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그는 『페스트』에서 화자이자 주인공인 리유의 입을 통해 페스트와 전쟁을 비교하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전쟁이 일어나면 어리석은 짓이니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듯이 페스트같은 재앙이 일어나면 그런 재앙은 인간의 척도로 이해할 수 있는것이 아니므로 비현실적이거나 악몽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사람들은 오만하고 습관적이어서 여전히 모든 것이 전처럼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재앙이 발생하고 지속되는 한 그 누구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이제 인정해야 할 것이면 명백하게 인정하여, 쓸데없는 두려움의 그림자를 쫓아버린 다음 적절한 대책을 세워야한다.

진실이 아니라 사랑이 부조리에서 구원해준다고 믿는다. 그 사랑은 동지애와 우정 같은 좀더 넓은 인간 관계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시시포스 신화』에서 그는말한다. "그들에게는 오직 하나의 사치가 있을 뿐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관계의 사치다.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이 세계 안에서 인간적인 오직 인간적인 것에 불과한 것은 무엇이든 보다 뜨거운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을 어찌 깨닫지 못하겠는가. 긴장된 얼굴들, 위협받은 동지애, 인간들 상호 간의 지극히 강하고 수줍은 우정,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진정한 부유함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언젠가 소멸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카뮈 자신이 밝힌대로 이방인이 ‘부정‘에 대한 소설이라면 『페스트」는 ‘긍정‘에 대한 소설임을 알고 있다. 카뮈는 전쟁이라는 비극을 몸으로 겪으면서 인간의 삶과 역사에 대한 깊은 비관적 인식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개인은 그 어떤 노력으로도 고통을 이겨 낼 수 없고, 고통을 이겨낸다고 하더라도 그로부터 어떤 구원의 약속도 얻을 수 없으며, 전쟁이 끝난다 해도 폐허의 비참 속에 버려진채 또 닥쳐올 전쟁에 대한 두려움으로 몸을 떨어야 하기 때문이다. 페스트가 밀어닥친 도시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도 인간은 행복하기를 원한다. 인간에게는 그럴 권리와 의무가 있다. 행복을 향한 욕구 속에서 우리는 희망을 가지게 되며, 행복과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곧 고통에 대한 반항을 의미한다. 앞에서 언급한 카뮈의 소설 속 분신들은 신뢰와 우정,헌신과 희생을 통해 끝끝내 반항하며 삶의 희망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지킨다. 카뮈 자신의 말대로 우리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 요컨대 인간은 매 순간 죽음에 면역되지 않고 죽음의 실상을 의식하며깨어 있어야만 죽음(타나토스)에 대비되는 삶(에로스)을 가장 열렬하고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죽음에 면역되면 삶의 매 순간에도 또한 무감각해지게 될 터다. 죽음과 고통의 타나토스, 행복과 희망의 에로스, 중요한 것은 부정을 긍정으로 승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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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니까, 아픈 것도 인생이야. 사람이 상처를 겪으면 외상 후 스트레스성 장애라는 것을 겪는다고 하고 그게 맞지만, 외상 후 성장도 있어. 엄청난 고통을 겪으면 우리는 가끔 성장한단다. 상처가 나쁘기만 하다는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거지. 피하지 마. 피하지만 않으면 돼. 우린 마치 서핑을 하는 것처럼 그 파도를 넘어 더 먼 바다로 나갈 수 있게 되는거야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제는 뿌리보다 줄기를 믿는 편이다

줄기보다는 가지를,
가지보다는 가지에 매달린 잎을,
잎보다는 하염없이 지는 꽃잎을 믿는 편이다.

희박해진다는 것
언제라도 흩날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나희덕, 「뿌리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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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에서 영화 〈알제리 전투>가 다시 머리에 떠오른다.
"사람의 얼굴은 둘이다. 하나는 웃고 하나는 운다." 영화 속 알제리민족해방전선 조직원들 사이의 암호다. 카뮈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않아서 흥미롭다. 그러나 웃든 울든 얼굴은 하나가 아닌가. 얼굴은울 수도 있고, 웃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카뮈의 말대로
"어느 것도 거부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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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이것은 마치 우리가 그림을 그릴 때와 마찬가지의 상태입니다. 시선은 사물과 결합되고자연과 한데 엮여 있으면서도, 손은 홀로 그 자신의 길을 따라 나아가고, 그러는 와중에 때로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거나 흔들리다가도, 이내 다시 기쁨에 젖어, 무언가를 바라보는 일 없이도 그저빛나고 있는 저 별들처럼 가만히 얼굴 아래로 깊이 가라앉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저의 작업 방식은 항상 그러했습니다. 얼굴이 먼 곳을 향한 시선을 머금는 동안에도, 손은 그 자리에 홀로 남겨져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래야만 한다고 말씀드리고도 싶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야 저는 다시금 시간과 한데 어우러질 수 있을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저는 지금처럼 외로움 속에 지내야만 할 것이며, 저의 외로움은 말하자면 누군가의 발걸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또한 이제껏 누구의 발걸음도 허락해본 적 없는 숲과 같은, 그렇게 단단하고 확고한 무언가가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한 외로움은 자기가 가진 모든 특별함을, 모든 예외성을, 의무들을 잃어버려야만 합니다. 외로움이 곧 일상이되어야 함은 물론이며, 동시에 자연스럽고 반복적인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설령 덧없기 그지없는 생각일지라도, 제게 다가오는 생각들은 언제나 저를 완전한 외톨이로 여길 수 있어야만하며, 그럴 때에야 그것들은 다시금 저를 믿게 될 것입니다.

