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여기까지다. 최소한 배고픔과 관련해 그의 고통을 완화시켜줄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여기까지다. 한 공기의 밥으로 그가행복을 느낀다고 해서 두 공기의 밥, 세 공기의 밥, 나아가 한 가마의 밥을 그에게 먹여서는 안 된다. 한 공기를 넘어서는 순간, 그는배고픔에 비견할 만한 새로운 고통에 빠져들고 마니까. 사랑은 ‘한공기의 밥‘과 같은 것이다.
한 공기의 사랑이다. 그의 고통을 완화시켜주는 ‘한 공기의 사랑을 할 수 있느냐가 문제다. 한 공기를 넘어서는 모든 사랑은 "정말사랑했다!" 라는 나의 정신 승리는 가능하게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에게 온갖 고통을 가하는 끔찍한 일이다. 심지어 나를 사랑하면 세 공기든 네 공기는 한 가마든 먹어야 한다고 그를 압박한다. 세 공기, 네 공기의 밥을 지은 자신의 수고를 내세우면서 말이다. "당신을 위한 나의 수고를 헛되게 하지 말아줘. 그러면 나는 정말 슬플 거야." 어느새 그의 배고픔과 포만감보다 나의 수고가 핵심이 되고 만다. 한 공기를 넘어서는 사랑은 이제 사랑의 궤도를 이탈해 공회전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애지중지(愛之重之)하지않게 되니까. 애지중지하는 마음은 그를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것,
한마디로 그를 내 뜻대로 부리지 않겠다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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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 점수라는 아들의 말에 아버지는 얼굴이 환하게 밝아져, 가족들 앞에서 의기양양해졌다는군요. 그런 아버지를 보며 아들은 기쁨으로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합니다.
열세 살 아들의 기쁨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리고 마음속으로 늘 울고 있다는 『토지』 속 일본 할머니의 슬픔은 또 무엇이랍니까. 아마도 이들의 기쁨과 슬픔은,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논리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둘다 인간과 인간이 이어져 있음을 증명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낯선 할머니, 철없는 아들이라지만 그들은 나 아닌 다른 사람의기쁨과 슬픔을 함께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기쁨과 슬픔은 나와 네가 공감할 수 있다는 증명이며, 그래서 인간은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증명입니다. 이와 같은 공감이 더 촘촘하게 우리들을 에워쌀 때,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참 좋은 세상이 될 겁니다. 그런 세상을 박경리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의 인연이 모두가 그와 같다면 그야말로 이 세상이 극락이지 극락이 어디 따로 있겠나."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는데 마음속으로 늘 울고 계신다는 할머니, 세상 모든 슬픔에 공감했던 그분께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할머니의 마음은 사람을 살렸고, 사람들에게 극락이 어떤 곳인지 알려주었다고 말입니다.

... 욕망이나 의지, 결단과는 상관없이, 그림을 아무리 열심히 그리더라도 그의 생활은 점점 더 가난해질 수도 있고, 훌륭한 화가로 인정받지 못한 채 무명의 세월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이때 스스로가 그림 그리는 것을 긍정하는 데서 더 나아가, 가난과무명의 세월까지 긍정하는 것, 즉 첫 번째 긍정으로부터 생겨날모든 결과까지 기꺼이 긍정하는 것이 두 번째 긍정이라는 거지요. 이렇게 두 번 긍정한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가난해도 좋고 무명으로 끝나도 좋다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방법은 없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덧붙입니다. 물론 그렇다 할지라도 늙고 병들고 죽는 등등의, 인간으로서 겪는 불행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자기 긍정의삶을 살아가는 자에게 그런 고통이나 불행은 지나가는 불행과고통이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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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란 순수하게 사랑할 수 없는 나의 무능이다. 즉 상대방이 나에게 전부(이 단어의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일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원죄다. 삼위일체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향한 순수한 움직임이요, 아들은 아버지를 향한 순수한 움직임이고,
애가 어떤 형태를성령은 이 움직임의 상호성이요 역동성 자체인 것처럼, 그렇게 내가 상대방을 향한 순수한(엄정한 의미에서 순수) 움직임이지못하게 만드는 것이 원죄다.

