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는 왜 가섭을 깨달은 자, 즉 삶의 주인이라고 판단했을까? 아니 거꾸로 물어보자. 싯다르타가 꽃을 들었을 때 가섭만 얼굴에 미소가 번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가섭의 몸과 마음은 오직 꽃으로 향했던 것이다. 나머지 제자들의 몸, 즉 눈은 꽃을 향해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싯다르타의 속내를 더듬고 있었다. 싯다르타의 속내를 읽으려는 제자들의 눈에 꽃이 들어올 리 없다.

아끼는 사람이 무언가 해주기를 원하는 순간,
아낌의 관계는 무너지고 그 자리에 너저분한 거래 관계가 들어선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너도 이만큼 해야 하는 것 아니야?" 이제상대방이 나의 애지중지하는 모든 행동을 일종의 부채감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아낌의 관계는 막장을 향해 치닫고 만다. 이런 비극을 피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아끼는 사람을 반려견이나 반려묘처럼 보는 연습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다. 물을 가져다 달라고, 밥을해달라고, 쓰레기 봉투를 버려달라고, 청소를 해달라고 할 수도 없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알아듣는다 해도 쫑긋한 귀와 해맑은 눈, 그리고 네 다리를 가지고 무엇을 하겠는가?

『맹자(孟子)」의 「공손추(公孫丑)」 상편에는 누군가를 아끼는 사람의 좌우명이 될 만한 ‘물망물조장(勿忘勿助長)’ 일화가 등장한다. "마음으로는 잊지도 말고[勿忘], 억지로 자라나게 도와주지도 말라[勿助長], 송나라 사람처럼 되지 말라. 어떤 송나라 사람이 벼의 싹이 자라지 않는 것을 염려하여 논바닥에 박힌 벼의 싹을 조금씩 뽑아 올려주었다. 피곤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와 가족들에게 ‘오늘 대단히피곤하구나! 나는 벼의 싹이 자라는 것을 도와주었다!‘라고 말했다. 그의 아들이 논에 달려가보니 벼의 싹은 말라죽었다. 세상에는벼의 싹이 자라는 것을 돕지 않는 이가 드물다. 돕는 것이 무익하다.

‘물망물조장‘은 맹자(孟子, BC 372?~BC 289?)가 그 유명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방법으로 제안했던 것이다. 사실 ‘물망물조장’의방법은 벼를 기르는 농부의 경험과 지혜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물망물조장‘이라는 문장에서 ‘물(勿)‘은 ‘하지 말라‘는 뜻이고, ‘망(忘)’은 ‘잊다‘라는 의미이고, 조장(助長)’은 ‘자라나게 돕는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물망(勿忘)‘이 ‘잊지 말라‘는 요구라면, ‘물조장(勿助長)‘은 ‘자라나게 돕지 말라‘는 요구인 셈이다. 그러니 물망물조장은 ‘잊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라‘는 뜻이 된다.

이런 참담한 경험으로부터 농부는 이상한 교훈을 얻을 수도 있다. 돕는 것이 무익하다 생각한 농부는 벼들을 그냥 논에 방치할수도 있다. 조장의 비극을 보았기에 이제 더 이상 조장하지 않겠다는 결의다. 바로 이것이 ‘망(忘)‘이다. 벼들이 저절로 자랄 때까지 방임하자는 전략이다. 그렇지만 이번 전략도 비극을 낳는다. 벼들 주변의 잡초를 제거하지 않아서 벼들이 잘 자라지 못하거나 시들시들 말라버렸다. ‘망‘의 전략도 사실 들여다보면 ‘조장‘의 전략과 동일한 오류를 범하는 셈이다. 이 경우에도 농부는 ‘벼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벼가 원한다고 자신이 생각한 것‘을 벼에게 적용했다.
그렇지만 벼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양분을 빼앗아 먹는 잡초를 제거해주는 것이 아니었던가?

무언가를 아끼는 일은 힘든 일이다. 조장해도 아끼는 대상은 불행에 빠지고, 조장하지 않고 완전히 방임해도 아끼는 대상은 불행에 빠지니 말이다. 그래서 맹자는 "잊지도 말고 조장도 하지 말라"라고 말한 것이다. 아끼는 대상을 방치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해서잘되라고 아끼는 대상에 직접 개입하지도 말라!‘는 아낌의 좌우명이다. 내 남편, 내 아내, 내 여자친구, 내 남자친구, 내 아들, 내 딸,내 반려견, 내 반려묘, 그리고 내 화초에게도 마찬가지다. 어떻게하면 내가 아끼는 것들이 더 근사해지고 더 행복해질까? 바로 이때맹자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지혜를 준다.

