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여기서는 이의를 제기합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이토록 감동하는데, 내가 어째서 짐승인가? 음악은 인간의 정신이 가장 고양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고급한 정신 상태죠. 동물이 인간의 여러 행동을 따라 하지만, 음악을 감상할 수는 없어요"

"카프카는 우리가 생각하듯 나약하고 울적하고 어둡기만 한 사람이 절대 아닐 수도 있다.’ 작품과 외모 때문에 그가 중압감을 못 이기고 구석으로 들어가 가만히 생각만 하는 사람처럼 보이잖아요. 그런데 카프카의 본질은 엄청난 생의 충동입니다. 한마디로 그에게 삶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살아 있는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거의 동물적이죠. 결코 자기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상황이든 뚫고 나가는 힘을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여기에 문학적 의지를 다 투여한 사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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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피해 달아나 세상과 인연을 끊는 일은 쉽지만, 세상에 관심을 두지 않고 전혀 종적도 없이 사는 일만큼은 어렵다." 세상에 살면서 어울리지 못한다고 느껴서 아예 은거하는 선비가 된다면, 눈으로 온갖 투쟁에 몸을 더럽히는 꼴을 보지 않고 어떤 거짓이나 위험도 겪지 않을 수 있을 겁니다. 세상을 떠나 멀리 숨어 버리는 것은어쨌거나 자신을 보호하는 손쉬운 방법이죠. 그러나 세상에서살면서 나는 새처럼 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면서도 공중에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매인 데 없이 자유롭게 모든 장애를 뛰어넘어 버린다는 것은 정말이지 어려운 일입니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고자 한다면? 앞서 제기한 비행의 방식이 아니라면 어찌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세상의 도리에 따라사리에 깊이 통해서 마음으로는 다른 의도가 없고 겉으로는아무것도 억지로 하는 일이 없는 한 어려울 것입니다. 두껍지않은 칼날‘을 원래의 틈‘에 밀어 넣음으로써 소의 뼈를 가르는 데도 칼놀림에 여유가 있어 십구 년 동안 칼날이 전혀 상하지 않았다던 통달한 백정의 경지에 이른다면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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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매우 아끼는 책 『어떻게 죽을 것인가Being Mortal』의 저자아툴 가완디 Arul Gawande 의학박사는 최근 의회 증언에서 그 절망적인 현실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돌봄에 있어서 무엇을 원하는지‘ 의견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환자가 어떤 돌봄을 원하는지 알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탁월한 방법은 그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의사든 가족이든 묻지 않고 시간을 거의 다 흘려보냅니다. 물어보지 않으면 우리가 제공하는 돌봄과 치료가 환자의 희망 사항과 대개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결과가 따라옵니다. 하지만 환자에게 묻고 돌봄과 희망 사항이 일치하도록 노력하면 놀라운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보통 의사가 환자에게 생의 마지막 단계에 대한 목표를 묻는 시점은 환자의 죽음까지 그 단계의 3분의 1도 채 남지 않았을 때입니다. 가족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마지막 순간이 가까워져서야 환자의 의견을 묻습니다.
많은 연구를 통해 심각한 병에 걸린 환자가 향후 돌봄에 대한 목표와 소망을 의사와 논의하면 훨씬 더 좋은 결과를 얻게된다는 사실이 입증됐습니다. 환자는 덜 고통받고, 신체적으로 더 자유롭게 됩니다. 또 비교적 다른 사람들과 오랜 기간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습니다. 가족이 우울증에 걸릴 확률도훨씬 낮아졌습니다. 평균적으로 호스피스에 빨리 등록하지만,
일찍 죽지 않으며 오히려 더 오래 삽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sabeth Kibler-Ross는 "죽음을 부정하면 공허하고 목적 없는 삶을 살게 된다. 영원히 살 것처럼 살면, 해야만 하는 일을 쉽게 미루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우리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삶을 논하는 것과 다름없다. 죽음은 삶을 비추는 훌륭한 거울이다. 죽음 이야기가 오싹하거나 무서울 필요는 없다.
미국 서북부 출신인 내 친구 마이클 미드MichaelMeade는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이렇게 말한다. "완전히 철든 인간이라면, 죽음의 문 앞에 자기 자신의 모습 그대로 나타난다.
우리가 삶과 그 결과물인 죽음을 모두 받아들인다면 주위사람들이 결정을 내리지 못해 혼란에 빠지는 것을 막고 우리의 죽음을 굳건히 받아들이도록 도울 수 있다. 의사나 간호사에게 사전 연명 의료 의향서, 명확한 위임장, 의료 결정 대리권 같은 분명한 지침을 제시해 두고, 가족에게 생애 말기에 어떤돌봄을 받고 싶은지,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고 싶은지, 어떤 의식을 치르고 싶은지 알린다면 감정적, 금전적 부담은 상당히줄어들 것이다.

