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쾰른의 한 지하실 창고에 적혀있던 기도문에 이 곡을 붙였습니다. 그곳은 유대인들이 숨어있던 곳으로, 이 기도문은 곧 많은 이에게 알려졌고 비극의현장인 바르샤바의 게토에서도 발견됩니다. 두려움과 절망속에서도 신앙과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이들은 이렇게 기도했겠지요.
나는 태양이 비추지 않는다 해도 태양을 믿습니다. / 나는사랑이 주변에 없는 듯 느껴져도 사랑을 믿습니다. / 그리고 나는 그분이 침묵하신다 하더라도 하느님을 믿습니다.

감사를 뜻하는 말들은 많다. / 그저 속삭일 수밖에 없는말들. / 아니면 노래할 수밖에 없는 말들. / 딱새는 울음으로 감사를 전한다. / 뱀은 뱅글뱅글 돌고 / 비버는 연못 위에서 / 꼬리를 친다. / 솔숲의 사슴은 발을 구른다. / 황금 방울새는 눈부시게 빛나며 날아오른다. / 사람은, 가끔, 말러의 곡을 흥얼거린다. / 아니면 떡갈나무 고목을끌어안는다. / 아니면 예쁜 연필과 노트를 꺼내 / 감동의말들, 키스의 말들을 적는다.
(메리 올리버 ‘아침산책’)

나의 행동과 생각과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덕이 아니라는 것을 인생의 어느 순간부터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살아 있는감정을 온전히 느끼고 그 감정을 자유롭고 꾸밈없이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절제와 기도하는 삶을 통해 얻게 되는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그중에서도 메리 올리버가 노래하듯 ‘감사‘
야말로 우리가 왜곡 없이 자연스럽게 느끼고 숨김없이 표현할 줄 알아야 하는 가장 아름다운 감정이 아닐까요? 시인은세상 모든 일에 혹은 모든 존재에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고있는 듯합니다.

루 게릭은 은퇴식에서 구장을 가득 채운 자신의 팬들에게 자신이 맞이한 운명에 대해 솔직하게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병고에도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지난 2주 동안 제가 맞이한 불운에 대해 읽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제 자신을 지상에서 가장 운좋은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이 운동장에 17년간 있으면서제가 받은 것은 팬들로부터의 호의와 응원이었습니다."

"이제 저는 비록 제가 이런 불운에도 살아야 할 많은 이유가있다고 말하며 이만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2년 6월 1일 보스턴의 웰즐리 고등학교에선 이 학교 출신 명사가 축사하는 관행을 깨고, 영문학 선생님인 데이비드매컬러 주니어가 ‘여러분들은 특별하지 않습니다 You are notspecial‘ 라는 주제로 축사를 맡았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승리자가 되는 것이 성공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행복한 삶에 눈을 두라는 이 축사에서 다음대목은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단지 깃발을 꽂으려고 산에 오르지 마세요. 맑고 신선한공기를 마시며 경치를 즐기세요. 세상이 당신을 보게 하려고 산에 오르지 말고, 당신이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도록산에 오르세요.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은 우리가 특별하지않다는 걸 느낄 때 찾아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다르다는 착각에서 벗어났다는 느낌에 너무도 안심하고기쁜 나머지 하마터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나의 행복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과 같고 다른 사람들 가운데 하나인 것에 감사드립니다." (토마스 머튼)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그리스도교의 근본진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비로소 깊이 묵상하게 합니다. 사람들은 다른 이보다 자신이 나은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며 얻는 성취감을 가장 큰 행복으로 여기는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은 우리를 끊임없이 경쟁구도 속으로 밀어 넣고,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합니다. 토머스 머튼은 우리에게 가장 큰행복은 내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같은 ‘인간‘임을 깨우칠 때 온다는 것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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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의 존재 이유를 묻기 시작했다. 니체 철학의 핵심적인 질문중의 하나는 ‘우리는 어떻게 존재하는 대로의 우리가 되는가?‘ 이다. 모든 지적 탐구의 주체는 ‘나‘다. 아래는 덴마크의 철학자 키르케고르(Kierkegaard)의 말이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것은 어느 과학자도 알아낼 수 없으나,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자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삶의 기적이다."

