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 끌어안고 있는 만물 또한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보다 멋진 텍스트가 어디 있으랴.
인간이 두 발로 선 이상 이 변화무쌍하고 흥미진진한 ‘책‘을 어찌 외면할 수 있으랴. 천지라는 이 우주적 도서관에 일단 발을 들여놓은 이상 읽지 않을 수 없다. 고로 삶은 읽기다!
살아 있는 한 읽어야 한다. 해와 달을 읽고, 날씨와 절기를 읽고, 아침 새와 저녁놀을 읽어야 한다. 아, 사람 또한 ‘책‘이다.
사람은 그 자체로 스토리요, 텍스트다. 하여, 누군가를만난다는 건 한 사람의 일상, 나아가 인생이라는 책에 접속하는 일이다.
삶은 앎이고 얇은 곧 읽기다. 그 뚜렷한 증거가 하나 있다.
전국 곳곳에 자리잡은 도서관이 그것이다. 이제 마을의 중심은 도서관이다. 도서관에는 남녀노소가 있고 카페가 있고 식당이 있고 세미나실이 있고 강연장이 있다. 이 모든 것을 연결해 주는 것은 다름 아닌 책이다. 그동안 삶과 분리되어 소외의 길을 걸었던 앎이 다시 삶과의 결합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다. 책이 나무의 생명력을 복원하는 중이라 해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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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 자본"에서 "자본"이라는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우리가 사람을 더 큰 생산 과정 중 일부로 여기고 있음을 의미한다. (정체된) 임금과 (감소한) 노동참여율 같은 지표를 통해 우리는
노동시장의 경쟁이 늘어간다는 사실을 추적해볼 수 있다.
노동자를 고용할 때 드는 비용은 이전보다 적어졌고, 편안한 삶을 누리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요소를 제공하는 넉넉하고 안정된 일자리를 찾는 일은 극히 어려워진것이 현실이다.

지난 세대의 어린이들이 즐겨왔던 활동과 경험은 두 번 생각할 필요도없다는 듯 문젯거리거나 위험한 일로 낙인찍혀 버렸다. 그런 활동을 할수 있게끔 해주는 어른들은 무책임한 사람으로 취급된다. 극단적으로(-) 사회는 아무리 사소하거나 있음직하지 않은 일이라 할지라도, 그 어떤 불편한 결과도 받아들이지 않는 식으로 변해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사례들은 어쩌면 드문 경우일 수도 있겠지만, 이는 아이들의 경험 을 희생하면서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개입하는 성인들의 행동 방식의증가와 잘 맞아떨어진다.

놀이하는 아이들은 의도적으로 스스로를 어느 정도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한다. 이것은 다른 어린 동물과 마찬가지로, 야외에서 노는 아이들을아주 조금 살펴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네를 타고, 미끄럼틀을내려오고, 놀이터에 설치된 기구들 사이를 헤집고 돌아다닐 때, 철봉과나무를 기어오를 때, 난간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위험한 행동을 할때, 이 모든 활동들은 어느 정도 무섭고 그만큼 재미있는 일인 것이다. 만약 전혀 무섭지 않다면 그런 행동은 지겨울 뿐이다.
만약 너무 위험하다면 그건 더 이상 놀이가 아닌 공포가 되어버린다. 그 경계선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아이 자신이기에, 모든 놀이는 아이 스스로 통제하고 감독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스스로의 한계를 시험하는 상황뿐만이 아니다. 아이들은 또한 사회적 놀이를 통해 자신들의,
사회적 한계를 시험한다. 어떤 형태의 사회적 놀이건 협동만큼이나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아이들은 놀이를 계속해나가면서 감정을다스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특히 갈등을 유발할 수 있는 분노와 공포를 말이다.

