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소음 한가운데서 그 심장 박동은 한결같다. 그리고 귀를기울이는 이에게는 그때보다 감지하기가 더 어렵지도 않다. 어쩌면참으로, 우리가 쓸데없는 것들로 더욱 시끄럽게 그 박동 소리를 압도할수록, 그 심장 박동은 더욱 고요하게, 더욱 끈질기게, 더욱 충실하게 자신을 알리고 있지 않을까.

하나는, 이 책이 삼위일체적 순환의 신비‘를 말하려는 것 같다는점이다. 모든 것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나와 하느님 아버지에게로돌아간다. 그분에게서 사랑이 샘물처럼 솟아 만물을 적시고 흐르며그분에게로 귀환한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되실 때까지 (1코린 15,28 참조). 그리고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가 있다. 성령 안에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심장이 세계의 중심이다. 온우주가 그분의 몸이다. 심장이 어찌 자기 몸을 돌보지 않거나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이 생명의 흐름과 순환을 가로막고 차단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세속성에 대한 풍자와 준엄한 비판도 이 책에서 찾을 수 있다.

또 하나는, 이 책이 ‘모순의 신비‘에 대해 곳곳에서 거듭하여 말한다는 점이다. 이 모순의 신비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 아들 안에서신성과 인성이 결합함으로써(위격적 일치) 이로부터 귀결되는 본질적 특성으로, 예수님의 생과 수난, 부활의 전 생애를 관통한다. 곧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크신 분"(안셀모 성인이 "그보다 더작은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작은 분이 되심으로써, 하느님 아들 안에서 양극단이 곧 무한과 한계, 낮춤과 높임, 권능과 무능, 강함과 약함, 충만과 공허, 하느님 가까이 하느님 멀리가 온전히 매개되고견지되며 무한히 초월된다. 이러한 모순의 일치는 그리스도 안에서남김없이 드러난 하느님의 절대적 사랑 안에서만 가능하다.

여기에 인간 존재가 지닌 ‘모순‘이 있다. 우리는 무한자이신 하느님을 향해 창조되었지만, 그분이 아니라면 한순간도 유지될 수없는 존재이다. 또한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라면, 우리는 결코 그분께 도달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런 역설적 존재인 인간에게 발타사르는 ‘시간‘이 지닌 가능성에 주목하도록 초대한다. 우리가 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하느님의부르심에, 은총 작용에 응답하는가에 따라, 인간의 유한함은 하느님의 무한함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된다. 따라서
‘시간‘은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건네는 중요한 장이 아닐 수 없다. 발타사르는 인간이 무한으로 나아가기 위한 비결로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세와 우리 자신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자세, 그리고사랑을 꼽았다. 더 나아가, 그는 하느님 곁에서 죽고 부활할 때, 비로소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다고 전한다. 그렇게 "시간의 비밀스러운 강물에 우리의 몸을 씻을 때" 우리는 무한을 향한 구원의 길로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보라. 둥둥 떠다니며 흔들거리는 것, 신비로이 유동하는것이 있으니, 그것은 시간이다. 이편에서 저편으로 가는 보이지 않는 작은 배. 이것에서 저것마다 노 저어 가는 여정. 시간 속으로오르자마자 배는 이미 너를 싣고 출발하고, 너는 어떻게 그러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네 아래 단단한 바닥은 이미 출렁이며요동치고, 가혹한 물길은 굽이치며 솟구친다. 잘도 휘감아 도는 강물처럼 굽이굽이 흐르기 시작한다. 강기슭이 번갈아 나타나고, 곧이어 배는 숲들을 가로질러 가며 너를 뒤흔든다. 너른 들판들과 인간의 도시들을 연이어 지난다. 물결은 그 자체로 변화무쌍하고 변덕스럽다. 부드럽게 살랑이다가도 금세 성난 폭포처럼 변한다.

시간은 은총처럼 충분히 길다. 시간의은총에 너를 맡겨라. 너는 시간을 끊어 내고 그것을 움켜잡아 어디에든 저장할 수 없다. 그러니 시간이 흐르도록, 달려가도록 두어라.
너는 어떻게든 그것을 붙잡을 수 없다. 아름다운 화음에 쓸어 담아단번에 영원히 소유할 수 없다. 인내는 듣고자 하는 이의 첫 덕성이다. 그리고 둘째 덕성은 내려놓음이다. 보라, 마지막 음이 다 울리기전에는 네가 멜로디의 진동을 앞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멜로디가 다 울린 다음, 그제야 너는 감추어진 무게와 긴장의 굴곡들과 간격의 굽이들을 조망할 수 있다. 귓속으로 들어간 것이 비로소마음속으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아니 더욱 그렇게 네가 감각의 다양성 안에서 감각적으로 경험하지 못하면, 보이지 않는 정신의 일체성 안에서도 파악하지 못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온 힘을 다해 허리를 짚고 구부려 뻗어 올리고자 하는 다리를 보면 이여인 역시 이 짐이 가볍지만은 않아 보입니다. 그럼에도 그녀의 표정에서는 ‘산다는 것이 뭐 대순 겨, 짐이란 게 그저 지면 되는 것이제!‘ 뭐 이런 것들이 느껴집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평온하고도 따스하며 유머러스하기까지 한 저 표정은 등 위의 올려진 짐과 함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묘한 감동이 솟아나게 합니다. 저 표정에서는 짐짓 도사인 척하는 허풍이나 무게를 감당함에서 오는 지나친 경직, 위엄 같은 것은 찾아볼수없습니다. 마치 가벼운 보따리 하나 들어 올리듯, 늘 해야 할 일상의 일을 하는 듯…