문제는 나는 나로서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또 다른 나로 변신을거듭한다는 것이다. 지금 알고 있는 나는 지금의 나일뿐이다. 지금 이 순간을 넘어서는 순간,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내가 아니다. 새롭게 변신한 나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미지의 세계를 지향하는 인간 존재는 주어진상태로서의 정적인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신하는 과정으로서의 동적인 존재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껍데기를 벗어 던지고 끊임없이 변신을 추구했던 니체. 그가 말하고 싶은 한 가지 화두, 그것은 ‘생존미학‘이 아니라 ‘존재미학‘이다. 니체가 던지는 화두는 먹고살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현대인들에게 얄팍한 자기계발 비법이나 던져주는 생존미학이 아니다. 니체의화두는 스스로를 발가벗기고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기 위해 끊임없이변신을 거듭하는 존재미학이다. 나를 나로 올곧게 세우기 위해서는 지금여기에 안주하고 있는 나를 스스로 흔들어 깨워야 한다. 과연 나는 진정한 나로 살고 있는가? 근본에 관한 질문은 존재의 모습에 관한 물음이다.
존재 자체를 뒤흔드는 질문이 존재를 더욱 튼실하게 만든다. 세차게 흔들려본 사람은 더 큰 시련과 역경에도 넘어지지 않는다.

스스로 흔들지 않으면 누군가에 의해 흔들린다. 내가 먼저 나를 흔들어야 남도 흔들 수 있다. 흔들어도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을 때는 낡은나를 망치로 부술 만큼의 용기가 필요하다. 두뇌를 수술하는 일이니 고통이 따르겠지만, 심하게 부서진 그곳이 바로 내가 다시 일어설 지점이다. 스스로를 파멸시켜야 또 다른 나로 재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밧줄 사다리로 온갖 창문에 기어오르는 법을 배웠다. 나는 민첩한 발로 높은 돛대에 오르기도 했다. 나는 다양한 길과 방법을 통해 나의 진리에 이르렀다. 내가 사다리 하나로만 먼 곳을 볼 수 있는 위치까지 오른 것은 아니다. 나 역시 계속해서 물어가며 걸었다. 물음과 시도, 그것이 내 모든 행로였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고기를 잡고 싶으면 새로운 그물이 필요하듯 새로운 관점으로나에게 물음의 그물을 던져라. 그런 질문의 반복을 통해 비로소 나만의길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 길을 걸어가는 여정에서 어느 순간 욕망의물길이 치솟는 때를 맞이한다. 그것이 바로 ‘물음표‘가 가져다주는 느낌표다. 바로 그 느낌표가 시키는 대로 걸어가라. 이와 관련해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우상의 황혼》),

"이제는 이것이 나의 길이다. 너희들의 길은 어디 있는가?" 나는 내게 ‘길‘을 묻는 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해왔다. 왜냐하면, 모두가 가야 할 단 하나의 길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높이 오르고 싶으면 그대들 자신의 발을 사용하라! 결코 실려서 오르는 일이 있어선 안된다. 낯선 사람의 등과 머리에는 올라타지도 말아라!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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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 EBS CLASS ⓔ
강신주 지음 / EBS BOOKS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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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료가 떨어져 방 안에서 덜덜 떨고 있던 사람이 나무 책상이 앞에 있는데도 그대로 얼어 죽는다면, 그는 책상이 땔나무가 될 수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다. 책상은 공부를 하는 용도로 써야한다는 생각, 즉 모든 것에 주어진 본질이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생각해보라. 아이들이 책상 위에 올라가 놀면 어른들은 내려오라고 한다. 책상은 공부를 하는 자리이지 노는 곳이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 책상 위에 올라가면사람들은 그가 책상의 본질을 모른다고, 혹은 아이들처럼 못 배웠다고 인상을 쓰기 마련이다. 제법유아‘나 ‘제법유자성‘이라는 발상이다. 책상 등 모든 존재에는 아트만이 있고, 자성이 있다는 생각인 셈이다.

영원과 불멸에 집착하는 사람은 근사했던 시절 어머니의 모습을찍은 사진에 집착하는 사람에 비유할 수 있다. 그 사진에 집착하기에 그는 노쇠해진 어머니의 모습을 직면할 수 없고, 당연히 삶의 마지막을 보내는 어머니를 아낄 수도 없다. 반면 순간과 찰나에 집착하는 사람은 어머니의 모든 삶의 과정을 찍은 필름을 엄청나게 빠르게 돌려 보는 사람과 같다.