보다 지식 집약적인 노동이 늘어나는 것을 특징으로 삼는 "신경제"의 성장은 기술 혁신의 속도가 가속화되는 것, 그리고 일자리의 주요 출처로서 서비스 산업의 비중이 지속적으로 확장되는 것과 궤적을 같이한다.
복지welfare를 노동복지workfare로 바꾸는 등, 1990년대에 내려진 정책 결정으로 인해 사람들은 노동이 점점 더 불안정해지는 와중에도 그러한 일자리를 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고 말았다. 노동력의 출처는점점 더 다변화되었다.
여성, 비백인, 고령층, 이주노동자 등의 비중이 눈에 띌 만큼 늘어났고, 각기 다른 교육 수준을 가진 이들 사이의 차이도 눈에 띄게 벌어졌다. 이러한 구조적 변화의 이면에는 그것을 뒷받침하는이념적 변화가 있었다. 직장과 일상 모두에서 집단적 책임의 개념을 개인적 책임과 개인주의가 대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미래를 위한 투자 대신 무급 인턴들이 뽑혀 나왔다. 바리스타가되기 위해서도 인턴십을 거쳐야 한다는, 마치 농담 같은 소리가 진담이 되어버린 세상 속에서, 젊지만 경험이 없는 노동자라도 자신의 노동에 따라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발상은 그저 철 지난 소리가 되어가고 있다. 누군가가 써준 추천서, 이력서에 적힌 경력 한 줄이 너무도중요해진 직업 시장 속에서, 우리 밀레니얼들은 시간, 기술, 그리고에너지라는, 우리가 가진 유일한 것들을 기꺼이 내놓을 수밖에 없다.
대학은 무급 인턴십을 홍보하는 수준을 넘어섰다. 일부 대학에서는 졸업을 위해 인턴십 수료를 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으니 말이다.
마치 인턴십이 대학에서 제공하는 교육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기라도한 양, 많은 학교들은 인턴십에 학점을 부여한다.
학교, 기업, 학생 3자간의 관계는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학생은 대학에 돈을 내고 기업 (혹은 정부나 비영리단체)에서 일을 한다.

미국의 유년기는 높은 포상을 걸고 벌이는 경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구조가 지속되는 한, 이력서에 한 줄 더 써넣기 위해
무슨 짓이건 할 아이들은 언제나 나타날 수밖에 없다. 마치 톰 소여가 친구들을꼬드겨 자신이 해야 할 울타리 페인트칠을 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돈까지 내게 했듯이, 기업과 대학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실제로는 별로가치가 없을 일을 하는 그 자체가 특권인 양 여기게끔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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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킨스가 재단까지 설립해가며 이런 도발적인 주장들을 펼쳤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행보는 일종의 ‘무신론 운동‘을일으키려는 시도였다. 그는 "종교는 감히 비판해서는 안 될 무엇"이 절대 아니라는 점을 사람들에게 일깨워주려 했다. 더 나아가 그는 유신론적 종교를 박멸해야 할 ‘정신 바이러스‘라고규정하고 인류가 하루 빨리 그 망상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복제만을 위해 인간 숙주를 무차별공격하는 감기 바이러스처럼, 종교도 그 자체만을 위해 작동하는 정신 바이러스일 뿐이라며 새로운 유형의 무신론 운동을시작했다. 이른바 과학적 무신론 운동이다.

데닛은 그 누구보다 도킨스의 밈meme 이론을 발전시킨 학자이지만 종교에 대한 정신 바이러스 이론에는 다소 비판적이었다. 데닛은 《주문을 깨다Breaking the Spell)에서 도킨스가 종교밈의 무법자outlav적 측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했다고 비판하고 종교밈을 ‘야생밈wild-type meme‘과 ‘길들여진 밈domesticatedmeme’으로 구분한 후, 현대의 고등종교는 후자에 해당한다고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민속종교 같은 경우는 자신의 복제에만 열을 올리는 야생밈이지만, 현대의 고등종교는 경전·신교 · 교리문답 · 신학자 등과 같은 기구들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길들여져 있는 밈이다.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야생의 소를 젖소로 길들였듯이, 우리는 진화의 역사에서 우리 자신을 위해 민속종교 같은 야생밈을 고등종교로길들였다는 것이다.

