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파고스에는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한 가이드라인이 있었다. 배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하고, 인솔자의 동반 하에만섬에 상륙할 수 있고, 조개껍질 하나도 가지고 나올 수 없고, 동물이 눈앞에 있어도 만지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그곳의 야생 동물은 인간에 대한 경계심이 없었다. 오히려 인간을 철저히 무시했다. 우리가 주연도 조연도 아닌, 지나가는 행인에불과했던 덕분에 종종 아름다운 순간들이 찾아왔다. 해변의해먹에 누워 책을 읽는 내 발밑에서 두 마리의 바다사자가 낮잠을 자던 오후가 있었고, 아기 바다사자가 엄마를 찾느라 내몸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던 아침도 있었다. 앞발을 날개처럼저으며 우아하게 헤엄치는 바다 거북이를 오랫동안 따라가던평화로운 순간도 머물렀다.

야생의 동물을 대면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동물원에 갇힌 동물과 야생의 그들이 얼마나 다른지를, 대초원에 서 있는 사자가 황홀할 정도로 당당하다면 동물원에 갇힌 사자는무기력과 절망에 사로잡힌 눈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야생의 동눌들을 만나고 난 후 동물원은 폐기되거나 그 목적이 변해야하는 곳이라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인류는 이제동물원에 가지 않아도 동물에 대해 배울 수 있는 다양한 경로를 가지고있다. 컬러 사진이 입혀진 책이 있고, 고화질 다큐멘고화질 다큐멘터리가 있고, 언제든 찾아볼 수 있는 동영상이 가득한 인터넷이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에서 보지 않고도, 멀리서 망원경만으로 관찰한다 해도 만족하는 태도가 아닐까.
더 나아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도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음을 상상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보이지 않는 존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동물원은 사라질 테니. 간접 경험만으로도 충만해질 수 있는 소박한 문명인이 점점 많아진다면 지구의 미래는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인류는 더 멀리 가고 싶다는 열망, 더 높은 곳에 오르고 싶다는 갈망, 더 깊은 바다에 닿고 싶다는 꿈, 이런 욕망으로 여기까지 왔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내 손으로 직접 만져보고, 내발로 직접 서보고 싶다는 욕망에 나도 휘둘려왔다. 이제는 어디를 가도 그 욕망이 망가뜨린 세계를 바라봐야 한다. 끝없는욕망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지구에 홀로 남은 생명이될지도 모른다. 그 황폐한 지구를 상상하면 숨이 막힌다. 우리는 늘 너무 늦은 일은 없다고 배워왔으니 지금이라도 욕망을제어하는 법을 익히면 되지 않을까. 다행히 인류의 역사는 점점 참을성을 기르고 욕망을 통제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왔으니 간접 경험에 만족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다.

세상에서 가장 뚱뚱하고 무거운 새 카카포는 날기를 포기한 새였다. 저자의 표현처럼 "최초의 인간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 순간부터 거의 모든 인류가 열망해온 그것을 이 동물이 포기했다는 사실에는 뭔가 마음을 사로잡는 힘이 있다". 인간으로 치자면 어떤 부족이 직립을 포기하고 네 발로 기어다니며 살기로 결심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느낄 법한 충격이었다.

나는 여전히 집 바깥이 더 익숙한 삶을 살고 있다. 지구는스스로 증식이라도 하는지 아무리 돌아다녀도 도무지 끝이보이지 않았다. 여행에 관한 한 호기심도 줄지 않았고, 열정도 식지 않았다. 아직은 무릎에 힘도 빠지지 않았다.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가 필수다. 돈과 시간, 체력과 호기심. 다행히도 나는 여전히 돈만 부족할 뿐 나머지는충분히 넘친다. 정착하고픈 마음이 들게 하는 운명의 남자도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러니 계속 떠도는 삶을 살 수밖에. 배낭 하나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담아 어디로든 훌쩍 떠날 수 있다는 것. 여기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의 삶을 실행할 수 있다는 것. 낯선 말과 낯선 음식, 낯선 사람들, 온통 모르는 것들속에서 나란 존재를 단단히 끌어안고 지낼 수 있다는 것. 그럼으로써 내가 알거나 믿고 있던 것들이 날마다 무너지고, 매일 더 넓은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이 삶의 방식은 내가 지닌 최고의 자산이 되었다.
다만 이제 여행의 방식이 바뀌었다. 여행사를 찾아가지 않고 클릭 몇 번으로 가격을 비교해 항공권을 구매하고... 모든게 간단해지고 편리해졌다.

