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현존은 생각하는 마음 바깥에서, 서로 동참하는 관계 안에서 경험되는 것이다. 마음은 본디 보고 맛보고 사랑하기보다판단하고 분석하고 통제하는 경향이 있다. 마음이 ‘벌거벗은 지금에 현존하거나 머물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마음은 일거리를 원하고 사물을 가공 처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 게임을 멈추는 열쇠는 아주 간단하다. 침묵 또는 그냥 가만히 있음이다. 토머스 키팅 신부가 지혜롭게 보았듯이, 침묵만이 하느님의 첫째가는 언어이며, "그 외의 다른 모든 것은 서투른 번역"일뿐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실질적 차원에서 침묵과 ‘하느님’은 동시적으로, 차라리 동일한 것으로 경험될 것이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나면 당신은 더 깊은 침묵으로 들어가고 싶을 것이다. 지난 5백 년 동안 말로써 말이 많았던 종교는 이 비결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 같고, 결국 침묵 자체를 겁내게 된 것 같다. 그래서는 말할 것도, 증명할 것도, 생각할 것도, 방어할 것도 없는 광야40일 속으로 예수를 따라서 들어갈 수 없다.

‘마음의 평화‘라는 말을 자주 하지만 실제로 그런 건 없다.
당신이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한 당신은 결코 참 평안을 누릴 수 없다.
당신이 참 평안을 누린다면 당신은 마음 안에 있는 게 아니다.
위의 어느 쪽 말도 믿거나 믿지 않거나 하지 말고,
그냥 정직하게 당신 자신을 관찰하라. 그때 당신은 알게 되리라.
하지만 그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앎 일것이다.

마르타는 모든 일을 아주 잘했고 제대로 했다. 다만 한 가지.
‘지금 여기에 있지를 못했다. ‘현존을 못한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자신의 억울한 느낌에, 어쩌면 자신의 순교자 콤플렉스에, 남에게필요한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자신의 욕구에 깨어있지 못했다.
일종의 선하지 못한 선행이다!

자기에게 깨어있지 않으면 손님에게 깨어있을 수 없고, 하느님께도 깨어있을 수 없다. 현존이란 현재에 존재함이다. 다시 말해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당신이 어떻게 현존하느냐가 곧 모든일을 어떻게 하느냐다. 예수는 일상생활의 차원에서 마르타에게도전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신적 차원에서 어떠하냐를 반영하기때문이다. 일상에 신적 차원을 반영하는 것이 바로 마르타가 ‘해야 하는 한 가지 일이었다.

"사랑과 아픔만으로는 아무도 하느님께 갈 수 없다.
그러나 사랑과 아픔을 겪은 사람만이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갈수 있다."
마르타가 더 훌륭한 마르타가 되는 것으로는그 자리에 갈 수 없다. 그러나 사랑 때문에 겪는마르타의 분주함, 좌절, 서툰 짓,
헛된 시도들이 마침내 마리아로 바뀔 실마리가 된다.
우리 모두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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