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은 인공지능이 자신에게 미친 영향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에게는) 세상에서 바둑을 가장 잘 두는 존재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나오면서 내가 아무리 바둑을 잘 둬도 이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인공지능으로 인해 바둑을보는 관점 자체가 근본적으로 흔들렸다. 나는 바둑을 예술로 알고배웠다. 그런데 지금은 과연 그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다."
"젊은 나이에 은퇴를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다. 인공지능이다. 알파고를 만나고 인간의 한계 같은 것을 경험했고 처음으로 무력감을느꼈다. 그리고 수학적 계산으로 승리하는 인공지능을 마주하면서
‘바둑은 예술인가?‘라는 회의감에 사로잡혔다. 인공지능 앞에서 바둑은 흑과 백이만드는 예술작품이 아니었다. 그저 확률싸움에 불과했다

인공지능에게 대체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인공지능에게대체되지 않는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인공지능의 주인이 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인공지능의 학습러닝 능력을 무용지물로 만드는위대한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두 능력을 가지려면 무엇보다 먼저 인공지능에게 대체되지 않는 생각이란 무엇인지, 인공지능의 주인이 되는 위대한 생각이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 생각은 문명적 의미의 ‘Think‘다.

점프개미라는 게 있다. 이 개미 종족은 여왕개미가 죽으면 일개미중 한 마리를 여왕개미로 추대한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평범했던일개미의 몸이 여왕개미처럼 커지고 수명도 열 배 이상 늘어난다.
자신이 여왕개미라는 확신이 유전자조차도 바꿔버리는 것이다. 당신은 어떨까? 한국 사회에서 철저하게 일개미로 키워진 당신이 나도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면 말이다.

Think 하는 나, 다시 말해 인공지능이 복제할 수 없는 생각을 하는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 없다. 지금부터 조금씩 만들어나가야한다. 그런데 새로운 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공지능의 본질을 꿰뚫고 이를 넘어서는 일이 필요하다. 인공지능의 본질은 모방이다. 인공지능의 핵심인 딥러닝은 인간의 뇌를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 이는 무슨 의미인가. 만일 당신이 뇌를 변화시킬 수 있다면, 즉인공지능에게 대체되는 생각밖에 할 줄 모르는 뇌를 인공지능이 절대로 대체할 수 없는 생각을 하는 뇌로 바꿀 수 있다면, 당신은 인공지능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는 또 무슨 의미인가. Think인공지능이 복제할 수 없는 생각 하는 나는 다른 무엇이 아닌, 나 자신을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삶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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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보고 피아노를 상상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어요?"

88개의 건반, 240개가 넘는 현, 페달 몇 개 그리고 욕조만큼이나 커다란 소리통.
이것은 모든 피아노의 선조가 되는 섬세한 악기들의 이야기이며, 많은 대조들로 이루어지는 이야기이자, 피아노 제작으로 천금을 움켜쥔 19세기 이민자의 이야기이고, 비교적 최근 유럽과 중앙아메리카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시간급 이주 노동자들의 이야기요, 현대의 그랜드피아노를 발명해낸 어느 가족의 이야기인 동시에, 유달리 예민한귀를 가진 소수의 노동자와 평생 악보는 읽어본 적도 없으며 카네기 홀에 발도 들인적 없는 수많은 노동자의 이야기이고, 베토벤과 쇼팽 몇 소절을 독학으로 익힌 오토바이 애호가들의 이야기요, 건반 아래쪽에 구멍을 뚫고 거기 자그마한 납추를 끼우는사이 토크쇼 프로그램을 놓칠세라 텔레비전 방송의 오디오 시그널을 잡아내는 특수제작 라디오를 작업장까지 가지고 들어오는 공원들의 이야기이다.

