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을 인문하다 - 문학과 철학으로 읽는 그들의 노래, 우리의 마음
박지원 지음 / 사이드웨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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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한 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어쨌든 시작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끝까지 해내는 것이
바로 용기 있는 모습이란다.
승리하기란 아주 힘든 일이지만
때론 승리할 때도 있는 법이거든."
하퍼 리, 『앵무새 죽이기』 (열린책들)

용기는 그런 나의 자아를 포함한 그 모든 것들을 부숴버리는일입니다. 용기란 다른 게 아닙니다. 그저 ‘부수고 파괴하는 것‘
입니다. 용기는 나의 단점과 한계, 과거의 내 모습 따위에 집착 - P1

하던 습관을 과감하게 내팽개치고, 내가 지금껏 ‘나는 이런 사람이야.‘ 라고 정의하던 자아의 정체성을, 그리고 나를 둘러싼 그모든 내가 아닌 것들을 한 순간 총체적으로 전복하는 것입니다. 용감함이란 나 자신을 잠시 동안 철저하게 망각하는 태도이며, 지금 나의 결단으로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선 단1퍼센트도 눈길을 주지 않는 단호한 자세입니다.
그래서 용감한 사람은 (Not Today)의 노랫말 그대로 총을 조준하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쏴버리는 쿨한 태도를 갖게 됩니다. 그는 나 스스로를, 내 주위의 상황을,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의 관념을, 마침내는 이 세계를 향해서 아무 죄의식도 없이 조준하고, 탕, 발사합니다. 그는 무심하게 조준해선, 싹 부숴버립니다. ‘지금 이 순간 나를 억누르는 그 말도 안 되는 껍질들을,
강력한 힘의 논리를, 불합리한 차별을, 그럴 듯하게 들리는 온갖궤변들을, 그리고 이런 모든 껍질들에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는나 자신을……. - P2

‘대지의 사람들‘이라 불리는 라틴 아메리카의 마푸체 족 사람들은 누군가와 헤어질 때 아래와 같은 작별 인사를 한다고 합니다. 이 짧은 인사말은 용기라는 덕목에 바치는 가장 훌륭한 한마디가 아닐까 싶습니다.
마리치웨우 페니 (Marichiweu peni) :
형제여, 우리는 앞으로 열 번은 더 이겨 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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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소년단의 노래 제목으로도 쓰인 ‘피, 땀, 눈물‘은1940년 처칠의 영국 수상 수락 연설에 등장한 후, 지금은 영어권에서 하나의 관용구처럼 쓰이는 표현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태도‘를 묘사할 때 주로 활용되고 있는데요.
이 관용구를 제목으로 삼은 책, 『피 땀 눈물』에서 영국의 저술가 리처드 던킨은 인간이 어째서 노동과 자아실현에 중독되어 버렸는지를 역사적으로 차근차근 되짚습니다. 이 책의 분석처럼, 사회 전반에 퍼진 "너는 열심히 노력해서 진정한 자신이되어야 한다."는 압력과 강제적인 분위기 또한 인간을 무너뜨릴수도 있습니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이 몇 년 전에 쓴 『피로사회,
는 바로 이런 ‘자기계발 만연 사회‘의 폭력성을 잘 드러내서 대중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었죠. 한병철은 있는 힘껏 ‘자기 자신’이 되려다가, 도리어 자기 자신과 가장 멀어져 버리고 스스로를망쳐버리는 씁쓸한 풍경이 세계적으로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고지적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란 질문에 관해선, 그야말로모든 것이 혼돈에 가깝습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든타락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언제든 다시 제대로 살아낼 수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저는 ‘성장‘의 시작이 바로 그런 ‘혼돈‘
의 지점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인문적인 것‘은 바로 그처럼 연약하고 파괴되기 쉬운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는 데서 첫 걸음을 내딛습니다. 인문학, ‘인문적인 사유‘의 어떠한 힘이란 게 있다면, 그것은 (인간과 세계에 관한) 모든 단정과 확신들을 깨끗하게 버리는 탣도에 가까울것이라고 저는 오래전부터 생각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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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를 늘려나갔을 뿐인데..
나에게서 남으로 시선을 옮겼을 뿐인데. 그가 있던 자리에 가봤을 뿐인데, 안 들리던 말들이 들리고 안 보이던 것들이 보였다.
슬프지 않았던 것들이 슬퍼지고 기쁘지 않았던 것이 기뻐졌다.
하루가 두 번씩 흐르는 것 같았다. 겪으면서 한 번, 해석하면서한 번, 글을 쓰고 누우면 평소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든 채로 잠드는 듯했다.
우리는 글쓰기의 속성 중 하나를 알 것 같았다. 글쓰기는 게으르고 이기적인 우리를 결코 가만히 두지 않았다. 다른 이의 눈으로도 세상을 보자고, 스스로에게 갇히지 말자고 글쓰기는 설득했다. 내 속에 나만 너무도 많지는 않도록 내 속에 당신 쉴 곳도 있도록, 여러 편의 글을 쓰는 사이 우리에게는 체력이 붙었다.
부지런히 쓸 체력과 부지런히 사랑할 체력. 이 부드러운 체력이우리들 자신뿐 아니라 세계를 수호한다고 나는 믿는다.

