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장이 기울어지는 것은 합법적인 황제노역과 같은 유전무죄 무전유죄 사건들이지 결코 불법적인 사건들이 아니다. 불법적인 것들은 ‘법대로‘ 만 처리해도 얼마든지 제재할 수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제의 핵심은 그것이 불법적이냐 합법적이냐가 아니다. 일반 사람의 보편적인 상식에서 매우 어긋나고 황당한 일이 합법이라는 권위를 등에 업고 벌어질 때가 문제로,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서 운동장은 점점 기울어져왔다.
헌법적 지위를 가진 인간이라는 개념은 이해 관심(이익 또는해를 경험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우려나 불평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인식)을 가진 존재인가의 문제이다. 이해 관심은 의식을가진 존재여야 하고, 의식의 기본은 고통과 쾌락을 경험할 수있는 능력이다. (중략) 24주 이후는 신경망이 충분히 발달해서 고통과 쾌락을 경험하는 인간 존재로서 규범적 지위가 생긴다. 모(母)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태아에게 공격을 가한다. 면 국가가 개입해서 규제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처럼 24주 이전에는 가치의 문제이고, 이후는 규범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중략) 나는 이것이 인간 생명을 존중하는 태도라고보지 않는다‘ 는 가치의 주장이고, ‘태아는 헌법상 사람이다는 규범의 주장이다. 헌법은 규범을 다루는 문제이고 가치의관철이 어떤 형태로 국가에 의해 국가에 의해 허용될 수 있는지 제한하는 것이다. ‘법의 여신‘ 이 추구하는 공평과 평등은 ‘헌법적 지위를 가진 사람 에게 적용되며, 보편적인 인간적 가치를 실현하기위함이 아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인간적 가치를 지키고 옹호하는 보루 역할도 하지만 말이다.
인문학자는 가난한 이들에게 구원의 선물을 나눠주는 산타클로스도 아니고 그렇게 행동해서도 안 된다. 그의 앎이 그의 삶으로 증명되지 못한다면, 그의 말이 그의 행동으로 표현되지 못한다면, 인문학자는 ‘앓을 통해 삶을 바꾼다‘ 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서구에서 ‘professor(교수하다) 라는 말의 라틴어 어원(profiteor, professus sum; pro et fateor)은 무엇인가를 말하다‘, ‘선언하다‘, ‘고백하다‘ 라는 뜻을담고 있다. ‘교수한다‘ 라는 것은 단지 어떤 사실을 확인하는(constative) 말이 아니라, 행동을 인도하고 야기하는 말, 즉선언이나 고백처럼 수행적인(performative) 말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수(professeur)로서 배움의 장에서 말하는 자는말한 대로 살아야 하고 [그런 선언이고, 그 전에 ‘살아온대로 말해야 한다‘ [그런 고백이다. 인문학자의 경우에도 앎을 추구하는 것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인문학자는 결코 완성된 앎을 갖고 ‘미완의 삶‘ 에 다가가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앞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삶을 생산하며, 삶의 과제를 앎의 과제로 떠안은 사람이다. 는
삶의 성장을 위한 교육이려면, 가르치는 사람은 배우는 사람과 함께 비에 젖고 바람에 흔들리며 자기 삶의 마디를 만들어 가고 스스로 성장하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결코 가르치는 사람의 뒤꿈치가 배우는 사람이 도달해야 할 삶의 종착점이 아니다. 사람을 교육한다는 것은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사람 모두 배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각자의 현재 삶보다 더깊고 성숙한 ‘저만치‘ 의 삶을 지향하고, 이를 위해 가르치는쪽은 사람과 세상에 관해, 그리고 그런 세상에서 꽃피울 인간다운 삶의 모습에 관해 보편적 관점에 서서 가르쳐야 하며, 이를 명심해야 한다. 가르치는 사람 중에 하수는 자기를 보라며 다그치고, 고수는 자기를 넘어서도록 격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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