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시간을 알리는 시계 소리를 세며 화려한 낮이 무서운 밤 속에 묻히는 것을 볼 때, 또 바이올렛이 한창 시절을 지난 것을 보고, 또 검은 고수머리가 백은(白銀)으로 변한 것을 볼 때, 한때는 가축을 위하여 폭염을 가려 주던 나무들의 잎이 다 떨어진 것을 볼 때, 여름의 푸른 것들이 모두 다발로 묶이어서, 희고 총총한 그 수염 보이며 영구차로 운반되는 것을 볼 때, 그때 나는 그대의 미에 대하여 생각하노라, 그대도 시간의 흐름 속에 가야 한다고, 고운 것도 아름다운 것도 제 모습을 버리고, 다른 것들이 자라나는 것과 같이 빨리 없어지기에. 세월이 낫으로 그대를 베어 갈 때 막아 낼 길은 없느니, 만일 자식을 낳은 것이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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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이 그 완전성을 유지하는 것은 다만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 또 이 거대한 인생 무대는 . 많은 별들이 알지 못할 감화를 주며 비판하는 한낱 쇼를 연출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 또 사람의 번식도 식물처럼 하늘의 도움도 받고 방해받으며, 젊은혈기 속에서 뽐내다가 절정에 도달하면 곧 시들어, 그 미모가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을 생각할 때, 이 무상에 대한 나의 상상은 내 눈앞에 그대의 찬란한 청춘을 포악한‘시간‘이 쇠퇴와 공모하여 더러운 밤으로 화하게 하려고 하는 것을 보노라. 나는 그대를 위하여 ‘시간을 대적하여 그가 그대 뺏으려 할 때 시(詩)로써 새롭게접목하노라.
18
내 그대를 한여름 날에 비겨 볼까? 그대는 더 아름답고 더 화창하여라. 거친 바람이 오월의 고운 꽃봉오리를 흔들고, 여름의 기한은 너무나 짧아라. 때로 태양은 너무 뜨겁게 쬐고, 그의 금빛 얼굴은 흐려지기도 하여라. 어떤 아름다운 것도 언젠가는 그 아름다움이 기울어지고 우연이나 자연의 변화로 고운 치장 뺏기도다. 그러나 그대의 영원한 여름은 퇴색하지 않고, 그대가 지닌 미는 잃어지지 않으리라. 죽음도 뽐내진 못하리, 그대가 자기 그늘 속에 방황한다고 불멸의 시편 속에서 그대 시간에 동화(同和)되나니, 인간이 숨을 쉬고 볼 수 있는 눈이 있는 한 이 시는 살고 그대에게 생명을 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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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눈은 화가가 되어 그대의 미모를, 나의 가슴의 화판에 옮겨 놓았노라.. 나의 몸은 그 그림의 틀최상의 화가의 기술이 원근법을 썼노라. 진정한 모습이 그려졌는지, 그 기교는 화가 자신을 거쳐서만 알 것이, 그림은 고요히 나의 가슴의 화실에 걸리고, 그대의 눈은 그 방의 창문. 이렇게 눈과 눈이 서로 도와나의 눈은 그대의 모습을 그리고, 그대의 눈은 나의 가슴의 창이 되어, 태양은 그 창으로 그대의 모습을 보려 하도다. 그러나 내 눈은 작품을 우아하게 할 재주 없어, 보이는 것은 그려도 마음은 몰라라.
25.
별의 은총을 받는 자들로 하여금 명예와 훌륭한 칭호를 자랑하게 하라, 나에게는 이러한 승리의 길이 막히었지만, 내가 가장 존경하는 것에서 예기치 않은 기쁨을얻었노라. 왕후(王侯)의 총신들이 그들의 잎새를 펴지만, 태양을 따르는 금잔화같이 그들의 자랑은 자신들 속에 묻어 버리리. 군주가 한 번 찌푸리면 그 광영(光榮)은 슬고 마나니.. 전공으로 유명한 노고의 용장(勇將)도, 천 번 이긴 뒤에 한 번 패하면, 광영의 명부(名簿)에서 말살되고 노고로 얻은 공적은 다 망각되느니.. 그렇다면 나는 행복되어라 사랑을 하고 사랑을받고, 이별을 하지도 않고 당하지도 아니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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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과 세인의 눈에 천시되어, 혼자 나는 버림받은 신세를 슬퍼하고, 소용없는 울음으로 귀머거리 하늘을 괴롭히고, 내 몸을 돌아보고 나의 형편을 저주하도다. 희망 많기는 저 사람, 용모가 수려하기는 저 사람, 친구 많기는 그 사람 같기를. 이 사람의 재주를, 저 사람의 권세를 부러워하며, 내가 가진 것에는 만족을 못 느낄 때, 그러나 이런 생각으로 나를 거의 경멸하다가도 문득 그대를 생각하면, 나는 첫새벽 적막한 대지로부터 날아올라 천국의 문전에서 노래 부르는 종달새, 그대의 사랑을 생각하면 곧 부귀에 넘쳐, 내 운명, 제왕과도 바꾸려 아니 하노라.
감미롭고 고요한 명상의 궁전으로 지난 옛일의 기억을 불러올 때면, 나는 갈구하던 모든 것들을 갖지 못함을 한숨짓고, 귀중한 시간을 낭비한 옛 비애를 새삼 애탄하노라. 그리고 죽음의 끝없는 밤 속에 숨어 있는벗들을 위하여 메말랐던 내 눈을 눈물로 적실 수 있고, 오래전에 잊혀진 비련(悲戀)을 다시 슬퍼하고, 사라진 많은 모습들의 상실을 탄식하노라. 그러면 지나간 슬픔을 슬퍼할 수 있고, 예전의 애통한 슬픈 사연을 하나하나 헤아려 전에 지불했던 셈을 아니 한 듯이 다시 지불하노라. 그러나 벗이여, 그때 그대를 생각하면, 모든 손실은 회복되고 슬픔은 끝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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