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혈연관계를 일컬어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게다가 테야르는 스스로 외부인이라 생각하는 많은 이들을 자신은 그리스도의 참된 형제들로 여긴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사실 행동이 아닌 말로만 열심히 그리스도를 "주님,주님" 하고 부르는 이들보다 그들이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있다.

하느님의 말씀이 몸소 인성을 취하셨다. 육화를 가리키는 독일어 ‘멘쉬베르둥Menschwerdung은 하나의 ‘과정‘이라고 할 만한 역동적인 것을 가리킨다. 사람이 되어 가는 활동인 것이다. 라너의 관점에서, 하느님의 사람 됨‘(Menschwerdung Gottes)에 대한 인간의 가장 참된응답은 ‘인간의 사람 됨‘(Menschwerdung des Menschen)이다.

하느님 앞에서 오롯이 자신을 위해서만, 말하자면 기도하지 않는형제들을 기억하지 않으면서 기도하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이있을까? … 그런 사람은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에서, 또 동료 인간에 대한 책임감에서 기도할 것이다. 그는 하느님의 현존이나 부재를 체험하면 할수록 자신의 감정이나 무감각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기도하지 않는 이들이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흔적을 넌지시 느낄 수 있도록, 그들이 말하는 부재하시는 하느님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일은 성인의 통공(communio sanctorum) 안에서 일어난다. 넓게 보면 성인의 통공이란, 십자가 위의 하느님께서 그들을 위해 완전한 버림받음을 견디고 겪으신 모든 이의 공동체를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모든인간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인도의 어느 예수회원에게 배운 대로 그저 숨만 쉰다. 내모든 근심과 걱정과 슬픔을 내뱉기 위해 날숨을, 그분의 평화와 기쁨과 힘을 들이키기 위해 들숨을 쉰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친 다음 다시바다로 돌아가듯이, 인간도 이런 들숨과 날숨의 리듬 안에서 바오로사도의 말을 몸으로도 거의 체험할 수 있다. "내가 약할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12,10). 그러나 단지 나만 바라보는 것은아니다. 인간은 아무도 섬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교회의 근심과 상처와 약함은 또한 나의 약함이다.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심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이들의 슬픔과 어둠은 또한 나의 깊은 골이다. 그러나썰물이 다시 밀물로 바뀌듯, 우리도 평화와 힘과 기쁨의 물결을 느낄수 있거나 적어도 넌지시 알아챌 수 있다. 성경 말씀처럼 "주님께서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느헤8,10 참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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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관련한 뇌의 화학물질이 분비된다. 그러면 몸이 느최초의 화학반응이 혈류에서 완전히 빠져나가는 데에90초가 걸린다고 한다. 90초가 지나도 계속 분노를 느끼는 것은이 화학반응을 지속시키겠다는 나의 선택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사용하는 목욕탕의 이미지가 그런 것이다. 일단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90초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작정한다. 다만 이 시간 동안 나 자신의 몸의 반응을 세심하고 알아차리고 그 시간이 지나면 선택권은 온전히 내게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몸의 느낌을 존중하는 것이다. 내가 뜨거운 목욕물의 이미지를 쓰는 이유도 여기에있다. 화가 나면 정말로 뜨거운 목욕물에 들어간 것처럼 체온이오르고 숨을 멈추게 된다. 그 시간 동안 나 자신을 자책하지도않고 나를 분노케 한 상황을 이해하려 하지도 않고 그저 몸을 가진 동물로서 있는 그대로 분노를 느낀다. 그러면 이 순간조차도꽤나 달콤하다.

우뇌가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한다는 뜻이 구체적으로 어떤 기능을 말하는 것일까? 우뇌는 매 순간 깨달음을 준다. 가령 저자는 호박을 먹지 않았다. ‘나는 호박을 싫어해. 이것을 철석같이믿는 것이 좌뇌다. 좌뇌는 이런 자신에 대한 판단을 새롭게 하는것을 싫어하며 사고의 패턴을 반복한다. 그렇지만 우뇌는 매 순간이 새롭다. 어제 호박을 싫어했다고 오늘도 같을 리는 없다고판단하는 것이 우뇌가 하는 일이다. 저자는 이제 호박을 아주 좋아하게 됐다. 이렇게 다른 좌뇌와 우뇌를 함께 쓰기 위해 우리는섣부른 판단을 피하고 ‘자신만의 마음의 정원‘을 세심하게 돌봐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지금 당장 전파사에 가서 전기충격기를 사세요. 화를 한 번내자마자 방에 들어가서 그걸로 몸을 지져버려요. 그러면 고통을 겪으면서 기절을 할 거예요. 그렇게 몇 번만 하면 다 고쳐집니다."