다시 말해서, 나의 사랑을 표현함과 동시에 상대방에 대하여 나의 독립성을 강조할 수 있겠는가. 그런 태도는 명백히가능하지 않다. 사랑한다는 것은 종속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나는 세상 끝까지 당신을 따라갈것이다. 나는 당신에게 종속되고 싶다.
아무튼 모든 인간의 공동체에는 ‘나는 당신들에게 종속되기원한다.‘라는 암묵적인 말이 함축되어 있다. 왜 이 순간 그토록 많은 공동체가 생겨나고 그렇게 빨리 사라지는가? 이런 상호 종속의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적 사랑에서 사랑한다는 것이 종속되고자 하는 바람이라면, 사랑이 충만하게 체험되는 하느님에게는 얼마나 더 당연하겠는가?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를 잊지 말고, 사랑의 영역에서 떠나지 말고 생각해 보라. 하느님이 오직 사랑이실 뿐이라면 그분은 모든 존재 가운데 가장 종속적인 존재요, 무한한 종속성이신 것이다. 탕자의 아버지는 그의 아들에종속되어 있다. 아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는 슬픔에 잠길이다. 아들이 돌아오면 그는 기쁨 가운데 있을 것이다(참조: 루카 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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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알고 있고, 알아야 하는 상식이나 사회적 잣대는 우리의 공통감각을 형성해주는 힘이기도 하지만, 때로 그것은 우리를 고정시키는 거푸집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반드시 이렇다는 기준은 우리 삶을 이끄는 지침이기도 하지만, 때로 그것은 우리를옭아매는 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는 재미는 제 스스로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사는 재미‘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그 재미로 두 활개를 치며 훨훨댕긴다는 거였습니다.

빛이 목적지에 도달하는 시간을 최소화했다고설명한다면 당신은 헵타포드(외계인)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완전히 다른 두 가지의 해석이다. / 물질 우주는 완벽하게 양의적인 문법을 가진 하나의 언어이다. 모든 물리적 사건은 완전히 상이한 두 방식으로 분석될 수 있는 하나의 언술에해당된다. 한 가지 방식은 인과적이고, 다른 방식은 목적론적이다. 두 가지 모두 타당하고, 한쪽에서 아무리 많은 문맥을 동원하더라도 다른 한쪽이 부적격 판정을 받는 일은 없다."
수학이나 물리학에서 통용되는 이런 인식은 철학자 니체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는 삶과 행위를 위해서 역사를 필요로 하지, 삶이나 행위를 편안하게 기피하기 위해서 또는 이기적인 삶이나 비겁하고 나쁜 행위를 미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역사가 삶에 봉사하는 만큼 우리도 역사에 봉사할 것이다. 삶에대한 역사의 공과‘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니체의 에세이 「반시대적 고찰 IⅡ」의 첫 페이지에 있는 문장입니다. 그는 역사를 읽는 세 가지 방식을 이야기합니다. 과거의 위대함을 기념하거나(기념비적 방식), 보존하고 존경하는 방식의 역사 인식(골동품적 방식)이 아니라, 현재를 비판적으로 재평가하기 위해 과거의 조건들을 평가함으로써 (비판적 방식) 삶에 봉사하는 역사를 강조합니
다.

그것은 거대한 공항 지붕의 무게를 받치는 기둥이었습니다.
작가는 그 강철 기둥을 바라보며,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모습을 이렇게 전해줍니다. 그 기둥은 모름지기 짐이란 이렇게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비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라는 거였습니다. 공항터미널의 기둥들은 자신들이 받는 압력은 거의 느끼지 않는 듯,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자신들의목 위에 400미터 길이, 1만 8,000톤의 거대한 지붕을 마치 아마포 차일을 사뿐하게 얹어놓은 듯한 모양새로 서 있었습니다. 알랭 드 보통은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우아함이라고 부르는, 아름다움의 하위 범주에 속하는 자질"이며, 그 앞에서 경외감마저 느꼈다고 말합니다. 또 그로부터 자신이 떠받치고 있는 무게감을드러내지 않는, 그리하여 자신이 극복하고 있는 어려움을 내세우고 싶어하지 않는 강철기둥의 겸손함도 보았다고 합니다.

