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사는 법 -괴테

아름답게 살고 싶다면
지나간 일에 구애되지 말고,
쉽게 화를 내지 마십시오.
언제나 지금을 즐기며,
특히 남을 미워하지 말고,
앞날은 그저 하느님께 맡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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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도시들은 잡종성‘이 강하다. 혼성性이라고 해도 좋다. 유럽처럼 원조를 자처하며 순종을 내세우는 문화, 미국처럼 혁신을앞세워 신종新種을 지향하는 문화와는 달리 우리는 순종을 품고 신종을 지향하되 그 무엇이든 품에 안는 잡종雜種의 문화다.
왜 잡종성이 강해졌을까? 급격한 사회적 충격과 낯선 문물의습격을 받아들이고 적응시키고 숙성시키는 과정을 스스로의 힘으로감당하기 힘들었던 근대기의 험난한 역사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역사의 단절, 전통의 부정, 폐허로 변한 환경, 부족한 인프라, 급격히등장한 각종 도시 문제, 상업화 물결의 습격 등 다사다난한 과제들을 짊어지고 나름의 방식으로 생존하기 위한 현대의 시간 속에서 저도 모르게 학습한 힘의 결과다.

예찬하는 태도에는 어떤 ‘바름‘이 필요하다. 무턱대고, 무작정,
맹목적으로 예찬하는 태도란 무턱대고, 무작정, 맹목적으로 비판하하는 이유는 천만 가지라도 댈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이 작동하는 방는 태도와 별로 다르지 않다. 좋아하는 행위만 마음의 문제인 것이아니라 싫어하는 행위도 마음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른바 교조적인 기준, 규범적인 기준, 또는 유명세 이상을 넘어서는 자신만의 눈이 필요하다.
물론, 예찬한다고 해서 그 대상이 완벽하다는 뜻은 아니다. 마치 결점이 있는 사람에게 훨씬 더 인간적인 매력이 있듯이, 결점을가진 인간이 어떤 덕목을 보일 때 훨씬 더 감동적이듯이, 도시도 마찬가지다. 비록 우리 도시의 현재에 대해서 불만이 많다 하더라도그 때문에 좋은 점을 보지 못할 이유는 없다.

많은 도시들을 다녀보니 이것 한 가지는 뚜렷이 알겠다. 한 번이라도 가본 도시는 대체로 더 좋아진다는 사실이다. 좋아하니까 간것 아니냐고? 물론 그런 점도 있겠으나 모든 여행 스케줄을 내 뜻대로 짜는 건 아니므로 우연히 들르는 경우도 생기고, 특히 업무 출장은 선호도와는 상관없이 결정되기 마련이다. 실제로 보고 나면 더의문이 많아지기도 한다. 선입견이 깨지는 것은 물론 막연한 인상에서 벗어난다. 사람을 실제로 만나고 시간을 같이 보내고 나면 사뭇다른 면을 발견하게 되는 것과도 비슷하다.
잘 알게 되고 알게 되면 좋아진다는 이치가 작용하는 것일까? 알고지내던 사람의 집에 가보고 나면 그 사람이 더 잘 보이는 것과 비슷이치다. 잠깐이라도 스친 도시는, 아주 짧게 몇 시간이었다 하더라도, 더 가깝게 다가온다.
또 한 가지 뚜렷한 점은 그 도시에 실제로 가보고 나면 기존에가졌던 생각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좀 더 확신이 들기도 하고 좀 더 의문이 많아지기도 한다. 선입견이 깨지는 것은 물론 막연한 인상에서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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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유명한 도시나 건축물, 공간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건축물이나 공간이 지닌 스토리 안에 한발 더 들어가면 세상에 흥미롭지 않은 사례는 없다. 그것이 성공이든 실패든,절반의 성공이든 반쪽짜리 진실이든 말이다. 게다가 유명한 건축물이나 공간은 오랜 시간에 걸쳐 검증받은, 이른바 ‘클래식‘ 이다. 시간을 초월해서 ‘고전‘이 된 충분한 이유가 있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충분한 소이연이 있다. 스토리를 알고 나면 더 많은 것을 느끼게됨은 물론이다.
유명한 건축물이나 공간을 상투적으로 칭송하거나 미화하는 것을 나는 우려할 뿐이다. 미화하다 보면 자칫 흉내 내고 싶은 마음이든다. 칭송하는 마음은 자칫 잘못된 환상이나 쓸데없는 콤플렉스로이어지기도 한다. 왜 우리는 이렇게 못 만드나, 못 만들어왔나 하는공허한 질문을 하게 만든다. 잘못된 ‘벤치마킹’ 대상을 설정하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서 수없이 일어나는 일이다.
겉모습만이 아니라 속을 주의 깊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도시속 다양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총동원되었을 수많은 인간 군상들의 스토리는 그 자체로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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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은 핵가족과 냄새와 폭력에 대한 이야기다.
이제 삶은 계급이나 학연, 지연 따위로 구별되지 않는다.
욕망도 외모도 능력도 ‘초균질화되었다. 오직 냄새로만 구별된다.
코로나 역시 그렇다. 계급도 인종도 성별도 세대도 개의치 않는다.
오직 신체상태(혹은 면역력)만이 최종심급‘이다.
이 지점에서도 기생충과 코로나는 대칭적이다.
둘이 전하는 메시지도 서로 통한다. 사방 어디에도 출구가 없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
이 책이 이런 미증유의 시간대를 건너가는
‘소박한 힌트가 되기를 바란다."