인디언 추장인 까마귀 발은 말했다.
조금 뒤면 나는 떠난다.
어디로 가는지 나도 모른다.
우리는 모르는 곳에서 와서 모르는 곳으로 간다.
삶은 무엇인가? 밤중에 빛나는 개똥벌레 불빛이다. 겨울에 내쉬는 버펄로의 숨결이다. 풀밭을 가로질러움직이다가 해질녘에 사라지고 마는 작은 그림자다.‘

데이비드 실즈,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하지만 그날 저녁 나는 죽음에 관한 대화가 정치나 종교보다훨씬 깊은 영역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저녁을 먹는 동안 그들과 조금도 다투지 않았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상대방의 종교를 이야기하거나 평가하는 것과 다르며 교훈적인 대화가 아니다. 죽음 앞에서는 우리 모두 아이와 같다. 문화, 정치,
인종, 성차를 넘어 깊이 마음을 나누려는 순수함과 의지가 있는 것이다. 그날 밤 만찬이 진행된 세 시간 동안 강력한 유대감이 형성됐다. 식탁에 앉은 모든 사람이 눈물을 흘렸고, 남부 사람과 그들의 감정 표현 능력에 대한 나의 편견이 사라졌다. 빌프리스트는 생각에 잠겨 말했다. "단순한 질문들이 어떻게 억압을 날려 버리는지 봤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이야기해야합니다. 끓는 냄비가 뚜껑을 날려 버리는 것 같은 대화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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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년 동안 이러한 만찬을 수천 번 열었고, 낯선 사람, 친구, 동료 들이 모여 죽음이라는 불편해 보이는 주제에 관해 대화를 나눴다. 매번 만찬은 똑같은 제안으로 시작된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먹기 전에 이제는 우리 곁에 없지만 각자의 삶에 긍정적인영향을 끼친 고인을 기리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머릿속에 처음 떠오른 사람을 선택하는 게 좋습니다. 괜히 중간에 바꾸지마세요. 제일 처음 떠오른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고인의이름과 그분이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이야기한 다음, 초에 불을 붙이거나 그분을 위해 건배하세요. 우리 모두 배가 고프니까 각자 1분 정도만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자기계발에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쏟아붓고 있다. 더 좋은 모습으로 더 잘 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매달 다이어트를하고 크로스핏 센터에 등록한다. 심리 치료를 받고 명상을 배우고 재테크를 한다. 그런데 변화해야 한다는 생각에 늘 사로잡혀 있지만, 모든 변화가 죽음과 회생을 포함한다는 사실은모른다. 변화와 죽음의 관계를 보여 주는 예는 셀 수 없이 많지만, 가장 단순한 예로 겨울로 바뀌는 가을과 봄으로 바뀌는 계울을 생각해 보라. 우리는 노력을 기울여도 죽음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데 번번이 실패하지만, 우리 모두 언젠가 죽는다는사실이 모든 개인적 변화의 지렛목인 것이다. 