아침에 일어나서 엄마 방으로 가니까 왠지 눈물이 나오고 가슴이 찡했다. 원가가 엄마한테 안기고 싶었다. 자다가 밝은 곳으로 가면 이상하게 눈물이 나온다.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모르겠다. 언니랑 동생이 옆에 있어도 그리운 마음이 든다.
옆에 있어도 그리운 마음이 든다니, 나도 그게 무엇인지 알 것같았다. 한편 열세 살 이형원은 이런 문장을 썼다.
함께 뒤섞여 놀다가 서로의 여름 냄새에 대해 다 알게 되었다. 우리의 두피에서는 찌든 걸레 냄새가 났다. 우리의 옷에선 중학생 남자 옆을 지나가면 맡을 수 있는 냄새가 났다. 우리의 발에서는 가죽에 물을 묻히고 한동안 방치해둔 냄새가 났다. 웃음거리가되던 우리의 여름 냄새들이었다.

좋은 문장의 근거를 생각할 때 자주 다시 읽은 책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소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다. 이 소설에는 작문 연습을 하는 어린 쌍둥이가 등장한다. 전쟁과 가난 때문에 그들에겐 선생님이 따로 없다. 둘은 부엌 식탁에 앉아 서로에게 글감을 내준다. 그 주제로 두 시간 동안 종이 두 장에다 각자의 글을 쓴다. 다 쓰면 글을 바꿔서 읽어본다.

상대방의 글쓰기 교사가 되어주는 것이다. 사전을 찾아가며 철자법 틀린 것을 고치고 문장을 수정한다. 문장을 고칠 때에는 쌍둥이들만의 규칙이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 대해 쉽사리 ‘친절하다‘라고 쓰지 않는다.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이 모르는 심술궂은 면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쌍둥이는 친절하다는 말 대신 이렇게쓴다. "그는 우리에게 담요를 가져다주었다." 또한 쌍둥이는 "호두를 많이 먹는다"라고 쓰지, 호두를 좋아한다"라고 쓰지는 않는다. 좋아한다는 단어는 모호하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서 "이 마을은 아름답다"와 같은 표현도 금지되어 있다. 둘에게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추하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실에 충실한 문장을 연습한다.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묘사를 훈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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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함에 대하여 - 홍세화 사회비평에세이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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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동 집회가 부럽더라. 왜 노동자들이 죽는 문제로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촛불을 들고 나오지 못할까. 우리도 어떻게 하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어쩌면 더 심각한 문제이지 않나. 한 해에 몇천 명의 노동자들이 일하다가 죽는 거니까. 그리고 그게 매년 반복되니까. 만일 노동자가 죽는 일로 그만큼 사람들이 모이면 분명 사회가 달라질 것 같은데 말이다."(〈오마이뉴스)권두섭 민주노총 법률원 대표변호사의 안타까운 술회가 내가슴을 적신다. 산재 사망자가 단 한 사람이라도 줄어들도록 단한 사람이라도 더 "우리가 김용균이다!"라고 외칠 수 있기 바란다.

