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형(서울 주민)
"환경문제는 인류의 보편적인 숙제인데 무작정 화장터 설립을 반대하면 안 되죠. 해당 시설들은 어디든 반드시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화장터는 필요하지만, 우리 동네에는 안 된다는 입장은 매우 이기적이죠. 설마 정부에 돈을 더 달라고 요구하고 그러는 건아니죠?"

이미혜(화장터 예정 부지 근처 주민)
"물론 환경문제는 우리 모두 함께 해결해야 하는 숙제죠. 그런데 왜인류의 보편적인 숙제를 일부 지역 사람들만 떠안아야 하죠? 서울사람들은 매립장, 소각장, 폐기물 처리장 등과 관련해 논란이 벌어지는 지역이 어디인지 알기나 할까요? 인류의 숙제를 도시보다 낙후된 지역에 사는 사람들만 풀어야 한다니 모순이죠. 책임은 모두에게 있는데, 왜 힘없는 사람들만 피해를 입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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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성숙의 잣대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느끼느냐의 여부, 나아가 얼마나 많은 타인의 고통을 느끼느냐의 여부로 결정된다. 타인, 나아가 타자의 고통을 느끼는 순간 아이는 성숙해지고, 겉만 어른이던 사람도 진짜 어른이 된다. 성숙의 과정을거치면서 인간은 자신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하염없이 작아지는것을, 혹은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자기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자신의 고통을 중심으로 타인이 돌아간다는 감정적 천동설에서 벗어나 자기만큼이나 타인도 고통에 아파한다는 감정적 지동설로 이행하기 때문이다. 나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타인을 비롯해 모든 생명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아는 순간, 인간은 생물학적 나이와는 상관없이 성숙한어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겨울에 길을 가다 추위와 배고픔으로 옴짝달싹 못하는 길고양이와 마주칠 때가 있다. 그렇게 고통을 직면하면 고양이를 품에 안고 집으로 데려갈 수밖에 없다. 고양이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면 그냥 지나치겠지만 이미 느껴버렸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고양이가느끼는 추위와 배고픔에 대한 고통을 완화시키려는 자발적 감정이자 의지, 혹은 노력은 이렇게 탄생한다. 고양이를 외면할 수도 있다. 고양이의 고통보다 고양이를 집에 데려옴으로 인해 생길 나의고통이 더 크다고 판단하거나, 결국 고양이의 고통이 사무치게 전달되지 않은 탓이다. 내 넓적다리에 느끼는 고통만큼 고양이의 고통이 다가와야 고양이의 고통을 완화해주려는 감정과 행동이 나온다. 바로 이것이 ‘일체개고‘ 라는 명제로 싯다르타가 절규했던 가르침의 핵심이 아닌가.
타인의 고통이 사무치면 우리 마음에 자비가 차오르게 된다. 자비, 혹은 그냥 사랑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니 새겨두자, ‘사랑의 핵심은 고통을 느끼는 것이고, 그렇게 느낀 고통이 가짜가 아니라 진짜라면 우리는 그 고통을 완화하려는 즉각적이고 자발적인 행동을시작한다.‘ 사랑이 연민과 다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연민은 행동을 낳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에 대한 감수성에 기반한 실질적인 사랑은 항상 상대방에게적중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배가 고프면 그에게 밥을 해준다. 그가배고프면 나도 배고프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외로워하면그와 이야기를 나눈다. 그가 외로우면 나도 외롭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그를 업고 병원에 간다. 그가 아프면 나도 아프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걷기 힘들면 그의 지팡이가 되어준다. 그가 거동이 힘들면 나도 힘들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우울하면 그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재롱을 떨어준다. 그가 우울하면나도 우울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추우면 그에게 옷을 벗어준다. 그가 추우면 나도 춥기 때문이다.
진짜 사랑이 열정적인, 그리고 자발적인 노동을 낳는 것도 이런이유에서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사람이 배부르면, 사랑하는 사람이 지인과 행복한 담소를 나누면, 사랑하는 사람이 건강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힘차게 잘 걸으면, 사랑하는 사람이 명랑하면, 우리는고맙기만 하다. 진짜 사랑할 때에는 질투라는 감정이 상대적으로약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완화시켜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이 완화되었는지 여부뿐이기 때문이다. 잊지 말자. 질투심이 강해질수록 우리의 사랑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가 되어간다는 사실을.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먹여 배고픔의 고통을 완화하는 것은 사랑이자 동시에 선한 일이다. 그렇지만 배고픈 사람에게는 한 공기의 밥이면 충분하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고통에도, 그리고 고통의 감수성에도 중도가 필요한 이유다. 두 공기의 밥은 배고픔의 고통 대신 배부름의 고통을 선사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고통은 잠시완화시킬 수 있을 뿐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 없다.

