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빅터 - 17년 동안 바보로 살았던 멘사 회장의 이야기
호아킴 데 포사다 외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평범한 사람들이 무언가를 만들 때는 대부분 기존의 것에서 디자인을 살짝 고치거나 몇 가지 기능을 추가하죠. 이른바 지루한 덧칠작업이죠. 그에 반해 천재들은 사물의 결정적인 요소를 바꿉니다. 새로운 물건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만들죠. 세상에, 줄넘기에서줄을 없앨 생각을 하다니. 정말 친구 분을 빨리 만나 뵙고 싶네요!"

"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활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느껴도 그것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상한 점을 당연하게 여기기까지 하죠. 하지만 호기심이 왕성한 사람들은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들은질문을 하죠. 왜? 왜? 왜? 언제 어디서나 질문을 하는사람. 이들이 애프리가 원하는 창조적인 인재들입니다. 바로 빅터 씨처럼요."

그러자 불덩이 같던 남자의 체온은 거짓말처럼 정상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정신의 힘을 과소평가한다. 정신은 정신일 뿐이고 현실에서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못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신은 행동을 지배한다.
표지판을 잘못 본 등산객의 경우처럼 정신은 심지어육체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당신이 무엇을 믿느냐에따라 당신의 현실이 결정된다.

"세… 세상의 기준이 오옳… 은 것 아닌가요?"
"전혀 그렇지가 않네."
테일러 회장은 웃으며 검지를 흔들었다. 그리곤 검지를 가슴팍에 대고 줄을 긋듯 수직으로 내려 그었다.
"사람들은 심장이 왼쪽에 있다고 말하네. 그런데 사실 심장은 인체 중앙에 있어. 약간 왼쪽으로 치우쳤을뿐, 일반적인 위치 개념으로는 분명 중앙이야. 하지만으레 심장은 왼쪽에 있다고 알아왔던 탓에 모두 그렇게 말하는 것일세. 학창시절에 심장이 가운데 그려진인체해부도를 수없이 봤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눈보다 잘못된 상식을 더 믿는 거지."

17년 전 빅터를 저능아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로널드 선생의 눈에는 빅터의 IQ 평가표에 적힌 173 이란숫자가 73으로 보였다. 그게 사건의 전부였다. 단지 누락된 한 자리 숫자로 인해 빅터는 17년 동안 바보로 살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빨갱이 대신 좌파라고 불러 주지만, 좌파라는 완곡 어법은 여전히, 곧바로 ‘공산당 일당 독재·생산수단의 공동소유·평등한 분배’를 의미하는 스탈린주의를 뜻하고, 나아가 김일성·김정일 세습 왕가의 추종 세력임을 증명해 주는 불도장이다. 하지만 박노자는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의 보론 「좌파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단상」을 쓰면서, 좌파란 "시대 해방적이며 발전적인 경향을 주장하고 따르는 사람"을 일컫는다고 말한다. 그는 20세기 말에 무너졌던 교조적 현실 사회주의를 부정하면서 "현실에 대한 비판과 부정"의 정신을 가진 사람은 모두, 이미 좌파라는 세례를 베푼다.

중국이 조선을, ‘임금은 약하고 신하는 강하다’는 뜻의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라고 일컬었듯, 조선은 재상 우위의 국가, 요즘으로 말하자면 내각책임제 국가였다. 조선은 그 정치 구조상 임금이 아무리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려고 해도 사대부들이 따라 주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는 나라였다. 이런 나라에서 효종이 추진한 군비 확장 정책은 기득권에 안주하는 문신들의 강한 반발을 살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문신들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란 국란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다. 어떤 교훈을 얻기에는 이미 정치 구조가 고질적인 문치주의로 고착된 것이다. 군약신강과 문치주의! 이것에 대한 반동으로 나온 것이 우리나라 현대사를 비극으로 만든 계몽 군주에 대한 갈구가 아니었을까?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국가 형성기에는 강력한 군주가 있어야 한다는 국가주의 신화를 이승만·박정희와 같은 독재자를 통해 해갈하려고 했던 절박한 사정에는, 군약신강과 문치주의에 대한 한국민의 오래된 불신이 깔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위의 인용문은, 몇 년 전부터 신문과 방송을 통해 심심찮게 대할 수 있었던 ‘제왕적 대통령’에 대한 시큼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떤 사안에서든 그저 중립이나 중용만 취하고 있으면 무지가 드러나지 않을 뿐더러, 원만한 인격의 소유자로까지 떠받들어진다. 나의 중용은 나의 무지였다. 중용의 본래는 칼날 위에 서는 것이라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사유와 고민의 산물이 아니라, 그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것을 뜻할 뿐이다. 그러니 그 중용에는 아무런 사유도 고민도 없다. 허위 의식이고 대중 기만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는 무지의 중용을 빙자한 지긋지긋한 ‘양비론의 천사’들이 너무 많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음의 작용을 살피면서 공존할 수 있는 미래를 선택하는 일도 결국 ‘나는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종림 스님은 욕망과 무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잘 살고 싶고 뭔가를 하고 싶어 하는 욕망은 없애거나 억눌러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자유로이 일어나도록 살려야 하는 대상이라고 규정한다. 그렇다면 나의 욕망과 남의 욕망이 어떻게 서로 억누르지 않고 어우러질 수 있을까? 종림 스님은 마음이라는 틀 안의 내용을 비우자고 제안했다. 서로를 보장하고 존중하는 길을 비움 속에서 찾는다. 마지막으로 철학자 셸리 케이건과 함께 죽음을 마주한다. 그는 죽음이 삶을 부른다고 했다. 우리는 자신의 유한함과 끝을 충분히 인지할 때 살아 있는 순간을 허투루 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게 사랑에 대해 물었다. 로맨틱한 사랑 말이다. 정념을 미루고 차단하려 하는 오늘의 청춘들을 보며 애달픔이 일었다.

