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많은 청소년들이 소비할 때 큰 죄책감을 낀다고 고백합니다. ‘미래 생명에 대한 책임’, 이것이 그들이 당연히 가져야 할 기본자세라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란 기실 지구에서 잠시 살다가 떠나는 것이고, 지구는 다음 세대인 미래 생명이 살아야 할 터전이므로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지금 나의 욕망을위해서 끝없이 소비하는 것은 책임 있는 자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독일에서는 생태 교육이 매우 중요시되기 때문에 이러한 환경의식, 생태적 감수성이 대단히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웨덴의그레타 툰베리가 불러일으킨 청소년의 ‘생태 반란은 모두 이런철저한 생태 교육을 바탕으로 생겨난 것이지요. 과연 한국에서소비할 때 죄책감을 느끼는 청소년은 얼마나 될까요? 아마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독일의 성교육은 우리의 이러한 성교육과 전혀 다릅니다. 성의 영역도 68혁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지요. 68혁명은 일종의 성 혁명이었으니까요. 독일은 성과 관련해서 죄책감을 갖는 아이들이 거의 없습니다. 독일에서는 아주 이른 시기부터, 그러니까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성교육을 체계적으로 실시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성교육의 첫 번째 원칙입니다. 성과 관련해서 절대 윤리적 평가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대원칙입니다. 성을 윤리적으로 비판함으로써 아이들이 죄의식을 갖게 해서는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은 윤리와 아무 상관 없는 영역이라고 봅니다. 성이라는 것은 생명과 관계되고 인권과 관련된 중요하고 예민한 영역 이므로 성과 관련하여 충분한 책임의식을 갖도록 가르쳐야 하지만 그렇다고 성을 악마화해서 아이들의 내면속에 죄의식이 생기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독일에서는 성교육을 가장 중요한 정치교육으로 본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약간의 설명이필요합니다. 독일의 교육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민주주의 최대의 적은 약한 자아"라고 했습니다. 왜한국에서는 이렇게 민주주의가 취약할까 고민하던 시기에 아도르노의 에세이에서 본 이 말은 저에게 개안의 충격을 주었지요. 이 말이 옳다면 약한 자아를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민주주의를 할 수 없다는 얘기지요. 민주주의를 하려면 구성원 하나하나가 강한 자아를 가진 성숙한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것이니까요. 저는 이 말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가 왜 취약한지를깨닫게 되었습니다. 한국인들은 과연 얼마나 강한 자아를 가지고 있을까요?
자아, 에고가 형성되는 시기는 곧 리비도가 발현되는 시기입니다. 바로 이때 인간은 처음으로 리비도와 슈퍼에고 사이에서 분열된 에고를 체험하게 되지요. 리비도는 자연적인 현상이므로, 인간이 일정한 나이가 되면 이런 생물학적 충동을 느끼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제부터가 문제이지요. 성에 대해 억압적인 사회일수록 슈퍼에고가 리비도를 윤리적으로 공격하고, 이른바 ‘악마화(dimonisieren)‘합니다. 성적 본능을 사회적으로 억압하고, 윤리적으로 나쁜 것으로 치부하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가 바로 그런 사회이지요. 이러한 성적 본능을 나쁜 것이라고 공격한다고 리비도가 사라지나요? 아닙니다. 슈퍼에고가 리비도를 공격하면 할수록 리비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에고가 점점 더 강한 죄의식을 내면화하게 됩니다. 여기서 죄의식‘이라는 개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것이 정치적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버젓이 살아 있는 것을 악이라고 공격하면, 인간의 자아는 죄의식을 내면화할수밖에 없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일종의 성 정치학‘이 탄생하는것입니다. 깊은 죄의식을 내면화한 인간일수록 약한 자아를 갖게 되고, 약한 자아를 가진 인간일수록 권력에 굴종적인 인간이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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