어느 한쪽 견해에 빠지면 우리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존재들,
영원하지도 순간적이지도 않은바로 그 존재들과 제대로 관계할 수 없다.

영원할 듯한 것에서 작은 변화를 찾고,
순간적인 듯 보이는 것에서 순간적이지 않은 것을 찾자.

많은 인연으로 만들어진 존재들은 영원하지도 않고 순간적이지도 않다. 그러니 우리가 영원과 순간, 어느 한쪽에 쏠리지 않아야,한마디로 말해 상견과 단견 같은 희론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존재들의 실상이 보이는 법이다. 그러므로 중도의 길, 사랑의 길, 자비의 길에 들어서려면 균형 잡기가 필수다. 자전거를 탈 때처럼 영원쪽으로 넘어지려 할 때는 순간 쪽으로 핸들을 틀고, 순간 쪽으로 기울어지려 할 때는 영원 쪽으로 핸들을 트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한다.
변하지 않을 듯한 것에서 그렇지 않은 부분을 찾고, 변할 것 같은것에서 그렇지 않은 부분을 찾자. 영원하지도 않고 순간적이지도않은 존재의 실상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중도의 길, 사랑의길, 그리고 자비의 길을 걸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명경과 지수는 이렇게 다른 사유 이미지다. 명경은 세상과 직접마주치면 찌그러지기 쉬운 마음, 그래서 세상과는 일정 거리를 두고 관조할 수밖에 없는 마음을 상징하고, 지수는 어떤 외부적 충격도 흡수할 수 있는 회복의 힘을 가진 마음, 그렇기에 한 조각의 바람이나 작은 낙엽, 혹은 작은 물방울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마음을 상징한다.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에서 정(靜)이라는 글자를 강조했던 것도 바로 이 지수와 관련 있다. 마음을 안정되게 하자는 것,바로 이것이 ‘지수‘의 목적이니까. 잊지 말자. 마음을 고요하게 하려는 이유는 세상을 냉담하게 관조하는 명경‘이 아니라 세상의 아주 작은 움직임에도 파문이 일어나는 민감한 ‘지수‘처럼 마음을 만들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마음을 명경의 이미지로 이해하느냐, 아니면 지수의 이미지로 이해하느냐에 따라 우리 삶은 확연히 달라진다.

‘명경지수(明鏡止水)‘라는 말이 있다. 맑은 거울과 고요한 물이라는 뜻이다. 명경‘은 ‘맑은 거울‘로 해석된다. 과거 동아시아에서는 유리가 아니라 청동으로 거울을 만들었다. 그래서 경(鏡)이라는 글자에 쇠를 뜻하는 금(金)이 부수로 들어 있는것이다. 문제는 청동거울은 쉽게 녹이 슬기 때문에 계속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불행히도 ‘명경‘은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양반이나 귀족 등 소수의 여성들이나 사용했던 일종의 사치품이었다. 대다수 여인들은 고요하고 맑은 물에 자신을 비춰 보며머리와 얼굴을 정갈히 다듬었다. 그릇에 담긴 물이었을 수도 있고,아니면 빨래터 근처 개울의 잔잔한 물이었을 수도 있다. 바로 이것이 고요한 물‘로 번역할 수 있는 ‘지수‘다.

잔잔하고 고요한 물만이 작은 꽃잎 하나, 작은 바람 한 줄기에도섬세하게 반응하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안정되고 평화로우면 외부 대상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 당연하지 않은가. 나의 고통, 나의 상실, 나의 패배감, 나의 상처, 나의 좌절에만 마음이 가 있다면, 우리는 어머니, 아내, 남편, 아이, 고양이, 벚꽃 등의무상한 삶에 제대로 직면할 수 없다. 이런 상태에서 자비니 사랑을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닌가? 그렇다면 역으로 생각해보자. 작은 꽃잎 하나, 작은 바람 한 줄기에도 가녀리게 떨리는 물이 있다면 이 물은 자신이 잔잔하고 고요한 물이라는 걸 입증하는 게 아닐까?