인간의 창조물이자 장난감인 피아노의 이야기는 우리를 무수한 일대기로 잡아 이끈다. 도구와 장치를 한가득 품은 채 피아노는 세월을거치며 변화하여왔고, 확인 가능한 시점과 장소에서 개선되어왔다.
(…) 지난 150년 세월에 걸쳐 피아노는 목욕통보다 유용한 도구로서자리매김했다 서부 개척지 변경의 통나무 오두막에도 욕조는 없을지언정 피아노는 있었던 것이다.
-자크 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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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후반기에 접어들어 어느 정도 경제적 안정이 보장되었을 때 열정을 직업으로 삼아보는 것은 어떨까? 그럼 생활비 걱정을 하지 않고도 마음껏 영화를 찍거나 블로그에 집중할 수있을 것이다. 그 일에 생존이 달린 것이 아니므로 편안하게 거리를 두고서 일을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생각도가능하다. 사실은 어떤 것에 흥미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이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자유가 아닐까? 먼저 이것저것 시도를 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열정을 일로 삼을 것이 아니라 흥미를 느끼게나 하기 쉬운 일을 열정으로 바꾸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열정은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접근 방식이다. 그렇게 된다면우리의 모토는 ‘좋아하는 일을 하라‘가 아니라 ‘네가 하는 일을 좋아하라!‘가 될 것이다. 그럼 훨씬 마음의 부담이 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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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우리의 의견과 가치관, 생활방식이 옳은데남들이 뭘 몰라서 저러는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결단코 한 번도 없는가?
우리는 나와 다른 그룹, 나와 다른 생각과 입장, 성별, 연령, 계층, 종교,국적에 따라 끊임없이 경계를 긋고 니 편, 내 편을 나누려고 한다.
소비 행동은 신분의 상징이 되고, 직업은 정체성이 되었으며,
정치적 다름은 적개심이 되었다.
과연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우리‘와 ‘저들을 끊임없이 구분하는가. 무엇으로 1류와 3류를 규정하는가.

특히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이런독선에 취약하다. 가슴에 손을 얹고 물어보자. 우리도 때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우리 생각이 옳은데 왜 저 바보들은 이해를못 하는 걸까? 하지만 그런 식의 최종 결론은 대화의 문을 닫는다.
상대에게 ‘바보‘, ‘잘난척쟁이‘, ‘성차별주의자‘, ‘사회악‘, ‘기생충‘,’인종차별주의자‘ 같은 꼬리표를 붙여 파일에 착착 정리를 해버리면 상호 이해를 위한 대화는 애당초 불가능해진다. 이것이 모두가가장 많이 헷갈리는 지점이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말이 곧 그의의견이나 행동을 이해하고 그의 관점에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기때문이다.

언뜻 듣기엔 틀린 데가 하나도 없는 말이다. 즐거운데 돈까지벌 수 있다니, 왜 그런 것을 마다하겠는가? 당연히 찾아나서야 마땅하다. 하지만 왜 열정을 굳이 돈과 교환해야 하며 왜 굳이 의무로 만들어야 할까? 취미가 즐거운 것은 목적 없이 즐기기 때문이지 않은가? 물론 우리는 삶의 많은 시간을 일을 하며 보내기에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면, 아니 조금이라도 좋아할수 있다면 삶도 훨씬 아름답고 수월할 것이다.
그러나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외침은 위장되고 은폐된 엘리트주의이다. 항상 열정만 좇으며 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부모가 대학 등록금과 집세와 용돈을 다 대주는 젊은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혼자서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한 부모 가정이라면 절대 불가능할일이다. 열정을 바친 직업은 특권층에서 자기 최적화의 우아한 몸짓이 된다. 그들이 생각하는 직업은 돈과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자아실현의 행위이다. 자아는 직업을 통해 마침내 정당화된다.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래픽 디자이너인 것이다.

특히 미국에서 정체성을 직업과 결부하는 추세가 강하다. 집세를 내기 위해 하루 8시간 뼈 빠지게 일해야 하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런 미국적 현상이 점차우리 사회 곳곳으로도 침투하고 있다.

