나도록 가볍게 내버려 두고 그 일들에 가볍게 대처하는 것이지. 짊어진 짐들은 벗어던지고 앞으로 나아가게. 너의 주위에는온통 너의 발을 잡아당기는 모래 늪이 널려 있지. 두려움과 자기연민과 절망감으로 너를 끌어내리는. 그러니 너는 매우 가볍게걸어야만 하네. 가볍게 가게, 친구여."

여기, 페르시아 시인 잘랄루딘 루미의 시가 있다.
가까이 오라, 사랑하는 이여.
우리 서로를 어여삐 여기자당신과 나갑자기 사라지기 전에.
역설적이게도 삶의 기쁨은 이곳에서의 나의 머묾이 제한적이고 유한하다는 자각에서 시작된다. 봄의 풀꽃들도 그것을 아는듯하다. 지저귐을 막 배우기 시작한 어린 새도 안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우리의 가슴 안에 그 새의 공간을 남겨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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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잠깐의 시간으로 모든 걸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힘든 시간을 묵묵히 인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툭툭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수많은 감정들이 담겨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조심스레 초라해진 내 아픔과 고민을 건넸더니 귀를 의심할 정도의 간단명료한 해답을 주셨다. 몇 초간 멍해 있다가도 자동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지혜로운 답이었다.

"조진 거 아니야? 조진 건 잊어라", "눈이 갔네. 밥맛은느껴지냐? 밥부터 먹고 생각해라. 하기 싫어도 해야지" 등주변에선 쉽사리 들을 수 없는 답을 내어주셨다. 보통 고민을 던지면 답변이 더 길어야 정상인 걸로 알고 있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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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 교육은 야만이다 - 김누리 교수의 대한민국 교육혁명
김누리 지음 / 해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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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우울한 나라‘이다 보니 한국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최근 이케아에서 38개국을 대상으로 한 ‘2023년 소비자 조사‘를 발표했는데, "집에서혼자 있을 때 가장 즐겁다"는 응답을 한 비중이 세계에서 가장높은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이 결과 또한 치열한 경쟁의각자도생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국인의 고달픈 삶을 반증하는 것이라 씁쓸한 뒷맛을 남깁니다.

결국 이 모든 지표와 많은 석학들의 지적이 가리키는 총체적난국의 원인은 바로 경쟁입니다. "세계 최고의 우울증"(마크 맨슨),
"세계 최저의 출산율"(《뉴욕타임스》》, "세계 최악의 갈등 국가"(킹스칼리지), "세계 최고의 홀로주의"(이케아), 이러한 암울한 ‘세계 기록들‘의 뿌리에는 모두 극단적 경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경쟁,특히 경쟁 교육이 대한민국을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로 만든 것입니다. 이를 해소하는 것은 이제 단순한 교육의 문제를 넘어 국가 존립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경쟁이 자연스럽고, 긍정적이고, 불가피하다는 생각은 한국인대다수가 가지고 있는 지배적인 생각이지만,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처럼 ‘지배적인 잘못된 생각‘을 ‘이데올로기‘라고 합니다. 조금 학문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데올로기란 ‘특정 사회나 집단에서 지배적인 잘못된 관념체계‘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한국인들은 ‘경쟁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한국 사회에서 지배적인 잘못된 관념체계‘에사로잡혀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가 경탄하는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고의 자살률, 세계 최악의 불평등, 세계 최저의 출산율 등 ‘지옥 같은 사회‘가 된 것은 무엇보다도 이 3각의이데올로기 체제 때문입니다. 저는 경쟁-능력주의 공정의 3각 이데올로기 체제를 한국 사회를 야만적인 사회로 만든 가장 결정적인 관념체계라고 보고, 이를 ‘야만의 트라이앵글‘이라고 부릅니다.
이 잘못된 3각의 이데올로기 체제가 한국인의 의식을 완전히장악한 결과, 한국인은 자본주의 국가 중에서도 유례를 찾아볼수 없는 약탈적 야수자본주의, 천박한 천민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도 이에 저항하기는커녕 자발적으로 자신의 불행에 스스로를던지고 있습니다. 이데올로기 이론의 대가 테리 이글턴의 말을빌자면, "가장 어려운 해방은 바로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해방이기 때문이지요.

마이클 샌델은 ‘능력주의는 폭군‘이라고 했습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경쟁 교육은 야만‘이라고 했지요. 이제 능력주의 경쟁교육을 끝내야 합니다. 이제 폭군과 야만의 시대를 끝내야 합니다. 이제 이 야만적 폭군으로부터 우리 아이들을 구해내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들이 행복하고, 교사가 행복하고, 학부모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숙한 민주사회, 정의로운 복지국가로나아갈 수 있습니다.

넬슨 만델라는 "한 사회가 아이들을 다루는 방식보다 그 사회의 영혼을 더 정확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영혼‘은 무엇인가요. 우리 사회는 아이들을 어떻게대하고 있나요. 그들을 인간으로서 존중하고, 그들의 삶을 소중히 여기고 있나요. 그들의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나요. 그들이 개성을 기르고 자유를 누리도록 무엇을 돕고 있나요. 그들이세계의 고통과 억압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연대하는 세계시민으로 자라도록 이끌고 있나요.

