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기억하는 일을 통해 이 여성은 자기 삶의 폐허 같던 장면에서 살아갈 용기와 싸울 힘을 얻은 것이다. 기억은 "일종의 갱신/심지어 어떤 시작, 그것이 여는 공간은 새로운/ 장소이므로"(「일요일 공원에서」). 시 쓰기를 통해 삶은 늘 새롭게 기억되어야 한다. 시인이란 그렇게 믿는 존재이다.

그러나 평범한 이들에게는 종교적 태도란 두가지 모두를 뜻한다. 신성해진다는 것은 다른 존재를 위해사랑을 흘러넘치게 표현하는 일인 동시에 타자를 위해 물러서며 자신을 한껏 움츠리는 일이다.

뒤로 물러서 있기땅에 몸을 대고남에게그림자 드리우지 않기남들의 그림자 속에서빛나기ㅡ엉겅퀴 전문 ( 라이너쿤체)

인간은 실패하려고 태어난 ‘훼손된 피조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뮈 덕분에, 우리는 어려운 싸움을 계속이어가는 이들을 어리석다고 말하는 대신 위대한 용기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우리가 진정 사랑하는 이들은 승리하는 이들이 아니라 진실과 인간적 품위를 지키기위해 어쩌면 패배할지도 모를 싸움을 시작하는 이들이라는것도 알게 되었다.

영원에 이르는 은총이 우리에게서 멀기만 한 것은 아니다. 계속되는 사회적 참사들을 겪으며 우리는 ‘지켜주지못해 미안해‘라는 말을 수없이 되뇌었다. 사랑하는 이를 지키는 것이 진정한 사랑 아닌가…………. 친지들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조차 부끄러워하며 자책하지만, 베유라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사랑은 사랑하는 이를 지키는 게 아니라 사랑을지키는 겁니다.‘ 인간의 사랑은 보잘것없다. 사랑하는 이를지키고 싶어도 세계의 난폭함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무력해지기 때문이다

베유는 부재하는 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멈추지 않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죽은 이들에대한 경애심. 존재하지 않는 것을 위해 뭐든지 하기"는 인간을 운명의 중력에서 뜯어내어 영원 속으로 들어 올리는 사랑이다. 사랑을 지키는 사람은 승리에 대한 상상 없이, 미래의보상을 구하지 않고 전투에서 목숨을 거는 병사와 같다. 또한 사랑은 무차별적이어야 한다. 『일리아스 또는힘의 시에서 베유는 죽어가는 모든 가여운 것에 대해 애정을 보였던 호메로스야말로 가장 진실한 작가라고 평가한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읽으면서 작가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추측하기는 힘들다. 트로이 병사들이 그리스인의 창과 칼에 죽어갈 때도 기뻐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햇빛처럼 모든 사람에게 관여하는, 슬픔으로 인해 (…) 『일리아스』의 음조는 슬픔에 젖어 있지 않을 때가 없다. 이 슬픔 속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승자와 패자를 모두 사물로 만들어버리는 강력하고 몰개성적인 힘이다. 그 힘의 노예가 되는것은 패자뿐이 아니다. 점령지에서 지나가는 소녀를 사격하고 나서 쓰러진 시신 옆에서 한가로이 커피를 마시는 병사는 승리한 ‘사물‘이다. 살려달라는 말이 물질에 전해지지 않듯이 병사에게도 전해지지 않는다. 눈앞에서 끝없이 목격되는 고통을 회피하려고 병사에게서 그의 정신이 이미 도망쳐버렸기에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물이 되었다.

그들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는 방법‘을 선택할수도 있다. 방금 내 앞에 끼어든 자동차는 심하게 다친 아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달려가는 중일지도 모른다. 나보다 훨씬 급하고 위중한 상황에 놓인 것이다. 또 슈퍼마켓에서 모든 사람의 짜증을 돋우며 아이에게 악을 쓰던, 멍한 눈에 짙은 화장을 한 여자를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가능하다.
그녀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남편이 누워 있는 병실에서 사흘 밤을 지새우다 아이에게 먹일 간편음식을 사러 나왔는지도 모른다. 물론 내가 처음 생각했던 대로 끼어든 자동차의주인은 얌체족이고 대형 슈퍼의 그 여자는 배려심 없이 제기분대로 행동하는 무례한 사람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나의 욕구가 가장 우선적으로 배려받아야 한다는 본능에 나의 사고가 굴복한 것일 수도 있다. "교통마비와 붐비는 상점통로, 계산대 앞의 기나긴 줄 (...) 나의 태생적인 디폴트세팅

예민성은 "무언가가 관심의 흐름 안으로 헤엄쳐 들어왔을 때 그것에 대해 떠올린 것을 얼마나 꼼꼼하게 옮겨 적을 수 있느냐의 문제다.

‘사진에 관한 노트‘라는 부제가 붙은 『밝은 방』은 바르트의 마지막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사진의 두 요소,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functum을 구분한다. 도로를 순찰하는 무장군인들 사이로 수녀들이 지나가는 사진을 본다고 하자. 사진작가는 폭력적인 삶과 신성하고 평화로운 삶의 대비를 의도했을 테고 우리는 그 의도에 반응하며 전쟁이 끝나기를기원한다. "도덕적·정치적 교양이라는 합리적 중계"를 거친반응이다. 이처럼 우리를 건전한 시민으로서 반응하게 만드는 요소가 스투디움이다.

이와 달리 남들은 무심코 지나치는 세부 사항이 말을걸며 나만 아는 기억 속으로 나를 데려가는 경우가 있다. 사진의 한 부분에서 "마치 화살처럼" 날아와 나를 꿰뚫고 내마음을 물들이는 요소가 푼크툼이다. 이 하찮은 세부 사항때문에 우리는 어떤 사진을 사랑하게 된다. "한 장의 사진을 사랑할 때 또는 그 사진이 나를 어지럽힐 때 나는 그것 때문에 머뭇거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