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2년 10월 10일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나는 그대들에게, 슬프게도, 작별을 고하니, 아, 내가 이곳에 간직하고 온 사랑스런 희망은, 비록 어느 순간까지는 나를 치유해주었건만, 이제 완전히 나에게서 떠나간 게 분명하다네. 가을날 나뭇잎이 떨어져 버리듯말이지. 그래서 이제 그 희망은 다 사라졌다네. 마치 내가 이곳에처음에 왔을 때처럼 말이지. 나는 이제 가겠네. 나에게 종종 아름다운 여름날이면 간직되었던 용기조차도 이젠 사라져버렸거든.
오, 섭리여, 한때 나에게 순수한 하루의 기쁨을 내 앞에 선사해주던 것도 이제 오래된 날이 되었고, 내 안에 참된 기쁨이 울리던 것도 낯설게 되었으니. 오 신이시오, 언제, 도대체 언제 나는 자연의신전에서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인가? 영원히 불가능한가? 안되오, 그렇다면, 그건 너무 가혹하니.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에서

유서에서 우리는 베토벤이 스스로 삶을 포기하고픈 지경에다다를 정도로 그 고통이 절절했다는 것을 보는 동시에 마치 구름속에서 간간히 햇빛을 만나 삶의 기쁨에 대한 갈망과 생의 의지도 발견합니다. 이 유서는 절망에서 어쩔 수 없이 나오는 한숨만이아니라, 절망의 바닥이 순간적으로 우리에게 열어 보이는 희망의 빛역시 포착하고 있습니다. 베토벤의 생애가 주는 위로와 용기는 이두 가지 체험이 함께하는 데서 흘러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상실감과 이것이 변화되어 새로운 목적으로 나아가는 도약의 순간이 베토벤에게서는 끊임없이 나타납니다. 베토벤의 천재성은 유일무이한 것이겠지만 절망의 순간이 인생의 의미를 깨닫는 계기라는것을 이해하고 자신의 삶에 감사할 수 있는 힘은 모든 이의 삶에서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변화의 요구에 당황하거나 도피하거나 분노하기보다는 살피고숙고하고 작은 일부터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래의 준비는 나를 소리 없이 사로잡고 있었던 선입관과 관성에서 벗어나는 것에서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이끌고 기초가 되는 것은 환상이나 절제 없는 욕망이 아니라 올바른 가치와 건강한 자기애, 현실에대한 인식이어야 할 것입니다. 소문이나 고정관념, 관습, 타인의 기대 등에 휘둘리는 대신 분명한 자기 판단과 가치관을 가질 때, 비로소 행복하고 충만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포스트 코로나시대에는 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현명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현명함이라는 삶의 지혜를 모두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현명함은 시대나 지역에 상관없이 인간 문명 안에서 공통적으로 높이 평가하는 덕목이자 으뜸가는 삶의 지혜로 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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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들 사이에 작은 샘이 있고, 그 샘은 마르지 않죠. 이 철없지만집요한 낙관주의는 제 행복의 원천이기도 해요.
행복의 원천이 되는 마르지 않는 작은 샘은 무엇보다 ‘추억‘이라고생각합니다. 추억이 서로의 행복을 축복하게 해주는 힘이 되고 있는 〈쉘부르의 우산>의 마지막 장면 역시 바르다의 말에 공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돌고 도는 문화적 복고 취향을 소비하는 것만이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추억에서 오늘, 여기의 행복을 위한 샘물을 길어오는 지혜를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궁정에 둥지를 짓고 살 수 없어요. 하지만 제가 오고 싶을 때와도 좋다고 허락해 주세요. 그러면 저녁에 저기 창 밖에 있는 가지 위로 날아와 폐하를 위해 노래하겠어요. 폐하께서 행복하고 즐거워 하시도록 말예요. 저는 행복한 사람들과 고통 받는 사람들에대해 노래할 거예요. 폐하 주변에 감춰져 있는 좋고 나쁜 일들에대해서도 노래하겠어요. 저는 여기서 아주 먼 가난한 어부와 농부의 집으로도 날아간답니다. 그 사람들 이야기를 노래로 불러 드릴게요. 저는 폐하의 왕관보다 폐하의 가슴을 더 사랑한답니다.
__ P.240-241 《안데르센 동화전집》(윤후남 옮김, 현대지성, 2016)

