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난민을 자연재해에 비유하는 언어 습관 역시 우리의 인식에큰 영향을 미친다. 난민 물결, 난민 홍수, 난민 강물은 물론이고 난민 사태, 난민 습격 같은 표현도 자주 마주친다. 그런 비유는 무의식적으로 거대한 것, 위협적인 것, 우리 손을 벗어난 것을 암시한다. 따라서 공포와 통제 상실의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홍수는 위험이고, 해결책은 댐을 쌓아 인간 물결의 유입을 막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의식적으로 그런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메시지는 교묘하게 전달되어 우리의 정치적 견해와 행동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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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차별주의자 - 보통 사람들의 욕망에 숨어든 차별적 시선
라우라 비스뵈크 지음, 장혜경 옮김 / 심플라이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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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주동안 선생님들이 이런 방식으로 학급을 운영한 후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젠더 라벨링 학급의 아이들이 개인의 이름을 부른 학급보다 훨씬 성별 고정관념이 강해졌다. 선생님이 성별 고정관념을 입에 올리지 않았고 그저 학급을 남녀로 구분하기만 했는데도 건축가, 의사, 대통령 같은 특정 직업은 ‘남자들만 할 수 있다고 대답한 여학생들이 많았다. 반대로 간호사, 가정주부, 베이비시터는 여자들만 하는 직업이라고 대답했다. ‘여자들만, 상냥하고 부드러우며 육아를 할 수 있다고도 대답했다. 이런 성별 고정관념의 강화로 인해 젠더 라벨링 학급의 학생들은 집단 내 개인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했다. 즉 성별을 기초로 모든 남학생‘은 이런 방향으로 행동하고 여학생’은 절대 저런 방향으로 행동하면안 된다는 식의 일반화를 많이 했다. 한마디로, 선생님이 개인의특징보다 성별에 집중할 경우 아이들은 집단 안에서 개별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되었다.

성평등 교육을 하는 스웨덴의 유치원 ‘에갈리아‘에서는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아이들은 성별 고정관념을 거스르는 교육을 받는다. 가령 직업 교육을 할 때 우주항공사가 나오면 여성 우주항공사의 사진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곳의 아이들은 성별에 따라 직업이 정해져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장난감이나 책을 나누어줄때도 마찬가지이다. 동성애 커플이나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아빠가 많이 등장하는 책을 읽어준다.

그래서 아이들은 비록 주변에서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접하더라도 그것만이 유일한 삶의 방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운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우리의 의견과 가치관, 생활방식이 옳은데남들이 뭘 몰라서 저러는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결단코 한 번도 없는가?
우리는 나와 다른 그룹, 나와 다른 생각과 입장, 성별, 연령, 계층, 종교,국적에 따라 끊임없이 경계를 긋고 니 편, 내 편을 나누려고 한다.
소비 행동은 신분의 상징이 되고, 직업은 정체성이 되었으며,
정치적 다름은 적개심이 되었다.
과연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우리‘와 ‘저들을 끊임없이 구분하는가. 무엇으로 1류와 3류를 규정하는가.
이 책은 소속 범주로서의 ‘우리‘가 직업, 소속, 성별, 빈부격차,
소비취향, 관심사, 범죄, 정치 영역에서 어떤 구조를 띠는지,
또 그 안에서 ‘남들을 바라보는 독선적 시선이어떻게 표현되는지 살핀다.

영국 신문 인디펜던트>는 이렇게 물었다. 아일란은 내전을 피해 유럽으로 넘어오다 목숨을 잃었다. 아일란보다 앞서 수천 명의 어른과 아이들이 똑같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인도주의 위기의 상징이 된 것은 죽은 세 살배기 아이의 사진이었다. 그의 사연이 난민 위기에 얼굴을 선사했다.
여기서 인간의 패러독스가 드러난다. 우리의 공감은 반드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숫자와 관련 있지 않다. 우리의 공감은 오히려 개인에게서 솟구친다. 그를 보며 자신을, 자신의 아이들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지중해에 빠져 죽은 500명의 난민 뉴스는 그 정도의 고통을 유발하지 않는다. 숫자 뒤에 숨은 개인들은 추상이되고, 추상은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받는 사람이 우리와 가까워야, 혹은 그들의 고통이 가깝게 느껴져야 우리는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 고통에 맞설 각오를 다지게 된다.