사랑도 삶도 행복도 그리고 자유도 ‘이만하면‘이라는 말로 가늠할 수 있는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문제다. 사랑했거나 사랑하지 않았거나, 제대로 살았거나 그러지 못했거나, 행복했거나 행복하지 않았거나, 자유롭거나 자유롭지 않았거나, 이제 이만하면’ 이라는 말을 우리 삶의 사전에서 지우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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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는 ‘현애철수(懸崖撤手)‘라는 말이 있다. 매달려 있는 절벽에서 손을 떼야 한다‘는 뜻이다. 매달려 있는절벽에서 손을 떼라니? 죽으라는 말인가? 생각해보라. 지금 엄청난 높이의 절벽에 간신히 매달려 있다. 떨어지면 죽을 것 같아 살려고 매달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깨달은 사람들은 "매달려 있는 절벽에서 손을 떼야 한다"고 역설한다. 자비와 사랑을 강조하는 스님의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고 심지어 쉽게 납득되지도 않는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의구심은 간단히 해소될 수 있다.

‘매달린 절벽‘은 사실 놓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도 놓으면 죽을 것 같다고 믿는 집착의 대상일 뿐이다. 매달린 절벽‘은 사람마다 다르다. 젊음일 수도 있고, 건강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사람은 자유롭지 못한 사람,
자기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없다면 못 살 것 같고 죽을 것 같다면, 이미 그 사람은 매달린 절벽의 노예일 뿐이다. 놓으면 죽을 것 같은데도 놓아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도모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해서다. 예를 들어 돌멩이를 놓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돌멩이를 잡고 있으면 그는 돌멩이 말고 자신이 잡을 수 있는수많은 것들을 잡을 수 없다. 그러니 오해하지 말자. 돌멩이를 놓는것은 빈손을 유지하겠다는, 혹은 아무것도 잡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돌멩이를 다시 잡는 것을 포함해 모든 것을 잡을 수있는 자유를 얻기 위해서다.

여행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여정 전체가 시간 단위로 계산되는 ‘돌아올 날이 예정된 여행‘이다. 비행기 왕복 티켓, 묵을 숙소들,
돌아봐야 할 주요 관광지들, 귀국해서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줄 선물 목록 등. 돌아올 날이 예정된 여행의 특징은 여정 중간쯤 되면이미 귀국을 생각하며 잠을 청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여행은 또 다른 특징이 있다. 여행할 때보다 여행을 떠나기 전 출발할 날을 헤아릴 때 더 설렌다는 점이고, 동시에 여행할 때보다는 집에 도착한 뒤여행을 회상할 때 더 행복하다는 점이다. ‘돌아올 날이 예정된 여행‘이 여러모로 「민달팽이를 보는 한 방식」에서 김선우 시인이 말한 가출‘과 닮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김선우 시인은 가출을 하는 사람은 "떠나온 집이 어딘가 있고 언제든 거기로 돌아갈 수 있는 자" 라고 말한다. 그러니 ‘돌아올 날이 예정된 여행’은 줄여서 가출자의 여행‘이라고 부를 수 있을 듯하다.

‘가출자의 여행‘은 아이러니하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마음은 이미여행지에 가 있다. 여행지에 도착해서는 마음이 집에 가 있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마음이 다시 여행지나 여행지 인증 사진에 가 있다.

집이라는 매달린 절벽에손을 떼어낸 자다. 몸이 어디에 있든 마음도 그곳에 있다. 인증 사진을 찍을 일도 없다. 그저 마음과 몸에 담아두면 그만이니까. ‘자유‘란 별것 아니다. 몸이 있으면 마음도 같이 있고, 마음이 있으면몸도 같이 있는 것이다. 지금 머문 곳을 몸이 싫어하면 떠날 뿐이고, 지금 머문 곳을 마음이 좋아하면 더 머물 뿐이다.