스님은 설명한다. 화내는 건 습관이기 때문에, 절대 고쳐지지않는다고. 그래도 고치려면 화를 냈을 때 전기충격기의 고통을연상하게 해서 저절로 화가 안 나게 하는 방법밖에 없는 거라고.
테일러가 말하는 뇌의 회로를 선택한다는 것과 같은 원리일 것이다. 분노와 고통을 새로운 회로로 연결시키라는 말이다.

그게 거짓말이지. 안 고쳐도 살 만한 거 아니에요? 그냥화내고 살아요. 그렇게 살면, 애나 배우자가 나중에 당신을 떠날수도 있고, 싫어서 상대도 안 해줄 가능성이 높지만, 그건 당할때 ‘내 탓이다‘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그냥 살면 돼요."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내가 정말 변화를 원하는가‘라고 냉정하게 질문하는 것이다.

소시오미터 이론에 따르면 남들의 긍정적시각을 제대로 인식할 때 자아 이미지가 좋아진다. 내가 환영받는 곳, 내가 잘 해낼 수 있는 역할을 발견할 줄 아는 건 삶을 행복하게 이끌어 갈 능력이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남의 인정에 목을 매라는 뜻은 아니다. 남의 의견을애써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누구인가를 내가 의식적으로정할 수 있으면 된다.

내가 가진 건 자존감이 아니라 적극적인 탐구 끝에 얻은 나에대한 이해다. 언제, 어떤 사람들과 함께 행복한지, 무엇이 나를채워주는지, 어떤 거리감이 좋은지, 나를 아는 만큼 다른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쫓아다니지 않을 수 있다. 시골에 오지 않아도 궁금해하기만 한다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는 것들이다.

나를 묶어두지 않는다.
나는 어떤 일에도 100퍼센트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처음 시작할 때, 항상 생각하는 건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이다. 취미 생활을 할 때도 장비를 먼저 준비하지 않는다. 회사에 다닐 때도, 박사 공부를 할 때도, 갑자기 그만두어도 억울하지않을 정도로 대충 한다. 다음에 할 일, 내일 하고 싶은 일을 하기위한 에너지나 돈이 항상 남아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내 인생관이다. 나는 나 자신의 삶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고 생각한다. 최선을 다한 끝에 지쳐버려서 다른 일은 하고 싶지 않게 되는 것도싫고 좋아하는 사람과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는 즐거움을 놓치기도 싫다. 그리고 어떤 일이고 지겨워지거나 멈추고 싶을 때 언제라도 그럴 수 있는 자유도 나에게는 아주 중요하다. 이 가치들이중요한 만큼 세속적인 욕망은 약하다. 배수의 진을 치지도, 있는

인생에서 내가 꾸준히 노력하는 건 바로 열심히 노력하지 않기‘이다. 그럼 가만히 살면 될 것 같지만 의식적으로 경계하지않으면 생각보다 어렵다. 나는 모든 걸 남김없이 불살랐다고 의심 없이 자부할 수 있을 정도로 최선을 다한 적은 없지만 나 역시 어떤 일을 할 때 서서히 나를 잊게 되고, 마구 달려가 끝을 보고 싶을 만큼 몰두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아, 안 돼, 이렇게 열심히 하면 안 되지‘ 하며 멈추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방법은 단순하다. 끝을 생각한다. 빵 만들기 싫어질 때, 빵을그만 만들 때를 생각한다. 왜 그렇게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지금은 죽을 때까지 빵을 만들고 싶으니까. 그때를 생각하면 일단 도구를 사는 것을 극도로 삼가게 된다. 마찬가지로 천연 발효 기술까지 배우고픈 마음이 잠잠해진다. 언제든지 빵 굽기를 그만둬도 미련도 귀찮은 뒷정리도 없는 상태로 머무를 수 있다.
내게 미니멀리즘이나 소비 줄이기가 쉬운 이유도 마찬가지다.
새 물건을 사고 싶거나 필요할 때, 내가 가장 고민하는 것은 돈이나 쓸모가 아니다. 물건의 끝을 생각한다. 버리고 싶어질 때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상상한다. 소파나 식탁 같은 큰 가구, 텔레비