가장 날렵한 것들은 가장 부드럽다. 새는 생기 있다.
새는 부드럽기 때문이다.
돌은 무겁기에 무력하다. 돌은 그 본성에 의해 추락하기 마련이다. 그 무거움이 약점이기 때문이다. 새는 자신의 본성에 따라 상승한다. 새의 연약함이 곧 힘이기 때문이다.
완벽한힘에는 공중에 떠있도록 하는 일종의, 경쾌함과 가벼움이 있다.
- G.K. Chesterton, Orthodoxy, in: The Collected Works vol.1,

무거움은 세속적 힘이자 종교적 완고함과 지위에 따른 진지함을상징하며, 가벼움은 약함과 부드러움과 겸손함을 담고 있는 상태입니다. 무거움은 강하고 위대해 보이나 오만하고 허무하여 생명을 잃고 추락하기 쉽습니다. 가벼움은 자신의 부족함을 통해 상승하게 하며 이는 진정한 생명력의 표시입니다. 성인들이란 거창한 인물이기이전에 이러한 ‘역설‘을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종교 차원을 떠나서도 우리 인생에서 자신을 너무 무겁게 생각하는 대신 ‘가볍게 할 수 있는 삶의 지혜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새를 관찰하며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을 최근에 번역 출간된 조류학자이자 기자이며 환경 운동가들인 필리프 J. 뒤부아와 엘리즈 루소의 에세이 《새들에 관한 짧은 철학》(맹슬기 옮김, 다른, 2019)을 읽으며 생각하게 됩니다.

삶의 크고 작은 순간순간 속에서 재생의 시간을 (일시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며, 무력함을 견뎌야 하는), 일식의 시간을 받아들이자. 그러면 우리에게 있던 근원의 힘과 아름다움을 되찾을 것이다. 새처럼 한없이 가벼워질 것이다.
P.21 《새들에 관한 짧은 철학》

이러한 시대를 극복하는 것은 매우 커다란 과제이고 도전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도전에 응답하는 첫 발은 거창한 일을 해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을 두드리는 작고 여린 ‘인간다움‘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연민의 마음을 가질 줄 알고, 타인에게 따뜻하고 호의를 가지고 대하며, 이웃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원할 수 있고, 나에게 주어진 인생의 작은 기쁨에도감사할 수 있는 삶의 태도를 회복할 때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작은 새가 지저귀는 노래‘를 들을 수 있는 마음입니다. 큰 변화가필요한 시기에 우리들은 어느 때보다 섬세하게 작고 여린 사람들의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귀 기울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을가만히 돌아보고 돌보며 거친 분노와 정체 모를 불안과, 성찰이 결여된 인정 욕구가 내는 소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묻혀있던 내면의갈망이 속삭이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벌새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다. 이 작은 새는 꿀을 찾아 아주 멀리까지 날아가는데 그 모습이 은희의 여정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은희는 아주 작은 여자아이 이지만, 사랑받기 위해서 또 진정한 사랑을 찾기 위해서 많은 곳을 날아다닌다. 그리고 동물들이가진 상징에 대한 책을 찾아보았을 때 벌새에는 희망, 회복, 사랑같은 좋은 상징들만 있었다. 그래서 영화에 붙이기에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P.253 《벌새》(김보라 쓰고 엮음, 아르테, 2019)

벌새가 노래하는 것을 들으시오
새의 날개는 눈에 보이지 않으니.
벌새의 노래를 들으시오
나를 들으려 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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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음악서재, C# - 혼돈의 시대, 사색이 음악을 만나 삶을 어루만지다
최대환 지음 / 책밥상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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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과 책과 음악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인생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에 대한 예의와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 음악과 책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 사람이 자랑하는 교양에 인격과 영혼이 담겨있기는 할까요? 하지만 인생을 바르게 살아가고자 애쓰며,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름답고 행복한 인생을 위해 살아가려는 사람에게 책과 음악은 좋은 친구이고 교양은 든든한 밑천입니다.

철학자가 별다른 사람은 아닙니다. 좋은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고,그리로 가는 길을 찾고 걷고자 애쓰며, 그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인생을 제대로 사랑할 줄 알기를 소망하며, 배우고 깨닫는 것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철학자는 책을 통해 세상이라는 더큰 책을 읽게 됩니다. 철학자는 음악을 들으며 자신의 영혼이 선율과 공명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교양은 그에게 내면의 아름다움과 덕을 가꾸도록 안내합니다. 베르길리우스가 단테를 인도하듯 책과 음악과 교양은철학자에게 좋은 삶을 보여주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합니다.