주름 접기 (임플리케이션)와 주름 펼치기 (익스플리케이션)라는 과정만큼싯다르타와 나가르주나의 ‘연기‘를 잘 설명해주는 비유도 없을 듯하다. 수많은 조건들이 마주쳐 만들어진 한 잔의 커피도, 수많은 악기들의 연주가 조화를 이루어 울려 퍼지는 하나의 협주곡도 바로하나의 주름이 아닌가? 그래서 하나의 사람을, 하나의 사건을, 하나의 대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 그 사건, 그 대상에 새겨진주름을 펼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도 『도덕의 계보학 (Zur Genealogie der Moral)』(지식을만드는지식,2008)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선과 악을 넘어, 이것은 적어도 좋음과나쁨을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선과 악은 부모님, 시부모님, 선생님, 직장 상사, CEO나 사회적 통념 등이 나에게 강요하는 것이라면, 좋음과 나쁨은 오직 내가 느끼고 감당하는 것이다.
다수가 원하는 선과 악이 아니라 너의 좋음과 나쁨, 혹은 나의 좋음과 나쁨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혜능도 마찬가지다.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바로 그러한때 어떤 것이 혜명 상좌의 원래 맨얼굴인가?"라는 혜능의 질문은결국 "니, 뭣고?" 라는 질문과 다름없는 셈이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보지 않고, 네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지말할 수 있는가? 바로 이것이 육조다운 혜능의 첫 번째 물음이자설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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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특히 유럽의 금속공예는 생활과 함께 존재하는데 한국의금속공예는 현실과의 괴리가 너무나도 크지요. 예를 들어 유럽에서촛대를 만들면 작품으로 인식할 뿐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사용됩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저 장식품에 불과해요. 유럽에서는 지금도저녁을 먹을 때 촛대를 사용하는 그들만의 문화가 있으니 괴리가 없는거죠. 그때 깨우친 것 중 하나는, 공예가 생활 속에 있어야 하는 건데우리에게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점이었어요. 또 금속공예를하다 보면 만드는 과정에서 오염물질이 나오는데, 그걸 중화시키지않고 그냥 버리기도 합니다. 그런 게 너무 싫었어요. 나중에는 내가 왜쓰지도 못하는 걸 만들어야 되나 하는 회의가 많이 들었죠.

김신저는 ‘필연‘이라는 말보다 ‘우연‘이라는 말을 더 좋아하는데요.
어떤 직업을 갖게 될 때 필연적이라기보다 우연적인 경우도 꽤 많을것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것을 필연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지요.
지금의 내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석하는 건 나의 의지를 가볍게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누구나 무한한 가능성을 지녔다고 보는태도에 더 가깝지 않을까요. 내가 어떤 사람이 되려고 태어난 게 아니라세상에 우연히 던져진 만큼, 나는 어떤 사람도 될 수 있다, 이런 태도를갖고 의지를 발휘해 자신의 재능을 펼친다면 ....

저도 그런 고민을 계속 하고 있는데, 고정관념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없어요. 그렇다고 그걸 따라가면 신선하지가 않아요. 그래서 광고는대중보다 한 발 앞서가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두 발을 앞서가면고정관념이나 상식에서 너무 떨어져 있기 때문에 공감을 불러일으키지못하고, 보조를 맞춰가면 신선하지가 않은 거지요. 그러니까 그 시대의고정관념과 상식, 통념을 쭉 공부를 하고요. 그다음에 판단을 하는겁니다. 따라갈 것인지, 한번 뒤집을 것인지, 뒤집으면 사람들이 열광할것인지, 못 알아들을 것인지, 이런 것들은 건건이 다 따져봐야 해요.

광고 메시지가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끌고 갈 수있다고 믿고 카피를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차이는 인정한다. 차별에도전한다." 이것도 제가 쓴 카피예요. 남녀 문제입니다. 남녀 문제를등장시켜서 광고를 만들어도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여생도를 모델로 삼아서 남녀 간의 차이는 있지만 그게 차별이 되지않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질 수도 있고요.