대화가 사랑의 행위라면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무거움을 나에게로 고스란히 가지고 와야 한다. 그러니까 나는 아내와, 나는 남편과, 나는 딸과, 나는 아들과, 나는 후배와 규칙적으로 소통하고 있으니 돈독한 관계라고 자랑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되물어야 한다. 대화를 나눈 뒤 상대방의 무거움을 자신이 충분히감당해서 무거워졌는지. 만약 충분히 무거워졌다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그만큼 홀가분해졌을 것이다. 당신은 마침내 제대로사랑을 한 것이다. 상대방의 고통을 잠시나마 완화시켜주는 데 성공한 셈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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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발돋움
헨리 나우웬 지음, 이상미 옮김 / 두란노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치유하는 일은 친밀한 빈 공간을 낯선 손님에게 마련하여 베풀어주는, 보잘것없으면서도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그 공간에서손님은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두려움 없이 되돌아보며, 혼란스러움의 한가운데에서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는 자신감을 얻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진단이라는 말을 그 말 본래의 심오한 의미인 속속들이 안다(diagnosis; dia=속속들이 gnosis= 앎)‘라는 의미로본다면, 모든 치유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환자를 충분히 알려는 관심 어린 노력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진단이란 현재 그들의 삶을 모양짓고 형성하며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을 이끌었던 그들의 즐거움과 아픔, 기쁨과 슬픔, 성공과 좌절을 알려는 노력입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치유란 무엇보다도,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 정말로 관심 있게 들어주는 사람에게 자기의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친밀한 빈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을 뜻합니다.

복음은 우리가 각기 처한 인간적인 상황에 부응하는 소식입니다. 또한 교회는 규칙을 따르라고강요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우리의 주림과 목마름을 채워주기 위해 상을 차려놓고 우리를 부르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교리는 우리가 고수해야 하는 생소한 문구들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어둠 가운데 하나의 빛으로 여러 세대를 거쳐 전수된 가장 심오한 인간의 경험을 상세하게 문서로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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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깨닫는다고 하여, 사회적 현실이 곧 변하지는 않지요. 변화란 쉽지 않습니다. 뿌리 깊은 인간의 열망에 호소할수 있을 때만 변화가 가능하겠죠. 중국에서 열린 학술 대회에참가했다가 북한 여성 한 명과 나누었던 대화가 기억나네요.
북한 사람들의 생활상이 궁금하여 이것저것 묻다가, 이렇게물었습니다. ‘북한 여성들에게 인기 있는 남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녀는 준비라도 한 듯 주저 없이 대답했습니다. ‘인격이 훌륭한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습니다. 오, 과연.
재차 물었습니다. 인격이 가장 중요한가요? 인격이 훌륭하면다른 것들은 상관없나요?‘ 그녀는 여전히 주저 없이 대답했습니다. ‘돈이 없어도 인격이 훌륭하면 여성들이 좋아합니다.
다시금 물었습니다. 남자가 대머리여도 상관없나요?‘ 갑자기그녀가 주춤하고, 짧은 침묵이 흘렀습니다. 벌목 중인 야산과같은 내 두피를 흘낏 본 뒤, 이내 ‘대머리여도…… 상관없습니다!‘라고 소리 높여 대답했습니다. 그것으로 그 대화는 끝났지만, 나는 북한 사회의 변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그짧은 침묵을 떠올립니다.