오만함도 층위가 있다. 조금이라도 겸연쩍어할 줄 아는 오만함이 있는가 하면, 오랫동안 내면의 절제나 외부의 견제가 작동하지 않아 공격성까지 띠는, 뻔뻔한 오만함도 있다. 가령 세월호 참사 초기에 ‘악어의 눈물이라도 흘렸던 박근혜 대통령도두 차례의 선거 이후에 언제 그랬느냐는 모습으로 바뀌지 않았던가.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독재로 치닫는다. 그렇다면 삼성 엑스파일 사건과 불법·탈법적 유산 상속을 비롯하여 온갖 작태가『삼성을 생각한다』에서 드러났음에도 어떤 대가도 치르지 않았던 삼성의 오만함은 어느 층위에 있을까? 외롭고 어려운 싸움을벌이는 반올림에 우리가 연대해야 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신문은 사회의 거울이라고 했던가. 매일 한겨레〉〈르몽드〉를 읽으면서, 이 땅의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움과 함께 분노와 슬픔을 느낀다. 한나라에서는 청춘들이 거리로 나와 "일보다는 사랑을 하자"고 외치는 반면, 다른 한 나라에서는 수학여행을 가다가 한꺼번에 수장되고 일하다가 직업병으로 죽어도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큰소리를 친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라 했거늘…. 청춘들이거리에 쏟아져 나오지 않기 때문인가.

"광신자들이 열성을 부리는 것도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지혜로운 사람들이 열성을 보이지 않는 것 또한 수치스러운 일이다. 신중해야 하지만 소극적이어선 안 된다."
볼테르는 광신자가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이 말을던졌다. 애당초 광신자들에게서는 수치심을 기대할 수 없고, 수치심을 느낄 줄 모른다면 지혜로운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글은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동성애를 반대한다"고 공언하는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아니라 정의와 공정의 촛불 정권을 자임한 집권 세력을 향한 것이다.

내가 ‘적극적인 앨라이 (Ally, 성소수자들LGBTQ이 겪는 차별에반대하고 평등 사회를 위해 연대하는 사람)‘가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이 땅에 만연한 무지와 편견, 차별과 배제에 시달리는 성소수자에게 동시대인으로서 미안함이 앞서기 때문이다. 또한 ‘한 사람이라도 자유롭지 못한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선한 사람의 무관심이 악을 키운다"는 18세기 영국의 보수주의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의말을 내 가슴에 새기고 있기 때문이다.
무릇 잘못된 언행을 비난할 수는 있지만, 존재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마땅한 기독교인을 비롯하여, 인간의 사랑을 음란‘으로 덧칠하면서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야말로 적반하장이다.

여기서 수오지심(羞惡之心)과 측은지심(側隱之心)을 인간의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꼽은 맹자의 말을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다. 또 한 인디언 부족의 기도문("오, 위대한 영이여! 내가 상대방의 모카신을 신고 1마일을 걷기 전에는 상대방을 판단하지 않도록 지켜주소서")에 담긴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본받아 예멘인들의 자리에서 생각해보라고 설득하려는 것도 아니다. 부부 간에도 서로 설득되지 않아서 다른 생각을 가진 채로 평생 살아가는데, 남을 설득하는 일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다만 함께 나누고 싶은 질문이 있다. "만나보지도 겪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혐오감정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그것이다. 내가 시대 변화에 둔감한 순진한 로맨티시스트여서일까. "알지 못한 채 사랑한다"는 말은 어렴풋이나마 이해되는 반면, "알지 못한 채 혐오한다"는 말은 잘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스스로 인종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주 드물다. 다만 인종주의적 언행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다. 나와 다른인종, 종교, 문화를 가진 대상을 차별·배제 억압하고, 마침내는혐오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순서일 듯싶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과정이 생략된 채 바로 혐오하는 것일까. 기억력이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면 3년 전에 세 살짜리 시리아 어린이 알란 쿠르디가 터키 해변에 시신으로 떠밀려온 사진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때 품었던 측은지심은, 가령 그의 아버지나 아저씨가 제주도 난민으로 들어왔을 때는 혐오감정으로 돌변하는 것인가. 아니면 화면으로 만나는 것과 직접 대면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인가. 마치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바리케이드의 소년 가브로슈에겐 환호하지만 거리에서 만나는 불량(이라고 규정된) 소년들은혐오하는 것처럼.

