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마이니치신문(每日新闻)의 독자란에 이제 그만 졸친(卒親)을 하겠다는 한 어머니의 글이 올라온 적이 있다. 그녀의 닉네임도 지친 엄마. 나이는 55세. 비슷한 세대여서제목만 봐도 끄덕거려졌다. 글의 요지는 이랬다. 충치가 생기지 않도록 어릴 때부터 양치질 습관을 들여 놓았더니 커서는 양치질도 하지 않는 성인으로, 매일 밤 책 읽어 주며,
독서 습관 들여 놓았더니 휴대전화 아니면 활자라고는 읽지 않는 성인으로, 학교 급식표를 붙여 놓고 메뉴 중복되지않도록 영양소 신경 쓰며 키웠더니 컵라면을 제일 좋아하는 성인으로, 환경의 소중함을 가르쳐 주려고 환경 운동도 같이 했는데 방을 쓰레기장으로 해 놓고 사는 성인이란 자식을 보며 지친 엄마 님은 이제 그만 엄마를 졸업하게다고 졸친 선언을 했다.
졸친하는 길에 마지막으로 아들에게 한마디하고 싶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노력이 전혀 열매 맺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걸 가르쳐 주어서 고~맙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의 갑 오브 갑‘이 자식이지 않을까.

하지만 자식도 제 뜻이란 걸 갖고 태어났으니 부모 뜻대로되지 않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뜻과 뜻이 일치하면 다행이지만, 대부분 충돌하니 꺾이든가 꺾든가 해야 한다.

정하가 중고등학교 때 이런 말을 종종 했다.
"나 같은 딸 만난 걸 고맙게 생각해. 착하지, 공부 잘하지,
개념 있지."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내 머릿속이 바삐 돌아간다. 이럴 때뭐라고 해야 교육에 좋을까. 내 마음의 소리를 그대로 하자면 "웃기시네" 이지만, 사임당을 지향하는 배운 사람으로서,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영혼 없는 교육용 멘트로 "맞아, 엄마도 그렇게 생각해. 고맙다"라고 말한다. ‘지친 엄마 님의 ㄱ~ 맙다와 같은 느낌
... 누누이 하는 말이지만 자식은 내려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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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들이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무언지를 깨닫는다. 그것은 거리낌 없이 사랑할 권리다. 알베르카뮈." 거리낌 없이, 아낌없이, 남김없이 ‘사랑‘한다는 것, 그 또한최초의 인간이자 마지막 인간으로서 우리 각자가 삶의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수행해야 할 권리‘ 이자 의무가 아닐까 한다.

카뮈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들에 자주 인용되는 말이 있다. "카뮈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그와 악수하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는 것이다."(『스웨덴 연설』) 멋지고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가 낯선 사람과의 의례적인 대화와형식적인 인사를 싫어한다는 것, 양로원에 막 도착했을 때 원장과악수를 나누며 거북해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상대방이 자신의 손을 붙들고 오랫동안 놓지 않자 어떻게 손을 거두어야 할지 몰라 무척 난감해한다.
카뮈는 프리드리히 니체가 가진 불굴의 의지를 자기 속에서 일깨우고자 늘 노력했지만, 또한 섬세하고 상처받기 쉬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우리가 손을 내밀 때 카뮈는 뫼르소처럼 다소 멋쩍어하고,
어색해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충분히 조심스럽고 신중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카뮈는 오랫동안 우리 손을 잡아줄 것이다.

카뮈의 말대로, 우리가 자신을 삶을 연기하는 배우로 인식하면세상은 달리 보인다. 세상과 우리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고서 좀더 객관적으로 관찰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이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인식하여 더욱 바람직한 삶을 하나의 의미 있는 사명으로서 완수하게 되는 것이다.
한 사람의 배우로서 지금 나는 그저 무심하고 무의미한 현재적 상황 위에 결코 잊힐 수 없는 과거의 흔적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것을목도한다. 그러면서 삶의 일상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각성의 단계로 나아가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것에서 시간의 깊이를 체험하는가능성에 눈을 뜬다.