그저 한 동네에서 같이 살던 이주민의 운명과 인간 드라마에마음이 움직여 공식적인 강제 추방 반대 운동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수많은 작은 지역의 저항이 강제 추방을막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핵심은 사회적 친밀도, 친숙한 개별 사례에 있다. 쫓겨나게 생긴 이주민이 평소 우리 집에도 놀러 오던 아들의 같은반 친구이다.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 공감과 부당하다는 느낌, 타인의 상황을 개선하고픈 욕망이 생겨난다. 이런 관계가 탄생할 수있으려면 서로를 알 수 있는 계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아이들은학교에 다닐 수 있어야 하고 어른들에겐 일자리를 제공하고 여가시설을 이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나 정치권은 이런 가능성을 차단하기에 바쁘다.

아직 유럽의 언어를 모르는 난민 아이들은 따로 학급을 배정하때문에 그 아이들이 친구들과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언어를울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다. 또 난민 보호소는 지역민들이 사는주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에다 둔다. 자국민과의 접촉이 생길수가 없으므로 연대 활동과 정치권의 부정적 결정에 반대하는 제항 운동이 발전은커녕 아예 싹이 트지도 못한다. 따라서 지역민들이 공감과 의무적 책임감을 느낄 수 있는 가능성도 줄어든다. 난민 문제를 바라보는 개인의 입장이 어떻든 관계없이 지역민과 접촉이 많은 사람의 체류 기회가 더 높다는 사실은 불공정하지 않은가?

이런 위협감이 널리 퍼지게 된 데에는 정치 엘리트들의 역할이크다. 많은 정치인이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 속죄양과 적의 이미지를 부추기고 원한과 시기, 증오를 자극하는 손쉬운 방법을 택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특정 집단을 도구화하고 잠재적 위험요인으로 매도하는 것이다. 심각한 정치 문제를 힘들게 파헤치는것보다 이런 방법이 힘은 덜 들면서 얻는 것은 더 많다. 과도한 이주 물결, 일자리 경쟁, 복지 제도의 남용, 범죄 우려를 부추기면서공포와 불안을 조장하는 편이 훨씬 간편하다. 공공 담론에서 구조적 폐해와 사회적 문제가 자취를 감춘 지는 이미 오래다. 그럴수록 깬 시민들이 나서서 포퓰리즘의 말장난에 놀아나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것이다. 그 시작은 언어이다.

이주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 이주에 대한 인식에 큰 영향을 미친다. 국외 거주자(Expat)와 이민자 (Immigrant)를 굳이 구분하여 부르는 것이 재미있지 않은가? 둘 다 외국에서 들어온 사람들을 말한다. 하지만 고학력 백인 6으로 자신이 원해서 들어온 사람과 이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은 차이가 난다. 고학력 흑인은 유럽에서국외 거주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필리핀 간호사는 이민자이거나계절노동자일지언정 국외 거주자는 아니다.