21510하지만 민주정부가 키우고자 한 건 애초에 인간이 아닙니다. 그들은 인간을 ‘자원‘으로 변화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인간을 천연자원(natural resources)에 대비되는 인적 자원(human resources)으로 본 것이지요. 인간을 자본의 ‘부품‘으로, ‘원료‘로 만들고자 한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 한국인은 민주정부 아래에서 ‘인간‘이 아니라 ‘자원‘으로 키워졌습니다. 그것은 한국 자본주의가 만들어놓은 끔찍한 악몽이지요. 저는 이러한 도구적 교육관이 한국 자본주의가 초래한 유례없는 불평등보다 한국 사회에 더 장기적이고심원한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너무도 인간을 경멸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스펙은 영어 ‘specification‘의 약자로,
원래 무기의 사양, 즉 무기의 성능이나 특성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이 총은 사정거리가 500미터이고 인간을 동시에 5명 살상할수 있다. 이런 설명을 할 때 쓰이는 말이 스펙입니다. 이런 끔직한말을 한 인간의 능력을 규정하는 개념으로 쓴다는 게 말이 됩니까?

저는 스펙이라는 말이 갖는 유일한 메타포적 미덕은 그것이인간을 죽이는 살상무기의 성능을 뜻하는 말이라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적 자원‘ ‘노동의 유연화‘ ‘스펙‘이라는 말에서 살펴보았듯이,
현대 사회의 지배는 근본적으로 언어에 의한 지배입니다. 다시말하면 언어를 통해 인간의 의식을 장악함으로써 지배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돌아보면, 그것은 이미 근대의 개막을 의미하는 프랑스 대혁명 때부터 시작됐습니다. 언어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합니다.

천재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하늘이 내린 재주입니다. 이런재주는 아무나 갖지 못하지요. 그래서 천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딱 하나만 잘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골고루 잘하는 천재는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범재(凡)‘입니다. 평범한 재능인 것이지요. 만약 어떤 천재가 한국 교실에서 교육받는다면, 그는 틀림없이 열등생으로 낙인찍혀 교실에서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한국에서는 모든 것을 골고루 잘하는 학생을 모범생, 우등생이라고 부릅니다. 그런 학생들이 스카이에 가는 거지요. 천재는 스카이에 가기 힘듭니다. 실제로 제가 4년간 서울대에서 가르치면서 만난 학생들 중에서 ‘아, 이 아이는 천재구나‘ 하는 느낌을 받은 학생은 거의 없었습니다. 경이로운 수준의 강박적 성실성을 가진 학생들은 많이 보았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저렇게까지 성실할 수 있을까 놀라면서, 한편으론 이 착한 아이들에게 너무도 안타까운 심정이었습니다

앞서 말했지만, 대한민국은 선진국 중에서 유일하게 대학입학시험을 컴퓨터가 채점하는 나라입니다. 컴퓨터가 채점을 한다는것은 정답이 명명백백하다는 말입니다. 정답이 분명하지 않으면기계로 채점할 수 없지요. 사지 혹은 오지 선다형의 문제를 내고그중에 답 하나를 선택하면 그게 맞는지 틀린지 기계가 판단합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 교육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컴퓨터에 물어보면 다 아는 정답을 왜 알아야 하는 것입니까? 특히이런 식의 지식 교육, 암기 교육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전혀맞지 않습니다.

4차 산업혁명은 인간의 많은 능력을 인공지능, 로봇 같은 초고등력 기계가 대체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니 미래의 교육이 길러주어야할 능력은 도저히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비판능력, 사유능력, 상상능력, 공감능력이지요. 그리고 이런 능력은 기계가 측정할 수 없습니다. 죽은 지식을계속 아이들 머릿속에 처넣는 것을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구시대

"어떤 수업이 끝나면, 아이들이 몰려와 묻는 거예요. ‘너는어떻게 생각하니?‘ 수업 시간마다 이렇게 물으니까 몹시 곤혹스러웠어요. 일주일 내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 공세를 받았는데, 저는 한 번도 제대로 된 대답을 못했어요. 그래서 주말에방에 혼자 앉아 곰곰이 생각해 보았죠. ‘나는 과연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러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어요. ‘내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이 없다‘라는 사실 말이에요."

독일의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무사유는 범죄다"라고 단언했습니다. "무지는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무사유는 용서할 수 없다. 무지는 지식의 부정 혹은 부재이지만 무사유는 의미의 부정이기 때문이다." 사유하지 않는 것, 특히 비판적으로 성찰하지 않는것은 단순한 나태나 태만을 넘어 범죄에 동조하는 길이라는 뜻이지요.