그리하여 그는 『젊은 시절의 글』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다.
"집 없는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 떠돌이들에게도 심장이 있고 영혼이 있다. 그 영혼은 누구보다도 더한 욕망으로 부풀어 있어서 그만큼 더 아름다운 것이다." 『안과 겉』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가난이나에게 불행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빛이 그 부를 그 위에 뿌려주는 것이다." "나의 어린 시절 위로 내리쬐던 그 아름다운 햇볕 덕분에 나는 원한이라는 감정을 품지 않게 되었다. 나는 빈곤 속에서 살았으나 또한 일종의 즐거움 속에서 살았다. 무한한 힘을 나 자신 속에서 느끼고 있었다. 다만 그 힘을 쏟을 만한 곳을 발견하기만 하면 될 것이었다. 가난은 그러한 나의 힘을 가로막는 장애가 되지 않았다. 아프리카에서 바다와 태양은 돈 안 들이고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체험한 빈곤은 나에게 원한을 가르쳐준 것이아니라, 오히려 어떤 변함없는 마음, 그리고 묵묵한 끈기를 가르쳐주었다. 내가 그것을 잊어버리는 일이 있었다면 그 책임은 오로지나에게, 또는 나의 결점에 있는 것이지, 내가 태어난 그 세계에 있는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부러워하지 않는 것, 그것은 나의 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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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전통에서 시Lyrik 란 가슴에 품은 채 연주하는 고대 그리스의 탄주악기 뤼라lyra를 그 어원으로 한다. 그래서 서양사람들은 시가 곧 음악이요, 시의 생명이 가슴의 진정성에있다고 여긴다. 그런 관념은 거의 본능과도 가까운 문화적 유전자로 남아서 그들은 지금도 노래가사와 시를 구분하지 않고 부르는 데 익숙하다. 팝송 가사를 찾고 싶을 때 서정시를뜻하는 단어 ‘리릭lyric‘을 그대로 검색어 창에 넣을 수 있는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독일어에서 노래를 뜻하는 리트Lied의 어원도 뤼라다. 노래가 시고 시가 곧 노래다. 그래서 괴테는 시를 "그저 읽으려 말고, 늘 부르라 nur nicht lesen, immer singen"고 말했다. 시는 결코 눈으로 읽는 문자가 아니기에 아이들도 지을 수 있다.
글자를 몰라도하루 종일 노래하는 것이 아이들이다. 그처럼 서양인들에게 시는 내가 적어 친구에게 선물할 수도 있는 쉬운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말言을 가지고 누각이 있는 특별한 집寺을세운 것을 시詩라고 보는 동양 사람들의 생각과는 차이가 있다.
우리에게는 시가 노래라는 인식이 희미한 까닭에 시가 어렵다고 느낀다. 알게 모르게 시인을 하늘에서 뚝 떨어진 신선神仙처럼 여긴다. 중국인들도 이백을 시선詩仙이라 부르지 않는가. 시란 특별한 사람이 쓰는 것이지, 나 같은 보통 사람이쓰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뭔가 멋지고 심오한 시어가 잘 떠오르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니 시는 단순한 노래가사보다 위에 있다. 노래를 위해서는 그저 가사를 쓰면 되고, 시는 고요한 가운데 울리는 심오한 것이라고 여긴다.
서양의 진정성과 동양의 특별함. 이 둘은 모두 예술의 지향점이므로 굳이 선후나 우열을 논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문화 향유의 주체가 소수 귀족들에서 일반 시민들에게로 넘어오던 근대 이후, 시와 노래에 대한 서양적 관념은 분명 힘을발휘했다. 시가 곧 노래라 여겨 왔기에 서양 사람들은 소박한민요에서 새로운 시적 생명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민요를 모델로 하여 쉽게 이해되는 시를 쓰고 여기에 다시 진솔하고 단순한 곡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가곡이란 단순히 성악 음악의 한 장르가 아니다.
그것은 진정성 있는 문화를 가꾸려는 시인, 음악가, 시민들사이의 역동적인 교류이자 천재와 문화저변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마음을 울리는 시인의 말 한 마디가 작곡가의 손끝에서 노래로 바뀐다. 그것을 성악가와 피아니스트가 조화로운음악으로 재현해 내면, 듣는 이들의 마음 속에 새로운 시심詩心이 자라난다. 읽고 상상하고 표현하는 일로 그들 모두가하나가 된다. 그렇게 수많은 읽기와 수많은 해석과 수많은 상상력이 생겨난다. 굳이 직업작가가 아니어도 관계없다. 읽기와 듣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애호가가 되고, 나아가 직접 표현하기 시작한다. 그저 수동적으로 문화상품을 소비하는 자가 아니라 주체적인 문화인이 된다. 그래서 가곡에서 시인은잃어버린 자신의 반쪽을 되찾고, 음악가는 시어에 의지하여자신을 성찰하고, 시민들도 조화의 감각으로 자기 감수성과상상력을 가꾼다. 우리도 그런 문화를 한번쯤 가꿔보아야 하지 않을까. 예술가곡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클라라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당신의 마음은 여전히 진실하고 확고한가요? 흔들림 없이 나는그대를 믿어요. 하지만 세상 하나뿐인 연인에게 아무 기별을 못듣는다면 아무리 강한 용기마저도 길을 잃게 마련이지요. 그 여인이 내게는 당신입니다. 수천 번 모든 것을 되새기고 또 스스로에게 말해 보았어요. 우리가 원하고 움직인다면, 꼭 그렇게 해야할 겁니다. 저한테 그냥 간단히 ‘네‘라고 적어 주세요. 다가올 당신의 생일에 제가 드리는 편지를 아버님께 직접 전해달라고 부탁드릴 참이니까요. 비록 교수님께서 지금은 저를 보란 듯이 반대하기로 작정하셨지만, 당신이 절 위해 직접 간청하는데, 설마 저를 쫓아버리기야 하시겠어요?