인간은 순간을 살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끝을 상상할 수 있는유일한 동물이라고 한다. 그래서 괴롭기도 하지만, 그렇기에 삶의 충만함을 이해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끝의 아름다움을그렇게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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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게 실망하지 않는 법에 대해 물었다. 상황을 생각하면 내가 무척 천진난만해 보인 모양이다. 그럴 만했다. 기자가 되었지만 5년을 못 채우고 그만두었고, 좋다는 대학에서 영문학을전공했는데 직업에 조금도 활용하지 않았고, 심리학 박사학위도받았지만 6년간 공부만 즐기다가 지금은 시골에서 직접 구운 빵을 판다. 아니, 팔다가 코로나 세상이 되어서 그것도 중단했다.세상의 눈으로 보기에 다 실패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다. 그런데정작 나는 대체로 신이 난 얼굴로 빵을 굽고 애들과 낄낄거리고멍하니 책을 뒤적인다.

소로는 『월든』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준다. 어떤 마을사람이 부자 변호사를 찾아가 자기가 짠 바구니를 사달라고 한다. 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러자 마을 사람은 화가 나서 말한다.
"당신은 나를 굶겨 죽일 작정입니까?" 마을 사람이 화를 낸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변호사는 말이나 엮어내면서 저렇게 잘사니, 나도 사업을 해야지. 내가 잘하는 건 바구니 짜는 일이지.내가 바구니만 짜면, 사주는 건 변호사가 할 일이야. 마을 사람은 화를 낼 것이 아니라 살 만한 가치가 있는 바구니라고 믿게만들거나, 아니면 변호사가 사고 싶은 다른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소로는 말한다.

변호사가 내가 짠 바구니를 내가 만족할 만한 가격에 사준 경우는 어떨까? 변호사에게 감사해야 할까? ‘누가 너더러 바구니를 짜래? 너 좋아서, 너의 판단으로 짠 거잖아‘라는 논리를 받아들이자면, 변호사가 바구니를 산 것 역시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변호사 자신이 필요하니까 샀을 뿐이다. 갑자기 솟아난 선의를총족시키려고 그랬든, 귀찮아서 그랬든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전혀 감사하거나 기뻐하지 않아도 된다. 이 세상이나 타인에게기대하거나 원망하는 마음과 감사하고 기뻐하는 마음은 사실 똑같은 동전의 양면인 셈이다.

당신의 선택일 뿐이다. 세상은 요구하지 않는다.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 만큼 세상에 무엇을 해줄 필요도, 감사하거나 보답할 이유도 없다. 그런 부담이 없을 때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분노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비로소 공평해졌으니 말이다.
이런 기분이 될 때 자주 흥얼거리는 노래가 있다. 소로의 마을사람과 변호사를 떠올리면서 어반자카파의 〈널 사랑하지 않아)의 가사를 곱씹으면 정말이지 거의 모든 일이 괜찮아진다. 달콤하고 포근한 위로를 받아서가 아니라, 내 노력과 꿈과 나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모든 마음이 잠잠해진다.

소로의 삶이 보여주듯 나만의 바구니를 계속해서 짠다고 세상이 알아봐준다는 보장 같은 건 없다. 그러나 소로의 인생이 불행했냐고 하면 아닐 것 같다. 그는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방향으로계속해서 살아나갔다. 세상이 무심하는 아니든, 주어진 자유를누렸다. 이따금 그 섬세한 바구니를 알아보는 에머슨 같은 친구나 독자 앞에서 세상과 통하는 그만의 길을 발견했을 것이다.