두 번째 이유는 이 공부가 실제로 내 삶에 통찰을 준다는 것입니다. 왜 화를 냈을까? 왜 기분이 처질까? 왜 어떤 사실은 기억하면서 다른 사실은 잊어버릴까? 그리고 이는 정치, 경제, 역사와 연결됩니다. 사람들은 왜 전쟁을 일으킬까? 가장 효과적인 정부의 틀은 무엇일까? 법이 존재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무정부적 질서를 지향해야 하는 것 아닐까? 돈을 꼭 각자 벌어 소유해야 하나, 아니면 모두가 함께 공유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이런 정치적인 질문은 결국 인간 본성에 관한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바로 ‘뇌는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관한 질문이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편으로 자신과 친구가 되도록 스스로에게 관대해져야 합니다. 그럴 때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할 때까지 나를 화나게 만드는 말씀을 다양한 면에서 살펴보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나는 나 자신의 친구가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할 때 자신을 이해하게 되고,
그런 다음에야 자신을 진심으로 위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성경본문은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구체적 이해를 담고 있습니다.
저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인격체인 나 자신과 하느님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이런 다양한 이해를 하나의 공통된 지평 안에 융합합니다.
이 새로운 지평 안에서 다른 시각으로 저의 삶을 바라보게됩니다. 저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고 이해하게 됩니다. 개인의삶과 연관 지어 이해하는 것은 항상 주관적인 과정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해하는 것은 결코 본문을 객관적으로 정의하거나 단순하게 역사적인 맥락만을 설명하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이 포함된 대화입니다.

초기 교회에서는 성경을 해석할 때 세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우리 역시 이 질문으로 성경 본문에 다가설 수 있습니다.
1.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2. 나는 누구인가?
3. 나는 무엇을 기대하는가?

정신과 의사인 알베르트 괴레스(Albert Görtes)에 따르면, 우리는 성경을 제대로읽을 능력이 없기에 성숙하지 못한 하느님상像을 가졌는지도모릅니다. 우리는 질투, 비관주의, 방관, 벌, 권력과 같은 인간의 모든 특징을 하느님께 투영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미지에 따라 하느님을 묘사합니다. 괴레스는 이렇게 조언합니다.
"그것이 크건 작건 빈약하건, 또는 순수한 지성에만 머무는것이든 아니면 모든 신화와 관련된 미신적인 요소를 거부하는 것이든, 우리가 이해하는 정도에 따라 신성 역시 성장해가는 특징을 지닙니다."

드레베르만(Eugen Drewermann)은 이 역사를 심리학적으로 해석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지닌 원초적인 유혹은 하느님처럼 되고 싶은 것입니다. 인간은 낙원에서 자신이 하느님이 아니라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드레베르만은 악의 실제적인 원인을 두려움으로 보는데, 그 두려움은 인간이 자신의 불완전함을 깨닫고 하느님처럼 자기 자신의 온전한 주인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데서생겨납니다. 두려움은 "우리가 죄를 짓도록 이끄는 모든 힘으로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계획에서 벗어나게 하고, 자신을 낯설게 느끼게 하며, 왜곡되고 병적인 방식으로 존재하게합니다. 두려움은 우리 인간 존재의 이유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 "이로부터 필연적으로 절망이 생겨납니다.
하느님처럼되고 싶은 것과 한계, 비천함, 불완전함과 같은 모든 인간적인 조건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시작부터 실패하게 될 노력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