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이 없는 나라가 있고 연애소설이 없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알았을 때, 뭐? 하며 놀란 적이 있다. 노을이 없는 나라에 노을에 대한 시가 많고 연애소설이 없는 나라에 성性에 대한 갈등도 없다는것을 알고 또 한번 놀랐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해가 지면 곧 어두워지기 때문에 노을을 볼수 없다고 한다. 노을에의 그리움 때문인지 노을에 대한 시가 가장많고, 스웨덴에서는 성이 개방적이고 자유스럽기 때문에 성에 대한결핍과 갈등이 없어 연애소설이 없다는 것이다.

가장 오래된 것 그것은 새로운 것이며, 오래된 것일수록 현재의 의미를 갖는다는 말을 오래 생각해 보았다. 그때 나는, 시를 남겨두고 시의 뒤로 숨어버린 시인들이 가장 멋진 시인들이 아닐까싶었다. 왜냐면 가장 멋진 시인들은 자기 독자들과 함께 죽어서도살아 있는 시인들이기 때문이다. 그 멋진 시인들의 독자가 되어 나는 시를 읽는 내내 감동하면서 행복했다.

"아픈 물고기들을 치료하려고 물에다 귀를 대요. 물고기의 말을 듣고 치료해 주는 거죠."
《둘리틀 선생 항해기》에 나오는 수의사 둘리틀 선생의 말이다.
물에다 귀를 대고 물고기들의 말을 들으려는 수의사의 마음을 어떻게 신기한 몽상으로만 생각할 수 있을까.

수의사의 말 옆에다 시인의 말을 놓아 본다.
"아픈 사람들을 읽으려고 가슴에다 귀를 대요. 사람들의 마음을 듣고 아픔을 달래 주는 거죠."

중세 아랍문학의 대표작인 《아라비안나이트>에 여자 노예 이야기가 나온다. 타와우드‘ 라는 여자 노예는 재색을 겸비한 노예다.
빚진 금과 1만 디냐르에 팔려간 그녀에게 주인이 장기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시 짓는 일에 뜻을 두고 우드를 잘 타며 그 곡에 맞추어어떻게 노래를 부를 것인지, 그 현을 어떻게 울릴 것인지를 터득하고 있다"고 대답한다. 이런 것들이 금화보다 더 가치있는 일이라고자부했던 중세 아랍의 서정시는 우드의 현과 더불어 귀중한 재산이나 보물처럼 여겨왔다. 나는 타와우드의 ‘어떻게 란 말이, 시는 무엇을 쓸 것인가보다 어떻게 쓸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말에 겹쳐져서 예사로 생각되지 않는다.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 존경받고 아이들에게사랑받는 것 … 아름다움을 헤아릴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조금이라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사랑보다 우정이 오래가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한동안 잠기다.
가 헤세가 생각한 우정을 떠올려 보았다. 무엇을 구하지 아니하고어린애처럼 단순한 심성으로 바라볼 때, 세상은 아름다웠다는 헤세의 곧은 정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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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 교수와 스님들의 이야기는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하나로 연결된다. 도법 스님이 말씀하신 이 세상의모습처럼 따로 또 같이’, 그러니까 각각 별개인 동시에 전부가하나로 이어져 있다. "하나 안에 일체가 깃들고 여럿 안에 하나가 깃드니, (…) 한 티끌이 온 우주 품어 안고 온갖 티끌들도 그러하다"라는 의상 조사의 법성게 구절처럼, 한 편 한 편의 글들은 작지만 그것이 모두 모이면 서로를 비추고 확장되어 더없이 큰 울림을 줄 것이다. 말 그대로 영혼을 치유하는 약이 되어줄 이 글들을 통해 인생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힐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엉뚱한 데 중점을 두고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눈을 뜨거나 진짜 코끼리를 보는 데는 별로 관심이없고, 서로의 의견을 바꾸려 애씁니다. 다른 주장을 하는 상대를 어떻게 설득하고 합의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이기고 제압해서 다툼을 끝낼 것이냐에 골몰하는 거죠. 그러한 합의와 절충은 당장의 불을 끌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진정한 해결책은 못

라는 편견이 있어요. 그런 느낌이 없으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도 있죠. 그러나 사실 깨달음은 일상과 동떨어지고신비로운 어떤 것이 아닙니다. ‘몰랐던 걸 알았다‘, ‘잃었던 걸찾았다‘, 가려졌던 것이 벗겨졌다‘, ‘어두웠던 것이 밝아졌다‘
등의 의미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번갯불이 번쩍하는 순간 방안을 직접 본 상태와 유사하죠. 나의 참모습, 이 세상의 참모습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하고 확신하는 경험적 지혜가 바로 깨달음입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에 맞게 내 삶을 만들어가는 실천이 더욱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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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토마토가 과일임을 아는 것이다. 지혜는 과일 샐러드에토마토를 넣지 않는 것이다." 지식은 안다. 지혜는 이해한다.
지식과 지혜의 차이는 종류의 차이이지 정도의 차이가 아니다.
지식이 늘어난다고 해서 반드시 지혜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며,
실제로 지식이 늘면 오히려 덜 지혜로워질 수도 있다. 앎이 지나칠 수도 있고, 잘못 알 수도 있다.
지식은 소유하는 것이다. 지혜는 실천하는 것이다. 지혜는 기술이며,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로 습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지혜를 운으로 얻으려는 것은 바이올린을운으로 배우려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여기저기서 지혜의부스러기를 줍기를 바라면서 비틀비틀 인생을 살아나간다. 그러면서 혼동한다. 시급한 것을 중요한 것으로 착각하고, 말이 많은 것을생각이 깊은 것으로 착각하며, 인기가 많은 것을 좋은 것으로 착각한다. 한 현대 철학자의 말마따나, 우리는 "잘못된 삶을 살고 있다.