어떤 유일한 것, 시급한 것이 필요합니다. 스스로를 자연에, 강한 무언가에, 노력하는 것에, 밝음에 절대적으로 결합시키는 것으로서 말입니다. 아울러 그것은 더없이 작은 것, 혹은 더없이 일상적인 것 안에서 어떤 순수한 전진을 실현하는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기쁘게 붙잡은 것들 속에서, 아직 드러나지 않은 먼 곳을 향한 우리의 모든 시선 속에서, 우리는 비단 지금의 이순간과 그 다음에 다가올 순간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들과 더불어 우리 안에 둥지를 틀고 있는 모든 지나간것들을 변화시키고, 그것들을 우리 안에 짜 넣으며, 그럼으로써우리가 알지 못했던 고통의 생경한 형체를 풀어 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마침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저고통이 과연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많은 삶의 동력을 우리의 혈관 안에 흘려 넣었는가를!

왜냐하면 근본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그 누구도 삶 속에서다른 이를 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매번 갈등이나 혼란스러움을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다시금 도달하게 됩니다. 인간은 혼자라는 사실 말입니다.

누구나 자기 안에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미래를, 자기만의 폭과자기의 세계를 품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삶의 가장 훌륭한 점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따금 자기 안에 존재하는 것, 다시 말해자기의 고유한 내면을 견뎌 내는 것이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어려움은 우리가 보다 확고하게, 또는 어쩌면 이렇게 말하는 편이 보다 온당할 것입니다. 완고하게 자기 자신만을 고집해야 할 그런 순간들 속에서, 스스로를 자기 바깥의 무언가와 결합시키려 할 때에 찾아오게 됩니다. 그럴 때면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사건들은 우리의 고유한 중심점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바깥의 낯선 것으로, 타인들에게로 옮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이것은 지극히 간단한 무게중심과 균형의 문제입니다. 그리고이런 상황에서는 오직 무거운(또는 어려운) 것만이 분명한 역할을 해낼 수 있는 법입니다.

부모에게서 삶을 배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이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들의 삶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경험들에는 우리가 그것을 겪어 내기 위한 저마다특별한 속도들이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각자에게 알맞은 속도 이에서, 각각의 경험들은 비로소 새롭고 깊이 있는, 그리고 풍부한것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혜라는 것은, 결국 어러 상황들 속에서 그에 맞는 특별한 속도를 발견해 내는 능력이라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의도를 가지는 것만큼 도움의 손길을 방해하는것은 달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심들만큼이나 경솔한 것도 달리 없을 것입니다.
결심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동안 우리는 그만 지쳐버려서, 그것을실행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게 되어 버리고 마는 까닭입니다.

만약 삶의 전문가가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를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첫째는 사물과 향기, 감정, 지나간 것들, 아침놀과 동경들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위대한 멜로디이며, 둘째는 이 충만한 합창을 채워 주고 완성시키게 될 각각의 목소리들입니다. 아울러 하나의 예술작품을, 다시말해 보다 깊은 삶의 형상이나, 비단 지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닌어떤 초시간적인 경험의 상을 정초하고자 한다면, 모쪼록 다음의두 가지 음성을 올바른 관계 안에서 화합시킬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알맞은 때로부터 울려 나오는 하나의 음성과, 그 안에서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울려 나오는 또 하나의 음성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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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의에서 제시하는 소설, 즉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을읽는 이유부터 얘기해 보죠. 저는 소설을 읽으면서 교훈을 얻는 것이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당대 비판성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이 시대의 모습을 소설에 비춰 보는 겁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삶은 어떻습니까? 사실 우리가 스스로사는 모습을 거리를 두고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은 정도가아니라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지요. 이런 점에서 적어도 제가 책, 특히 소설을 읽는 이유는 지금 우리 삶에 대해 물어보는 데 있습니다.

비평을 나타내는 영어riticism의 어원인 그리스어 크리티코스(kriticos)에는 분별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봐야 분별할 수 있어요. 예컨대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의 비판본이 쓰인다면 그가 남겨 놓은 상태로 다시 보겠다는 뜻이지 부정적으로 보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주목할 것은 소설 읽기가 상당히 관습화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유학 가기 전까지 읽은 책이 소설밖에 없습니다. 제 사유 능력과 상상력은 다 소설 독서를 통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 때문인지 저는소설이 점점 이상하게 기능화되는 점에 대한 분노가 많습니다. 책한 권을 어떻게 읽느냐 하는 것은 내 삶을 어떻게 보느냐 또는 우리 사회, 우리 문화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보는 방법이 회로화되어 버리면 뭘 보든 그 회로를 따라가게 됩니다. 그래서 책 한 권을 다시 보기 시작한다는 것은 곧 우리가 다른영역에서도 충분히 새로운 관점을 가질 가능성을 발견하거나 경험하는 사례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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