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들 사이에서만 거둘 수 있는 것이 있다. 경계에서 사는 삶은 고단하지만, 경계에서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낯선 언어가 익숙한 세계를 휘젓는 철학적 순간을 만나는 것은 고단한 경계인이 얻는 축복이다. 그 축복을 나누고 싶었다. 쓰면서 가장 많이 생각한 것은 방향이다. 이들은 어느 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지, 우리는 어느쪽을 향해 걷고 있는지. 언어란 오랜 시간에 걸쳐 한사회의 구성원이 함께 빚어낸 작품이고, 단어는 그 작품의 중요한 기본 재료다.

파이어아벤트 Feierabend‘는 하루 일을 마감할 때 쓰는 명사다. 축제나 파티의 의미가 담긴 파이어 Feier와 저녁이라는 뜻의 아벤트Abend가 합쳐진 말이다. 일을 마칠 때 사람들은 먼지 묻은 손을 툭툭 털면서, 혹은 사무실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Feierabend! (파이어아벤트!)"라고 외치고, 동료들은 서로에게 ‘수고했어, 잘 쉬어!‘라는 의미로
"Schönen Feierabend! (쇠넨 파이어아벤트!)"라는 인사를 건넨다

훈색이라는 이름의 색이 있다. 노을이 질 때 하늘에 보이는, 분홍에 노랑이 섞인 색이다. 색이름에 저런 따뜻하고 훈훈해 보이는 글자를 넣은 이유도 아마 비슷한 감각이 아닐까. 그동안 좋아하는 색을 묻는 질문에 소녀 시절갈색에서 시작해서 지금껏 팔레트 하나를 다 돌았는데,
내가 요즘 가장 좋아하는 색은 훈색이다." 저물녘에 세상만사를 포근하고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는 색, 인격이있다면 아마도 가장 다정할 것 같은 색.

Servus, 제르부스라는 인사말은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같은 성서 속 표현에서 기원을 찾는다. 비슷하게 서로에게 "I‘m your servant", 즉 "저는 당신의 종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내 앞에 있는 너를 마치 신처럼 여기고나를 낮추겠다는 마음이 지금까지 남아 전해진다는 사실은 참 뭉클하다. 특히 전국 노래자랑에 버금가는 전국 갑질 자랑으로 도배된 사회면 뉴스에 지친 마음에는 더더욱 그렇다. 우리 모두는 갑이 되길 바란다. 을, 병, 정도 모자라 무기경신임계까지 물고 물리는 사슬에서 어떻게 하면 나를 조금 더 앞쪽에 놓을 수 있을지 고민한다. 만만해 보이는 사람 앞에 서면 자동적으로 가슴이 펴지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며 고개가 치켜올라가 거북목이 교정되는 것이다. 특히 서비스 직종에 있는 분들에게 유독 무례하게 굴어 사회적 이슈가 되고 공분을 사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당신의 종입니다. 제가 당신을 섬기고 살필게요"라고 말하는 인사는 특별하게 느껴진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지금은 활짝 웃으며 온마음으로 쓰는 인사다.

gefallen 이라는 동사도 휘도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휘도라는 개념을 떠올리면 보이지 않는 수많은 빛의 굴절속에 서 있는 느낌이 든다. 나라는 존재와 우리 인생 자체가 이렇게 무수한 굴절을 통해 닿아오는 관계 속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gefallen 은 우리가 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관한 아름다운 동사다. 인간이란 나 혼자 빛날 수 없고, 애초에 빛이란 건 내 안에 있지 않다. 내가 당신을 통해서 존재한다는 것. 주체와 객체라는 조금은 차가운 관계를 이렇게 한 번 빛처럼 꺾어보는 일. 세상의 모든 문장이 ‘나는‘으로 시작하지는 않는다는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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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림이 나를 기쁘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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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이 당신 마음에 드나요?

펼쳐진 자연 속에 인간은 개미만 한 모습으로 등장하곤한다. 겸재 정선이 박연폭포를 그린 그림에서 작고 귀여운 조상님들을 한번 찾아보시길. 그렇게 기본적으로 세상에 놓인 자아의 사이즈가 작다. 게다가 큰 범주에서 작은 범주로 가는 사고방식에다 장유유서長幼有序라는 윤리도 결합해 두었다. 큰 것부터, 어른 먼저... 그래서인지나를 뒤로 물리고 공동체를 위해야 한다는 생각, 나이라는숫자를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 대를 위해서는 소를 희생해야 한다는 사고 같은 것들이 어느 정도는 자연스럽다.

