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루소가 걸을기회를 놓치는 법은 없었다. "그 정도로 사색하고 그 정도로 존재하고 그정도로 경험하고 그 정도로 나다워지는 때는 혼자서 걸어서 여행할 때밖에 없었던 것 같다. 두 발로 걷는 일은 내 머리에 활기와 활력을 불어넣어준다. 한곳에 머물러 있으면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할까, 몸 이 움직여야 마음도 움직인다고 할까. 시골 풍경, 계속 이어지는 기분 좋은 전망, 신선한 공기, 왕성한 식욕, 걷는 덕에 좋아지는 건강, 선술집의 허물없는 분위기, 내 예속된 상태와 열악한 상황을 생각하게 하는 것들의부재. 바로 이런 모든 것이 내 영혼을 속박에서 풀어주고, 사유에 더 많은용기를 불어넣어주고, 나를 존재들의 광활한 바다에 빠지게 해준다. 그덕분에 나는 그 존재들을 아무 불편함이나 두려움 없이 마음껏 결합하고 선택하고 이용할 수 있다. 여기에서 루소가 그려 보이는 보행은 물론 이상적인 보행, 즉 건강한 사람이 쾌적하고 안전한 길에서 자발적으로선택한 보행이다. 나중에 루소의 무수한 상속자들이 행복, 자연과의 조화, 자유, 미덕의 표현이라고 여기게 되는 보행도 바로 이런 보행이다.

걷는 경험 속에서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사유가 된다. 자신으로부터도피하기란 불가능하다. 43 순례길에 나선다는 것은 가족 관계, 애착 관계, 지위, 의무와 같은자신의 복잡한 세속적 자리를 뒤로하고 일개 순례자로서 걸어간다는 뜻 이다. 순례자들 사이에는 서열이 없다. 은총과 헌신의 서열이 있을 뿐이다. 터너 부부는 순례를 경계선 상태(timinality)라 말한다. 과거 정체성과 미래 정체성 사이의 경계선에 놓인 상태, 따라서 기성 질서 밖에 있는 상태이자 가능성의 상태이다. 경계선 상태가 문턱을 뜻하는 라틴어 limin에서 온 단어라고 할 때, 순례자는 상징적 의미로 보나 물리적 의미로 보나 그런 문턱을 넘어가 있다. "문턱을 넘어간 사람(liminar)은 지위와 권위를 빼앗긴 사람, 권력에 의해서 인정되고 유지되는 사회구조에서 쫓겨난사람, 수련과 고행을 통해서 밑바닥 층으로 낮아진 사람이다. 그러나 성스러운 힘이 세속적 힘없음을 보상해준다. 성스러운 힘이란 약자들의 힘으로서, 구조적 권력이 사라지고 본성이 부활함으로써 생겨나기도 하고성스러운 인식을 받아들임으로써 생겨나기도 한다. 이 힘이 사회구조에속박돼 있던 많은 것들, 특히 동지애와 공동체 감각을 해방한다.

길을 따라간다는 것은 먼저 간 사람의 해석을받아들인다는 것, 학자나 탐정이나 순례자처럼 먼저 간 사람의 뒤를 밟는다는 것이다. 같은 길을 걷는다는 것은 어떤 중요한 일을 똑같이 따라한다는 것이다. 같은 공간을 같은 방식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같은 생각을 하는 방법, 같은 사람이 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따라한다.
는 것은 그 누군가의 행동을 흉내내는 연기가 아니라, 그 누군가의 영혼을 닮기 위한 노력이다. 순례가 다른 모든 보행과 다른 점은 이렇게 반복과 모방을 강조한다는 데 있다. 신을 닮기란 불가능하지만, 신이 걸어간길을 똑같이 걸어가는 일은 가능하다. 예수가 인류의 실족(Fall)을 대속하는 과정에서 가장 인간적인 모습, 발을 헛디디고 진땀을 흘리고 상처입고 세 번 넘어지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14처에서다. 하지만 이 14처가 어느 성당에서나, 아니, 아무 데서나 볼 수있는 일련의 그림이 되면서, 신도들이 따라가는 것은 이제 수난의 장소가 아니라 수난 이야기가 되었다. 성당에 그려진 14처는 신도들이 예루살렘으로 걸어 들어가는 통로,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 속으로들어가는 통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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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삶의 의미를 삶 그 자체가 아닌 외부에서 찾으려 합니까?" 그가 물었다. "우리의 전설이 말하는왕이 실제로 존재하느냐고요? 나도 모르지만, 그건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아는 것은 초승달처럼 가느다란 지구의 반사광 아래로 달의 산들이 아름답게빛난다는 사실입니다. 태어난 이후로 한 번도 왕을보거나 들을 수 없었으니 나 역시 그의 실제성을 의심할 만하지요. 하지만 나는 삶을, 순간의 아름다움을, 행동하는 기쁨을 의심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소피스트들은 인생이라는 별의 궤도에서는 찰나에불과하며 패배와 죽음 외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나는 승리와 삶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겠습니다. 우리가 죽음에 관해 무엇을 압니까? 영혼이 불멸한다면 우리는 죽지 않을 것이고, 영혼이 육체와 함께 소멸한다면 우리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도 모를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영원한 존재인 것처럼 살아가십시오. 지구가 텅 비어 버렸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해서여러분의 삶이 바뀌었다고는 믿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지구에 사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 안에 살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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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 삶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나 자신을 보여지는 나와바라보는 나‘로 분리시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언제나 나를본다. 보여지는 나에게 내 삶을 이끌어가게 하면서 바라보는 나가그것을 보도록 만든다. 이렇게 내 내면 속에 있는 또다른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의 일거일동을 낱낱이 지켜보게 하는 것은
이십 년도 훨씬 더 된 습관이다.
그러므로 내 삶은 삶이 내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거리를 유지하는 긴장으로써만 지탱돼왔다. 나는 언제나 내 삶을 게리 밖에서 지켜보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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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를 새로운 삶으로 이끈 것은 단순한 삶에 대한열망이었다. 쓸모없는 것들과 최대한 멀어져서 딱 본질에만 충실하게,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내 시간을잡아먹고,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집안일에 시간을 덜 쏟는 대신 아이들과 놀아주기, 중요한업무에 집중해서 빠른 시간 안에 끝내기, 오늘은 뭐 입을까 고민하는 시간에 아침 운동하기. 그렇게 구체적인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자 내가 해야 할 일이 보였다. 미니멀리스트가 되어야 했다. 정신을 쏙 빼는 잡동사니에 둘러싸여 어떻게 중요한 것에 집중하겠는가. 일상은 루틴으로 만들어 단순화할 필요가 있었고, 내 에너지를 빼앗는 흡혈귀 같은 사람들과 거리를 둘 필요가 있었다. 신경을 빼앗는 것들로부터 나를 지켜야 했다.

