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한 사람으로 보면, 나는 그저 20년 넘도록 지름이 100미터쯤 되는 조그만 그라운드 안에서만 맴돌다가 마흔이 넘어서야 세상으로 나온 미숙아이다. 야구가 인생의 축소판이라고는 하지만, 그축소판에서만 놀다 나온 나에게 인생과 세상은 새삼 낯설고 막막하다.

늦깎이 인간 이대호가 의지할 것은 야구장에서 익힌 노력과 성공의 방법들뿐이다.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출발점도 역시 야구 선수 이대호의 성공과 실패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기왕 입을열어 인사말을 전하는 김에, 내가 야구 선수로서 어떻게 인생을 시작하고 마무리했는지 한번 정리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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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또 하나의 다른 세상을 열어주는창문과 같다.

결정적인 것은 우리가 언제나 신비로 가는 길 위에 있다는 점이다. 여기 지상에서는결코 우리에게 완전히 인식되지 않을, 우리가 하느님을맞대고 볼 때야 비로소 그분의 꾸밈없는 광채 안에서 환히 빛나게 될 그 신비로 가는 도정에 있다는 것이다.

우선 엠플레포emplepo이다. 대체로 ‘누구의 속을 들여다보다‘, 다른 이의 근본을 보다‘라는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요한은 이 단어를 세례자 요한에 대해 말할 때 사용하는데(요한 1,36), 바로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그분 안에서 세상의 죄를 없애는 어린 양을 알아보았다고 말할 때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속)를 바라보시고 그 안에서 온갖 약점에도 불구하고 바위, 곧 그의 진정한 본질을 알아보셨다는 것을 이야기할 때 똑같은 말을 선택한다(요한1,42).

또 다른 말은 테아스타이that이다. 이 말은 테오스 whees,
하느님이라는 말과 어원이 같다. 진정한 바라봄은 우리가 관찰하는 모든 것 안에서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곧 모든 존재의 본래의 근거인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 나는 피조물의 아름다움 안에서 하느님의 아름다우심을 본다.나는 인간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 안에서 하느님 자신이 나와 만나신다는 것을 깨닫는다. 예수님께서 필립보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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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의 예언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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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태어나는 이유는 세 가지 때문이다.
1. 배우기 위해.
2. 경험하기 위해.
3.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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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에 따르면 중년에 접어들며 인생이 생각보다형편없이 짧다는 것을 깨달은 두 명의 현자가 있었으니, 어느 맑은 봄날, 한 명은 "얼마 남지 않은 인생, 충실하게 살자"라고 결심했고, 다른 한 명은 "얼마 남지 않은 인생, 자유롭게 살자"라고 작정했다.
훗날 그 둘이 죽음에 이르렀을 때 첫 번째 현자의 제자들이 말하길, "스승님은 충실하게 사는 것은 남의 눈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가 원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두 번째 현자의 제자들이말하길, "스승님은 자유롭게 사는 것은 남의 눈에 개의치 않고 스스로가 원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라하셨습니다."

노배우가 말했다. "스타가 된다는 건 물이 얼음이 되는 것과 같아. 본질은 같고 잠깐의 변화만 있는 거라고 언젠가 얼음이 상온에 노출되어 다시 물이 됐을때 ‘아, 이 물은 예전에 얼음이었지‘라며 누가 알아줄 것 같나? 그저 물일뿐이지."

홍어 명인이 물었다.
"남도에선 큰 집안일이 있을 때 홍어를 상에 올리는데, 옛 어른들이 말씀하시던 잔칫집 홍어와 상갓집홍어의 차이를 아십니까?"
"글쎄요. 맛이 다른가요? 분위기 탓일까요?"
"잔칫집 홍어는 미리 날을 받아놓고 품질이 좋은 걸찾아 충분한 시간과 정성으로 삭히니 맛이 좋지만,
상갓집 홍어는 갑작스럽게 구해 급히 올리는 것이니 맛있기가 힘들다는 얘기죠."
슬픈 일은 느닷없이 닥친다는 걸, 홍어로도 배운다.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받은 인성 교육 이야기를 들려준다.
"종이에 사람을 그리세요. 그리고 그 사람에게 나쁜말을 하며 종이를 구겨보세요. 이제 좋은 말을 하며종이를 다시 펼치세요. 어때요. 구겨졌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죠? 그래요. 나쁜 말을 하고나면 나중에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상처가 완전히 없어지지않는답니다. 그러니까 친구한테나쁜 말을 하면 안되겠지요?"

