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이 있는 게 아니라, 가끔 친밀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한 작가는 꼬집듯 말하고 있다. 사람의 이기적인 면을 잘 꼬집는 말이지만, 그 말이 옳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우정이니 뭐니하는 거창한 말은 빼더라도, 언제 만나도 편안하고 마음 놓이는 친구들이 있다. 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친구란 아무 말 없이 오랫동안 같이 앉아 있어도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어떤 사람들은 같이 있는 것은 불편해서, 괜히 담배를 피우거나, 해도괜찮고 안 해도 괜찮은 말을 계속해야 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냥 곁에 있는 것만으로 편안해져서, 구태여 의례적인 말들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있다. 같이 아무 말 않고 오래앉아 있으면 불편해지는 사람을 친구라 부르기는 거북하다. 친구란아내 비슷하게 서로 곁에 있는 것을 확인만 해도 편해지는 사람이다. 같이 있을 만하다는 것은 어려운 삶 속에서 같이 살아갈 만하다고 느끼는 것과 같다. 그런 친구들이 많은 사람은 행복할 것 같다.

2. "하느님이 움직일 수 있는 여지(공간)를 위해 비우는 일을 하는것이 이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까지 그(Zahnt)는 말한 것이다"(56). ——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하느님이 움직일 수 있도록 굳어진 것들을 비워야 한다. 공!

우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그 작가는, 바다가 놀라운 것은거기에 놀라운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좋은 친구가 놀라운 것은 거기에 놀라운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과연 놀랍다!

도스토옙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 (정음사, 1968)의 가장 끔찍한 전언은 맨 앞 대목에 숨겨져 있다. "……… 그러나 인간의 사는 힘은 강하다. 인간은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동물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10.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동물이라…… 그 동물은 체념에도 쉽게 익숙해진다. 불편하고 더러운 것, 비인간적인 것에 익숙해진 인간의 모습은 더러운 것인가, 안 더러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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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파엘)는 문득 힘을 소유하는 것 자체가, 아무리 그 힘이막대하다 하더라도, 그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홀(王)은 어린아이에게는 한갓 장난감일 뿐이지만 리슐리외에게는 도끼요, 나폴레옹에게는 세상을들어 올릴 수 있는 지렛대인 것이다. 힘은 꼭 우리만큼의 크기를가지며 그래서 큰 사람만을 더 키우는 법이다.
오노레 드 발자크, 이철의 옮김, 『나귀 가죽』, 문학동네, 2008.

. 『변신 이야기』의 저변에는 헬레니즘 특유의 자유롭고 건강한 민주주의가 깔려 있으며, ‘변신‘이란 자연의 구성원인 온갖 생명간의 무한한 생성과 경계 이월, 활기찬 낙관주의의 표현이다.
15장에 느닷없이 삽입된 뛰타고라스의 가르침‘을 보자.

모든 것은 변할 뿐입니다. 없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영혼은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알맞은 형상이 있으면 거기에 깃들입니다. 짐승의 육체에 있다가 인간의 육체에 깃들이기도 하는 것이고, 인간의 육체에 있다가 짐승의 육체에 깃들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돌고 돌 뿐, 사라지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말랑말랑한 밀랍을 보십시오. 이 밀랍으로 새로운 형태를 만들면 거기에는그 전의 형태가 남지 않을뿐더러, 그 전의 형태로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모양만 변했을 뿐, 밀랍은 여전히 밀랍입니다. 이와같습니다. 영혼은 어디에 가든 처음의 영혼 그대롭니다. 다만 다른 형상에 자리를 잡았을 뿐입니다.

