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회루‘의 주춧돌은 사람 키보다 커서 돌기둥처럼 보인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돌기둥이 아니라 엄청 긴 주춧돌이다. 가장 높은 기단부 역시 ‘경복궁에 있는 건물들이다. 기단부의 높이를 보면 건축주의 권력 양을 측정할 수 있다. 실제로 왕족은 돌을 3단으로 쌓은 기단을 만들 수있었고 양반은 2단 이하로 만들어야 했다. 권력의 위계를 구분하기 위한 조선 시대 건축 법규인 것이다. 기단은 재력을 나타내는 척도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부잣집은 성북동, 한남동의 경사 대지에 높은 축대를쌓은 집들이다. 현대 도시에서의 축대는 조선 시대 때 기단이라고 볼 수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비, 기단의 높이, 권력, 건축 공간에 대해서 잘 그려 낸 사례다. 영화를 보면 가난한 송강호 가족은 비가오면 물이 차는 반지하에 살지만, 부자들이 사는 동네로 카메라가 옮겨지면 집들이 모두 거대한 축대 위에 올라간 모습으로 그려진 것을 볼 수있다. 심지어 주인공 남자는 그 집 대문을 열고 계단을 한참 올라가야마당과 현관문을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축대가 높았다.
과거에 무거운 돌로 기단을 만들 만큼 재력이 없었던 일반인들은 기단없이 주춧돌만 두고 집을 지었고, 비싼 기와를 사용할 수 없었다. 대신가을에 추수하고 남는 볏단을 재활용해서 지붕을 덮었다. 볏단은 기와보다 가볍기 때문에 볏단으로 지붕을 마감하면 지붕을 받치는 나무 기둥도 굵은 재료를 쓸 필요가 없다. 자연스레 주춧돌도 작은 것을 사용하면 된다. 같은 면적의 건축물이라도 초가지붕을 가진 건물보다 기와지붕을 가진 건물의 건축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에 엄청난 차이가 난다. 그래서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기와집이 부의 상징이 된 것이다.

강수량의 차이는 농업 품종의 차이를 만들고, 품종의 차이는 농사 방식의 차이를 만들고, 농사 방식의 차이는 가치관의 차이를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건축에서 동서양의 강수량 차이는 건축 디자인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발전시켰고, 건축 공간은 행동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행동 방식은 궁극적으로 사람의 생각에도 영향을 미쳤다. 서양은 밀 농사의 혼자 농사하는 방식에 따라 개인주의 성향이 커졌고, 외부와 단절된창문 없는 벽 중심의 건축으로 바깥과 교류가 적은 성격의 공간으로 발전했다. 건축물 역시 독립된 개별적인 건축물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건축적 개인주의가 발전했다. 반면 벼농사는 집단 농사 방식으로 사람 간의 관계가 중요한 가치였으며, 많은 강수량 때문에 사용하게 된 재료인목재를 이용한 기둥 중심의 건축 양식은 외부 자연 환경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생활양식으로 발전되었다. 강수량 차이로 인해서 서양은 독립된 개인이 중요한 사회가, 동양은 관계를 중요시 하는 사회가 되었다.

밀 농사를 짓는 서양에서 수학이라는 논리 위에 객관적이고 절대적인가치관이 만들어져 가는 동안, 벼농사를 짓는 동양에서는 ‘관계‘를 중요시하는 상대적인 가치관이 만들어져 가고 있었다. 이 사실은 앞서 벼농사 지역의 사람들은 요소들 간의 관계에 중점을 두고 기차와 철길‘을 하나로 묶는다는 실험 결과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두 문화권은여러 가지 분야에서 차이점을 보이는데, 우선 이상향의 공간적 개념에서 나타나는 차이를 살펴보자. 서양 기독교에서의 이상향은 천국이며천국은 우리가 죽어야만 갈 수 있는 다른 차원의 공간이다. 이는 마치이데아에 절대로 가지 못하는 동굴에 묶인 사람과 같다. 절대적 공간은있지만 인간은 갈 수 없다. 다만 상상할 뿐이다. 하지만 동양의 이상향인 무릉도원은 다르다. 무릉도원 설화는 이렇다. 진나라 때 어느 어부가 복숭아꽃이 만발한 숲을 지나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낙원 같은 마을을 발견했는데 그곳에서 나온 후 다시 찾아가려고 했더니 찾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동양에서의 이상향은 우리와 같은 세계에 존재하지만 다만 찾기 어려운 장소일 뿐, 우리가 절대로 갈 수 없는 세상은 아니다. 선악에 대한 가치관에서도 차이점이 보인다. 서양 문화에서는 선악의 가치관이 절대적이다. 예를 들어서 십계명 같은 법은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같은 명확한 독립적인 명제로 선善을 규정한다.
반면에 동양에서는 선악의 결정을 관계에 의해서 설명한다. 동양에서는 절대적인 선을 믿지 않는다.

중용의 개념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다.
쉽게 말해서 눈치 봐서 가운데에 서라는 말인데, 벼농사 사회의 공동체내에서 튀지 않게 행동하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우리나라 사회는 요즘도 이런 덕목을 최고로 내세운다. 우리 사회는 뛰어나지만 튀는 것보다는 무능하더라도 무난한 것을 더 좋게 보는 사회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중용이 되려면 좌와 우의 거리를 젤 필요가 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중간쯤에 ‘선‘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좌와 우의 관계 속에서 선을 찾는 것이다. 이는 동양 사회가 상대적인 가치와관계를 중요시했음을 보여 준다. 동양에서 최고의 덕으로 이야기되는
‘중용‘은 절대적 선의 개념이 아니라, 주변의 상황과 관계에 따라서 변화하는 선의 개념이다. 또 다른 예를 찾아보자. 동양에서 도덕의 가장근본이라고 생각하는 ‘효孝‘는 부모와 자녀라는 두 사람 간의 상대적인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다. ‘충忠’은 임금과 신하라는 관계 안에서 만들어지는 선이다. 동양은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선을 찾으려 했다. 부모자식의 관계는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생기는 피할 수 없는 관계다. 사람들은 존재하는 즉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맺게 되는데, 동양에서는 그 관계 속에서 가치를 찾으려고 했다. 이는 집단 노동 방식으로 벼농사를 지으면서 만들어진 가치관이다.

마찬가지로 동양에서 비움의 의미는 단순히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의미라기보다는 그 이상의 긍정적인 의미를내포하고 있다. 동양에서 비움은 창조의 시작이다. 비움에 큰 가치를둔 동양 철학자 노자는 일단 손에 잡히는 물질적 존재가 가득 차게 되면 오히려 성장의 잠재력이 소진된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그의 생각은 노자의 『도덕경』 11장에 잘 나타난다.

진흙을 이겨서 질그릇을 만든다. 그러나 그 내면에 아무것도 없는 빈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릇으로서의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게문[戶]과 창문을 뚫어서 방을 만든다. 그러나 그 아무것도 없는 빈 곳이 있기 때문에 방으로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있는 것[有]이 이로움[利]이 된다는 것은 없는 것[無]이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노자 도덕경』 11장, 남만성 역)

바둑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진다. 그중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이야기는 기원전 2300년경 초대 중국 황제 요堯가 자신의 두 아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설이다. 체스나 장기가 말과 코끼리등이 등장하는 유목 사회의 전쟁을 상징적으로 만든 게임이라면 바둑은논밭을 확장하고 경작하는 농경 사회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만든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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