심각한 편지에는 유쾌한 답장. 클라라는 사랑의 조바심때문에 작은 사랑의 표현조차 빠뜨리고 만 연인을 놀리듯이 - 이렇게 답장했다.

그냥 간단히 ‘네‘만 하라고요? 그 짧은 말 한 마디가 그렇게 중요하다니! 당신 마음은 내 마음처럼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가득 차있는 게 아니었나 보죠?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온 영혼을 담아 그
‘네‘ 라는 말을 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 그래요,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 내 가장 깊은 마음을 다해 당신께 그 ‘네‘라는 말을
속삭일 게요. 영원히요!

슈만은 뤼케르트Friedrich Rückert, 1788~1866의 시구를 빌려, 클라라를 "나보다 더 나은 나mein befres Ich"라고 부른다. 이처럼 사랑은 ‘나‘와 ‘너 사이의 구분을 잊게 만든다. 하지만 동시에 사랑하는 ‘너‘는 ‘나‘를 이전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존재이다. 이처럼 사랑하는 두 사람은 서로의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며 서로를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한다.
슈만과 클라라는 서로에게 그런 존재였다.

‘만남‘의 자리를 기념한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따로 흘러가던 두 가닥의 시간이 겹쳐지는 순간, 역사가 달라지고 운명이 뒤바뀐다. 내가 기억해야 할 만남의 자리는 어디인!
가 -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꼭 숙고해야 !
할 주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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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을 볼 때 이따금 나는 내 외모가 내게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내 얼굴이 평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가 로스차일드만큼 부자라면 누가 내 얼굴을 문제로 삼겠는가? 휘파람만좀 불면 수천 명의 여자가 그들의 미모를 받쳐 들고곧장 내게로 달려올 것이 아니겠는가? (…) 어쩌면나는 아주 지력이 탁월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이마의 넓이가 일곱 뼘이나 된다고 하더라도,
이 넓은 세상에는 여덟 뼘의 이마를 가진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내가 로스차일드라면, 내 옆에있는 그 여덟 뼘의 이마를 가진 현인이 무슨 의미가있겠는가? (…) 말할 나위도 없이 돈은 절대적 위력을 지닌다. 그러나 또 한편 돈은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돈의 주요한 위력은 바로 그 점에 있다. 돈은 모든 불평등을평등하게 한다.(미성년)

어떻게 보면 나는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일 수도있다. 아니 내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고 말하는편이 더 적절할 것 같다. (…) 내게 필요한 것은 강한힘으로 얻어지는 것, 강한 힘 없이는 절대로 얻을 수없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고독하지만 내적인 안정이깃든 인식이다! 이것이 바로 전 세계 인간이 그토록얻으려고 힘쓰는, 가장 완전한 의미의 자유의 정의인 것이다! (미성년)

.... 하인들에게 흔히말하는 태도가 참으로 흐 거들먹거리는 근성 같은 것은 조금도 없어보이는 거들먹거리는 근성 같은 것은 조금도 없었다. (...) 가장 중요한 점은 그러한 공손한 태도였어.
(…) 그의 흠잡을 데 없는 그런 태도는 오만을 완전히 버림으로써 얻어진 것이었지. 그 정도가 되면 어떠한 처지에 있든, 어떠한 운명에 처하든, 자기 스스로 자신에 대해 흔들림 없는 확신과 같은 신념이 생길 것이다. 자신이 처해 있는 바로 그 상황에서 자신을 존중하는 능력은 이 세상에서는 아주 보기 드문것으로, 진정한 품위와 마찬가지로 정말로 귀한 것 이지."
하인 신분의 마까르가 얼마나 올곧고 품위가 있었는지귀족인 베르실로프가 그와의 만남을 두려워할 정도였다.
그건 베르실로프가 마까르의 아내를 빼앗아 돌고루끼를 낳았기 때문만이 아닌 마까르의 이 세상에서 아주 보기 드문 진정한 품위 때문이었다.