제가 소속된 트라피스트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성 베네딕도는 같은 내용을 다른 말로 표현합니다. 그는 수도생활에나아감에 따라 짐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넓어져 같은 생활을사랑의 감미로 달려가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짐을 진 사람이 달려간다는 것이지요 그것도 사랑의 달콤함으로 바로 이 여인에게서 느껴지는 모습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화의 마지막에 원작자폴볼스(Paul Bowles)가 등장해나지막이 이런 말을 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지 못하고, 인생을 마르지않는 샘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은 고작 몇 차례 일어날까 말까다. 자신의 삶을 좌우했다고 생각할 정도로소중한 어린 시절의 기억조차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떠올릴수 있을지 모른다. 많아야 네다섯 번 정도겠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보름달을 바라볼 수 있을까? 기껏해야 스무 번 정도아닐까. 그러나 사람들은 기회가 무한하다고 여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 - 최진석의 자전적 철학 이야기
최진석 지음 / 북루덴스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생은 판에 박힌 되풀이와 놀라움이라는 이중구조를 취한다.‘
‘시간은 희한한 우군이 되었다. 우리를 죽이지 않고 떠받친다… 과수원 같기도 하고 사막 같기도하다.‘
‘생이 짧으면 치열하게 살 이유가 생긴다… 이것이카운트다운의 이점이다.‘

50이라는 좌표는 하나의 이정표예요. 은총과 붕괴사이에서 파도를 타는 나이죠. 더 높은 것을 꿈꾸고, 더 멀리 뛸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건강한 상태지만, 노화의 첫 징후도 나타나죠. 더는 젊지도, 그렇다고 엄청나게 늙지도 않은 무중력의 ‘정지상태‘를 경험하게 됩니다.
특이한 건 50세가 되면 인생이 정말 짧아지기 시작합니다.
오십이 넘었다면 당신은 이미 사랑, 가족, 직업 등에서 많은의무를 치뤘고 시니어로 불릴 겁니다. 그때 이런 의문이 고개를 들어요. 앞으로 내가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을까, 여전히또 다른 변화를 꿈꿀 수 있을까.
다행히 50 이후에도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30여 년이 더 있습니다. 남은 시간을 얼마나 잘 사용할까? 그것은 각자에게 위대한 과제고, 그래서 우리는 단지 늙어가는 것만으로자기 인생의 철학자가 되죠. 적어도 50년은 지나야 되어야 했던 모습‘에서 벗어나 홀가분한 생이 자기 앞에 펼쳐집니다.

‘노년‘이라는 주제 자체가 대단한 힘과 매력을갖고 있어요. 중요한 건 내가 어떤 단어를 첫 번째로 쓸 것인가였어요. ‘포기를 포기하라!‘ 첫 단어를 골라서 쓰는 그 순간, 글 전체의 톤이 정해지죠. ‘늙음‘을 보는 시선이 서정적일지, 논쟁적일지, 그 사이 어디쯤일지. 좋은 아이디어란 마치 식탁보의 실과 같아요. 실 하나를 당기면 식탁보 전체의올이 풀리죠.

‘우리는 상처받았지만 충만했고, 악몽을 관통했고 보물을 받았다. 당연히 받았어야 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터무니없는 은총이 감사하다...‘ 엔딩 문장이 감동적이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못 말리게 시끄럽고, 참을 수 없이 웃긴 철학책 -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법
스콧 허쇼비츠 지음, 안진이 옮김 / 어크로스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키우던 고양이 플러피에게 벼룩이 생겼는데, 만 네 살이었던 딸 세라가 플러피에게 어떻게 벼룩이 생겼느냐고 물었다. "
"벼룩이 다른 고양이의 몸에 붙어 있다가 펄쩍 뛰어서 플러피에게 왔을 거야." 매슈스가 대답했다.
"그 고양이한테는 어떻게 벼룩이 생겼는데?" 세라가 물었다.
"또 다른 고양이한테서 왔겠지." 매슈스가 대답했다.
"그런데 아빠." 세라가 자기주장을 펼쳤다. "계속 그런 식으로 대답할 수는 없어. 끝없이 계속되는 건 숫자밖에 없단 말이야!"
당시 매슈스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우주론적 논증cosmolog-ical argument에 관한 강의를 하고 있었다. 우주론적 논증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는 아주 복잡한 것도 있다. 하지만 기본 구조는간단하다.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다. 하지만 그 인과관계를 끝없이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 따라서 ‘제일 원인 first cause‘은 반드시 있어야 하며, 그 제일 원인에는 어떤 원인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그 제일 원인이 신이라고 주장한다. 그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토마스 아퀴나스였다.

철학자는 "그런데 시간이란 무엇일까?"라고 묻는다. 다른 어른들은 별생각 없이 자신은 그런 걸 궁금해할 시기가 한참 지났다고 단정한다. 다른 어른들은 이번 주에 장을 보러 가거나 신문을 사러 갈 시간이 있는지는 궁금해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지금 몇 시인지를 알고 싶어 하지만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생각은 안 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점을 멋지게 표현했다. "그렇다면 시간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나에게 그걸 묻지 않을 때는 나는 그걸 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질문을 해서 내가 설명하려고 하면 말문이 막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