미국의 전설적인 디자이너인 레이먼드 로위Raymond Loewy는 마야MAYA이론을 주장했는데요. "Most Advanced Yet Acceptable", 즉 가장앞서가되 대중이 받아들일 정도로 앞서가라는 주장이지요. 정말 얄미울정도로 그는 세상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세상은디자이너의 창의력을 쉽게 받아들일 정도로 그렇게 진보적이지만은않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하거든요. 하지만 결국 변화한다는 것을 잊으면안 될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광고와 디자인 분야에서 창의성을발현하면서 혁신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텔레비전 광고를 만든다거나 인쇄 광고를 만드는 것에만매달리는 게 아니라 ‘이 제품을 어떻게 사람들한테 알리지?‘라는문제에서부터 일을 시작한다는 거지요. 좀 더 종합적인 접근을 할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하는 일들이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옛날에는이 제품을 텔레비전에 ‘어떻게 보여주면 좋을까? 언제 보여주면좋을까? 얼마를 쓰면 좋을까?‘를 고민했다면, 지금은 ‘이 제품을텔레비전에서 보여주는 게 맞나? TV가 아니면 뭘 해야 하나?‘ 이런식으로 종합적인 솔루션을 찾아내려고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제 4대매체 중심의 역량을 다양한 분야로 분산시켜야 하는 상황이 되어서,
변화에 발맞춰 가기 힘든 업종 중 하나가 광고일 거예요.

"브로드캐스팅의 시대에서 내로우캐스팅의 시대로바뀌어서, 더 이상 ‘브로드 하지 않아요. 유튜브 채널이다 방송이잖아요. 이런 개인 미디어가 너무나 많아지니까전선이 없어진 거지요. ‘군중‘이라는 말도 없어지고 ‘분중‘이 되어버린 거라고 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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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마종기는 눈 내리는 아침에 미사를 지낸 감동을 시 「눈 오는 날의 미사에서 노래합니다. 두 번째 연에서 듣게 되는 시인의 고백이 마음을 깨끗하고 따뜻하게 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모형의 물이 / 오래 비어 있던 나를 채운다 / 사방에 에워싸는 하느님의 체온, / 땅에까지 내려오는 겸손한 무너짐. / 눈 내리는 아침은 희고 따뜻하다.

바로 나는 잠자고 있으나, 나의 심장은 깨어 있다>입니다.
유난히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이 곡과 클라우스 헴메를레 주교의 성탄 묵상은 참 잘 어울립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네 / 말씀이 심장이 되셨네 / 하느님께서 심장을 가지셨네. / 하느님의 심장이 뛰시네 / 수백만의 인간의 심장의 맥박 안에서 / (…) / 이제 우리는 알게 되었네 / 사람의 심장 안에 살고 계신 것이 누구이신지 / 우리의 심장은 채워지지 않는 몽상이 아니라네 / 우리의 심장은 출구없는 절망으로 내몰리지 않는다네 / 우리의 심장은 현실에서 도피하지 않는다네 / 아니, 우리의심장은 옳다네 /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심장을 취하셨으니까.

미쓰하라 유리의「하얀 길이라는 짧은 시 한 편이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오랫동안 헤매이다 마침내 바른길 찾아오면 / 길은 아무말 하지 않아 칭찬도 나무람도 / 짐 될까 저어 ‘돌아왔니‘
한마디조차 / 다만 지금부터 걸어갈 길 오롯이 하얗게 가리킬 뿐 / 걸어온 길보담 / 지금부터 걸어갈 길이 / 늘 중요하니까.

베토벤은 이 부제와 함께 마지막 악장 도입부의 악보 여백에 "그래야 하는가Muss es sein?"라고 묻고, 이어서 "그래야 한다그래야 한다Es muss sein, Es muss sein!"라고 스스로 답하는메모를 적어두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체코의 작가밀란 쿤데라는 자신의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현악 사중주 제16번)에 얽힌 이러한 일화를 실존철학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는 베토벤이 인간의 삶을 진정가치 있게 만드는 것으로 무거움과 필연성을 꼽았다고 말합니다. 베토벤은 그리스 신화의 아틀라스가 마치 하늘을 지고있는 것처럼 인간을 각기 자신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는 존재로 보았다는 것이지요.

밀란 쿤데라 역시 이런 정황을 모르지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오히려 일상의 작은 일화가 어느 사이엔가 심오하고 실존적이고 존재론적인 사건이 되어버린 것 자체가 소설의 주제를 잘 표현하고 있다고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쿤데라는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존재하는 ‘아이러니‘야말로 인간 존재와 인간의 삶을 관통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합니다. 베토벤의 이 일화는 이러한 철학적 인식을 위한 탁월한 예입니다. 작가의 생각에 동의하든하지 않든, 베토벤이 자신의 마지막 걸작과 함께 남긴 수수께끼 같은 메모는 음악사가들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진지한 삶의 질문으로 다가옵니다.