여행이 편리해질수록 나는 왜 이리 허전해지는 걸까. 점점만남의 밀도가 물렁해지고, 감동의 깊이도 얕아진다. 사람을만나 마음을 여는 일도 줄었다. 남들이 가지 않는 곳에서 모험을 하는 일 따위는 진작 사라졌다. 세계는 이미 낱낱이 드러났고, 더는 오지도 없고, 신비로운 모험 따위는 전설이 되었다. 대부분의 여행이 비슷해졌다. 같은 곳에 가서,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사진을 찍고 SNS에 올리는 것으로 여행이 끝난다. 정말 이것뿐인 걸까? 헛헛하다. 한 번 여행을 떠나려면엄청난 각오를 해야 했고, 수많은 모험을 함으로써 여행을 통해 인생이 변할 가능성이 컸던 시절의 여행자들이 부러워졌다. 세계일주 한 번으로 인생이 바뀐 대표적인 남자가 떠올랐다. 영국 신사 필리어스 포그. 쥘 베른의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의 주인공이다.

이제 여행은 어디로 가느냐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여행이 매혹적인 이유는 여행이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인생이그러하듯. 낯선 곳에서 어떤 만남을 통해 얼마나 변화하게 될지 전혀 모르는 채로 우리는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계속하는한 내 마음의 지도는 날마다 달라진다. 세계가 계속 확장되어 간다.
.... 내 발걸음이 그곳에 사는 이에게는 불쾌한 흔적에 불과할 수도 있고, 내가 사랑하는것들을 망가뜨리는 길이 되기도 한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몸가짐이 조심스러워졌다.

여행을 한다는 것은 내내 타인의 친절에 기대어 사는 일이다. 덕분에 타인에 대한 내 선입견을 끝없이 수정해올 수 있었 다.
흑인에 대한, 동성애자에 대한, 무슬림에 대한, 열대 지역의 사람에 대한 수많은 편견이 깨졌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인정하는 법을 배워갔고, 내가 속한 이 세계를 마음을 다해 끌어안게 되었다. 길 위에서 나는 조금 더 용감했고, 더 착해졌다. 타인의 고통을 나눌 줄 알게 되었고, 지구에 조금이라도 해를 덜 끼치는 인간이 되고자 애쓰고, 육체적인 불편함을 견 디는 힘이 극도로 강해졌다. 집이 아닌 곳의 화장실도 가기 싫어하던 내가 대자연의 지형지물을 기꺼이 사용할 줄 알게 되었다. 낯선 사람과는 말을 섞는 것 자체를 꺼리던 내가 처음 만난 여행자에게 밥 먹으러 같이 가겠냐고 능숙한 작업을 걸게 되었다.... 내 안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늘 여행에서 발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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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고통 없는 사랑이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사랑은 원래 그런 것입니다. 예수는 자기 포기 없이는 사랑이 있을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사랑을 추구하면서 사랑받는 존재에게 고통당할 각오가 없다면, 사랑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랑이 부족하고 삭막한 세상에서 사랑을 택한 사람의 삶은 고통의 길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받는 고통을 자랑스럽게 여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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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것에 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사계절이 있어 싹이 나고, 꽃이 피고, 무성해지다가 마침내는 시드는 날이 온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갈 수 있는 곳까지묵묵히 걸어가기. 끝을 알면서도 감당해내는 태도가 결국성장의 증거가 아닐까. 내가 인생에 대해 아는 유일한 사실은 삶의 길목 어딘가에 죽음이 기다린다는 냉혹한 진실뿐인데도 나는 삶을 감당한다. 여행의 끝은 결국 지친 몸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것에 불과함을 알면서도 나는 늘 다시 떠난다.
한 번 떠났다 돌아올 때마다 집은 조금 더 아늑해지고 일상은더 애틋해진다. 나이가 들수록 죽음은 조금씩 더 생생하고 구체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죽음을 겪은 이후 죽음은 내게도 이제 낯설지 않다. 그렇게 떠돌다가는객사 혹은 고독사가 운명‘ 이라는 농담에 서른의 나는 웃어넘만 쉰을 앞둔 나는 담담히 미소 짓는다. 더 나아가 객지에서의 고독사‘가 내 운명이 될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니 떠날때마다 뒷자리를 생각하고 정리에 들이는 시간이 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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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겨울,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를 다시 찾아갔을 때 나는 눈물이 핑 돌 만큼 안도했다. 이 낡은 서점의 모든 것이 그대로라는 사실에. 벚나무 아래 서서 바라보는 서점의 초록색간판도, 문을 열고 들어서면 왼편으로 보이는 ‘비트’, ‘로스트제너레이션‘, ‘셰익스피어‘ 등으로 구분된 서가도, 이가 슬은낡은 버팀목들도,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쓰인 시구도 그대로였다.
"I wish I could show you when you are lonely or inidarkness the astonishing light of your own being(당신이 외롭거어둠 속에 있다고 느낄 때 당신이라는 존재가 발하는 그 환한 빛여주고 싶네)."