팬데믹 초기 마스크 대란이 일어났을 때, 어렵사리손에 넣었던 마스크 한장을 친구에게 주었더니 진심으로 감동하여 눈물을 글썽이던 모습이 잊히지않는다. 오늘 내가 그에게 마스크 몇십 박스를 보낸다 해도 그때처럼 감동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가치란 그런 것. 급격하든 완만하든 상황과 시절에 따라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러니 지금 내가 귀하게 여기는 것들의 가치 또한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일.

농구 경기 중간엔 시계가 시시때때로 멈추지만, 축구 경기 도중엔 시계가 멈추지 않는다. 시간을 다루는 두 가지 방식이 흥미롭다. 인플레이가 아니면 유의미한 시간으로 세지 않겠다는 농구의 논리와, 시간은 좌우지간 흐르는 것이고 인플레이가 아닌 순간은 추가 시간으로 보상하겠다는 축구의 논리. 물론 실세계에서 시간은 멈추지 않고, 무의미한 시간을 보냈다고 나중에 보충해주지도 않지만, 때론 생각한다. 우리 삶에도 농구 혹은 축구의 방식으로 시간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택할지.

둥글어진다는 건 무뎌진다는 걸까. 아니, 뾰족했을때보다 더 많은 것을 섬세하게 느낀다는 거겠지. 2차원에서 선으로 그린 땅 위를 별 모양이 구른다고 생각해보자. 별 모양은 뾰족하게 튀어나와서 땅 위에닿는 부분과 아예 안 닿는 부분이 극단적으로 나뉘어, 닿는 부분은 무척 민감하지만 안 닿는 부분은 한없이 둔감할 게다. 반면 둥근 원이 구를 땐 모든 부분이 빠짐없이 닿으며 땅 위의 전부를 느낄 테니, 무릇 뾰족한 사람을 두려워 말고 둥글둥글한 사람을어려워하라. 사실 그는 모든 걸 파악하고 예민하게주시하는 이다.

전염병 장기화로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분들의이야기를 다룬 기사, 그 아래 달린 두 가지 댓글.
하나는 "너희만 힘든 게 아니다."
또 하나는 "남 이야기가 아니다."
같은 상황을 해석하는 다른 마음. 후자의 마음을 지니고 싶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나 자신을 다루는 법을 조금이나마 더 잘 알게 되는 것. 게으르고 괴팍하며 소심하고 엉뚱한 자아를 어르고 달래면서 느릿느릿 앞으로 나아가는 것. 한심하기도 안쓰럽기도 섬뜩하기도 답답하기도 한 나, ‘이것도 팔자인데 어쩌겠니.‘
하는 심정으로 마침내 인정하고 동행하는 것. 너나나나 고생이 많다. 나 때문에 너도 참 고생이 많다.

부작용

매일 오늘이 인생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라는 현인의 말을 듣고,
매번 이 식사가 인생 마지막 끼니인 것처럼 먹게 되었다.

자유

한번 홀딱 젖고 나면
더 젖을 수는 없다.
그때부터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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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은 유일하신 하느님께서 소위 세 가지 방식,
즉 당신 창조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말씀을 통해서, 영의 내적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드러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이해했습니다. 이러한 만남은 우리의 내면에서 이루어지고,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보여 주고자 합니다.

이는 자주 소홀히 취급되어, 많은 이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에 어려움을 느낍니다. 사람들은 자기 내면에 소홀하고,
때로는 규범과 법에 의해 영에 매우 적대적인 외부의 영향을 많이받습니다. 그러나 내면은 자유롭고 오직 사랑의 힘을 통해서만 인도됩니다. 믿음과 사랑은 인간의 가장 내밀한 영역이기에 아무도이 영역을 외부에서 조종할 수도 없고, 조종해서도 안 됩니다.
외르크 징크Jörg Zink는 삼위일체를, 이 한 분이신 하느님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반향 공간 내지 영역으로 묘사합니다. 세상 만물은별들의 시와 함께 우리를 둘러싸고, 자연의 노래와 함께 우리와 매우 가까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 삶 안으로 옮기십니다. 그리고 우리 영혼에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수 있는 반향 공간이 있습니다. 한분이신 하느님, 하지만 세 가지체험. 이것이 삼위일체입니다.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마차를 타고 지나가는 길에
"왜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저렇게 불행해 보이나?"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신하는 그에게 "왕비 마마, 그들에게 빵이 없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왕비는 깜짝 놀라면서 다시 물었습니다. "빵이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않나?"
케이크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사람의 궁핍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케이크가 없어도 사람이 살 수 있지만, 빵조차 없는사람에게는 결국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빵 걱정을 해야 하는 사람은 이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여러 종류의 케이크 가운데 하나를 고를 수 있는 사람은 우리에게 빵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끊임없이 의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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