인생의 숲길을 걷는 철학자가 되고자 합니다. C# minor(올림 다단조) 음악 속에서 그 발자국을 디딜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네 개의 반음 올림표를 가진 C# minor의 화음은 조용하면서도 신비스럽고, 마음을 울리면서도 어루만져 줍니다. 인생을 동반하는 음악 중에서 C# minor로 시작되는 곡들은 유난히 마음에 젖어듭니다.
초등학교 시절 동네 피아노 학원에서 어느 소녀가 치는 쇼팽의 왈츠 2번, C# minor를 들었을 때, 그 순간 이 곡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수십 년이 지났습니다만, 달콤한 슬픔과 수줍은 위로가 절묘하게 섞인이 소품은 여전히 지친 마음을 치료해줍니다. 쇼팽의 녹턴(야상곡) 중아마도 가장 유명하고 사랑받는 곡인 ‘녹턴 20번’, C# minor를 들을 때도 언제나 거짓말처럼 시간이 멈추는 것 같습니다.

인생을 C# minorr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다감하게, 우아하면서도 깊이 있게, 친절하면서도 여백을 가지고 걸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있습니다. 그럴 때에 어울리는 벗이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위대한 평균율클라비어곡집‘에 나오는 두 곡, C# minor의 프렐류드와 푸가입니다, I권의 네 번째 ‘프렐류드와 푸가 BWV 849 와 II권의 네 번째 ‘프렐류드와 푸가 BWV 873‘을 들을 때마다 감각의 황홀함과 정신적 관조에서 오는 평정이 차례로 마음과 생각을 감싸고 돕니다. 헝가리의 피아니스트 안드라슈 쉬프가 젊은 시절에 연주한 평균율‘ 음반은 이 곡이 주는 위안과 기쁨을 알게 했습니다. 돌고 돌아서 여전히 이 음반을 좋아합니다.

릴케의 시는 시대를 넘어서 오늘의 예술가들에게도 창작의 보고입니다. 이를 영화감독 빔 벤더스가 작가 페터 한트케와 함께 작업한 철학적인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실감할 수 있습니다. 영화의 기본 착상과 대사들 곳곳에서, 무엇보다 천사들의 독백에서 《두이노 비가》의 그림자를 보게 됩니다. 말테의 수기》나 《사랑하는 하느님 이야기》 같은 릴케의 산문들 역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세대를 거쳐 꾸준히 읽히고 있습니다. 릴케의 문학은 현대의정신적 위기 징후를 미리 예감한 작품들이기도 하고, 신관에 대한심오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릴케는 시인, 작가, 예술가, 철학자들에게 평생 파고들며 대결해야 하는 귀중한 존재이지만, 일반 독자에게는 위로를 주는 시인이고작가이며 사랑하게 만드는 존재입니다. 그의 시는 수수께끼 같으나난해하다기보다는 신비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먼 곳을 향하도록자극도 주지만 그 길을 떠날 수 있는 힘을 얻도록 위로 역시 줍니다.
릴케의 편지는 우리 시대에 절실한 사유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삶이란 변화‘라고 깨우쳐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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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우리가 더 이상 단 한번뿐으로 존재하는 인간이 아니라면, 누구든 우리 한명 한 명을 총알 한 알로 완벽하게 이 세상에서 지워버릴 수있다면, 이야기를 한다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간은 누구나 그저 한 명의 그 자신일 뿐만 아니라, 한번의 삶을 살아내는 아주 특별한 존재다. 반복 없이 단 한번으로 존재하는,다시는 없을 지점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각자의 이야기는 중요하고 영원하고 신성하며 그래서 어쨌든 각각의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연의 뜻을 충족한다면, 그 누구라 해도 경이로운존재다. 그 누구라 할지라도 각자에게서 정신이 형상되고, 각자에게서 피조물이 괴로워하며, 각자에게서 구세주가 십자가에 못 박혀 있다.

나는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그것을향해 살아가려 했을 뿐이다.
그것이 왜그토록 어려운 일이었을까?

모든 사람의 삶은 각자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길이다.
자신에게 가는 길의 시도이며 좁은 길의 암시다. 그 어떤 인간도 오롯이 자기 자신이 된 적 없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애쓴다. 어떤 사람은 애매하게, 어떤 사람은 투명하게, 자기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 방법을 찾으려 한다. 누구나 자기 출생의 찌꺼기를, 저 근원 세계의 점액질과 알껍데기를 죽을 때까지 지니고 있다. 간혹 어떤 이들은 결코 인간이되지 못하고 개구리나 도마뱀, 개미에 그치고 만다. 더러 어떤 사람들은 상체는 인간이고 하체는 물고기인 채로 남는다.
하지만 누구나 인간이 되라고 자연이 던진 돌과 같다.