진짜 스코틀랜드 사람 오류
반대되는 사례를 배제하고 계속해서 불합리한 주장을 하려는 논리적 오류.
A:스코틀랜드 사람은 죽에 설탕을 넣지 않아.
B: 우리 삼촌은 스코틀랜드 사람인데 죽에 설탕을 넣어.
A : 진짜 스코틀랜드 사람은 죽에 설탕을 넣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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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해보면, 실패의 경험 없는 승리에 대한 확신, 조직력을 바탕으로 한 강고한 투쟁력, 타협하기 어려운 상명하복의 교조적 문화, 다른 목소리를 포용하지 않는 적대적 계파주의가 이른바386 DNA로 자라났다. 자나 깨나 민주주의를 원했던 386세대가 진정한 민주주의자로 남을 수 없는 한계는 이런 DNA 때문이 아닐까. 당시 이들은 피와 눈물로 민주주의를 챙취하려 노력했을뿐 민주주의를 즐겁게 향유하는 법을 익히지는 못했다.

1990년 11월 구속된 뒤 감옥에서 5년 83일을 꼬박 살고 나오니 남은 건 부도난 집과 병환으로 날 알아보지도 못하는 아버지뿐이었다. 학원 강사를 한다는 후배한테 ‘이 쓰레기 같은 것아!‘라고 욕해줬는데, 그게 내가 될 줄은 몰랐다. (중략) 우리는 살아야 했고, 대치동은우리를 통해 살아야 했다.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들어간 것이다. 대치동에 뛰어든 우리는 분파가 달랐지만 뜻은 비슷했다.
‘자본주의의더러운 돈을 받아먹고 이렇게 타락해 있지만 잠시뿐이다. 유학 자금이든 우윳값이든 우리 목표를 이룰 때까지만 잠시 눈을 감자‘라고(최보윤, 2013).
잠시만 타락해 있자고 질끈 눈을 감았던 386 출신 스타강사들의 성공은 ‘학원 붐‘이라는 시대적 조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30대에 자수성가한 백만장자 사업가 엠제이 드마코의 표현을 빌리자면, 부동산과 아파트는 한국에서 ‘부의 추월차선(millionaire fastlane)‘이었다.
부자가 되기 위해선 아파트라는 부의 추월차선에 올라야 했다. 재산이 공개된 다수의 고위공직자들이 공식을 적극 실천했을 뿐이다. 그 기회를 노렸던 대부분 사람 역시 이러한 흐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파란 눈으로 한국 사회를 분석한 프랑스인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Valerie Gelezeau)의 『아파트 공화국』(2007)에는 아파트를 통해 부를 축적한 표준적인 한국인의 방식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인터뷰 대상자 중 누구도 본인이 부동산 투기를 했다고 증언한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아파트를 구입하는 것이 재산을 불리는가장 좋은 방법이었다는 사실에 모두들 깊이 공감한다.
물론 부동산 불패의 신화는 386세대 이전에도 있었다. 40~50년대생 역시 서울 강남과 목동, 상계동 등의 신시가지 개산 증식의 호재로 활용했다. 하지만 그 기회는 모두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개발 정보가 권력과 그 주변부 위주로 돌았기 때문인데 이것이 세대 내 양극화를 심화하는 한 원인이 됐다.

악은 그 크기와 모양이 다양하다. 선(善) 속에 작게 똬리를 튼악도 있고, 악으로 비판을 받지만 그 안에 일말의 선이 녹아 있기도 한다. 선과 악을 가른다는 것이 그래서 어렵다. 세상이 선과악, 이분법으로 정돈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기에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은 침묵과 발화 사이에서 고뇌한다. 그리고 아마도 자식을 취업시켜준 힘깨나 쓰는 부모들은 집에 가서 ‘이 아빠(엄마)의 능력을 봤지? 잘해라‘고 한마디 던졌을 것이다.