우리는 삶을 개선하려 할 때 죽음의 맥락에서 생각하지 않고, 죽음을 개선하기 위한 대화도 잘 하지 않는다. 나는 죽음이 많은 그늘을 지닌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죽음은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하는것이고, 우리 모두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죽음은 삶에 활기를 주는 달콤함이자 비극이다. 또한 마침내 성장하여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내면에서 사라져야만 하는것들의 작은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책은 우리가 죽음의다양한 의미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다. 자유롭고 자율적인삶을 살려면 죽음을 이해해야 한다. 현 시대에는 우리가 죽는방식이 망가졌기 때문이다.
죽음을 둘러싸고 우리가 사용하는 말(더 정확히 말하면, 피하는 말)만 봐도 심각함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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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의 주춧돌은 사람 키보다 커서 돌기둥처럼 보인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돌기둥이 아니라 엄청 긴 주춧돌이다. 가장 높은 기단부 역시 ‘경복궁에 있는 건물들이다. 기단부의 높이를 보면 건축주의 권력 양을 측정할 수 있다. 실제로 왕족은 돌을 3단으로 쌓은 기단을 만들 수있었고 양반은 2단 이하로 만들어야 했다. 권력의 위계를 구분하기 위한 조선 시대 건축 법규인 것이다. 기단은 재력을 나타내는 척도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부잣집은 성북동, 한남동의 경사 대지에 높은 축대를쌓은 집들이다. 현대 도시에서의 축대는 조선 시대 때 기단이라고 볼 수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비, 기단의 높이, 권력, 건축 공간에 대해서 잘 그려 낸 사례다. 영화를 보면 가난한 송강호 가족은 비가오면 물이 차는 반지하에 살지만, 부자들이 사는 동네로 카메라가 옮겨지면 집들이 모두 거대한 축대 위에 올라간 모습으로 그려진 것을 볼 수있다. 심지어 주인공 남자는 그 집 대문을 열고 계단을 한참 올라가야마당과 현관문을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축대가 높았다.
과거에 무거운 돌로 기단을 만들 만큼 재력이 없었던 일반인들은 기단없이 주춧돌만 두고 집을 지었고, 비싼 기와를 사용할 수 없었다. 대신가을에 추수하고 남는 볏단을 재활용해서 지붕을 덮었다. 볏단은 기와보다 가볍기 때문에 볏단으로 지붕을 마감하면 지붕을 받치는 나무 기둥도 굵은 재료를 쓸 필요가 없다. 자연스레 주춧돌도 작은 것을 사용하면 된다. 같은 면적의 건축물이라도 초가지붕을 가진 건물보다 기와지붕을 가진 건물의 건축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에 엄청난 차이가 난다. 그래서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기와집이 부의 상징이 된 것이다.