독일 철학자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 1947~)는 냉소적 이성 비판(Kritik der cynischen Vernunft)』(에코리브르, 2005)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성숙한 능력은 ‘예스‘의 유일하게 타당한 배경이 되며, 이 둘을 통해 진정한 자유의 윤곽이 비로소 뚜렷해진다." "예스"가 힘이 있으려면 "노"라고 외쳤던 경험들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예스"는 굴종의 표현이 아니라 자유의 표현일 수있다. 한마디로 말해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예스"라고 말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멈출 수 있어야, 혹은 그만둘 수 있어야 자유다. 멈출 수 있는 사람만이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고, 관계를 단절할 수 있는 사람만이 자기 뜻대로 관계를 만들 수 있다. "노!"라고 할 수 있어야 하고,멈출 수 있어야 하고, 그만둘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럴 때 우리의일거수일투족이 당당해지고, 그만큼 우리는 주인으로서 삶을 영위하게 된다. 멈출 수 있는 자유를 가슴에 품을 때, 그가 누구이든 상대방은 우리를 사랑하지는 않더라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임제(臨濟, ?~867)는 『임제어록(臨濟語錄)』에서 이렇게 말했다. "불교의 가르침에는 특별히 공부할 곳이 없으니, 다만 평상시에 일 없이똥을 누고 소변을 보며, 옷을 입고 밥을 먹으며, 피곤하면 누워서쉬는 것일 뿐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비웃겠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알아들을 것이다." 똥을 제대로 누는 경우, 소변을 제대로 보는 경우, 옷을 제대로 입는 경우, 밥을 제대로 먹는 경우, 피곤할누워 제대로 쉬는 경우, 몸과 마음이 함께 있다는 것에 주목하라.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면, 이미 주인으로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부처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시원하게 대변과 소변을 보고,
정성스레 옷을 입고, 맛나게 음식을 씹으며, 피곤하면 누워서 쉬는사람이다. 반대로 평범한 사람은 대변과 소변을 볼 때 스마트폰을보거나 딴생각을 하고, 바쁘다고 옷을 서둘러 입고, 음식을 먹는 둥마는 둥 하고, 피곤하지만 잡념 때문에 쉽게 잠들지 못한다. 몸과마음이 떨어져 있는 사람이 바로 평범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이처럼 몸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많은 것을 알려준다. 그러니 항상스스로 몸을 체크해보면 된다. 주인으로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면마음이 가는 곳에 몸이 가고 몸이 가는 곳에 마음도 갈 것이다. 반면 노예로서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면, 몸이 가는 곳에 마음이 가지않고, 마음이 가는 곳에 몸은 가지 않을 것이다.

『임제어록』에서 임제는 삶의 주인이 되려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속에 새겨야 하는 여덟 자의 가르침을 이야기한다. 바로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이다. 이를 ‘수(隨)‘, 곳 ‘처(處)‘,될 ‘작(作)’, 주인 ‘주(主)’, 설 ‘입(立)‘, 곳 ‘처(處)’, 모두 ‘개(皆)’, 참 ‘진(眞)’, 이 여덟 자로 이루어진 문장을 번역하면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곳마다 모두 참되다‘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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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도시에서는 이제 그 누구도 고양된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단조로운 감정만 느꼈다. "이제 끝날 때도 됐는데."
- 알베르 카뮈, 『페스트』 -

분명히 말하건대 이런 질병들이 번갈아 계속 찾아오는 현상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각각의 질병은 저절로생긴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저지른 일들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일 뿐이다. 질병들은 우리가 사는 행성에서 진행 중인 두가지 위험이 한 점에서 만난 결과 생겨났다. 첫 번째 위험은 생태학적인 것이고, 두 번째는 의학적인 것이다.
데이비드 콰먼,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

우리 시민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못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자기들에게는 여전히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생각은 재앙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있었다. 그들은 계속 사업을 했고, 여행 준비를 했고, 제각기 의견을 갖고 있었다. 미래와 여행, 토론을 금지하는 페스트를 그들이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자유롭다고 믿었지만, 재앙이 존재하는 한 그 누구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알베르 카뮈, 『페스트

새로운 상황은새로운 사랑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서로 어떻게든 접촉을 피하고 황급히 멀찍이 떨어져야 할 판에 사랑이라니… 나는 속으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백만 명이 넘게사망한 이 디스토피아 시대에 죽지 않고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시대에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미 지치고 진이빠진 우리가 다시 삶을 사랑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천지 사방에서육체의 온도를 재고 있을 때 나는 영혼의 온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영혼의 온도는 몇 도가 적합할까? 영혼이 섭씨 몇 도일 때 인간은 건강하게 서로 지키고 살리고 사랑하면서 살 수 있을까?

재난은 유족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오고그다음에는 잊힌다. 유족들에게만 재난은 충격으로 그치지않고 삶의 이야기, 목소리가 된다.