꼰대스러움은 종종 ‘대의‘나 ‘공공의 선과 같은 거창한 포장을 뒤집어쓰고 나타난다. 2018년 평창올림픽에서 남북관계라는 대의를 위해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을 무리하게 추진했던 일이 개인보다 집단, 국가를 강조해 벌어진 일이라면(김지은, 2018) 공고기관의 수장이 법인카드로 방울토마토를 사거나(원성윤, 2016) 내연여와의 데이트 비용을 쓴 것처럼 공사 구분이 불확실한 꼰대 근성이 드러난 일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숱하다.
꼰대는 갑질, 헬조선과 맞닿아 있다. 이들은 모두 공정하지 않음을 문제 삼는다. 왜 공정하지 않은가. 걸핏하면 ‘법대로 해‘를
외치지만 법과 제도가 원칙대로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쁘고 급하면 언제든 우리 사회 ‘갓길‘에서 전력질주 할 수 있는 권리를가졌다고 생각하는 기득권들이 너무도 많다. 당최 믿을 구석이 없으니 한국 사회 신뢰도가 선진국 가운데서도 바닥을 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 요즘 용감한 반(反)꼰대들은 수시로 묻는다 "그거 규정에 있어요?"

인간은 살아 있다는것 자체가 가해자의 성격을 띤다. 이슬을 먹고 살지 않는 한 어떤 생명을 빼앗아야 생존할 수 있다. 자신이 가해자임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어떤 윤리를 만들어갈 수 있을지를 계속 고민해야 한다(강성만,2018).

18세기 말 프랑스에서는 혁명을 선두에서 이끌었던 로베스피에르가 공포정치 독재자가 되어 결국 처형으로 생을 마감한 일도 있다. 개혁의 주체들이 시간이 지나 개혁의 대상이 되는 일은다수의 역사적 사실들이 증명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386세대의보수화 기득권화는 어쩌면 피할 수 없는 현상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세대보다 빠르게 사회적 목소리를 얻고 가장 길게 그 힘을 유지하고 있기에 이들의 보수화 기득권화는 한국 사회에 더큰 부담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선 달라질 건 없다는 체념의 언어부터 버려야 한다. 체념은 특히 오늘날 청춘들에게 가장 익숙한 언어가 되어버린 듯하다. 출산과 결혼, 취업조차 인생 계획 리스트에서 하나씩 작제해가는 N포세대는 바랄 게 없으니 절망할 이유도 없게 되었다. 하지만 다가올 미래까지 한발 앞서 지워버리는 편리한 무기력이 슬며시 이식되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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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도리어 누군가를 불리하게 만드는 간접차별indirect discrimination의 예들이다.

내가 유학을 한 학교에는 비영어권에서 온 학생들에게 입학 후 일정 기간 동안 시험시간을 더 주는 정책이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시험시간이 1.5배 더 길게 주어졌다. 로스쿨이니 당연히 언어가 중요하지만 시험에서 평가하고자 하는 것은 영어 실력이 아니라는 판단에서 마련된 정책이었다. 이 규칙 덕분에 비영어권 유학생이 영어 때문에 일찌감치 시험을 포기하거나 늘 가장 낮은 성적을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듯 우리의 능력을 판단하는 많은 기준들이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유리하고 누군가에게는 불리하게 편향되어 있지 않은지 의심해봐야 한다.

취업에서 토익 점수의 요건은 어떤가? 청각장애인 외에는 문제없는 공정한 기준일까? 꼭 필요한 직무능력이 아닌데도 거의 대부분의 회사에서 높은 영어 성적을 요구함으로써, 영어 접근성이 좋은 사회계층 혹은 특정한 학력이나 학벌을 가진 사람을 유리하게 하는 효과가 있지는 않은가?

능력주의 체계는 편향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다. 능력주의를 맹신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간과한다. 사람은 누구나 개인적 경험, 사회·경제적 배경 등에 따라 어떤 방향으로든 편향된 관점을 가지기 마련이다. 어떤 능력을 중요하게 볼 것인지, 그 능력을 어떤 방법으로 측정할 것인지와 같은 판단은 이미 편향이 작용된 결정이다. 이렇게 선택된 방식으로 능력을 측정할 때 출제자의 편향이 응시자 중 누군가에게는 유리하고 누군가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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