물론 나는 밝고 올바른 세계에 속했다.
우리 부모님의 자식이었지만 나의 눈과 귀를 향하는 곳 어디에나 다른 세계는 가까이 존재했다. 때때로 그것들이 주는 느낌이 낯설고 무서웠지만, 그리고 그곳에서 규칙적으로 양심의 가책과 두려움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한동안 가장 살고 싶었던 금지된 그 세계 안이었다. 그러다 밝은 세계로 돌아오는 일이 아무리 필요하고 선한 의도였지만 덜 아름답고 지루했으며 더 황량한 곳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인생에서의 목표는 아버지나 어머니처럼 되는 것, 그렇게 밝고 순수한 채로 그만큼 뛰어나고 순수한 상태가 되는것임을 알았다. 하지만 그곳에 이르는 길은 멀었다. 그곳에도착하기 위해서는 학교에 버텨 앉아 대학공부를 하고 여러시험을 봐야 했다. 그 길은 언제나 또 다른 어두운 세계의 바로 옆을 지나가거나 그 세계 한가운데를 꿰뚫어 통과했다. 어두운 세계에 머무르거나 그 안으로 자리를 잡는 일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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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초반, 미국 언론이 케이팝의 세계적인 성공과 미국 내에서의 관심을 보도하며 처음으로 사용한 표현이 바로
‘팩토리 아이돌 factory idol‘ 이었다. 공장형 아이돌, 즉 비인간적으로 찍어낸 듯 비슷비슷한 가수들이라는 부정적 의미가 들어 있다. 물론 이 같은 평가엔 미국인들 특유의 아시아인에대한 편견 혹은 케이팝의 부상에 대한 막연한 경계심이 반영측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미국 역사에서 아시아인은 늘몇 가지 고정관념으로 묘사되었다. 가령 성적 매력이 없는못생긴 남성 같은 것이 그러하다. 케이팝 아이돌의 잘생긴외모와 강렬한 춤사위는 분명히 그 편견을 깨는 데 일조하고있지만, 동시에 이는 개성이 없고 비슷비슷한, 만들어진 음악이라는 편견을 확인하거나 혹은 강화하는 결과를 낳기도....

BTS는 과연 이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물론 그들역시 케이팝 기획사가 기획하고 훈련한 아이돌임을 간과해선 안 된다. 그 점에서 그들 역시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고 아직 편견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들은 독특한 방식으로 이 한계를 일정 부분 극복해냈다. BTS는 굳이 영어로 제작하거나 번안한 음반을 녹음하지 않았다. 또한 앞서 언급한 케이팝 현지화의 필수적요소인 외국 작곡가 혹은 프로듀서와의 초국적 협업 그리고현대성의 상징적 존재이자 미국 대중음악 신과의 ‘중재자‘로 서의 재미교포 멤버 혹은 현지화의 필수 요소로 활용되어온 외국인 멤버 등을 통해 미국을 공략하지도 않았다. 정확히말하자면, 애초에 이들에겐 미국 진출‘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전략의 부재가 그들의 음악적 차별성을 입증하고 예상치 못한 성공으로 이어진 밑바탕이 되어버렸다. 그들이 이렇듯 최소화된(혹은 부재한) 전략으로도 폐쇄적인 미국 시장을 매혹시키고, 나아가 전인미답의 기록을 쏟아낼 수 있었던 것은 케이팝이면서 탈-케이팝적인 정체성, 특히 진정성을 내세운 음악적 태도 및내러티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BTS 역시 여느 아이돌 그룹과 유사한 트레이닝 시스템을 거치며 음악성을 담금질해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모든 멤버가 일정한 음악적 창작 능력을 갖춘 상태에서 픽업이 되었거나 커리어초반부터 뮤지션의 자세로 음악 작업에 참여했다는 점에서다른 그룹들과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바로 이 바탕 위에 케이팝의 전통적 강점인 트렌디한 음악과 화려한 퍼포먼스가결합함으로써 시너지가 훨씬 커졌다. 거기에 글로벌 트렌드이자 시대정신이며 미국 대중들에게 가장 환영받는 음악 장르인 ‘힙합‘의 언어와 태도를 통해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거칠지만 늘 솔직하게 표현했다. 이러한 모습이 아이돌 문화에 배타적이고 아티스트적 진정성에 유독 예민하게 반응하는 미국 미디어와 평단 그리고 청중을 두루 만족시킬 수 있을 만큼 신선하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것을 단지 운이 좋았다고만 말할 수 있을까?