반면에 이곳 독일에서는 나를 중심에 놓고 세상을 배치한다. 내가 중심이고 주변부는 뒤로 간다. 나와 가장 가까운 것부터 셈하고 작은 단위부터 신경 쓴다. 나이 차이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지만 어린 사람을 중요하게 챙긴다.

그렇기에 근무시간 외의 업무 전화가 그렇게 자연스러웠던 것이고, 밥을 먹다가도 업무상 중요한 전화가오면 (애초에 거는 사람이 문제다) 뛰쳐나가 받았던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한국에 거주하는 독일인들이 무척 의아해하는 부분이 바로 친구 사이에 약속을 자주 취소한다는 점이다. 작은 나의 일상이 큰 힘에 의해 통제받는 위계적인 사회에서는 나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일이 늘 벌어지기 때문에, 사적인 약속이 뒤로 밀려나는 경우가 잦다.
참이든 아니든 사람들은 ‘보다 중요한 이유를 들어 약속을 취소한다. 자신을 중심에 두는, 특히 주체적인 자아를중시하는 사고방식의 독일인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울것이다. 스스로 맺은 약속을 저렇게 쉽게 철회하다니.

한편 긴 인생을 위한 짧은 일어 책을 쓴 김미소 작가의 눈에는 ‘격리‘와 ‘요양‘의 차이가 보였다고 한다. 코로나 시기 한국에서는 공공기관에서 ‘격리‘라는 단어를 주로 썼는데, 일본에서 확진되어 안내문을 받았더니 ‘요양‘
이라는 단어가 보였다고. 우리가 세상에 스스로를 어떤순서로 놓고, 우리 사회가 어느 쪽을 바라보며 사는지 실감케 하는 단어들이다. 동양이라는 한 단어로 게으르게뭉쳐놓기에는, 동양 사회 안에도 무척이나 다양한 관점과 목소리가 있음을 알려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잊을 수 없는 증인』에 유대인 랍비 부남 Bunam의 말을인용한다.
"모든 사람은 두 개의 돌을 갖고 있어야 한다. 때에 따라 필요한 대로 선택할 수 있도록. 오른쪽 돌에는 ‘세상은 나를 위하여 창조되었다‘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왼쪽 돌에는 ‘나는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새겨져 있다.""
나는 우주이기도 하고 먼지이기도 한 존재다. 그때그때 주머니에서 적절한 돌을 만지작거리며 사는 지혜가필요하다. 왼쪽 주머니의 돌이 지나치게 무거워져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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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춤추는 별을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은 자신들 속에 혼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대낮에는 별들이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기존의 가치들을 대낮처럼 환한 진리라고 믿는 사람은 어떤 별도 발견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그 결과로 생겨나는 혼돈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우리는 제 안에서 춤추는 별을 찾게 된다.

정해진 궤도에서 이탈하는 삶은 불행할 거라는 협박에 굴하지 말고, 혼돈을 기꺼이맛보며 천천히 네 자신이 되어라. 남이나 스스로에게 자신의 성과를 증명하려고 서두르지 마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다만 나 자신을 기다리는 것을 배웠을 뿐이다."점점 조급해지고 불안해지는 우리를 향한 그의 다정한전언이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멘토는 멀리서 거룩한 지혜의오라를 뿜어내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멀지 않은 거리에서같은 곳을 탐험하는 동료 대원이다. 그러니 젊은 시인의 가장 좋은 멘토는 젊은 시인이 아니겠는가. "젊은이들에게 해주실 조언이 있다면?" 노작가 마거릿 애트우드는 에세이집『타오르는 질문들』에서 이 질문을 싫어한다고 말한다. "집사가 고양이에게 하는 충고가 아무리 유용해도(저 아랫집 덩치큰 수고양이는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 고양이는 듣지 않는다. 고양이는 자기 마음만을 따른다. 왜냐하면 고양이는 원래 그러니까. 젊은이들도 마찬가지다."

물론 젊은이들이 구체적으로뭔가 듣기를 원할 때는 예외라고 덧붙인다. 그렇지 않을 땐아무리 유용한 조언을 해도 참견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그것을 위세와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럼 지혜로운노인은 뭘 하지? 충고나 조언이 아니라 축복을! 그래서 애트우드는 『햄릿』에 등장하는 폴로니어스의 대사를 빌려 모험을 막 시작하는 젊은이들에게 외친다. "잘 가거라. 내 축복이안에서 피어나기를."