이처럼 모호한 표현으로 중요한 사안을 결정하고자 할 때,
불리한 위치에 있는 것은 발화자가 아니라 청자다. 표현이 모호하면, 발화자는 그 표현이 담고 있는 의미를 나중에 자의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여지를 누리게 된다. 그리하여 그 모호한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따져봐야 하는 책임은 청자에게로넘어가기 일쑤다. 모호했던 말이 나중에 멋대로 바뀌었을 때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청자다. 그래서 정치인들이 모호한 말들을 남발하면, 시민사회 구성원들은 그 말뜻을 구체화하라고요구해야 한다. 새 정치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을 선거가끝난 다음에 하면 너무 늦을 수 있다. 결혼하고 나서, 동전 방석을 건네는 남편에게 "오빠가(우) 말한 돈방석은 지폐 방석이 아니었어?"라고 따지면 너무 늦은 것이다. "동전은 돈 아니야?"라는 대답이 돌아올 수 있다. "동전 방석이라니, 세상에.
약속대로 빨리 지폐로 방석 만들어줘"라고 거듭 요구하면, 베네수엘라 지폐로 방석을 만들어줄지도 모른다. 베네수엘라는근년에 자국 통화를 95퍼센트 이상 평가절하했고, 베네수엘라의 최저임금 노동자는 월급의 3분의 1을 줘야 기껏 콘돔 한상자를 살 수 있다고 한다. "내가 어느 나라 지폐로 방석을 만든다고 구체적으로 말한 적이 있었나."

그렇다고 해서, 구분이 다 능사라는 말은 아니다. 어떤 구분은 지나치게 정치적이다.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과 같은 인종 구분은 서구 제국주의의 전개와 더불어 정착되었다. 나는황인종으로 분류되지만, 내 뽀얀 우윳빛 속살을 볼 때마다 나는 내가 황인종이라는 ‘사실‘을 의심한다. 인종 구분과 같은것이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구분이 단지 현상을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현상을 평가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노예라는 말을 생각해보라. ‘노예‘라는 단어는 단지 특정 현상을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평가하는 역할까지 한다. 그렇기에,
조선 시대 노비를 노예로 부를 것인가, 위안부를 성노예로 부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정치적인 이슈이기도 하다.
퀸틴 스키너(Quentin Skinner)가 말했듯이, 평가어는 해당사회의 의식을 반영한다. 그렇기에, 어떤 단어에 단순히 변화를 준다고 해서, 해당 사회가 곧 바뀌는 것은 아니다. 장애인에 대한 의식을 개선하기 위하여, 장애인이라는 말 대신 ‘장애우‘라는 말을 택한다고 해서 관련된 사회의식이 자동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명실상부한 사회의식 변화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장애우라는 신조어는 오히려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스트레스만 줄 수도 있다. 친구로 대하지도 않으면서 왜 친구라고 부르는거야...