솔닛은 ‘걷기‘를 주제로 삼는 것이 누구나 하는 일상적 행위에서 특수한 의미‘를 보는 법을 배우는 좋은 예라고 합니다.
역사와 문화라는 큰 맥락에서 ‘걷기‘를 조망하는 것이며, 그러면서도 각 개인의 살아 있는 흔적을 감지하려 애쓰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걸어가면서 생겨난 수많은 것들, 즉 골목과통행로 같은 장소, 순례와 산책 같은 활동, 이런 과정에서 자라난 문학적 상상력과 이야기, 그것들을 적어둔 책들이 걷기의 역사를 만듭니다.

이 우아하고 지적인 책은 ‘걷기‘라는 하나의 예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매일 경험하고 수행하는 일상의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다 깊이 통찰하게 합니다. 이는 사실 오늘날처럼 각 개인의 중요성과 대체 불가능함이 가차 없이 부정되는 시대에 굳건히 지켜져야 할 사상입니다.

솔닛은 순례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를 찾으려 애쓴다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더 중요한 것은 순례라는 행동의 근본적인 목적이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
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순례를 이끄는 원동력이 영혼의 가장내밀한 갈망과 그 갈망을 담는 나의 몸에 있는 것이지요.

세르토는 머리말에서 이 책을 ‘일상의 영웅들인 모든 익명의 사람들에게 헌정한다고 밝힙니다. 대단할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되풀이하며 수행하는 것은 사실 각자가 자신의 고유한 흔적을 세상 안에 새기는 것이며, 세상을 만들어 가는 방법 인 것입니다.

세르토는 이러한 일상의 실천 중에서 도시를 걷는 행위를 각별히 주목합니다. 일상의 영웅들은 늘 움직이고 걸으며 죽어 있는 공간에매일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지요.

시간은 우리 앞에 언제나 열려 있는 지평의 표현으로서충만함과 관련되지만, 개별적인 순간들은 제한된 공간속에서 살아가는 한계의 표현입니다. 사람들은 개별적인 매 순간을 살아가는 동시에, 우리의 최종 목적인 낙원의 미래로 이끌어주는 더 위대하고 밝은 지평을 살아갑니다. 여기에서 국가 건설의 진전을 위한 첫째 원칙이나옵니다. 곧 ‘시간은 공간보다 위대하다‘는 원칙입니다.
(222 항)

이 원칙은 눈앞의 즉각적인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장기적으로 천천히 확실하게 일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이는 어렵고 적대적인 상황을 이겨내고, 현실의 힘이 강요하는 계획의 변경을 참을성 있게 견뎌내도록 도와줍니다. 또한 우리가 충만함과 한계 사이의 긴장을 받아들이고 시간을 우선시하도록 초대합니다. 우리가 이따금 사회 정치 활동에서 보는 잘못들 가운데 하나는 공간과을 시간과 진전보다 더 중시하는 것입니다. 공간을 우선시한다는 것은 자신을 내세우는 권력의 공간들을 독점하고 모든 것을 현재에 가두어두려고 하는 무모한 시도를 의미합니다. 이는 과정을 고착시켜 진전을 가로막습니다. 시간을 우선시한다는 것은 공간들을 장악하기보다.
는 진전의 과정들을 시작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갖는다는의미입니다. 시간은 공간을 지배하고 밝혀주며, 그것들이 퇴보하지 않고 계속해 확장되는 연결 고리로 만들어줍니다. (223항)

교황의 통찰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작은 이들의 분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우쳐줍니다. 그리고 ‘시간‘ 이라는 지평 속에서 각자의 노력이 모여들고, ‘공간‘으로 표상되는 역사와 체제라는 거대한 벽도 인간다움을 향한 연대의 힘은 이겨내지못하리라는 희망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세르토 신부의 연구에서 영감을 얻은 리베카 솔닛이 ‘걷기의인문학‘을 꿈꾸며 우리에게 전하는 호소도 결국 이러한 연대에의 촉구일 것입니다. ‘걷기‘라는 일상적인 행위이자 실천에주목할 때, 역사와 공간이 이루는 거대한 세계가 사실은 인간에게 또 각각의 사람들에게 귀속됨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는것이지요. 그리고 각 개인이 나름의 길을 걸어가고 있고 이러한 생의 발걸음들이 만나 쌓여간다는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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