배움이 없어서, 가난해서, 변변한 친정 식구가 없어서, 난쟁이 같은 추물이어서 그렇게 사는 건 아닙니다. 볼품없이 늙은아낙네, 막딸이‘는 자신의 삶을 기꺼이 짊어지고 하루하루 살아갔습니다. 거대한 지붕을 사뿐히 얹고 있는 강철기둥처럼, 천 근같은 삶의 무게를 얹은 채 살아갔습니다. 대단한 쾌거도, 놀라운사건도 없이, 과시하는 바도 없이 ‘모름지기 짐이란 이렇게 지고살아가야 한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삶이었습니다. 그러하니 그녀에게는 눈부시게 화려한 겉모습과는 상관없는, 삶의 당당함이 아로새겨져 있었던 겁니다.
문득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모습과 보이지않는 모습은 어떠할지 궁금해집니다. 저는 무엇을 얹고 살아가는지, 어떻게 얹어놓았는지 조심스럽게 들춰보고 싶습니다. 이제야 겨우 "인생에는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있다" 라는 말이 제게 와닿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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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장이 기울어지는 것은 합법적인 황제노역과 같은 유전무죄 무전유죄 사건들이지 결코 불법적인 사건들이 아니다.
불법적인 것들은 ‘법대로‘ 만 처리해도 얼마든지 제재할 수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제의 핵심은 그것이 불법적이냐 합법적이냐가 아니다. 일반 사람의 보편적인 상식에서 매우 어긋나고 황당한 일이 합법이라는 권위를 등에 업고 벌어질 때가 문제로,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서 운동장은 점점 기울어져왔다.

헌법적 지위를 가진 인간이라는 개념은 이해 관심(이익 또는해를 경험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우려나 불평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인식)을 가진 존재인가의 문제이다. 이해 관심은 의식을가진 존재여야 하고, 의식의 기본은 고통과 쾌락을 경험할 수있는 능력이다. (중략) 24주 이후는 신경망이 충분히 발달해서 고통과 쾌락을 경험하는 인간 존재로서 규범적 지위가 생긴다. 모(母)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태아에게 공격을 가한다.
면 국가가 개입해서 규제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처럼 24주 이전에는 가치의 문제이고, 이후는 규범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중략) 나는 이것이 인간 생명을 존중하는 태도라고보지 않는다‘ 는 가치의 주장이고, ‘태아는 헌법상 사람이다는 규범의 주장이다. 헌법은 규범을 다루는 문제이고 가치의관철이 어떤 형태로 국가에 의해 국가에 의해 허용될 수 있는지 제한하는 것이다.
‘법의 여신‘ 이 추구하는 공평과 평등은 ‘헌법적 지위를 가진 사람 에게 적용되며, 보편적인 인간적 가치를 실현하기위함이 아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인간적 가치를 지키고 옹호하는 보루 역할도 하지만 말이다.

인문학자는 가난한 이들에게 구원의 선물을 나눠주는 산타클로스도 아니고 그렇게 행동해서도 안 된다. 그의 앎이 그의 삶으로 증명되지 못한다면, 그의 말이 그의 행동으로 표현되지 못한다면, 인문학자는 ‘앓을 통해 삶을 바꾼다‘ 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서구에서 ‘professor(교수하다) 라는 말의 라틴어 어원(profiteor, professus sum; pro et fateor)은 무엇인가를 말하다‘, ‘선언하다‘, ‘고백하다‘ 라는 뜻을담고 있다. ‘교수한다‘ 라는 것은 단지 어떤 사실을 확인하는(constative) 말이 아니라, 행동을 인도하고 야기하는 말, 즉선언이나 고백처럼 수행적인(performative) 말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수(professeur)로서 배움의 장에서 말하는 자는말한 대로 살아야 하고 [그런 선언이고, 그 전에 ‘살아온대로 말해야 한다‘ [그런 고백이다.
인문학자의 경우에도 앎을 추구하는 것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인문학자는 결코 완성된 앎을 갖고
‘미완의 삶‘ 에 다가가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앞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삶을 생산하며, 삶의 과제를 앎의 과제로 떠안은 사람이다.

삶의 성장을 위한 교육이려면, 가르치는 사람은 배우는 사람과 함께 비에 젖고 바람에 흔들리며 자기 삶의 마디를 만들어 가고 스스로 성장하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결코 가르치는 사람의 뒤꿈치가 배우는 사람이 도달해야 할 삶의 종착점이 아니다. 사람을 교육한다는 것은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사람 모두 배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각자의 현재 삶보다 더깊고 성숙한 ‘저만치‘ 의 삶을 지향하고, 이를 위해 가르치는쪽은 사람과 세상에 관해, 그리고 그런 세상에서 꽃피울 인간다운 삶의 모습에 관해 보편적 관점에 서서 가르쳐야 하며,
이를 명심해야 한다.
가르치는 사람 중에 하수는 자기를 보라며 다그치고, 고수는 자기를 넘어서도록 격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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