물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 모두 마까르처럼품위를 갖출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지루한데다 고되기까지한 일상은 사람의 몸과 정신에서 우아함을 앗아 가게 마련이다.
더욱이 마까르는 아내를 뺏긴 뒤 종교적 순례를 다니면서 자신의 품위를 더욱 공고히 하기 때문에 누구나 그처럼 될 수 있다고 말하면 근본주의자나 다름없다.
하지만 베르실로프가 아닌 마까르에게 진정한 품위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게 된다. 내가 욕망하는 것들이 반드시중산층 이상의 부를 축적해야 이룰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안심이 된다. 종교 순례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이 노력을 기울인다면 일정 수준까지는 내적 힘을 기를 수있다는 뜻이니 말이다. 만약 넉넉하고 성숙한 집안 문화 아래에서만 품위 있고, 편안하고 자유로운 대인 관계를 맺을수 있고, 자기 재능에 집중할 수 있는 인간이 된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허세덩어리 귀족 베르실로프마저 이렇게인정하고 있다.

"대체로 그들(민중)은 우리보다 훨씬 자신의 문제를 잘 해결하는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더없이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놓이더라도 자신들의 일상적인 생활을 계속 할 수 있고, 또 그들의 생활과는 동떨어진 이질적인 환경 속에서도 전혀 흔들림 없이 본래의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 있지. 우리는 도저히 그럴 수가없지만, (….) 민중은 정신적으로나 정치적인 측면에서 위대한 생활력과 거대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는것을 증명해 왔다."

오늘도 살아 보겠다고 꾸역꾸역 일터로 가는 모든 직업인, 온갖 집안일과 돌봄 노동으로 가족의 일상을 지켜 주는주부들, 고급 과외는 받지 못하지만 공부해 보겠다고 눈에불을 켠 평범한 집안의 자식 모두가, 설령 때로 꼬일 대로꼬여서 번민하더라도 어느 순간에는 ‘자신이 처해 있는 바로 그 상황에서 자신을 존중하는 능력을 갖출 수 있고, 그럼으로써 ‘진정한 품위를 갖출 수 있다.

"너의 하늘이 청명하기를, 너의 사랑스러운 미소가 밝고 평화롭기를, 행복과 기쁨의 순간에 축복이너와 함께하기를! 너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어느 외로운 가슴에 행복과 기쁨을 주었으니까" (백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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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베냐민은 어떤 이야기에서 이렇게 썼다. "그 섬에는열일곱 종의 무화과가 있다고들 한다. 그 이름들을 - 행속에서 제 길을 가는 남자가 혼잣말하기를 - 알아야 할거야." 그러니까 각각의 무화과 종류는 제각기 독특해서다른 것으로 치환될 수가 없다. 그런 독특성은 열일곱 종의 무화과를 한 이름만으로 부르지 못하게 한다. 보편적명칭은 그들의 유일성, 제각기의 특성, 고유한 이름의 특성을 없애는 일이다. 이런 독특성 덕분에 각각의 무화과종류는 제각기 저만의 이름, 곧 고유한 이름을 얻는다. 각각의 무화과는 저만의 이름을 갖고 그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 마치 이름이 그 본질, 그 존재에 접근을 허용하는 순간적인 암호이며, 오직 고유 이름으로 부르기, 그런호출만이 그 본질을 맞추는 것만 같다. 그들이 그토록 다른데, 그것을 단 하나의 이름, 하나의 보편적 명칭으로 부른다면 각각의 무화과 종류의 존재를 알지 못할 것이다.
오로지 독특한 것만을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 고유한 이름을 붙이기, 고유한 이름으로 부르기가 각각의 무화과 종류를 체험할 열쇠를 손에 쥐여 준다. 잘 알다시피 인식이아니라 체험이 중요하다. 체험은 일종의 부르기, 또는 깨우기다. 진짜 체험, 즉 불러내는 대상은 보편성이 아니라 독특성이다. 오로지 이것만이 만남을 가능케한다.

뛰어난 것이 시들어도 울지 마라! 머지않아 그것은 젊어지리니! 너희 마음의 멜로디가 멈추어도 슬퍼하지 마라!!
머지않아 어떤 손이 그 소리를 다시 켜게 되리니!!
나는 어떠했던가? 나는 끊어진 현악연주 같지 않았던가? 소리를 조금 더 내긴 했지만 그것은 죽음의 소리였다.
나는 이미 어두운 백조의 노래를 부른 다음이었으니!
죽음의 화환을 나 자신에게 둘러주고 싶었지만 나는 겨우겨울 꽃들만 지녔다.
프리드리히 횔덜린, 《휘페리온》

니체는 이름 붙이기를 권력행사로 파악한다. 지배자들은
"각각의 물건과 사건을 하나의 소리로 낙인찍고 그로써 그것을 소유한다." 그에 따르면 언어의 기원은 지배자들의권력선포‘ 이다. 언어는 ‘가장 오래된 물건 점유과정의 잔향이다. 모든 낱말, 모든 이름이 니체에게는 하나의 명령이다.