영정 사진은 망자를 상기시키기 위해 거기에 있지만, 영정 사진이 곧 망자는 아니다. 즉 재현은 그 어떤 대상을 상기시키지만 그 대상 자체는 아니다. 어떤 풍경화도 그것이 표현하는 풍경 자체는 아니다. 어떤 나라의 지도도 그것이 가리키는 나라 자체는 아니다. 어떤 지구본도 지구 자체는 아니다.
호르헤 보르헤스는 이 점을 혼동하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일이 벌어지는지 일종의 사고실험을 통해 보여주었다.
누군가 현실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궁극의 지도를 만들겠다고 꿈꾼다. 그는 실제의 풍경과 모든 점에서 일대일로 정확하게 대응하는 지도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의 작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 될수록 그 지도는 점점 더 커져간다. 그래서마침내 지도가 현실과 완벽하게 조응하게 되었을 때, 그 지도의 크기는 현실과 똑같은 크기가 된다. 문제는 그렇게 큰 지도는 들고 다닐 수도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현실과 똑같다면그냥 현실을 들여다보면 되는데, 무엇 하러 똑같은 크기의 지도를 들여다보겠는가?
요컨대, 대표 혹은 재현이라는 것은 복제나 모사(模寫)가아니다. 자신이 대표하고자 하는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핵심적인 특징을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목달기도 대표 혹은 재현의 일종이다. 글 내용을 최대한 모사적으로 전달하려 든다면, 책 내용 전체가 그냥 제목이 되어버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마치 호르헤 보르헤스가 말한, 그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정확한 지도가 실제 풍경과 똑같을 정도로거대한 크기가 되어버렸듯이...

이처럼 제목은 중요하다. 제목은 독자의 관심을 환기하고,
일견 모호하고 불투명한 책 내용을 선명히 해줄 수 있고, 다면적인 글 내용에 일정한 방향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제목으로 인해 비로소 글이 완성되는 멋진 경우도있다. 미국의 작가 찰스 부코스키의 시를 한 편 읽어보자. 아래의 시는 그 제목에 의해 비로소 완성되는 것 같다.
"믿기지 않겠지만 갈등이나/고통없이 평탄하게/살아가는 사람들이/정말 있다./그들은 잘 차려입고/잘 먹고 잘 잔다./그리고 가정생활에 만족한다./슬픔에 잠길 때도/있지만/대체로 마음이 평안하고/ 가끔은 끝내주게/행복하기까지 하다./죽을 때도 마찬가지라 대개 자다가 죽는 것으로 수월하게 세상을 마감한다./믿기지/않겠지만그런 사람들이 정말존재한다."
찰스 부코스키가 지은 이 시의 제목은 외계인들>이다.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보르헤스는 말했다. "가장 행복한 것은책을 읽는 것이에요. 아, 책 읽기보다 훨씬 더 좋은 게 있어요.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것인데, 이미 읽었기 때문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고, 더 풍요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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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공감은 타인에 대한 정서가 수반된 반응이라는 점에서동정심과 매우 유사하며, 일반적으로 차이를 두지 않고 혼용해 쓰곤 한다. 하지만 상담 분야에서는 공감과 동정을 엄격히 구분한다. 공감을 할 경우, 자아는 이해를 위한 도구로 활용되기 때문에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 반면, 동정은 다른 사람의 곤경이나 정서에 대한 민감성을 강화해 자의식이 감소한다. 즉 공감할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우리로 대체하지만, 동정할 때 우리는 우리를 다른 사람과 대체한다. 따라서 동정은 공감보다 타인의 정서에 더 깊게 사로잡혀 있는 상태이며, 자신과는 서서히 분리된 감정 상태에 빠지는 것을 의미한다.