이런 구분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특권의 표현이다. 국외 거주자를 높이 평가하기 위한 위계적 구분이다. 명칭은 사회적계급과 국적과 인종을 나타낸다. 국외 거주자는 여권이 없어도 되고 사회적 통합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그래도 아무 상관 없다.
어차피 톱클래스의 전문 인력이고 -경제적 어려움이 아닌 - 자발적 의지로 이곳에 왔다. 스위스 최대 온라인 쇼핑몰 디지텍 갈락서스(Digitec Galaxus)의 홍보팀장이자 칼럼니스트 리코 쉬파흐 (RicoSchipbach)의 말대로 국외 거주자는 1급 이민자 37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끼리라도 모든 이민자를 국외 거주자라고 높여 불러보면 어떻게 될까? 아니면 아프리카에 사는 유럽 국외 거주자들도이민자라고 불러보면 어떨까? 흥미로운 실험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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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 저 여자 만나고 다니는 이성애 남성을 뭐라고 부르나?
보통 ‘바람둥이‘, ‘카사노바‘ 정도의 표현을 쓴다. 여자가 이 남자저 남자를 만나고 다니면 뭐라고 부를까? 바로 ‘창녀‘라는 험한 말이 튀어나온다. 성과학자 에르빈 헤베를레 (Erwin J. Haeberle)는 파트너를 자주 바꾸는 남녀에 대한 이런 식의 다른 평가가 부권 사회시스템의 증거라고 주장한다.20 그런 식의 평가가 독립적인 라이스타일을 추구하는 여성들에게 수치와 불명예를 안긴다고 말이다. 이런 사실은 역으로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여성이 사회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 한다.

그 말은 여성의 목소리가 달라진 것이 사회문화적 요인탓이라는 뜻이다. 요즘 여성들은 달라진 사회 환경으로 인해 목소리를 다르게 사용한다. 저음의 목소리는 여성 인권 수준이 향상된결과로 해석할 수 있고, 이 사회가 여성을 조금 더 진지하게 인식한다는 의미일 수 있다. 물론 문화에 따라 차이는 있다. 가령 일본여성들의 목소리가 세계에서 가장 높다. 거기선 아직도 고음의 목소리가 미의 이상으로 꼽힌다. 반대로 남녀평등 성적이 좋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경우 여성들의 목소리가 세계에서 가장 저음이다.

주제를 아이로 옮겨 오면, 여전히 육아와 가사 노동, 돌봄은 대부분 여성의 몫이다. 그러니까 무보수에 사회적으로 인정도 받지못하는 노동은 여성에게 돌아간다. 어린이집 교사, 간병인, 간호사 등 직업이 여성적‘일수록 사회적 인정과 임금은 낮다. 이런 일에 뭐 하러 돈을 들인단 말인가? 집에서 엄마가 돈 안 받고 하는일이 비쌀 수가 없다. 흔히 여자는 남자보다 돈을 적게 번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하지만 돈을 적게 버는 것이 아니라 노동에 대한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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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 맘‘ 이라는 말부터가 차별의 뉘앙스를 담고 있다. ‘워킹 대디‘나 ‘워킹 페어런츠‘라는 말은 아무도 쓰지 않는다. 성역할 고정관념이 육아를 여성의 몫이라고 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령 혼자 아이를 키우는 10대 싱글 맘은 무책임하다는 손가락질을 받는다. 책임질 능력도 없으면서 대책 없이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말이다. 그럼 자식의 양육을 거부한 아빠는 어떻게 되는가? 똑같이 무책임하게 아이를 낳고 심지어 그 아이를 버린 아빠는 전혀비난받지 않는다. 같이 낳은 아이를 혼자 키우느라 제대로 된 직장도 못 구하고 능력 계발도 못 하는 여성에게 더 가혹한 도덕적비난을 퍼붓는 것이 과연 올바른 짓인가?

키처럼 어쩔 수 없는 신체 조건도 그렇지만, 공식적인 공간에서신체를 사용하는 방법도 성별에 따라 다른 평가를 받는다. 버스나전철에서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서 공간을 독점하는 습관은 특히남자들에게서 많이 나타난다. 이런 쩍벌남 현상은 남성의 신체 구조나 자기만 편하겠다는 이기심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 생물학적 조건이나 이기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얼마만큼의 공간이내 차지인가?‘라는 질문이다. 공간을 최대한 사용하는 남성들의습관은 유전자나 호르몬 탓이 아니라 학습된 것이다. 그런데 한집단이 공간을 더 많이 사용하면 남은 집단의 공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여성들은 몸을 웅크리거나 다리를 모으는 식으로 공간을더 적게 쓰려는 경향이 있다.