- 오비디우스 ‘변신이야기’-

인간이 유의미하고 존엄한 존재인 것은 사유라는 행위 때문이다. 위대함의 단초도 여기에 있다. "218-(397) 인간의 위대는 자신이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점에서 위대하다. 나무는 자기가 비참하다는것을 모른다. 그러므로 자신의 비참을 아는 것은 비참하다. 그러나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곧 위대함이다." 하지만 파스칼은단순히 사유와 인식만을 촉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강조하는 바는 ‘올바르게 사유하도록 힘쓰자.‘는 것이다. 즉, 도덕과 윤리가 중요하다. 그 궁극의 지점에 신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팡세』는 인간과 신에 대한 탐구를 담고 있으되 ‘신 없는 인간의비참‘(1부)을 신 있는 인간의 행복‘(2부)으로 이끌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의 호교론은 가히 확률론의 창시자답게 내기(도박)의 논리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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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군가와 사랑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 세상에 거의 없다는 사실을 거듭 깨달았어. 사랑은 곧 힘겨운 노동이야. 사랑을 표현할 다른 말이 없다는 것을 신께서는 아시겠지? ( 릴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것은 불변의 재능이 아니니다. 그보다는 기나긴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재능들과 마찬가지로 친밀함의 능력도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연마된다. 누군가와 친밀해지려면 관계를 맺고, 그 과정을 연습하고, 그것이 빛이 나도록 다듬어야 한다. 잠깐이든 장기적으로든, 우리는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마다 그 사람과 가까워지는 방법을 깨달을 기회를 얻게 된다. 둘의 관계가 지속되는 기간이 몇 달이든 몇십 년이든 또는 평생이든, 관계라는 구슬을 잘 닦아 빛이 나게 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은 인간 정신을 탐구하는 과정의 본질을 이루는 요소다. 하지만 정신, 즉 두뇌가 시간을 기억하는 방식, 다양한 종류의 경험과 상황 속에서 우리가 주관적으로 시간을인지하는 과정은 여전히 정확한 답을 찾지 못한 미해결 문제로 남아 있다.

관계를 유지하는 데 가장크 노력이 필요한 부분은 나의 독립성‘과 ‘함께하는 것‘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다. 자유에 대한 욕구가 책임감과 충돌하고, ‘네가 필요해‘라는 마음과 ‘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라는 마음이 충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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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하루는 너무도 유명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시계처럼 규칙적인 삶을 살았다.

4시 55분, 하인 람페가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라는 말로 칸트를 깨운다. 칸트는 자신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 들어주지 말라고 명령하였기에 그가 일어나기 전까지 람페는 절대 자리를 뜨지 않는다. 5시, 기상. 홍차 두 잔을 마시고 파이프 담배를 피운다. 잠옷, 덧신, 수면용 모자를 쓴 채 강의준비를 한다. 7~9시, 정장을 입고 강의를 한다. 9시~12시45분,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집필을 한다. 12시 45분, 점심에 초대한 손님들을 작업실에서 맞는다. 다시 정장 차림. 오후 1시~3시 30분, 점심시간이자 하루 중 유일한 식사 시간.
오랜 시간 동안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한다. 오후3시 30분, 산책을 간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변함이 없다. 저녁, 여행기 등 가벼운 책을 읽는다. 오후 10시, 절대적 안정속에 잠자리에 든다.

"참을 수 없는 세계란 어쩌면 새로움에 대한 강박적 추구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지속되는 일상적 진부함‘ 속에서 살아가게 하는, 그런 세계가 아닐까. 이런 세상은 사유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반복되는 삶의 패턴들 속에서 진지한 생각거리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싶다면 지금처럼 아무것도 생각할 것 없는 상태 자체에 대해 따져 묻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 그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믿는데서부터 출구가 열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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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는 프로네시스bronesis)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이는 ‘실천적 지혜‘라는 뜻으로,지식을 의미하는 에피스테메(episteme), 참된 지혜 혹은 성스러운지혜를 의미하는 소피아(sophia)와는 결이 다른 개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좋은 삶을 사는 것에 관하여 잘 숙고하는 사람‘이 실천적 지혜가 있는 현명한 사람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여러 각도에서 질문을 던지며 시의적절하고 상황에 잘 맞은 답을 끌어내는 것이 바로 프로네시스이겠지요.

회의론자들은(epoche)‘라는 걸 강조했는데요. 이 에포케라는 말은 ‘판단 중지는 뜻입니다. 언제나 일관되게 옳고 그른 것도, 좋고 나쁜 것도 어으므로 매사에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신중하게 판단을 보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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