나는 나무를 보기 위해, 숲을 걷기 위해 도시를 떠나곤 했다. 하늘을 가리는 콘크리트 빌딩과 흙을 밟을 수 없는 도로가 싫었다. 나는 끝없이 자연을 찾아 도시를 탈출했다. 잠깐벗어났다가 도시로 돌아와 다시 편리함을 누리는 일상이었다. 나에게 도시는 자연과 나를 분리하는 장벽이었고, 나를비롯한 인간은 자연을 오염시키고 파괴하는 침략자에 불과했다. 이 책은 당연하다고 믿었던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에 제동을 걸었다. 자연이 별개의 영역이 아니라 나 자신이 자연안에 속한 야생의 존재라니!
내게는 영화 <식스센스>급 반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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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에는 일상의 힘이 살아 있었다. 무너지지 않은그 든든한 일상의 힘이 나는 고마웠다. 내 친구 마미코가 어떻게든 끌어안고 버텨낸 그 일상이었다. 여행보다. 일상은 힘이 세다.
여행보다 일상은 끈질기다. 나는 점점 여행과 일상의 경계가 무너진 삶을 살아가지만, 일상의 소중함은 나날이 커간다. 마미코의 일상을 지지하는 힘이 어린 쌍둥이라면, 내 일상을 버티게 하는 건 나 자신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내가 아니면 누구도 나를 챙기지 않으니까 절대로 무너져서는 안 되는 삶이라고 그렇게 믿고 살아왔지만, 실은 아니었다. 나 아닌 누군가가 늘 가까이에 있었다. 내 삶의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우리가 서점에 가는 이유도 이 넓은 지구에서 내가 누군가와 이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서점은 섬처럼 외로 떨어진 우리를 이어주는 매개체다. 책과 나를, 이 세계 다른 세계를 연결해주는 통로, 온라인에서 책을 살 수도 있고 전자책을 다운받을 수도 있는데(심지어 더 저렴한 가격에) 왜 굳이 서점을 찾아가는 걸까. 기껏해야 몇십 평 남짓한공간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빛이 비치는 서점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설 때면 드넓은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기분이다. 슬며시 서점 안을 둘러보며 주인의 취향을 가늠해볼 때면 나쁜 짓이라도 하는 듯 심장이 두근거린다. 시류에 호응하는 책들 사이에 놓인 비주류의책이 고집스러운 주인의 취향을 은근히 드러낼 때면 슬며시웃음이 난다.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 소중히 놓여 있는 모습을보면 취향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진다. 책장에서 한 권의 책을빼내 손에 들 때면 묻어 있는 먼지조차 사랑스럽다. 맨 뒷장을 넘겨 몇 쇄를 찍은 책인지 슬쩍 확인할 때면 안도와 슬픔이 동시에 치민다. 이 좋은 책을 읽은 이들이 겨우 이것뿐이라니. 이 책을 발견한 사람은 75억 인구 중에 고작 수천 명. 얼- 이름도 모르는 그들과 나는 그 순간, 작은 비밀을 나눈것 같은 관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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