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 EBS CLASS ⓔ
강신주 지음 / EBS BOOKS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연료가 떨어져 방 안에서 덜덜 떨고 있던 사람이 나무 책상이 앞에 있는데도 그대로 얼어 죽는다면, 그는 책상이 땔나무가 될 수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다. 책상은 공부를 하는 용도로 써야한다는 생각, 즉 모든 것에 주어진 본질이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생각해보라. 아이들이 책상 위에 올라가 놀면 어른들은 내려오라고 한다. 책상은 공부를 하는 자리이지 노는 곳이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 책상 위에 올라가면사람들은 그가 책상의 본질을 모른다고, 혹은 아이들처럼 못 배웠다고 인상을 쓰기 마련이다. 제법유아‘나 ‘제법유자성‘이라는 발상이다. 책상 등 모든 존재에는 아트만이 있고, 자성이 있다는 생각인 셈이다.

영원과 불멸에 집착하는 사람은 근사했던 시절 어머니의 모습을찍은 사진에 집착하는 사람에 비유할 수 있다. 그 사진에 집착하기에 그는 노쇠해진 어머니의 모습을 직면할 수 없고, 당연히 삶의 마지막을 보내는 어머니를 아낄 수도 없다. 반면 순간과 찰나에 집착하는 사람은 어머니의 모든 삶의 과정을 찍은 필름을 엄청나게 빠르게 돌려 보는 사람과 같다.

어느 한쪽 견해에 빠지면 우리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존재들,
영원하지도 순간적이지도 않은바로 그 존재들과 제대로 관계할 수 없다.

영원할 듯한 것에서 작은 변화를 찾고,
순간적인 듯 보이는 것에서 순간적이지 않은 것을 찾자.

많은 인연으로 만들어진 존재들은 영원하지도 않고 순간적이지도 않다. 그러니 우리가 영원과 순간, 어느 한쪽에 쏠리지 않아야,한마디로 말해 상견과 단견 같은 희론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존재들의 실상이 보이는 법이다. 그러므로 중도의 길, 사랑의 길, 자비의 길에 들어서려면 균형 잡기가 필수다. 자전거를 탈 때처럼 영원쪽으로 넘어지려 할 때는 순간 쪽으로 핸들을 틀고, 순간 쪽으로 기울어지려 할 때는 영원 쪽으로 핸들을 트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한다.
변하지 않을 듯한 것에서 그렇지 않은 부분을 찾고, 변할 것 같은것에서 그렇지 않은 부분을 찾자. 영원하지도 않고 순간적이지도않은 존재의 실상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중도의 길, 사랑의길, 그리고 자비의 길을 걸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명경과 지수는 이렇게 다른 사유 이미지다. 명경은 세상과 직접마주치면 찌그러지기 쉬운 마음, 그래서 세상과는 일정 거리를 두고 관조할 수밖에 없는 마음을 상징하고, 지수는 어떤 외부적 충격도 흡수할 수 있는 회복의 힘을 가진 마음, 그렇기에 한 조각의 바람이나 작은 낙엽, 혹은 작은 물방울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마음을 상징한다.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에서 정(靜)이라는 글자를 강조했던 것도 바로 이 지수와 관련 있다. 마음을 안정되게 하자는 것,바로 이것이 ‘지수‘의 목적이니까. 잊지 말자. 마음을 고요하게 하려는 이유는 세상을 냉담하게 관조하는 명경‘이 아니라 세상의 아주 작은 움직임에도 파문이 일어나는 민감한 ‘지수‘처럼 마음을 만들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마음을 명경의 이미지로 이해하느냐, 아니면 지수의 이미지로 이해하느냐에 따라 우리 삶은 확연히 달라진다.

‘명경지수(明鏡止水)‘라는 말이 있다. 맑은 거울과 고요한 물이라는 뜻이다. 명경‘은 ‘맑은 거울‘로 해석된다. 과거 동아시아에서는 유리가 아니라 청동으로 거울을 만들었다. 그래서 경(鏡)이라는 글자에 쇠를 뜻하는 금(金)이 부수로 들어 있는것이다. 문제는 청동거울은 쉽게 녹이 슬기 때문에 계속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불행히도 ‘명경‘은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양반이나 귀족 등 소수의 여성들이나 사용했던 일종의 사치품이었다. 대다수 여인들은 고요하고 맑은 물에 자신을 비춰 보며머리와 얼굴을 정갈히 다듬었다. 그릇에 담긴 물이었을 수도 있고,아니면 빨래터 근처 개울의 잔잔한 물이었을 수도 있다. 바로 이것이 고요한 물‘로 번역할 수 있는 ‘지수‘다.

잔잔하고 고요한 물만이 작은 꽃잎 하나, 작은 바람 한 줄기에도섬세하게 반응하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안정되고 평화로우면 외부 대상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 당연하지 않은가. 나의 고통, 나의 상실, 나의 패배감, 나의 상처, 나의 좌절에만 마음이 가 있다면, 우리는 어머니, 아내, 남편, 아이, 고양이, 벚꽃 등의무상한 삶에 제대로 직면할 수 없다. 이런 상태에서 자비니 사랑을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닌가? 그렇다면 역으로 생각해보자. 작은 꽃잎 하나, 작은 바람 한 줄기에도 가녀리게 떨리는 물이 있다면 이 물은 자신이 잔잔하고 고요한 물이라는 걸 입증하는 게 아닐까?

주름 접기 (임플리케이션)와 주름 펼치기 (익스플리케이션)라는 과정만큼싯다르타와 나가르주나의 ‘연기‘를 잘 설명해주는 비유도 없을 듯하다. 수많은 조건들이 마주쳐 만들어진 한 잔의 커피도, 수많은 악기들의 연주가 조화를 이루어 울려 퍼지는 하나의 협주곡도 바로하나의 주름이 아닌가? 그래서 하나의 사람을, 하나의 사건을, 하나의 대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 그 사건, 그 대상에 새겨진주름을 펼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도 『도덕의 계보학 (Zur Genealogie der Moral)』(지식을만드는지식,2008)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선과 악을 넘어, 이것은 적어도 좋음과나쁨을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선과 악은 부모님, 시부모님, 선생님, 직장 상사, CEO나 사회적 통념 등이 나에게 강요하는 것이라면, 좋음과 나쁨은 오직 내가 느끼고 감당하는 것이다.
다수가 원하는 선과 악이 아니라 너의 좋음과 나쁨, 혹은 나의 좋음과 나쁨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혜능도 마찬가지다.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바로 그러한때 어떤 것이 혜명 상좌의 원래 맨얼굴인가?"라는 혜능의 질문은결국 "니, 뭣고?" 라는 질문과 다름없는 셈이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보지 않고, 네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지말할 수 있는가? 바로 이것이 육조다운 혜능의 첫 번째 물음이자설법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