네덜란드 학생에게 부탁해서 교재의 프랑스어를 먼저 읽게 하고 다른 학생들은그것을 네덜란드어 번역과 스스로 대조해가면서 반복하여쓰고 외우게 했다.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자구책이었지만,
놀랍게도 한 학기가 지나자 프랑스어를 전혀 몰랐던 학생들이 문법 규칙을 이해하고 프랑스어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통념대로라면 교사는 설명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설명 한마디 없이 학생들이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니! 자코토는 새로 발견한 교육법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낯선 것을 연관시키고 기억력을 발휘하는 것만으로도 외국어를 배울 수 있다면 다른 것들을 배우는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는 같은 방식으로 학생들에게 문학, 그림, 수학, 히브리어, 아랍어 등도 가르쳤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이제 새로 발견한 방법으로 가정교사를 두거나 학비가 비싼학교에 갈 수 없는 가난한 아이들도 충분히 배울 수 있다는생각이 들자 그는 몹시 행복해졌다. 이 방법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는 교육법이라는 뜻에서 ‘보편 교육‘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랑시에르는 자코토의 사상에 감동받아 『무지한 스승을 썼다. 그가 특히 주목한 것은 보편 교육이 전제하는 교사와 학생 사이의 ‘지적 평등‘의 원리였다. 학생이 교사의 설명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면 늘 교사보다 지적으로 열등한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기들은 교사 없이도 모국어를배우지 않는가.

설명할 때만, 그리고 설명해준 것만 아는 사람은 설명자에 예속된 존재이다. 혼자서 자신의 고유한 방식과 자신에게 맞는 속도로 배울 수 있을 때 그는 자유로워질수 있다. 좋은 교사는 유식한 자가 아니라 해방된 자를 만드는 교사이다.

가령 시를 가르칠 때 교사는 학생들이 시에 대해 자유롭게 말하고 그 대화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야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전문가의 시 해석을 미리 알려주지 않는 사람, 학생이 시에서 읽어낼 의미를 앞서 정하지 않는 사람, 그래서 학생이 배우게 될 어떤 것에 무지한 사람,다시 말해 무지한 스승으로 남아야 한다.

그는 학생이 주의를 기울여 알아낸 것이 무엇인지 계속 물어봐주고 학생의말에 경청하기 위해서 곁에 머물 뿐이다. 랑시에르는 이것을예술가의 ‘해방하는 수업‘이라고 부른다. 평등이 필요한 것은 시인과 독자도 마찬가지이다. 시인은 독자들이 제삼자의설명 없이도 작품에 공감하고 자신들의 고유한 시선으로 그것을 읽어주길 기대한다. 시인 자신이 누군가의 설명 없이사물과 직접 만나며 배운 것을 작품으로 썼듯이 말이다.

그런데도 난 시를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을떨칠 수 없다면, 자코토의 말대로 해보라. "배우라, 되풀이하라, 모방하라, 번역하라, 문장을 뜯어보라, 다시 붙여보라."
그렇게까지 할 마음은 없다고 당신은 말할지도 모른다. 바로그것이다. 여기서 ‘나는 못 하오‘는 ‘나는 하고 싶지 않소.
이런 수고를 내가 왜 하오?"를 뜻할 뿐이다. 그런 마음이라면 시집은 덮어도 된다

다만 당신이 정말 원하는 것을 배우려 할 때 이 무능력(나는 할 수 없다. 나는 이해를 잘 못 한다)이라는 속임수를 마음에서 떨쳐내라. "이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이야기할 것만 있다." 이제, 용기를 가지고 그 이야기를 시작하라.

"오빠가 죽었을 때 나는 책의 형식으로 그를 위한 묘비명을 만들었다." 라틴어로 밤을 뜻하는 ‘녹스Nox‘라는 제목이 달린 회색 책. 저자 앤 카슨이 고인의 사진과 편지, 우표를 붙이고 메모를 해뒀던 작은 수첩은 아코디언의 주름처럼이어진 192페이지의 독특한 책으로 재탄생했다.
앤의 오빠 마이클은 청년기에 여자친구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집을 떠났다. 그는 바다 건너 덴마크로 가서 이름을 바꾸고 가족들은 모르는 삶을 살았다. 간혹 엽서나 편지를 보내지만 주소를 알려주지 않는 아들에게 엄마는 편지를쓴다. "여러 해 동안 한 번이라도 크리스마스에 소포를 부칠수 있게 네 주소를 얻었으면 좋겠다." 부치지 못한 답장 속에 쓰인 이 말은 엄마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하지만, 마이클역시 죽은 여자친구에게 똑같은 말로 끊임없이 간청했을 것이다. 주소를 적지 않음으로써 마이클은 엄마에게 자신이 겪는 고통을 말없이 전한다. ‘엄마, 걔가 있는 곳의 주소를 알수 없어요. 한 번만이라도 그 애에게 무언가 보낼 수 있다면......이라고 고백이라도 하듯이. 엄마는 돌아가실 때까지오빠의 주소를 알지 못해, 그를 죽은 사람처럼 그리워하며살았다. 이 몹쓸 오빠.