누가 공간을 차지하는지, 누가 공간을 차지해도 되거나 마땅히차지하는지는 성범죄와 관련해서도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다. 미국 대학 캠퍼스에서 성범죄가 일어나면 여학생들한테 밤에 돌아다니지 말라고 당부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예방을 하려면 남자들을 집에 묶어두는 편이 더 효과가 있지 않을까? 그것이 논리적인 지시일 터이다. 하지만 성범죄가 늘어나면 여자들에게 밤에 혼자 돌아다니지 말라고 충고한다. 이 사실만 보아도 논쟁의 초점이어디에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위험이 존재할 경우 잠재적인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자리를 피해야 한다. 이런 식의 해결안은 당연하지도 않을뿐더러 교육적인 효과도 없다. 반대로 해야제재 조치가 진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행동반경이 줄어든 남성들이 범죄에 더 예민해질 것이고 그럼 지금처럼 범죄를묵과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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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의 무술림 테러 사건으로 인해 테러는 대부분 무슬림의 소행이라는 쪽으로 대중의 의견은 너무 빨리 움직인다. 하지만 이는 테러리즘의 정의 자체가 모호하고 논란이 많기 때문에 쉽게 판단할 수없는 주장이다. 그보다 훨씬 심각한 정신적 오류가 있다. 테러는 대부분 무슬림의 소행이라는 생각에서 도출된 무슬림 대부분이 테러리스트, 혹은 잠재적 테러리스트라는 결론은 명백한 오류다. 무슬람의 테러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한 정보를 얻는 유용한 방법 한가지는 지역의 무슬림 공동체와 좋은 관계를 맺고 정보를 공유하는것이다.

그렇다면 ‘서양‘이란 무엇인가? 호주와 폴란드를 포함하고, 서양에 속한 몇몇 나라보다 더 서쪽에 있는 이집트와 모로코 같은 나라는 제외하기 때문에 지리적 개념은 아니다. 베이나트가 지적했듯이일본, 대한민국, 인도는 포함되지 않으므로 정치적·경제적 용어 또한 아니다. ‘서양‘은 기본적으로 종교와 인종을 공유하는 집단이다.
(약간의 유대교인이 포함된) 기독교인들이자 (라틴 아메리카는 제외되었으므로) 백인들을 뜻한다.

정치적으로 살펴보면 트럼프의 연설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슬람 세계는 내부에서 전쟁을 하고 있으며 어떤 집단이나 가장 적대적인 조직도 유럽의 최약체 나라조차 무력으로 위협할 힘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트럼프의 연설은 정치적 분석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쪽‘과 ‘동쪽‘에 대한,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쪽‘에서 온 이민자들대한 두려움을 부추기기 위한 것이었다. 트럼프의 연설에 대해 베이나트가 내린 결론에 나도 동의한다. 트럼프의 관점으로 보면 미국은 본질적으로 서양 국가, 즉 백인과 기독교의 (잘해야 유대 기독교의)나라다. 미국에서 백인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은 진정한 미국인이 아니라 가면을 쓴 위협적인 존재임을 뜻한다

사랑은 타인을 온전한 인간으로, 최소한의 선을 행하고 또변할 수 있는 인간으로 바라보는 시선이다. 희망은 사랑에의해 유지되고, 타인에게서 최악보다 최선을 기대하는 영혼의 관대함이 사랑을 지탱한다. 행동과 행동하는 사람을분리하는 일이 이 사랑을 돕는다. 악한 행동을 비난할 수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행동 이상으로 성장과 변화가 가능한 존재다.
정치에서의 희망은 혐오를 멈추는 것부터 시작된다. 물론말하기는 쉽지만 실천은 어렵다. 상대의 온전한 인간성을상상하지 못하고 그들의 행동과 그 행동 뒤의 인간성을 분리해 생각하지 않는다. 서로를 악으로 규정하는 한 밝은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고 협력과 인류애를 가능하게할 사랑도 갖지 못한다.
우리는 공공의 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현실 경험이 없는내성적이고 허약한 철학자가 아닌 세계를 위해 일어설 수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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