지난 수년간 내가 미국 현지에서 만나본 ‘아미‘들은 BTS의음악이 "다르다"는 데 입을 모은다. 힙합을 포함한 그들의 음악과도 그리고 그들이 지금껏 접해온 케이팝과도 다른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그
‘다름‘의 핵심은 메시지의 보편성과 건강함이다. BTS는 그간 아이돌 음악에서 기피되던 청춘과 성장의 내러티브를 콘셉트이자 정체성으로 적극적으로 껴안아 그것을 심오한 메시지와 세련된 음악 안에 녹인 사실상 유일한 케이팝 그룹이다. 학교 3부작‘에 이은 ‘화양연화‘ 연작을 통해 구체화하기시작한 이들의 이야기는 추상적인 콘셉트와 허구적인 세계관이 주류를 이룬 기존의 케이팝 아이돌 음악과 다르며, 때로는 지나친 자기 증명과 소위 스웨그‘라 불리는 마초적 허세의 내러티브에 탐닉한 미국의 주류 힙합과도 달랐다. ‘쩔어‘나 ‘불타오르네‘가 보여주는 들끓는 에너지, ‘사이퍼‘ 시리즈와 Mic Drop‘을 통해 드러나는 젊은 뮤지션들의 당찬 면모, ‘고민보다 Go‘ 등에서 보이는 세태 비판, 무엇보다Epilogue: Young Forever‘와 ‘봄날‘ 등에 담긴 상처받기쉬운 청춘의 좌절과 슬픔 그리고 그 안에서 발견한 희망적인이야기는 케이팝의 가장 큰 약점이던 메시지의 진정성과 태도의 한계를 극복해낸 원동력이 되었다. 이 다양하고 진솔하며 보편적인 메시지는 트레이닝과 현지화 전략만으로는 결코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다.

내러티브의 진정성이 중심이 된 BTS의 행보는 그들의 평소모습이나 소셜미디어를 통한 팬들과의 소통에서도 고스란히드러난다. 대부분의 아이돌 그룹 소속사가 여러 가지 위험부담을 이유로 아티스트들의 SNS 활동을 자제시키거나 철저히 기획된 모습만 보여주던 시절에도, 그들은 부족한 자본을혁명적인 뉴 미디어로 만회하며 팬들과의 스킨십을 꾸준히쌓아왔다. 중요한 것은 거기에 일관성 있는 태도와 진심이담긴 진정성이 있었다는 점이다. SNS에서 보여주는 모습과그들의 내러티브는 정확히 일치했고, 그 어느 곳에서도 어색한 ‘맞춤형‘ 제스처가 없었다. 말과 행동 그리고 음악이 일체감을 이룬...

미국과 일본의 아이돌 문화에서
‘성장‘이란 콘셉트가 대부분 보여주기식의 피상적이고 가상적인 영역으로 제한되어 인공적인 느낌을 주는 데 반해, BTS는 그 진정성의 범주를 음악과 삶의 모든 곳으로 확대하면서팬과 아티스트가 ‘하나 되는 극도의 일체감과 동지의식을부여한다. 이것은 팬을 대상화했던 대중음악에 있어서 혁명적인 사고의 전환인 것이다.

2018년 10월 중순, BTS 멤버 지민의 사진 한 장이 온라인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사진 속에서 지민이 입은 티셔츠에는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장면과 2차 세계대전 종전,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축하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Patriotism(애국)‘, ‘Our History(우리의 역사)‘, ‘Liberation(광복)‘, ‘Korea(한국)‘라는 영어 단어가 적혀 있었다. 이로 인해 11월 8일, 일본 아사히 TV는 예정되어 있던BTS의 뮤직 스테이션> 출연을 취소하고, 4일 후 미국 유대인 인권단체 시몬 비젠탈 센터 Simon Wiesenthal Center, SWC도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와 BTS가 과거를 조롱한다며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 11월 13일 빅히트 엔터테인먼트가 입장문을 발표했음에도시몬 비젠탈 센터가 이에 대해 발표한 성명과 국제 언론이 이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는 문제가 있어 보였다. 이에 좌절감을 느낀 30여 명의 아미가 논란과 사건을 조망하고 되짚어보기 위해, 논문 수준의 ‘백서(본래 영국 정부의 공식보고서 명칭인데,정부가 정치, 외교, 경제 따위의 각 분야에 대한 현상을 분석하고 미래를 전망해 그내용을 국민에게 알릴 때 작성하는 보고서를 의미한다)‘를 발간했다. 여기엔 해당 사건의 개요와 잘못된 언론 보도 및 허위 정보 조사, 이를 이해하기 위한 역사적 배경,팬덤의 반응, J-ARMY 팀 멤버의 입장문 등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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