제임스 우드의 말마따나 문학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리게 도와준다. 그 연쇄작용으로 우리는 삶도 더 잘
‘읽어내게 된다. 우리는 늘 상황을 잘 읽어내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 순간을 살아내느라 정신이 없다. 의미는 얼마뒤에야 따라온다.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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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초등학생 남자 조카가 둘 있다.
주위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즐겁게 사는 그 아이들은내 삶의 에너지이기도 하고진짜 내 모습을 일깨워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손주들을 위해 장수풍뎅이를 키우는 아빠.
맛있는 음식을 내 친구 몫까지 만들어 주는 엄마.
늘 옆에서 나를 챙겨주는 언니와 남동생.
‘가족이 있어서 내가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다.
인생을 잘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 할 일은사랑하는 사람들과 오래 자주 함께 있는 것.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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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나는 책을 읽었다 - 선비의 독서법, 연암의 산문미학 정민의 연암독본 2
정민 지음 / 태학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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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에 이른바 도술이나 문장이란 것은 부지런함으로 말미암아 정밀해지고,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다. 진실로 능히 깨닫기만 한다면, 지난날 하나를 듣고 하나도알지 못하던 자가 열 가지, 백 가지를 알 수 있다. 앞서 아득히천리만리 밖에 있던 것을 바로 곁에서 만나 볼 수 있다. 전에는 뻑뻑하여 어렵기만 하던 것이 너무도 쉽게 여겨진다. 옛날에 천 권, 만 권의 책 속에서 찾아 헤매던 것이 한두 권만 보면너끈하게 된다. 이전에 방법이 어떻고, 요령이 어떻고, 말하던 것이 이른바 방법이니 요령이니 하던 것이 필요 없게 된다.

하지만 깨달음의 방법은 방향도 없고 실체도 없다. 잡을 수도없고 묶어둘 수도 없다. 옛날에 성련成連이란 사람은 바다의파도가 일렁이는 것을 보다가 거문고를 연주하는 방법을 깨달았다. 그는 정말로 그랬다. 가령 다시 어떤 사람이 성련의일을 부러워해서 거문고를 끌어안고 파도가 일렁이는 물가에 섰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대개 성련의 깨달음은 여러 해동안 깊이 생각한 힘으로 된 것이지, 하루아침 사이에 어쩌다 .
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깨달으라고 권하기보다는 생각해 보라고 권하는 것이 낫다. 물가에서 물고기를 부러워하느니, 차라리 집으로 가서 그물을 짜는 것만 못하다. 도술과 문장을 사모하기보다, 우러러 한 번 생각해 보는것만 못하다.

부지런한 노력이 정밀함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깨달음이 없으면 정밀함도 소용이 없다. 오성이 열리는 순간 모든 것은 달라진다. 지난날 암중모색하며 헤매던 길을 활보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깨달을 수 있는가? 막상 깨달음의 길은 방법도 없고 방향도 없다. 깨달음은 노력하고 또 노력하다 보면 어느순간 문득 열린다. 하지만 노력의 뒷받침 없이는 깨달음도 있을수가 없다.

가령 한 권의 책이 대략 60~70쪽쯤 된다고 치자. 그중 정화精華로운것만 추려 낸다면 십수 쪽에 불과할 것이다. 속된 선비는 처음부터 다 읽지만 정작 그 핵심이 있는 곳은 알지 못한다. 오직깨달음이 있는 사람은 손 가는 대로 펼쳐 봐도 핵심이 되는것에 저절로 눈이 가 멎는다. 한 권의 책 속에서 단지 십수 쪽만 따져 보고 그만둘 뿐인데도 그 효과를 보는 것은 전부 읽은 사람의 배나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두세 권의 책을 읽고 있을 때 나는 이미 백 권을 읽고, 효과를 보는 것 또한 남보다 배가 되는 것이다.

허공을 울며 나는 새를 새‘라는 단어 속에 가두는 순간, 그 새는 더 이상 날갯짓도 없고 울음소리도 없는 지팡이 위에 조각해놓은 새와 다를 바 없게 된다. 문자로 가두어진 지식이란 지팡이위에 새겨진 새의 조각과 같다. 그러니 ‘나는 그런 죽은 새보다 이른 아침 창밖에서 우짖는 저 새의 살아 숨 쉬는 생명력을 읽겠노라고 연암은 말한 것이다. 이런 독특한 관점은 「소완정기素玩亭記」에서도 "대저 하늘과 땅 사이에 흩어져 있는 것이 모두 이 서책의 정기"라고 하여 거듭 천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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