기술은 우리를 꾀어내어 철학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믿게한다. 알고리즘이 있는데 왜 아리스토텔레스가 필요하겠는가? 디지털 기술은 삶의 작은 질문(보이시에서 가장 맛있는 부리토 가게가 어디지? 사무실까지 가는 가장 빠른 길이 뭐지?)에 답하는 능력이 무척 탁월해서, 우리는 이 기술이 삶의 커다란 질문에도 쉽게 답해줄 거라고 생각한다

시리Siri가 맛있는 부리토 가게를찾는 데는 뛰어날지 모른다. 하지만 그 부리토를 가장 맛있게 즐길수 있는 방법을 물어보면 시리는 아무 대답도 내놓지 못할 것이다.

철학은 새로운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도와주고, 바로 거기에 큰 가치가 있다. 우리 동네 서점에는 ‘철학‘ 섹션과 ‘자기계발‘ 섹션이 붙어 있다. 고대 아테네의 ‘반스앤노블‘에서는 이 두 섹션이 하나였을 것이다. 그때는 철학이 곧 자기계발이었다. 그때는 철학이 실용적이었고, 철학이 곧 심리 치료였다. 영혼을 치료하는 약이었다.
철학은 치유 효과가 있지만 핫스톤 마사지의 치유 효과와는 그방식이 다르다. 철학은 쉽지 않다. 철학은 멋지지 않고, 일시적이지 않다. 철학은 스파보다는 헬스장에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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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호시노처럼 알래스카의 얼굴도 모르는 어느 마을 촌장에게 편지를 보내 볼까. 머나먼 알래스카로 떠나 평생 숲속 통나무집에서 살면 어떨까.
물고기를 잡고 야생초를 채집해 팔까, 아니면 여행 가이드를 하면서 살아갈까. 마음속 알래스카를 찾아 떠나는 상상만으로도 나에게 찾아온 인생의 권태기는 봄눈 녹듯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나도 나만의 빛을 찾아 새로운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다. 호시노가 말했듯이 "중요한 것은 출발"이니까.

사람이 여행을 떠나 새로운 땅의 풍경을 자신의 것으로만드는 데는 결국 누군가의 개입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아무리 많은 나라를 간다 해도, 지구를 몇 바퀴 돈다 해도그것만으로 넓은 세계를 느낄 수는 없다. 누군가와 만나고 그 사람이 좋아졌을 때에야 비로소 풍경은 넓어지며깊이를 갖게 된다.
- 호시노 미치오, 『긴 여행의 도중』에서

다리 없는 새가 살았다. 이 새는 나는 것 말고는 알지 못했다.
새는 날다가 지치면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잠이 들었다.
이 새가 땅에 몸이 닿는 날은 단 하루, 자기가 죽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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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는 시간 이외에 하는 모든 행위 페이스북이라는주식회사가 제공하는 네트워크를 확인하는 것부터 삼성이나 화웨이가 생산한 휴대전화를 조작하고, 애플사가 생산한 아이패드에서 넷플릭스가 제공하는 콘텐츠를 보는 일까지는 대부분 자본의 이윤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색‘이라는 존재방식도 증발되었지만, 사생활‘이라는 근대의 또 하나의 해방적측면도 말살되고 말았습니다. 신용카드 사용 내역이나 휴대전화위치 추적 등으로 각자의 현재 위치부터 한 시간 한 시간의 모든 행위까지 확인하고, 심지어 실시간으로 감시도 할 수 있는 세계에서 ‘사생활‘은 더 이상 논의할 의미조차 없습니다.

해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바로 권력을 최소화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말입니다. 되도록 권력을 분산시키고 견제해야 합니다. 조직은 항상적인 감시와 견제속에서 그저 심부름꾼으로서 일을 맡아보는 사람에 의해 굴러가야 하는 것이죠. 체제 내의 권력이든 반체제적 권력이든 권력그 자체가 악입니다. 어떨 때에 필요악일지 몰라도 어쨌든 악은악이죠. 권력이라는 독에 사람을 되도록 노출시키지 말아야 인권 수호가 가능해지고 각종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확 줄어듭니다. 특히 혁명을 지향하는 조직체라면 더욱더 탈(脫)권력화되어야죠. 혁명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무권력적, 무계급적 사회를만들어내는 일이니까요.

우리나라 교육의 아주 큰 폐단은 세계사와 한국사를 따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대개 선택 과목인 세계사는 선택을 받는 경우도 많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인 고졸자나 대졸자는 ‘광무개혁(光武改革)‘이나 ‘한일합병(韓日合件)’ 내지 ‘우리나라의 경제성장, 산업화, 민주화‘를 어렴풋이는 알아도 세계사적 맥락에서의의미는 전혀 모릅니다. 인식론적 민족주의라고나 할까요? 이런식으로 배우면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은 세계사적 맥락과도 무관하게, 오로지 ‘우리‘만의 자랑 내지 ‘우리’만의 수치가 되고 말지요. 더구나 그 ‘우리’라는 범주 안에, 예컨대 중국 동포나 구소련 고려인들은 아예 포함되지 않고, 북한사도 매우 단편적으로만 언급됩니다. 결국 ‘대한민국 사람‘은 학교 과정만 착실히 밟으면 오로지 대한민국의 통치자와 지식인‘들이 서술해준 ‘대한민국만의 과거‘를 아는 인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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