괴물」이나 「설국열차에 비하면 완전 정상가족이에요. 당연히 월세겠죠. 창문으로 보이는 세상이 바깥 세상의 전부입니다. 전봇대에 오줌 싸는 술주정뱅이랑 소독차. 그러고 보니 ‘오줌’하고 ‘소독’, 이것도 다 위생적 코드잖아요. 반지하는 더럽다, 다시 말해 가난을 ‘위생적으로 불결하다’, 이렇게 설정하는 거죠. 그 불결의 상징적 코드가 바로 꼽등이와 바퀴벌레 같은 것들이고요.
그 다음 박사장네. 이선균이 연기했던 박사장 집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창문이 있죠. 대저택은 창문이 큰걸로 구분이 되죠. 집을 지은 사람이 남궁현자 씨죠. 이름도 참 의미심장한 거 같은데. 어떤 ‘현자’가 만든 집입니다. 특징이 창문이 무지하게 넓은 거죠. 반지하와의차이가 딱 느껴지죠? 햇볕이 쏟아집니다. 그래서 그 창바깥에 뭐가 있어요? 정원에 나무와 잔디밭이 근사하게조성돼 있습니다. 그러니깐 부자라는 건 뭐예요? 집안에 자연물을 들여놓을 수 있다는 거죠. ‘모던’과 ‘생태’의 조화를 꾀한다는 거죠. 이것도 사실 되게 어이가 없어요. 자연을 그렇게 무시하고 착취하면서, 부자는 집안에 숲이 있거나 정원이 있어야 하는거죠....

이렇게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차이가 사라졌구나,
그걸 느꼈습니다. 정보는 너무 공평하고, 욕망도 동일해요. 그래서 구별하기 힘들어요. 딸 기정이가 대저택 욕조에 몸을 담근 채 그 쾌적함을 즐기는 걸 보고 오빠 기우가 말하죠. "넌 정말 여기서 살았던 사람 같애." 너무자연스럽다는 겁니다. 정말 조금의 어색함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모든 것을 이미 인스타그램 이런 데서다 본 거예요. 어색할 수가 없지. 예전에는 가난한 사람이 부잣집에 가면 일단 눈이 돌아가서, 바로 촌티를 풀풀 날릴 수밖에 없어요. 음식까지 얻어먹으면 마치 천상의 맛을 보았다는 듯이 거의 황홀경에 빠질 지경이었죠..
하지만 디지털 문명의 도래와 함께 정보의 공평화와 감각의 균질화가 일어났어요. 그래서 옷만 딱 갈아입고 나면 전혀 구별이 안 돼. 이게 너무너무 놀라운 거예요. 반지하에 살던 네 사람이 그 대저택에 다 잠입을 해서, 다 일자리를 거뜬히 점거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기사를 쫓아낸다고 그 자리를 차지할 수가 있느냐가 관건인데, 그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밀어내는 순간 바로 그걸 채울 수 있는 거죠. 그야말로 데칼코마니라 할 수 있죠

이게 참 세련된 거죠. 그러니까 절대 타자와 내가 직접적으로 섞이고 싶지 않다,
이런 사고방식인데,이거야말로 ‘니들’과 ‘우리’는 급이 다른 부류야, 라고선을 긋는 거죠. ‘절대 저들과 나는 섞일 수 없어. 그래서 싸우는 것조차 싫어. 싸우면 침 튀기고, 침 이쪽으로올지도 모르고, 악수도 하기 싫어’, 이런 사고방식인 거죠. 박사장 부인이 송강호랑 악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손은 씻으셨죠?"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이게 디지털시대의 부자겠죠. 말 그대로 신흥 부르주아들. 세련되고, 민주적이고, 경제적으로 후하기까지 하죠. 그리고절대 상처 주는 말 같은 건 안 합니다. 왜? 신경쓰기 싫으니까. 신경쓸 가치도 없으니까. 아니, 이런 점도 작용한 거 같아요. 난 부자지만 괜찮은 사람이야, 휴머니즘도 있고 세련된 매너도 있다니까,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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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항상 환상과 기도라는 두 극점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일상사에 정신없이 빠져서 ‘기도‘ 라는 말
이 성가시게 들릴 때가 있습니다. 또한 기도가 쉽고 당연해서 삶이라는 말과 거의 똑같이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 우리는그 중간 어디쯤엔가에 있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한 손으로는 우리의 귀중한 소유물을 잡은 채 기도하면서 그것이 지닌 미혹성을 어렴풋하게나마 겨우 의식할 뿐입니다.
하지만 어떤 때 우리는 반쯤은 잠들고 반쯤은 깬 흐리멍텅한상태에서 다시 한 번 깨어나게 됩니다. 전쟁의 위기나 급작스런 가난, 병, 죽음 속에서 ‘인생의 부조리들‘ 에 맞닥뜨리게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중립적인 자리에 남아 있을 수 없게 되고 어떻게든 반응을 보이라는 요구를 받습니다. 많은 경우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눈에 띄는 반응은 우리의 당황스러움에서 터져나오는 반발심입니다. 자신의 환상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깨닫게 되고 우리의 반항심을 기도로 바꾸라는 요구를 받는 때가 바로 인생의 힘겨운 순간들입니다. 이것은 아주 어렵지만 우리를 실체로부터 멀어지게 하는일이 아니라 오히려 실체에 더 가까이 가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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