22년 뒤, 오빠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부인은 누이 앤의 연락처를 2주 동안 찾지 못했다. "내가 현관을 쓸고 사과를 사고 저녁에 라디오를 켜고 창가에 앉아 있는 동안, 그의 죽음은 바다를 건너 나를 향해 천천히 유랑하며 왔다"고 앤은 적는다. 형제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자신이아무것도 모른 채 웃고 떠들며 평온한 일상을 누리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자책이 담겨 있다. 그녀는 소식을 듣고 급히 덴마크로 향했지만 장례가 끝나고 유해는 바다에 뿌려진뒤였다. 그녀는 자신이 제때에 도착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어디론가 항해하는 사람들처럼 그리고 정해진 장소에서 일정한 때에 수행해야 하는 제의들이 있었다. 그러나그것은 중지되었고, 우리는 아무것도 제대로 되게 할 수 없었고."
한나 아렌트는 "한 아이가 태어났다"는 말은 일종의복음이라고 말한다. 신의 아들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아이는 이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하며 태어난다는 것이다. 아이를 기다렸던 사람들이 달려와 그의 탄생을 경배한다. 누군가의 아이가 이 세상을 떠날 때도 마찬가지다. 그를알던 사람들이 달려와 그가 세상에 없다는 사실에 애통해한다. 그래서 ‘그가 아무도 반기지 않은 채 태어나, 슬퍼하는이 하나 없이 떠났다‘는 말은 불행한 인생을 뜻하는 가장 흔하지만 진실한 표현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사랑하는 이의죽음을 세상에 알리고 그와 작별하는 제의에 정성을 다한다.

앤 카슨은 제의의 형식은 그저 관습일 뿐이라는 헤로도토스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느 옛사람이 그리스인 몇 명에게 얼마만큼의 돈이라면 죽은 부모를먹겠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아무리 많은 돈이라도 그런짓은 하지 않겠노라고 화를 냈다. 자기 부모를 먹는 풍습을가진 인도인들에게도 물었다. 얼마면 죽은 아비를 불에 태우겠느냐고. 그러자 그들은 고함을 치며 신성모독적인 말을 그치라고 했다. 이처럼 ‘관습은 모든 것의 왕‘이어서 우리는 감당하기 힘든 슬픔을 겪을 때 관습의 도움을 받는다. 앤은 자신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두 분을 먹는 대신 화장 관습을 선택했으며, 두 분의 이름을 새긴 돌 아래 재를 묻었다.
그렇지만 오빠를 위해서는 제의를 선택할 수 없었고, 그 사실은 그녀에게 큰 고통을 주었다. 그래서 형제를 잃은 로마시인 카툴루스의 비가를 번역해 책을 만드는 방식으로 지연되었던 제의를 치르기로 했다.

관습이나 종교에 따라서든, 혹은 책을 만드는 방식으로든, 우리가 애도를 위해 선택하는 모든 제의의 핵심은 이것이다. 사랑하는 이가 떠났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 얼굴을 떠올리며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다른 이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고인이 살았던 삶의 역사를 세상에 알리며 그와 정중히, 그리고 천천히 작별하는 것.

사회적 제의가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핵심이전부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위패도 사진도 없는 분향소에서 우리는 고인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하지 못하고 듣지 못한 채 누군지도 모르는 고인을 애도하고 추모했다. 세상을떠난 당신이 누구였는지 알고 기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바로 그 제의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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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자 세이버다. 피자를 배달시켜본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다.
피자 중앙에 다소곳이 꽂혀 있는 플라스틱 삼발이다. 무심코버리는 물건이지만, 이름만큼은 굉장하다. 삼발이 탁자 같은생김새 때문에 ‘피자 테이블‘로 불리기도 한다. 피자 스택, 피자오토만, 피자 니플 등 별칭도 있지만, 널리 쓰이는 편은 아니다.