"음.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한 건 맞아. 그런데 생각해보면 엄마가 뭘 시킨 적이 없어. 그게 이상한 거지."
바로 이 지점이 변화를 위한 첫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변화시키겠다는 목표와 의지를 버리는 것. 변화가 필요 없게 되어야 그때 변화가 제 발로 찾아온다.

그런데 일시적이지 않은 진짜 변화들은 오히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마음이 됐을 때 나도 모르게 찾아왔다.

엄마도 그분 나름 아등바등 당신을 희생했으니 그것만으로도엄마에게 감사와 사랑을 느껴야 한다고 다짐했지만 도저히 안됐다. 그 대신 엄마도 그냥 소로가 이야기했던 바구니를 팔려다.
가 실패한 마을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엄마 멋대로 바구니를 백만 개쯤 짜서 나에게 팔려고 했던 것이다. 여기서내가 지불해야 하는 돈은 나의 무한한 애정과 존경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엄마가 짜준 바구니가 그렇게 많이 필요 없는데, 그걸억지로 전부 사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엄마가 나를 위해 무얼 희생했건 그건 엄마의 바구니일 뿐, 나에게 그걸 사야 할 의무는 없었다.

포기나 이해와는 달랐다. 그 전에도 포기하거나 남편을 이해하자고 마음먹었지만 결국 폭발하곤 했었다. 그런데 신기한 건,
이때부터 남편도 바뀌고, 나도 바뀌고 결혼 생활도 바뀌었다.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힘보다 더 상위의 강력한 힘은 변화가 필요 없는 맥락과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그 정도의 힘이 생기면, 변화가 드디어 저절로 찾아온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변화가 아니라 변화가 필요 없는 맥락에 모든 것이 적절하게 들어맞는다. 맥락을 만들 때의 장점은 ‘주인 되기를 나 혼자만 독점할필요가 없다는 데에 있다. 내가 바꾸고 싶은 상대도 그 나름으로자기중심이 있다. 그들이 변했다면 그들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성급하게 고마워하지도, 미안해하지도 않는다. 그들이 변화하기를 기대하지 않는 것처럼.

완벽하게 다림질된 아름다운 셔츠를 포기하는 것은 단순한 포기가 아니다. 오래된 나의 습관이나 남들이 정해놓은 관습의 맥락을 다시 점검하고 의식하는 과정이다.

물건 버리기, 간소화하기, 미니멀리즘 같은 용어는 비우고 없애는 것, 포기하는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비우고 없애기 위한 우리의 의식적인 살핌은 사실 더 많은 의미를 채우는 것이다. 내물건, 나와 함께하는 사람, 나의 일을 버리고 없애기 전에, 거기서 어떤 가치와 의미를 의식하고 즐기고 있는지 질문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눈에 보이는 것들의 숫자가 줄어들게 된다.
그 우연한 결과가 미니멀리즘일 뿐, 어느 날 하루 고생해가며 죄다 치우는 것이 목표는 아니다. 실제로 해보니 비우기 위해 비운물건들, 관계들, 습관들은 저절로 다시 채워졌다. 하지만 나의 현재에 중요한 의미, 맥락을 이해하고, 나만의 삶을 가꾸겠다는 목표를 가지면, 조금씩 나에게 맞는 것들만 남는다.

꼭 필요한 일이라면 내 삶 안에서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다림질에 다가갔다. 빳빳하게 다려진 셔츠야말로 쓸모없는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열심히 다림질을 하면서 스스로 일상을 가꾸는 재미를 발견했더니, 셔츠 입고 출근하는 일에 대한집착이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은 다림질을 안 하고 살게 됐다. 하지만 언젠가 셔츠를 다릴 일이 또 생긴다면 또다시 새롭게 일상의 기쁨이 되는 다림질 법을 개발할 것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질문은 늘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가‘라는 문제다. 타인에 대한 내 반응이 내가 누구인지 가장 정확하게 알려준다.

