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죄란 순수하게 사랑할 수 없는 나의 무능이다. 즉 상대방이 나에게 전부(이 단어의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일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원죄다. 삼위일체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향한 순수한 움직임이요, 아들은 아버지를 향한 순수한 움직임이고,
애가 어떤 형태를성령은 이 움직임의 상호성이요 역동성 자체인 것처럼, 그렇게 내가 상대방을 향한 순수한(엄정한 의미에서 순수) 움직임이지못하게 만드는 것이 원죄다.
다시 말해서, 나의 사랑을 표현함과 동시에 상대방에 대하여 나의 독립성을 강조할 수 있겠는가. 그런 태도는 명백히가능하지 않다. 사랑한다는 것은 종속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나는 세상 끝까지 당신을 따라갈것이다. 나는 당신에게 종속되고 싶다.
아무튼 모든 인간의 공동체에는 ‘나는 당신들에게 종속되기원한다.‘라는 암묵적인 말이 함축되어 있다. 왜 이 순간 그토록 많은 공동체가 생겨나고 그렇게 빨리 사라지는가? 이런 상호 종속의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적 사랑에서 사랑한다는 것이 종속되고자 하는 바람이라면, 사랑이 충만하게 체험되는 하느님에게는 얼마나 더 당연하겠는가?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를 잊지 말고, 사랑의 영역에서 떠나지 말고 생각해 보라. 하느님이 오직 사랑이실 뿐이라면 그분은 모든 존재 가운데 가장 종속적인 존재요, 무한한 종속성이신 것이다. 탕자의 아버지는 그의 아들에종속되어 있다. 아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는 슬픔에 잠길이다. 아들이 돌아오면 그는 기쁨 가운데 있을 것이다(참조: 루카 15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