피스라는 단어에는 ‘골자‘, ‘핵심‘이란 뜻도 있다. 식감과 맛을 해치는 불필요한 부분이라고 여겨 떼 버리는 귤락에 귤의 영양소가꽤 많이 포함돼 있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우리가 문제의 핵심을 놓치는 것과 귤락을 버리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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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기억하는 일을 통해 이 여성은 자기 삶의 폐허 같던 장면에서 살아갈 용기와 싸울 힘을 얻은 것이다. 기억은 "일종의 갱신/심지어 어떤 시작, 그것이 여는 공간은 새로운/ 장소이므로"(「일요일 공원에서」). 시 쓰기를 통해 삶은 늘 새롭게 기억되어야 한다. 시인이란 그렇게 믿는 존재이다.

그러나 평범한 이들에게는 종교적 태도란 두가지 모두를 뜻한다. 신성해진다는 것은 다른 존재를 위해사랑을 흘러넘치게 표현하는 일인 동시에 타자를 위해 물러서며 자신을 한껏 움츠리는 일이다.

뒤로 물러서 있기땅에 몸을 대고남에게그림자 드리우지 않기남들의 그림자 속에서빛나기ㅡ엉겅퀴 전문 ( 라이너쿤체)

인간은 실패하려고 태어난 ‘훼손된 피조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뮈 덕분에, 우리는 어려운 싸움을 계속이어가는 이들을 어리석다고 말하는 대신 위대한 용기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우리가 진정 사랑하는 이들은 승리하는 이들이 아니라 진실과 인간적 품위를 지키기위해 어쩌면 패배할지도 모를 싸움을 시작하는 이들이라는것도 알게 되었다.

영원에 이르는 은총이 우리에게서 멀기만 한 것은 아니다. 계속되는 사회적 참사들을 겪으며 우리는 ‘지켜주지못해 미안해‘라는 말을 수없이 되뇌었다. 사랑하는 이를 지키는 것이 진정한 사랑 아닌가…………. 친지들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조차 부끄러워하며 자책하지만, 베유라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사랑은 사랑하는 이를 지키는 게 아니라 사랑을지키는 겁니다.‘ 인간의 사랑은 보잘것없다. 사랑하는 이를지키고 싶어도 세계의 난폭함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무력해지기 때문이다

베유는 부재하는 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멈추지 않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죽은 이들에대한 경애심. 존재하지 않는 것을 위해 뭐든지 하기"는 인간을 운명의 중력에서 뜯어내어 영원 속으로 들어 올리는 사랑이다. 사랑을 지키는 사람은 승리에 대한 상상 없이, 미래의보상을 구하지 않고 전투에서 목숨을 거는 병사와 같다. 또한 사랑은 무차별적이어야 한다. 『일리아스 또는힘의 시에서 베유는 죽어가는 모든 가여운 것에 대해 애정을 보였던 호메로스야말로 가장 진실한 작가라고 평가한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읽으면서 작가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추측하기는 힘들다. 트로이 병사들이 그리스인의 창과 칼에 죽어갈 때도 기뻐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햇빛처럼 모든 사람에게 관여하는, 슬픔으로 인해 (…) 『일리아스』의 음조는 슬픔에 젖어 있지 않을 때가 없다. 이 슬픔 속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승자와 패자를 모두 사물로 만들어버리는 강력하고 몰개성적인 힘이다. 그 힘의 노예가 되는것은 패자뿐이 아니다. 점령지에서 지나가는 소녀를 사격하고 나서 쓰러진 시신 옆에서 한가로이 커피를 마시는 병사는 승리한 ‘사물‘이다. 살려달라는 말이 물질에 전해지지 않듯이 병사에게도 전해지지 않는다. 눈앞에서 끝없이 목격되는 고통을 회피하려고 병사에게서 그의 정신이 이미 도망쳐버렸기에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물이 되었다.

그들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는 방법‘을 선택할수도 있다. 방금 내 앞에 끼어든 자동차는 심하게 다친 아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달려가는 중일지도 모른다. 나보다 훨씬 급하고 위중한 상황에 놓인 것이다. 또 슈퍼마켓에서 모든 사람의 짜증을 돋우며 아이에게 악을 쓰던, 멍한 눈에 짙은 화장을 한 여자를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가능하다.
그녀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남편이 누워 있는 병실에서 사흘 밤을 지새우다 아이에게 먹일 간편음식을 사러 나왔는지도 모른다. 물론 내가 처음 생각했던 대로 끼어든 자동차의주인은 얌체족이고 대형 슈퍼의 그 여자는 배려심 없이 제기분대로 행동하는 무례한 사람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나의 욕구가 가장 우선적으로 배려받아야 한다는 본능에 나의 사고가 굴복한 것일 수도 있다. "교통마비와 붐비는 상점통로, 계산대 앞의 기나긴 줄 (...) 나의 태생적인 디폴트세팅

예민성은 "무언가가 관심의 흐름 안으로 헤엄쳐 들어왔을 때 그것에 대해 떠올린 것을 얼마나 꼼꼼하게 옮겨 적을 수 있느냐의 문제다.