우리가 자신에게만 집중하면 어떤 결과가 생길까? 우리가 개인적인 행복에만 집중한다면 어떻게 될까? 철학자 한병철의 대답은명확하다. 우리는 이미 자아실현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상업화하였고 정치적 유아 상태로 되돌아갔다. ‘성공한 삶‘과 현실 정치의 결합은 느슨해져버렸다. 상황을 바꾸기보다 변한 상황에 순응하라는 목소리가 더 높다. 그러나 최고의 인성 계발에 맞춰진 초점은 공동체의 참여를 제물로 삼는다. 사회 문제는 스스로를 챙기고 멋진 인생을 살아야 하는 개인의 문제로 변질된다. 가령 문화단체에서 무급 인턴으로 일하는 젊은 여성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인턴 자리 하나 얻으려고 그녀는 해외 연수를 다녀왔고 컴퓨터자격증을 땄다. 그뿐 아니다. 앞으로 이 인턴 경력을 바탕으로 더좋은 일자리를 구하려면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많은 자격증을 따야 한다. 그런 그녀에게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비슷한 처지의 인턴들과 모여 근로 조건을 논의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고민할 시간이 있을까? 10시간 중노동에 시달리고 퇴근하면 쓰러져 자기 바쁠 것이고, 기껏해야 요가나 몸에 좋다는 샐러드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랠 것이다. 그렇기에 한병철은 말한다. 번아웃과 혁명은서로를 배제한다."

그렇다면 인생 후반기에 접어들어 어느 정도 경제적 안정이 보장되었을 때 열정을 직업으로 삼아보는 것은 어떨까? 그럼 생활비 걱정을 하지 않고도 마음껏 영화를 찍거나 블로그에 집중할 수있을 것이다. 그 일에 생존이 달린 것이 아니므로 편안하게 거리를 두고서 일을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생각도가능하다. 사실은 어떤 것에 흥미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이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자유가 아닐까? 먼저 이것저것 시도를 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열정을 일로 삼을 것이 아니라 흥미를 느끼거나 하기 쉬운 일을 열정으로 바꾸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열정은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접근 방식이다. 그렇게 된다면우리의 모토는 ‘좋아하는 일을 하라‘가 아니라 ‘네가 하는 일을 좋아하라!‘가 될 것이다. 그럼 훨씬 마음의 부담이 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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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사랑은 우리에게 우리의 생활 방식, 판단 기준,
우리 선택의 바탕이 되는 가치들을 되돌아볼 것을 요구합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 <우리 어머니인 지구> -

욕망은 언제나 왜곡되게 자신을 표현하며, 그 왜곡을 낳는 것은억압된 충동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본능적인 충동이 모든 변화를 낳는다. 본질은 없고, 있는 것은 변화하는 본질이다. 아니 변화가 본질이다. 팽창하고 수축하는 우주가 바로 우주의 본질이듯이. 내 밖의 풍경은 내 충동의 굴절된 모습이며, 그런 의미에서 내안의 풍경이다. 밖의 풍경은 안의 풍경 없이는 있을 수 없다. 안과밖은 하나이다.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만물을 낳는다는 말의 참뜻은 바로 그것이다.

촌스럽다는 것은 도시스러운 것의 반대가 아니라, 도시스러움조차 모두 감싸 안는 것이다.
촌스럽다는 것은 도시스러운 것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것이다. 어린 도시스러운 것‘이 ‘어른 촌스러운 것을 맨날 놀리고 울려도 촌스러운 것은 어른스러운 것이라, 그저 조용히 웃으며 간다. 어린 도시스러운 것까지 품에 안고, 쾌활 명랑하게, 천진난만하게,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연민하면서 그렇게 뚜벅뚜벅! 3촌스러움을 어른스러움과 연결시키고 어린 도시스러움까지 품으려는 마음은 차별과 냉대를 포용과 환대로 바꿔놓는다. 대도시를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이들에겐 불가능한 자세다.

논에서 놀아지는 것들, 흙이 해내는 그런 경이로운 변화들을 말로써 전달하고 교육을 시킬 수도 있겠지만, 그 생명들과 함께하지않고서는 온전히 전달할 수 없는 일이지요. 책을 천 권 만 권 읽어도 알 수 없는 것이기에 누구에게든 살아생전 한 번이라도 농사를지어보시오‘ 하고 권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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