샤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 enfer,cestles autres" 라고 말했다. 그런데 나중에는 사르트르가 직접 이 유명한 문장이 잘못 이해되고 있다고 밝혔다. 흔히 인용하듯이 나를 괴롭히는 타인과의 나쁜 관계 때문에 지옥같이 힘들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인식하고 스스로를 평가하는 모든 것이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온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니 정확하게 해석하자면, ‘타인은지옥이다‘가 아니라, ‘지옥은 타인에 있다가 더 맞을 것이다. 이대사가 등장한 사르트르의 연극에는 지옥에 갇힌 세 사람이 등장한다. 이 공간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은 갇혀 있다는 사실도 아니고, 나머지 두 사람이 나를 괴롭히고 나를 비난해서도 아니다.
내가 나 스스로를 평가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지옥‘이라고 사르트르는 설명한다. 생존을 위해 공기와 물이필요하듯이, 끊임없이 타인에게 기대어야 한다는 그 사실. 우리는 이 지옥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타인이 나를 괴롭혀서가 아니라 내가 나로 살아가기 위해서다.

세상이 내게 거는 기대에 무심하기 위해, 우리는 결국 더욱더사람에게 기대어야 한다. 나 자신을 잃는다는 것도 결국 내가 있는 관계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완벽한 존재가 되려고 하지않고, 나의 모자란 점을 채워주는 사람들을 발견하며 사는 삶이다. 그래도 그런 사람들과 사회에 대해 빚을 졌다는 생각은 하지않는다. 나도 그들도 관계 안에 있는 것만으로 서로의 모자란 점을 채워주고 있으니, 세상이 나를 통해 흘러간다.

나의 모자란 점이야말로 나 자체다.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가운데 오는 고통은 나답게 타인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 고통을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나이트는 좀도둑이 되어 사람들에게다른 고통을 안겼다.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일은 분명히 때로 불편하고, 내 부족한 점들을 마주하게 하며, 아무리 노력해도 그 거리를 좁힐 수 없을 것 같은 순간도 많다. 이런 우리의 인생이 쉬워지는 일은 없겠지만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 수고로움이 자신을잃음으로서 더욱 나다워지는 길임을 깨달을 수는 있다.

일상에서 화가 날 때 나는 재빨리 어떤 이미지를 떠올린다. 내몸이 화라는 목욕탕 뜨거운 물에 들어가 있고 거기서 몸을 일으켜 물 밖으로 나오면 끝이라는 상상이다. 화가 내 안에서 꿇고있는 게 아니니, 내가 아무것도 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뜨거운목욕탕에 들어가면 처음에는 온몸의 살갗이 터질듯이 자극적이고, 숨을 꾹 참고 멈추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몸을 담그고있으면 나른하게 편안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뇌졸중을 통해 내가 배운 최고의 교훈이라면 감정을 몸으로느끼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 감정이 내 몸에 계속 남아있게 할지, 아니면 내 몸에서 곧장 흘러 나가게 해야 하는지판단할 힘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힘이 점차 강해지면서 내 감정이나 상황을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이나 외적 사건 탓으로 돌리고 싶어졌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나와 나의 뇌 말고는 나에게 어떤 기분을 느끼게 만들 사람은 없었다. 외부의 그 무엇도 내 마음의 평화를 앗아갈 수 없었다. 그것은 온전히 나의 문제였다. 내 삶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통제할 수는 없지만, 내 경험을 어떻게 지각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내게 달려 있었다.

오른쪽 뇌에는 현재 순간 외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으며, 매 순간이 감각들로 채워진다. 출생이나 죽음은 현재 순간에 일어난다. 기쁨의 경험 역시 현재 순간에 일어난다. 우리 자신보다 거대한 존재를 지각하고 그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경험 또한 현재 순간에 일어난다. 우뇌에서는 ‘지금 이 순간 The Moment of Now‘만이 끝없이 계속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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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작아질 때만, 겨자씨 한 알만 하게 작아질때만 열매를 맺고 그 힘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작은 믿음이 꼭 죄스러운 부족한 믿음의 열매는 아닐 것이다. 작은 믿음‘이 때로는 ‘커다란 믿음 보다 더 많은 생명과 진리를 담고 있을 수도 있다. 씨앗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아무 쓸모 없이 사라지고, 죽어야만 큰 유익을 가져올 수 있다는 비유, 여기서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믿음에 적용할 수는 없을까? 인간의 삶에서나역사의 흐름 속에서 믿음도 철저한 축소와 죽음의 시간을 겪어야 하는 것 아닐까? 작은 것이 큰 것보다 앞자리를 차지하고, 잃는 것이 얻는 것이며, 줄어듦과 작아짐이 곧 하느님의 활동을 앞당기기 위한 개방성을 뜻하는 복음의 역설적 논리에 비추어 이 상황을 이해한다면, 이 위기는 실은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때"(루카 19,44 참조), 카이로스, 적절한 때가 아닐까?