다시 말하면 지식만 있고 사유하지 않는 인간은 의미를 성찰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처럼 의미를 성찰하지 않는 자들이 결국 20세기 최악의 정치적 비극을 낳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한나아렌트가 지목한 대상은 무엇보다도 나치 시대의 사유하지 않는독일의 판사들이었습니다. 이 판사들을 아렌트는 ‘넥타이맨 살인자‘라고 불렀지요. 그들은 법조문에 나와 있는 지식을 그대로 적용할 뿐 그것이 뜻하는 의미를 사유하지 않았다는 거죠. 그것이야말로 범죄라는 거예요.
달달달달 외운 지식을 정답이라고 찍다 보면 사유능력이 저하될 뿐만 아니라 의미를 부정함으로써 결국은 범죄자의 하수인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독일의 참혹한 역사, 아우슈비츠의 비극

이 자리에서 안나 뤼어만은 18세 고등학생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의미에 대해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
"국회라고 하는 곳은 기본적으로 대의기관입니다. 그러므로국민이라는 모집단을 그대로 대의하는 국회가 가장 이상적인국회입니다. 그런데 지금 독일 국회에서는 10대가 거의 대변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10대의 의사를 대변하기 위해 국회에들어갔습니다."

안나 뤼어만은 자신의 국회 입성의 의미를 ‘세대 대표성(Generations-representation)‘이라는 말로 함축했습니다.
10대를 대변하는 역할이 자신이 국회의원이 된 의미라는 것이지요.

예전에는 중앙대학교에서도일정한 민주주의가 실천되고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총장 직선제지요. 그런데 두산이라는 재벌 기업이 중앙대를 인수한 이후에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두산이 중앙대학교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바로 총장직선제를 없앤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총장 임명제를 신설하고,
자기들 마음에 드는 사람을 학내 구성원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멋대로 총장으로 임명한 것이지요. 대학의 민주적 거버넌스를 파괴하고 독재적 전횡을 제도화한 것입니다. 이로써 대학 민주주의는 단칼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이룬

저는 독일에 갈 때마다 주로 독일 대학에서 머뭅니다. 베를린대학, 프랑크푸르트 대학, 브레멘 대학 등에 자주 가는 편입니다.
특히 대학 식당인 멘자에 가면 지금도 독일 대학생들의 관심 사안이 어디에 있는지를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식사를 하는 동안학생들이 건네준 팸플릿만 해도 한 줌이 됩니다. 생태 기후변화문제,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 유럽연합 내의 국가 간 차별 문제 등이들이 다루지 않는 문제는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억압과 고통에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아마도 지금은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전쟁과 관련된 논쟁이 독일의대학에서 뜨거운 이슈일 것입니다. 요컨대, 정치적 공론장으로서의 대학 캠퍼스가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대학 캠퍼스에 넘쳐나는 유인물들은 오로지 취업 정보뿐입니다. 이렇게 대학이 탈정치화되었다는 것보다
‘대학의 죽음‘을 더 확실하게 알려주는 부고가 또 있을까요. 우리의 미래를 생각했을 때 이는 너무도 끔찍한 일입니다.

스를 둘러보세요. 대학의 미화원, 경비원이 어떤 환경에서 지내고 있는지를 보면 말문이 막힙니다. 그분들이 대부분의 시간을보내는 곳은 말이 휴게실이지 도무지 사람이 쉴 수 있는 장소가아닙니다. 그런 것을 볼 때마다 정말 부끄럽고 화가 납니다.
독일에서는 가장 민주적인 곳, 가장 권력 비판이 예리한 곳, 가장 사회 정의가 확실하게 구현된 곳이 대학입니다. 그리고 이런대학에서 배운 학생들이 사회로 퍼져 나가서 ‘새로운 독일‘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대학이 가장 비민주적인 곳, 가장 권력 비판에 둔감한 곳, 가장 사회 정의와 거리가 먼 곳이 되었습니다

.빌헬름 폰 훔볼트는 "대학이란 가장 이상적인 유토피아를 선취하는 소우주"라고 했습니다. 독일 대학은 이 말대로 유토피아를선취하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대학은 ‘가장 끔찍한디스토피아의 공간‘으로 전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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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이끄심 그 길을 가다
최종훈 지음 / 성서와함께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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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이질문의 답은 루카가 전하는 ‘사도행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사도행전mpazers ànoorohwy"은 그 제목에서도 알 수있듯이 ‘사도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리고그 안에는 사도들이 어떤 사람이었고 어떻게 사도가 되었는지, 왜 그렇게 불렸는지, 누구와 함께 살고 누구를 만났는지, 예수님을 어떻게 따르고 증언하고 닮아 갔는지가담겨 있다.

루카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일들에 관한 이야기"(루카 1,1)를 하고 싶어 한다. 일차적으로 루카는 그들과 함께 살았던 예수님의 이야기, 곧 그분의 말씀과 행적 그리고 그분이 삶을통해서 보여 주신 사랑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사람들의 이야기, 그분을사랑하고 그분을 증언하고 그분의 삶을 따라 살았던 사도들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루카의 이야기는 그의 권고에 공감하고, 자신의 삶을 묵상하여 그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도 들려주라는 주제를 담고 있다. 루카의 목적은 ‘우리가 사는 이야기‘를하는 데 있다.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이야기, 그분으로 인해 변화된 이야기, 예수님을 따르고 증언하고그분의 사도로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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