원추리 꽃이 화려하게 무성하다. 노랗고 빨간 색으로 빛난다. 그렇다, ‘빛난다 leuchten‘는말은 꽃피는 원추리를 위한 동사다. 장미는 빛나지 않는다.
장미는 다른 동사를 요구한다. 광채를 내뿜는다strahlen고할 수도 없다. 아네모네나 밀짚꽃은 광채를 내뿜는다. 그럼장미는? 장미는 반짝이지도glänzen 않는다. 약간 멈추어 있기 때문이다. 장미는 뒤로 물러선 자세다. 장미의 화려함의비밀이 거기 있다. 장미는 장미한다. 장미하다 rosen가 장미를 위한 동사다.

릴케는 장미와 천사를 사랑했다. 내 정원엔 수많은 장미들이 있다. 이들은 내 눈을 섬세하게 풀어준다. 정원 입구에천사상 둘이 서 있다. 그들이 나의 장미정원을 보호한다. 릴케는 장미에 대한 시를 많이 썼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수많은 눈까풀 아래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잠이 되고 싶은 열망이여.

장미들로 이루어진 밤, 수많은 수많은
환한 장미들로 이루어진 밤, 장미들로 이루어진 환한 밤,
천 개 장미눈까풀들의 잠.
환한 장미-잠, 나는 너의 잠자는 자.
네 향기들의 환한 잠자는 자, 네 서늘한
내면성의 깊은 잠자는 자.

그럼 마치 꽃잎이 꽃잎을 건드리기에
감정 하나 생겨나는가?
그리고 이것은, 감정 하나가 눈까풀처럼 열리고
그 아래 순전히 눈까풀, 감긴 눈까풀들이
있는 건가, 마치 열 배나 잠자면서
내면의 시력을 약화시키기라도 하는 듯.


지금 이 순간 릴케의 이 장미 구절들을 사랑한다. 잠을이룰 수 없기 때문에, 깊지만 환한 잠, 장미 잠을 갈망하기때문이다. 나는 기꺼이 잠들어 그 누구도 아닌 사람, 이름없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것은 구원이리라.

오늘날 우리는 오직 에고 나 자신에만 열중해 있다. 누구나 큰 소리로 누군가가 되고자 하고, 누구나 진짜가 되고자 하며 다른 사람과는 달라지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모두 같다. 나는이름 없는 사람들이 그립다.

하이데거는 유명한 휴머니즘 편지에서 이렇게 쓴다.

인간이 한 번 더 존재 가까이에 있어야 한다면, 그보다 먼저 이름 없는 자로 존재하기를 배워야 한다. 공공성을 통한 유혹이나 사적인 것의 무력함을 동일한 방식으로 깨달아야 한다. 인간은 발언하기 전에, 먼저 존재Sein가 다시자기에게 말 걸게 해야 한다. 정작 말 걸어오면 거의 할말이 없는, 또는 드물게만 할 말이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우리는 오늘날 모두 특별한 존재이기에 할 말이 너무 많고, 소통할 것이 너무 많다. 우리는 고요함과 침묵을 잊었다. 나의 정원은 고요함의 장소, 정원에서 나는 고요함을 만든다. 나는 휘페리온처럼 귀 기울여 듣는다.

디지털화는 결국은 현실 자체를 없앤다. 또는 현실은 디지털 내부에서 현실성을 빼앗기고 하나의 창이 된다. 머지않아 우리 시야는 3차원 디스플레이와 같아질 것이다. 우리는 점점 더 현실에서 멀어진다. 나의 정원은 내게는 다시 찾은 현실이다.

"땅을 보호하라는 명령, 곧 땅을 아름답게 대하라는명령이 땅에서 나온다. 보호하다 schonen‘ 라는 낱말은어원으로 보아 아름다운 것dem Schönen‘ 이라는 말과친척이다. 아름다운 것은 우리에게 그것을 보호할 의무, 아니 명령을 내린다. 아름다운 것은 보호하는 태도로 대하는 것이 옳다. 땅을 보호하는 것은 인류의절박한 과제이자 의무이다. 그것이 아름다운 것, 뛰어난 것이니 말이다. 보호는 찬양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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