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성숙의 잣대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느끼느냐의 여부, 나아가 얼마나 많은 타인의 고통을 느끼느냐의 여을 가중시키기그런 남편보다 백배는 더 성숙하다고 할 수부로 결정된다. 타인, 나아가 타자의 고통을 느끼는 순간 아이는 성숙해지고, 겉만 어른이던 사람도 진짜 어른이 된다. 성숙의 과정을거치면서 인간은 자신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하염없이 작아지는것을, 혹은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자기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자신의 고통을 중심으로 타인이 돌아간다는 감정적 천동설에서 벗어나 자기만큼이나 타인도 고통에 아파한다는 감정적 지동설로 이행하기 때문이다. 나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타인을 비롯해 모든 생명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아는 순간, 인간은 생물학적 나이와는 상관없이 성숙한어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타인의 고통을 느낀다는 것! ‘일체개고‘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안다면, 우리는 그 일체의 것들에게 잔인하게 굴 수 없다. 오히려 그것들의 고통을 경감시켜주려는 마음을 품을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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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를로-퐁티는 여러모로 싯다르타의 통찰을 따르고 있다. 타타타!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자고, 결국 무언가를 파괴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그의 말대로 ‘폭력의 종류‘ 혹은 ‘폭력의 정도‘를 선택하는 것뿐이다. 달리말하면, 인간은 선과 악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악 중에서최소의 악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폭력과 폭력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폭력 중 최소의 폭력을 선택해야 한다. 이것이메를로-퐁티의 윤리다. 최대의 폭력과 최소의 폭력 중 후자를 선택하려 한다면, 우리는 충분히 윤리적일 수 있다.
이제야 새벽 산사에서 울려 퍼지는 법고 소리와 정갈한 공양 시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분명해진다. 싯다르타 이래 부처가 되고자 했던 모든 스님들은 최소 폭력을 선택해야 한다는 고뇌를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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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에는 사물(四物)’이라는 것이 있다. 법고(法鼓), 범종(梵鐘), 목어(木魚), 운판(雲板)을 가리킨다. 법고는 대개 가죽으로 만들어진 북이기에 들짐승과 관련된다. 즉, 법고는 들짐승을 깨우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범종은 인간을 깨우고, 목어는 물고기를 깨우고, 운판은 날짐승을 깨운다. 새벽이 오면 사찰에서는 법고를 제일 먼저치고, 이어서 목어, 운판, 범종 순으로 친다. 들짐승을 먼저 깨우고최상위 포식자 인간을 가장 마지막에 깨우는 감수성에 주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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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타인의 아픔이나 고통이 내 다리의 아픔이나 고통처럼 느껴진다면, 그 타인은 이미 내 몸이나 다름없다.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느끼면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우리는그 사람을 더 이상 고통스럽게 할 수 없다. 누군가의 목을 조르려면내 손에 그 사람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아야 한다. 동물을 죽이려면그 동물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아야 한다. 꽃가지를 꺾으려면 그 나무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아야 한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타인의고통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 즉 고통의 감수성이다. 바로 이것이자비라는 거창한 용어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평범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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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가르침은 고(苦), 즉 고통의 자각 혹은 고통의 느낌에서 출발한다. ‘일체개고(一切皆苦)’는 ‘일체 모두가 고통이다‘라는 싯다르타(Siddhartha Gautama, BC 563?~BC 483?)의 근본적인 가르침이다. 모든 것이 고통이라니, 얼마나 당혹스러운 가르침인가? 보통 종교라면 희망과 낙관적인 미래를 이야기하기 마련인데, 불교는 애초부터 모든 것이 고통이라고 말한다. 불교 경전에는 ‘타타타(tathata)‘라는 산스크리트어가 자주 반복된다. ‘있는 그대로‘라는 뜻의 타타타는 한자어로 진여(眞如), 여실(如實), 혹은 여여(如如)라고 번역된다. 마음속에 어떤 선입견도 갖지 않고 외부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일체개고‘는 타타타한 진실, 여실한 진리, 혹은 여여한 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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