강수량의 차이는 농업 품종의 차이를 만들고, 품종의 차이는 농사 방식의 차이를 만들고, 농사 방식의 차이는 가치관의 차이를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건축에서 동서양의 강수량 차이는 건축 디자인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발전시켰고, 건축 공간은 행동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행동 방식은 궁극적으로 사람의 생각에도 영향을 미쳤다. 서양은 밀 농사의 혼자 농사하는 방식에 따라 개인주의 성향이 커졌고, 외부와 단절된창문 없는 벽 중심의 건축으로 바깥과 교류가 적은 성격의 공간으로 발전했다. 건축물 역시 독립된 개별적인 건축물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건축적 개인주의가 발전했다. 반면 벼농사는 집단 농사 방식으로 사람 간의 관계가 중요한 가치였으며, 많은 강수량 때문에 사용하게 된 재료인목재를 이용한 기둥 중심의 건축 양식은 외부 자연 환경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생활양식으로 발전되었다. 강수량 차이로 인해서 서양은 독립된 개인이 중요한 사회가, 동양은 관계를 중요시 하는 사회가 되었다.

밀 농사를 짓는 서양에서 수학이라는 논리 위에 객관적이고 절대적인가치관이 만들어져 가는 동안, 벼농사를 짓는 동양에서는 ‘관계‘를 중요시하는 상대적인 가치관이 만들어져 가고 있었다. 이 사실은 앞서 벼농사 지역의 사람들은 요소들 간의 관계에 중점을 두고 기차와 철길‘을 하나로 묶는다는 실험 결과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두 문화권은여러 가지 분야에서 차이점을 보이는데, 우선 이상향의 공간적 개념에서 나타나는 차이를 살펴보자. 서양 기독교에서의 이상향은 천국이며천국은 우리가 죽어야만 갈 수 있는 다른 차원의 공간이다. 이는 마치이데아에 절대로 가지 못하는 동굴에 묶인 사람과 같다. 절대적 공간은있지만 인간은 갈 수 없다. 다만 상상할 뿐이다. 하지만 동양의 이상향인 무릉도원은 다르다. 무릉도원 설화는 이렇다. 진나라 때 어느 어부가 복숭아꽃이 만발한 숲을 지나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낙원 같은 마을을 발견했는데 그곳에서 나온 후 다시 찾아가려고 했더니 찾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동양에서의 이상향은 우리와 같은 세계에 존재하지만 다만 찾기 어려운 장소일 뿐, 우리가 절대로 갈 수 없는 세상은 아니다. 선악에 대한 가치관에서도 차이점이 보인다. 서양 문화에서는 선악의 가치관이 절대적이다. 예를 들어서 십계명 같은 법은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같은 명확한 독립적인 명제로 선善을 규정한다.
반면에 동양에서는 선악의 결정을 관계에 의해서 설명한다. 동양에서는 절대적인 선을 믿지 않는다.

중용의 개념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다.
쉽게 말해서 눈치 봐서 가운데에 서라는 말인데, 벼농사 사회의 공동체내에서 튀지 않게 행동하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우리나라 사회는 요즘도 이런 덕목을 최고로 내세운다. 우리 사회는 뛰어나지만 튀는 것보다는 무능하더라도 무난한 것을 더 좋게 보는 사회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중용이 되려면 좌와 우의 거리를 젤 필요가 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중간쯤에 ‘선‘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좌와 우의 관계 속에서 선을 찾는 것이다. 이는 동양 사회가 상대적인 가치와관계를 중요시했음을 보여 준다. 동양에서 최고의 덕으로 이야기되는
‘중용‘은 절대적 선의 개념이 아니라, 주변의 상황과 관계에 따라서 변화하는 선의 개념이다. 또 다른 예를 찾아보자. 동양에서 도덕의 가장근본이라고 생각하는 ‘효孝‘는 부모와 자녀라는 두 사람 간의 상대적인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다. ‘충忠’은 임금과 신하라는 관계 안에서 만들어지는 선이다. 동양은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선을 찾으려 했다. 부모자식의 관계는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생기는 피할 수 없는 관계다. 사람들은 존재하는 즉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맺게 되는데, 동양에서는 그 관계 속에서 가치를 찾으려고 했다. 이는 집단 노동 방식으로 벼농사를 지으면서 만들어진 가치관이다.

마찬가지로 동양에서 비움의 의미는 단순히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의미라기보다는 그 이상의 긍정적인 의미를내포하고 있다. 동양에서 비움은 창조의 시작이다. 비움에 큰 가치를둔 동양 철학자 노자는 일단 손에 잡히는 물질적 존재가 가득 차게 되면 오히려 성장의 잠재력이 소진된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그의 생각은 노자의 『도덕경』 11장에 잘 나타난다.

진흙을 이겨서 질그릇을 만든다. 그러나 그 내면에 아무것도 없는 빈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릇으로서의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게문[戶]과 창문을 뚫어서 방을 만든다. 그러나 그 아무것도 없는 빈 곳이 있기 때문에 방으로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있는 것[有]이 이로움[利]이 된다는 것은 없는 것[無]이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노자 도덕경』 11장, 남만성 역)

바둑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진다. 그중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이야기는 기원전 2300년경 초대 중국 황제 요堯가 자신의 두 아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설이다. 체스나 장기가 말과 코끼리등이 등장하는 유목 사회의 전쟁을 상징적으로 만든 게임이라면 바둑은논밭을 확장하고 경작하는 농경 사회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만든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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