미니멀리즘은 물건뿐만 아니라 삶의 방식에 관한 이야기다.
이 책에서는 미니멀리즘을 향한 획일적인 접근 방식을 거부한다. 당신이 상상하는 미니멀리스트의 하얗고휑한 집을 제안하지 않을 것이다. 각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모습을 일방적으로 좇기보다는 자신의 방식으로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
누구나 자신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방식을 찾을 수있다. 한 가지 기준만 잊지 않으면 된다. 가장 중요한 것 에 많은 에너지를 쏟으며 덜 중요한 것은 지워버려라.

흠 잡을 데 없이 합리적인 대답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말의 밑바탕에는 어느 날 그의 집에 있는 어떤 물건(아니면 누가 알겠는가, 모든 물건)을 더 이상 쓰지 못할 수 있다는 가정이 깔려 있다. 세상이 바닥날지 모른다는 가정.
이와 똑같이 행동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다음에 살 신발이 지금 것만큼 마음에 들지 않을까 봐너덜너덜해진 신발을 버리지 못한 적이 있는가? 다시는이만큼 파격적인 할인이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서 단골 매장에서 한 달 용돈을 모두 써버린 적이 있는가? ‘재고 5개‘라는 빨간색 작은 글씨가 눈에 띄어 장바구니를클릭한 적이 있는가?
이것이 희소성의 법칙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자신이사고 싶은 것이 바닥나는 일은 없을 것임을 알면서 이와반대로 자원은 바닥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대개 이런 착각에 빠진다. 희소성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은 무언가에 집착할 만한 합당한 이유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새것을 사는 일과 낡은 것을 버리지 않는 일, 이 두가지 행동의 결과로 우리는 지금껏 축적한 물건에 치여물리적으로 부담을 느끼고 감정적으로 버거워한다.

내 조언은 단순하다. 부디 해로운 인간관계를 지금 상태로 방치하지 마라. 이런 식으로 생각하자. 볼 때마다스트레스 받는 어수선한 방을 더 이상 방치하지 않을 생각이라면, 왜 이보다 훨씬 더 교묘하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인간관계를 그대로 방치하는가? 누군가를 멀리한다고 해서 당신이 나쁜 사람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강한 사람이 될 것이다. 자신을 보호하면서 자신과 관계를 맺는 대상을 부단히 경계하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당신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그리고 자신을 존중받도록만들 수 있는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다.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은 그 사람들과 관계가 있을 뿐이지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단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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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현대의 본질적 상황이다. 우리를 비관주의에 빠뜨린 것은 단지 세계대전만이 아니며 최근의경제 침체는 더더욱 아니다.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일시적인 부의 감소나 심지어 수백만 명의 죽음보다도 더욱 근본적인 문제다. 비어 있는 것은 우리의 집이나 금고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다. 이제는인간의 변치 않는 위대함을 믿거나 삶에 죽음으로 지울 수 없는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우리는 영적 고갈과 의존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마치예수의 탄생을 갈망했던 그 시대처럼.

어쩌면 아시아가 유럽보다 더 심오했고 중세 근대보다 더 심오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과학으로부터 항상 적당히 거리를 두었기 때문이다. 과학은 가닿는 모든 것을 죽이고 영혼을 뇌로, 생명을 물질로인격을 화학으로, 의지를 운명으로 전락시키기 마련이니까. 어쩌면 어느 대담하고 금욕적이며 아직도 종교적 열정이 강한 인종이 죽음과의 ‘과학적인 사랑 속 에서 환멸에 빠진 서구인들을 사로잡아 흡수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것이야말로 사상의 최종 승리인 셈이다. 모든 사회는 분열될 것이며 마침내 사상 가 자신마저 무너지리라. 어쩌면 사상의 발명이야말로 인류의 근본적 실수가 아닐까?

그리하여 이 최후의 잔혹극에서 철학은 과학과손을 잡고 파괴에 착수한다. 철학이 그토록 오만하게설파하고 열렬하게 추구하는 총체적인 시각이야말로의지와 환희의 (매우 드물지만) 가장 위험한 적이다.
세상이 그토록 거대하고 생물 종은 무수히 많으며 시간은 무한한 것이라면 한 개인이 그 어떤 의미나 존엄을 지닐 수 있겠는가? 지식이 늘어나는 자에게는 그만큼 슬픔도 늘어나며, 지혜는 딱 그만큼의 허무뿐인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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