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알고 있고, 알아야 하는 상식이나 사회적 잣대는 우리의 공통감각을 형성해주는 힘이기도 하지만, 때로 그것은 우리를 고정시키는 거푸집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반드시 이렇다는 기준은 우리 삶을 이끄는 지침이기도 하지만, 때로 그것은 우리를옭아매는 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는 재미는 제 스스로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사는 재미‘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그 재미로 두 활개를 치며 훨훨댕긴다는 거였습니다.
빛이 목적지에 도달하는 시간을 최소화했다고설명한다면 당신은 헵타포드(외계인)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완전히 다른 두 가지의 해석이다. / 물질 우주는 완벽하게 양의적인 문법을 가진 하나의 언어이다. 모든 물리적 사건은 완전히 상이한 두 방식으로 분석될 수 있는 하나의 언술에해당된다. 한 가지 방식은 인과적이고, 다른 방식은 목적론적이다. 두 가지 모두 타당하고, 한쪽에서 아무리 많은 문맥을 동원하더라도 다른 한쪽이 부적격 판정을 받는 일은 없다." 수학이나 물리학에서 통용되는 이런 인식은 철학자 니체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는 삶과 행위를 위해서 역사를 필요로 하지, 삶이나 행위를 편안하게 기피하기 위해서 또는 이기적인 삶이나 비겁하고 나쁜 행위를 미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역사가 삶에 봉사하는 만큼 우리도 역사에 봉사할 것이다. 삶에대한 역사의 공과‘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니체의 에세이 「반시대적 고찰 IⅡ」의 첫 페이지에 있는 문장입니다. 그는 역사를 읽는 세 가지 방식을 이야기합니다. 과거의 위대함을 기념하거나(기념비적 방식), 보존하고 존경하는 방식의 역사 인식(골동품적 방식)이 아니라, 현재를 비판적으로 재평가하기 위해 과거의 조건들을 평가함으로써 (비판적 방식) 삶에 봉사하는 역사를 강조합니 다.
그것은 거대한 공항 지붕의 무게를 받치는 기둥이었습니다. 작가는 그 강철 기둥을 바라보며,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모습을 이렇게 전해줍니다. 그 기둥은 모름지기 짐이란 이렇게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비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라는 거였습니다. 공항터미널의 기둥들은 자신들이 받는 압력은 거의 느끼지 않는 듯,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자신들의목 위에 400미터 길이, 1만 8,000톤의 거대한 지붕을 마치 아마포 차일을 사뿐하게 얹어놓은 듯한 모양새로 서 있었습니다. 알랭 드 보통은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우아함이라고 부르는, 아름다움의 하위 범주에 속하는 자질"이며, 그 앞에서 경외감마저 느꼈다고 말합니다. 또 그로부터 자신이 떠받치고 있는 무게감을드러내지 않는, 그리하여 자신이 극복하고 있는 어려움을 내세우고 싶어하지 않는 강철기둥의 겸손함도 보았다고 합니다.
배움이 없어서, 가난해서, 변변한 친정 식구가 없어서, 난쟁이 같은 추물이어서 그렇게 사는 건 아닙니다. 볼품없이 늙은아낙네, 막딸이‘는 자신의 삶을 기꺼이 짊어지고 하루하루 살아갔습니다. 거대한 지붕을 사뿐히 얹고 있는 강철기둥처럼, 천 근같은 삶의 무게를 얹은 채 살아갔습니다. 대단한 쾌거도, 놀라운사건도 없이, 과시하는 바도 없이 ‘모름지기 짐이란 이렇게 지고살아가야 한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삶이었습니다. 그러하니 그녀에게는 눈부시게 화려한 겉모습과는 상관없는, 삶의 당당함이 아로새겨져 있었던 겁니다. 문득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모습과 보이지않는 모습은 어떠할지 궁금해집니다. 저는 무엇을 얹고 살아가는지, 어떻게 얹어놓았는지 조심스럽게 들춰보고 싶습니다. 이제야 겨우 "인생에는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있다" 라는 말이 제게 와닿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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