‘사진에 관한 노트‘라는 부제가 붙은 『밝은 방』은 바르트의 마지막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사진의 두 요소,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functum을 구분한다. 도로를 순찰하는 무장군인들 사이로 수녀들이 지나가는 사진을 본다고 하자. 사진작가는 폭력적인 삶과 신성하고 평화로운 삶의 대비를 의도했을 테고 우리는 그 의도에 반응하며 전쟁이 끝나기를기원한다. "도덕적·정치적 교양이라는 합리적 중계"를 거친반응이다. 이처럼 우리를 건전한 시민으로서 반응하게 만드는 요소가 스투디움이다.

이와 달리 남들은 무심코 지나치는 세부 사항이 말을걸며 나만 아는 기억 속으로 나를 데려가는 경우가 있다. 사진의 한 부분에서 "마치 화살처럼" 날아와 나를 꿰뚫고 내마음을 물들이는 요소가 푼크툼이다. 이 하찮은 세부 사항때문에 우리는 어떤 사진을 사랑하게 된다. "한 장의 사진을 사랑할 때 또는 그 사진이 나를 어지럽힐 때 나는 그것 때문에 머뭇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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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릴케는 노래했다. "오 신이여, 우리에게 저마다의 고유한 죽음을 주소서." 하이데거는 릴케가 시적으로 표현한 것을 자신은 철학적 사유로 반복한다고 말했을 정도로릴케의 열혈 독자였다. 시인이 말한 ‘저마다의 고유한 죽음‘
을 철학자는 이렇게 풀어낸다. 우리가 아무리 세인의 방식을 따라 산다고 해도 죽음만큼은 타인이 대신 겪어줄 수 없는 사건이다. 물론 사고 현장의 의인, 재난 현장에서 아이를지키려는 엄마처럼 누군가는 다른 사람을 위해 죽기도 한다.

이탈리아 철학자 비르노에 따르면 하이데거의 이 구분법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대상 없는 불안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두려움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세계가 불확실하고 미결정적인 것으로 남아 있을 때 사람들은 불안을느낀다. 우리는 이 기분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특정 대상을위험한 것으로 지정해서 모호한 고통을 확실한 고통으로 바꿔버린다. 명확한 경계의 대상이 생기는 순간 그것만 제거하면 세계는 다시 확실하고 안전한 곳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들이 범죄를 저지를까 두려워. 저 동양인은 걸어 다니는 바이러스야. 이처럼 두려움의 대상을 고안하고 이들만 사라지면 사회가 안전하고 건강해질 거라는 감정적 방어 책을 만들어 내면서 타인에 대한 잔혹한 반응을 정당화 하게 된다

인류 역사에 등장했던 각종 학살은 대부분 불안 회피용 방어책의 결과였다. 그런데 이 심오한 통찰은 정작 통찰을 제공했던 철학자에게서는 망각된 것 같다. 하이데거는 유대인들을 기술 진보에 앞장서며 현대인의 자기소외를 만들어내는 범죄행위의 주범으로 지목했다. 기술문명이 주는 막연한 불안을 유대인이라는 두려움의 대상을 고안함으로써해소하려 한 것이다. 그는 고향과 같은 대지를 만들기 위해나치즘에 동조했고 유대인 학살에는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하이데거의 출석부에 적힌 이름의 주인들은 자신들이 가장존경하고 사랑했던 선생의 입을 통해 세상에서 추방될 처지가 되고 말았다. 하이데거 이후의 현대철학은 이 젊은이들이깊은 고통과 환멸에서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절망적인노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나의 죽음은 오직 나만이 경험할 수 있는 본래적인 사건‘이라고 선언했다. 인간은 누구도 대신해줄수 없는 자신의 죽음을 미리 떠올리며 유한자임을 깨닫고그 자신의 본래적 가능성을 찾기 위해 결단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물론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나의죽음의 중요성에 몰두하느라 타자의 죽음이 나에게, 그리고우리에게 주는 영향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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