혐오.
우리는 우리 각자의 눈으로 사물과 현상을 본다. 예멘 출신 난민을 향한 혐오감정은 그들에게 투사된 우리 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거기에 담겨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한편에는 ‘지디피(GDP) 인종주의‘가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 지적했듯이,
백인과 결합한 가족은 ‘글로벌 가족’, 비백인과 결합한 가족은
‘다문화 가정‘이라고 부르게 하는 것이 바로 지디피 인종주의다.
한국의 현대사 속에서 교묘히 결합한 물신주의와 인종주의는지디피 인종주의로 발전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보다 지디피가 높은 나라 사람들에겐 받는 것 없이 올려다보고 지디피가 낮
은 사람들에게는 주는 것 없이 내려다 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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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턴 ‘내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하고 [물어선 안 되고] 삶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물어야한다.

프랭클의 글을 읽으면서 특히 감동받은 구절 가운데 하나는 환자의 개별적인 모습은 의사에 의해 그대로 비추어진다고, 더 깊은의미로 보여야 한다고 진술한 부분이다. 프랭클은 그것을 가리켜‘환자 안에 있는 인성을 맨 처음 발견하고, (……) 더 나아가 환자 안의 인성을 일깨워 주는 의사 안의 인간성‘이라고 말했다. 이 얼마나놀라운 말인가! 인간에게는 비추기와 보이기가 필요한데, 여기서말하는 것은 무엇보다 불행한 일을 당했거나 병에 걸린 인간이다.
인간은 의사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 의해 비추기와 보이기가 필요한 존재다. 고통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 또 주어진 힘든 상황에서적절한 태도를 발전시키는 시도를 하려면 다른 누군가가 필요하다.
수용소에서 수감자들은 모두 ‘어떻게든, 어디서든, 그게 누구든 눈에 보이지 않게 자신을 소중하게 여긴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프랭클은 ‘타인의 실존, 타인의 존재‘를 거듭 강조하면서, 그들 없이 나의 자기를 보존하고 삶의 과제를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인생은 의무입니다. 유일하고 커다란 책임입니다. 하지만 삶에는 기쁨도 존재합니다. 기쁨은 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바랄 수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스스로 나타나야 합니다. 마치결과가 모습을 드러내듯, 스스로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에 행복은 결코 목표가 돼선 안 되고, 될 수도 없고, 되지 못하며 오직 결과일 따름입니다. 즉 타고르의 시에서 의무라고 부르는 것, 우리가 나중에 더 자세히 알아보려는 것을 이행한 결과 말입니다. 인간은 온갖 행복을 추구하지만, 행복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여기고 붙잡지 않을 때 그르칠 수밖에 없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Soren Kierkegard, 1813~1855가 지혜로운 비유를 이야기했습니다. 행복에이르는 문은 ‘밖을 향해 열려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행복의 문을밀고 들어오려는 자에게 그 문은 닫혀 버립니다.

"선생님은 육상 선수가 되거나 그와 비슷한 일을 하려고 그러십니까?"
노신사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쳐다봤고, 저는 계속 말했습니다.
"단지 그게 이유라면 선생님의 절망감과 방금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선생님의 인생은 끝났고, 계속되는 인생을 계속 살아가는 것도 선생님껜 무의미할 뿐이죠. 단거리든 장거리 달리기 선수든 선생님께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선생님처럼 일생을 최대한 의미 있게 살고 영향력을끼치면서 직업 세계에서도 유명하신 분이, 단지 다리 하나를 잃었다고 해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셨다는 건가요?" 노신사는 즉각 제 말을 이해했고, 눈물 젖은 얼굴엔 미소가 번졌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질병은 결코 의미의 상실을 나타내는 말이아닙니다. 때때로 그것은 의미의 획득을 뜻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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