‘하느님의 백성‘인 인간이 자신들 앞날의 여정에 걸리적거리며방해하는 것들을 버리지 못할 때, 때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불편하게느낄 구원의 방식들을 쓰기도 하신다. 니체가 말한 ‘소멸하다‘라는 말은 좌초하여 사라진다는 의미뿐 아니라, 문자 그대로 바닥으로 가다‘, 알맹이를 건드린다는 뜻도 있다.

이 첫 번째 묵상을 기도로 마무리하려 한다. 주님, 저희의 신심이저희 확신의 무게에 짓눌려 있다면 이 커다란 믿음을 저희에게서 거두어 가소서. 너무나 인간적인‘ 저희의 종교를 걷어 가시고 저희에게 ‘하느님의 믿음‘을 주소서. 당신 뜻이라면, 대신 저희에게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을 주소서. 작지만 당신의 힘으로 가득한 믿음을!

적자생존의 법칙‘이 적용되고 인정사정없이 남들을 제치고 나아가는 것이 규칙이 되어 버린 ‘이 세상‘은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이들에게 세 가지 선택지만 준다. 절망하여 체념하거나, 순응하여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거나, 그것도 아니면 약물이나 다른 수단으로 감각을 마비시켜 잠재우는 것이다. 시장에는 화학적 약물에서 종교적 약물까지 오만 가지 약물들이 나와 있다!

예수께서 장차 베드로 사도가 될 시몬에게 처음 가셨을 때, 베드로는 밤새 고기잡이에서 허탕을 치고 좌절한 어부들 사이에 있었다. (루카 5,1-11 참조). 예수께서는 어부들이 나름의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희망과 생각과 기대가 한계에 이르렀다고 포기한 바로 그때, 그들에게 희망을 주신다.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신앙은 신뢰, 그것도 불가능한 것을신뢰하는 용기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그러나"라는 저 말 한마디에 베드로의 신앙 전체가 들어 있다. ‘다시 한번 시도해 보겠다는 그의 용기를 통해 드러나는 신뢰이다.

베드로와 예수의 이 첫 만남 장면은 똑같은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마지막 만남 장면에도 대응된다. 그 만남에서, 이 제자는 대단히열성적이다가 또 처참하리만큼 허물 많은 모습을 오갔다. 그런 모습에 충격을 받으셨을 법도 한 예수께서는 급기야는 당신을 모른다고세 번 부인하는 최악의 잘못을 저지른 베드로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신다.
사랑의 길이란 ‘이 세상 논리의 눈에 ‘부조리함‘이라고 거듭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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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난 것들이 있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선택이 시작된다. 포기하면 내게 중요하고 가치 있었던 무언가가없어지지만 결코 그 빈자리가 그대로 지속되지는 않는다. 전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들이 새로운 가치가 되어서 나타난다.

왜 이런 아픔을 감수하며 포기해야 할까? 바로 이 질문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포기의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과거에는 충분히 좋았던 것들을 놓아야만 하는 때가 온다. 정확히 그때가 언제인지는 각자가 결정해야 한다. 다만 내가 무엇을 위해이러고 있는가?‘라고 자문을 해보아도 도무지 떠오르는 답이 없다면 그때가 의심하기에 좋은 때다. 그 의심이 나를 찾아온 순간회피하지 않는 것, 나에게 태연하고 냉정하게 질문을 던지는 것.
그 정도만으로 충분하다. 질문은 단순할수록 좋다.

이 세상에 선이 늘어나는 것은 역사에 남지 않을 사소한 많은 행동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더 나쁜 세상에서 살 수도있었을 텐데 그렇지 않은 이유의 절반쯤은, 드러나지 않는삶을 충실하게 살다가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는 무덤에서 잠든 이들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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