벤 카슨의 선택이 가슴에 와 닿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벤 카슨은 모든 상황에서 환자를 최우선으로 고려했다. 환자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였기 때문에 두렵지만 새로운 수술을 시도한 것이다.
차후에 얻게 된 명성은 처음부터 그의 목적이 아니었다.
선택의 기로에서 벤 카슨의 결정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존재한다. 바로 환자에게 가장 최선이 되는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그 선택이 비록 자신의 역할을 넘어서는 일이고, 자신도 처음이라 두려움과 위험을 안고 가는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결심을 하기 전, 벤 카슨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했고, 그러한 자신의 선택이 환자에게 최선의 결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열심히연구하고 실력을 쌓았다. 결국 벤 카슨이 의학사에 있어 ‘최초‘ 라는 수식어를 달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환자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그의 마음가짐과 실력 함양을 위한 끝없는 노력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단 한 번의 실패도 없는 삶이 존재할까? 아마도 그런 삶을 산사람은 단 한 번도 도전하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한평생 살다 보면 감당하기 어려운 삶의 무게에 휘청거릴 때가있기 마련이다. 바로 그때, 그 어려움에 대응하는 방식이 그 사람의 인생을 성공과 감동의 삶으로 만들거나 또는 그것과는 거리가먼 삶으로 전락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말기 췌장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음에도 전 세계인에게 감동을 안겨주었던 카네기 멜런대학의 랜디 포시 교수의 말이 떠오른다.
"어떤 성취를 이루는 과정에서 반드시 벽에 부딪히게 되지만 벽이있는 이유가 있다. 그 벽은 우리가 무언가를 얼마나 절실히 원하는지를 시험하는 것이다."

원래의 모습에서 멀어진 우리를 누가 진지하게 대해줄까요? 우리의 이상한 행동과 더듬거리는 말투는 우리에 대한 타인의 인식을바꾸고, 자기에 대한 자기 인식도 바꿔버립니다. 우리는 바보처럼우스꽝스러워지고, 무능해집니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병이죠. 여느 병과 마찬가지로 원인이 있고, 진행되며, 치료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전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애쓰고 있을 뿐입니다. 이 세상의 일부가되기 위해, 예전의 나로 남아 있기 위해. 그렇기에 저 자신에게 순간을 살라고 말합니다.
읽었던 부분을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란 형광펜으로 줄을쳐가며 연설문을 읽는 앨리스가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같은 병을앓는 사람들을 위로하며, 자신의 역할을 다하려는 모습은 깊은 감동을 안겨준다. 우리는 앨리스의 연설을 통해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과정이 기억을 상실해가는 과정이지만, 자아를 고민하는 과정이기도 함을 느낄 수 있다.

낙인의 가장 큰 문제는 아마도 낙인 효과‘를 불러오는 편견이라 할 수 있다. 하워드 베커의 주장처럼 낙인이 찍힌 사람 대다수는 관습, 도덕, 법 등 사회규범에서 벗어난 일탈 행위를 저지른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전혀 의도치 않게 실수로 잘못이나 죄를 범했고, 그에 따른 충분한 대가를 치른 사람조차도 낙인이 찍힌다는 것이다. 한 번 찍힌낙인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그 때문에 낙인찍힌 사람은 새로운 삶을 살아갈 의지와 기회를 잃게 되고, 또다시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악순환이 초래된다.
결국 이러한 낙인 효과‘는 사회규범을 어긴 자는 또다시 규범을 어길 것이라는 부정적인 편견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실수와 잘못을 저지른다. 설령 잘못을 의도적으로 범했더라도깊이 반성하고 그 죗값을 치른 사람에게는 편견을 갖지 않고, 그가 사회의 구성원으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게 옳다.

제니는 과거에 초인종에 응답하지 않았던 선택을 계속 후회하기보다, 지금 소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기로 했다. 과거의 행동에 매여 있어도 달라지는 것은없다. 무언가를 바꾸고 싶다면 과거가 아니라 지금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제니는 알았던 것이다.
이 영화에서 ‘언노운 걸‘, 즉 신원미상의 소녀는 유럽에 거주하는 흑인 이민자 소녀였지만, 우리나라에도 또 다른 배경을 가진,
사회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소외된 많은 언노운 걸이 존재한다.
한 사회의 수준은 그 사회가 가장 궁핍하고 소외된 계층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한 개인의 도덕적 가치는 그가얼마나 많은 권한을 가진 자리에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소외된자를 위한 삶을 살고 있는지로 평가할 수 있다. 영화 <언노운 걸〉을 만든 형제 감독이 원했던 것처럼, 우리 사회에 언노운 걸들이더 이상 존재하지 않도록 모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다시 한번숙고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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